1865년 6월 10일, 리하르트 바그너 (Richard Wagner)의 가극 ‘트리스탄과 이졸데’ (Tristan und Isolde, WWV 90) 뮌헨에서 초연
‘트리스탄과 이졸데’ (독: Tristan und Isolde, WWV 90)은 리하르트 바그너가 작곡하고 대본을 작성한 3막의 악극이다. 대본은 대부분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이야기에 바탕을 둔 고트프리트 폰 슈트라스부르크의 중세소설 트리스탄을 기초로 작성되었다. 1865년 6월 10일 뮌헨에서 한스 폰 뷜로우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 바그너의 가극 ‘트리스탄과 이졸데’ (Tristan und Isolde, WWV 90)
.초연: 1865년 6월 10일 독일 뮌헨
.지휘: 한스 폰 뷜로우
.작곡: 바그너 (Richard Wagner)
.작사: 바그너 (Richard Wagner)
.곡출처: Tristan and Iseult
중세부터 내려오는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전설을 바탕으로 바그너가 직접 대본을 작성하고 곡을 작곡한 3막의 오페라 (음악극). 1865년 6월 10일 뮌헨 궁정 가극장에서 한스 폰 뷜로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작곡을 완료한지 6년 만에 초연이 되었으며 워낙 난해한 작품이었던 탓에 초연 당시 반응은 크게 엇갈렸다. 그런 탓에 작품 외적으로도 많은 화제거리를 낳았다.
오늘날에는 바그너의 오페라 뿐만 아니라 전체 오페라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으며 현재에도 자주 공연되고 있다. 음악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작품으로 현대음악의 탄생에 큰 영향을 미친 곡으로 평가받고 있다.
○ 작곡 과정
바그너는 신화와 전설, 고대의 이야기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이러한 전설들을 소재로 작곡되었다. 특히 바그너는 젊은 시절부터 중세 전설인 파르지팔과 그의 아들인 로엔그린 전설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고 1840년대 중반에 중세의 시인과 관련된 전설을 바탕으로 한 탄호이저, 1840년대 후반에 로엔그린을 소재한 오페라를 완성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에도 파르지팔의 오페라화에 대해 꾸준히 구상하고 있던 바그너는 1854년경 파르지팔과 연관된 또다른 전설인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유럽을 휩쓸었던 1848년 혁명 당시 바그너는 드레스덴 혁명에 주도적으로 가담했는데 그때문에 수배령이 내려져 독일 국외를 전전하는 처지가 되었다. 외국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던 차에 1852년 취리히에서 자신의 열렬한 팬이었던 오토 베젠동크 (Otto Wesendonck, 1815-1896) 부부를 만났다. 오토는 옷감 거래를 통해 큰 돈을 번 상인이었는데, 바그너가 작곡에 전념할 수 있도록 취리히에 거처를 마련해 주고 로엔그린을 비롯한 그의 작품이 취리히에서 공연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문제는 바그너가 오토 베젠동크의 부인이었던 마틸데 베젠동크 (Mathilde Wesendonck, 1828 ~ 1902)에게 빠져들었다는 것. 마틸데는 미인일 뿐만 아니라 지적이고 문학과 음악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었다. 바그너는 그녀가 쓴 시를 바탕으로 한 5개의 가곡 (일명 베젠동크 가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몇년 동안 바그너는 나름 선을 유지하면서 속앓이만 했지만 결국 1857년부터는 노골적으로 마틸데 베젠동크에게 구애를 했다. 이 때 마틸데가 바그너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종종 바그너의 요청에 응답을 한 것을 보면 마틸데 역시 바그너의 애정공세를 싫어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확실하게 선을 긋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전폭적으로 받아주는 것도 아닌 애매모호한 마틸데의 태도는 오히려 바그너를 더 애태우는 역할을 했다. 한편으로 두 사람의 관계는 바그너의 부인 민나의 귀에도 들어갔고, 가뜩이나 삐걱거리던 두 사람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맞게 된다.
다른 사람도 아닌 후원자의 아내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빠져 방황하던 바그너는 때마침 자신의 처지를 대변해주는 듯한 트리스탄과 이졸데라는 비극적 전설에 마음이 사로잡힌다. 결국 그는 당시 구상하고 있던 링 사이클을 잠시 제쳐놓고 (이후 12년 동안 재개되지 않았다)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오페라로 만들 구상을 하게 된다.
한편으로 시인이자 바그너의 친구였던 게오르그 헤베그 (Georg Herwegh)는 바그너에게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저작을 소개했다. 1854년경 바그너는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은 후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자신의 생각과 일치함을 깨닫고 그의 철학에 깊이 경도되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비극적인 줄거리는 쇼펜하우어의 철학과도 접점이 많아 보였으며 그 점이 바그너가 이 소재에 꽂히게 된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바그너는 나중에 이를 자신의 생애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실제로 그는 힘든 처지를 벗어나 평온을 되찾은 후에도 계속 쇼펜하우어의 신봉자로 남았으며 트리스탄과 이졸데 이후의 작품에도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강하게 깃들어 있다.
일단 결심이 서자 바그너는 작곡 중이던 지크프리트를 중단하고 바로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작곡에 착수했다. 일단 1855년부터 대본의 집필에 착수 트리스탄 관련 작품 중 특히 가장 유명한 고트프리트 폰 슈트라스부르크의 운문소설을 주로 참고하여 집필했으며 이 소설에 나오지 않는 후반부는 자신이 직접 창작해서 1857년에 완성했다. 극적인 효과를 분명히 하기 위해 장대한 원작의 줄거리를 단순하게 각색하는 한편 당시 그가 몰입해 있던 쇼펜하우어의 사상과 철학을 작품에 깊게 반영했다.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부분은 원작과 마찬가지로 사랑의 묘약에 의해 일어나는 것으로 설정하였는데, 이는 현실성을 떨어뜨리는 장치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바그너는 인간의 의지로는 어쩔 수 없는 사랑의 운명적인 힘을 강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런 설정을 집어넣었으며 이러한 설정을 통해 쇼펜하우어 철학의 메시지를 더욱 뚜렷이 하고자 했다.
대본이 완성된 후 곧바로 작곡에 착수해 1859년에 곡을 완성했다. 바그너는 자신의 뮤즈가 되었던 마틸데에 대한 감정을 예술로 승화하여 주체할 수 없는 열정으로 빠른 속도에 작품을 완성해 나갔다. 바그너 스스로도 단숨에 음악을 써내려갔다고 밝혔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서 전례없는 음악적 시도를 많이 했기 때문에 완성까지는 2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바그너는 지인에게 쓴 편지에서 이 작품을 작곡하면서 자기 손끝에서 이런 작품이 쓰여지는 것에 스스로도 놀랐다고 말하기도 했다. 바그너는 이곡을 쓰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사랑을 통해 얻는 진정한 기쁨을 누려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 작품을 통하여 모든 사람이 갈망하는 진정한 사랑에 관한 기념비를 세울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사랑을 지향할 것이다.”
마무리를 하자면 마틸데에 대한 연애감정은 오페라의 완성을 기점으로 점차 평정을 되찾는다. 그리고 몇년 뒤 바그너는 진짜 남의 아내와 결혼하게 된다.

○ 초연
완성된 작품은 결과적으로 바그너의 작품 중에서 가장 난해한 곡이 되었다. 바그너도 이런 점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자신의 작품이 난해하다는 비판을 많이 받는 상황에서 이전 작품들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난해한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초연되었을 때의 반응에 대해서 바그너 본인도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완성한 무렵 때마침 우여곡절 끝에 탄호이저의 파리 상연이 결정되었다. 바그너는 젊은 시절 파리에서 무시당했던 아픈 기억이 있었기에 탄호이저 파리 공연을 기필코 성공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파리 공연을 위해 1859년부터 1861년에 걸쳐 탄호이저를 개작했다. 탄호이저 파리 공연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함에 따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초연은 상대적으로 뒷전으로 밀리게 되었다.
1861년 탄호이저 파리 공연이 끝난 후 바그너는 트리스탄의 초연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고, 1862년 마침내 빈 궁정 가극장이 이 작품의 초연에 관심을 가져 리허설에 들어갔다. 그러나 난해한 작품이었기 때문에 상당한 난관에 봉착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초연이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쉽지 않은 상황임을 깨달은 바그너는 트리스탄의 초연을 무리해서 추진하는 대신, 곧바로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작곡에 착수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난해하다는 평이 나올 것이 뻔하기 때문에 바그너는 본인이 할 수 있는 한 가장 평이하게 뉘른베르크 명가수를 작곡해 나갔다. 그러는 동안 빈 궁정 가극장은 의외의 근성으로 2년간 무려 70여차례의 리허설을 진행했으나 초연은 여전히 요원했다.
그때 바그너가 전혀 얘기치 못했던 중대한 일이 벌어졌다. 그토록 바랬던 엄청난 재력을 가진 후원자가 드디어 나타났던 것이다. 그는 바로 바이에른 국왕 루트비히 2세였다. 루트비히 2세는 즉위하자 마자 바그너부터 찾아서 데려오라는 명을 내렸다. 루트비히 2세는 바그너가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오래 전에 완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초연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뮌헨 궁정 가극장에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초연하라는 명을 내렸다.
작품의 지휘는 바그너의 수제자 한스 폰 뷜로가 맡았다. 이 때 바그너와 뷜로의 아내이자 리스트의 딸인 코지마 사이에 내연 관계가 상당히 진전된 상황이었으나 뷜로는 모르는 척 넘어갔고 스승의 작품의 초연을 위해 열일했다. 마침내 1865년 6월 10일 뮌헨 궁정 가극장에서 초연이 이루어졌다.
바그너 작품 중에서도 가장 난해한 작품으로 꼽히는 만큼 당시 반응은 큰 성공을 거두었던 전작들에 비해 좋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나마 공연 자체는 실패는 아니었으나 무대 밖에서는 예상대로 이 작품을 두고 격렬한 찬반시비가 벌어졌다. 특히 브람스파 사람들의 혹평이 이어졌는데, 브람스파의 거두이자 바그너까로 유명한 에두아르드 한슬릭은 이해할 수 없는 음악이라는 혹평을 남겼고, 클라라 슈만은 지금까지 들어본 음악 중 가장 불쾌한 음악이었다는 반응을 보였다.
음악적인 측면에서만 난해한게 아니라 극 내용 자체도 굉장히 처철한데다 직설적인 애정 표현이 많았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당시 기준이다) 부부동반으로 오페라를 관람하다가 아내를 극장에서 내보내거나 부부가 함께 뛰쳐나온 사례가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비판 못지 않게 찬사도 쏟아졌다. 다만 당시에는 연주자나 가수들조차 제대로 방향을 잡기 힘들 정도로 음악이 난해했기 때문에 한동안은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여튼 바그너의 작품이니까 좋다고 생각한다’와 같은 반응들이 많았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철학사에 지대한 영향을 준 저작 “비극의 탄생(1872년)”에서 음악의 도움을 받은 비극적 신화는 언어만으로는 성취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의의를 성취한다고 말하면서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그 예로 들었다.
이 오페라의 공연과 관련해서도 이야기거리가 있는데, 초연 당시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각각 루트비히 슈노르 (Ludwig Schnorr von Carolsfeld)와 말비나 슈노르 (Malvina Schnorr) 부부가 담당했다. 그런데 루트비히 슈노르는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4번째 공연을 마친 후에 갑자기 사망해 버렸다. 졸지에 남편을 잃은 말비나는 충격 때문에 이후 가수 활동을 포기했으며 한때 정령술 따위의 이상한 사술 (詐術)에 빠져서 ‘나는 장차 바그너와 결혼할 운명이다’ 와 같은 헛소리를 하고 다니기도 했다.
사망 당시 루트비히의 나이는 겨우 29살이었기 때문에 젊은 성악가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두고 많은 설왕설래가 있었으며,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저주받은 작품이라는 소문이 돌아서 한동안 슈노르 부부를 대체할 가수를 구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현재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루트비히는 심한 류머티즘에 의한 심장발작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저주와는 당연히 상관이 없다. 사진에서 보듯히 루트비히는 굉장히 뚱뚱한 체구였고 오페라 가수의 특성상 장시간 힘든 노래를 불러야 했기 때문에 심장에 무리가 올 가능성이 높았다. 게다가 루트비히의 마지막 공연은 알려진 것처럼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아니라 ‘방황하는 화란인’이었다.

○ 주요 음악
탄호이저에서 서곡이 전체 오페라의 주요 내용을 미리 알려주고 있다는 지적이 있었기 때문에 바그너는 다음 작품인 로엔그린 이후부터는 독립된 서곡을 쓰지 않고 전주곡을 도입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도 서곡이 없고 전주곡이 있다. 서곡처럼 명확하게 종결되지 않고 그대로 공연으로 이어진다.
또한 바그너는 일찌감치 탄호이저에서 아리아와 레치타티보의 경계를 허물었는데 이 작품에서는 아리아라는 개념이 완전히 사라졌으며 한 막이 끝날때까지 음악이 쉬지 않고 계속되는 소위 ‘무한선율’이 적용된다.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3막 작품이니까 이 오페라는 3개의 긴 곡으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관현악도 종래에 노래를 반주하는 역할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반주 역할이 전혀 없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바그너 특유의 라이트모티프를 계속 상기시키고 오페라의 분위기와 상황을 표현하는데 관현악이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있다.
중기 이후 바그너의 오페라를 무지크드라마 (Musikdrama, 악극)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 있다. 과거의 오페라처럼 가창과 연기가 분리된 것이 아니라 계속되는 노래와 음악으로 극을 진행하기 때문이다.
– 악기편성
플루트3 (3번은 피콜로 겸함), 오보에2, 잉글리시 호른, 클라리넷2, 베이스 클라리넷, 바순3, 호른4, 트럼펫3, 트롬본3, 튜바, 팀파니, 심벌즈, 트라이앵글, 하프, 현5부 (16, 16, 12, 12, 8).
– 연주시간
1막 : 1시간 20분, 2막: 1시간 10분, 3막: 1시간 10분, 총 3시간 40분
○ 줄거리
– 배경: 전설 시대 콘월, 브리타니, 아일랜드 앞바다
이 오페라의 내용은 스트라슈부르크의 원작과 많이 다르다. 아무래도 제한된 시간 (4시간 이내)에 마무리를 해야 되기 때문에 내용 자체는 많이 단순화시켰으며, 대신 당시 자신의 처지를 반영해서 밑도 끝도 없는 비극성과 처절함을 강조했다. 또한 이 오페라는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전체 내용에서 처음 부분이 생략되어 있는데 이 생략된 내용을 알고 있어야 오페라를 이해할 수 있다.
이졸데의 약혼자 (이자 사촌오빠)였던 아일랜드의 모롤트 (Morold)가 콘월에 와서 조공을 요구하자 콘월 마르케 (마크) 왕의 조카인 트리스탄이 모롤트와 싸워 그를 죽이고 자신도 부상을 입는다. 트리스탄은 치료를 위해 의술로 소문난 이졸데를 찾아가는데, 상처를 본 이졸데는 트리스탄이 자기 약혼자를 죽인 원수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를 죽이려고 하다가 마음을 바꿔 치료를 해주고 돌려 보낸다. 이후 콘월의 마르케 왕은 결혼을 위해 이졸데를 데려오라고 트리스탄을 다시 아일랜드로 보내고, 이졸데를 데리고 돌아오는 뱃길에서 오페라가 시작된다.
– 1막 : 항해중인 배의 갑판 위
트리스탄의 배에서 시작된다. 이졸데는 시녀 브랑게네를 시켜 키를 잡고 배를 조종중인 트리스탄에게 자신의 시중을 들라고 했는데 트리스탄이 거절하고, 트리스탄의 부하 쿠르베날은 과거 이졸데의 약혼자 모롤트가 콘월에 왔다가 목만 아일랜드로 돌아갔던 이야기를 하면서 시녀를 조롱한다. 화가 난 이졸데는 트리스탄이 과거 탄트리스라는 가명으로 자신을 속이고 치료받으려고 했던 사실을 상기시키고, 이 교활한 사내를 그 때 죽이지 않은 것이 후회된다고 하면서 브랑게네에게 트리스탄과 같이 죽을테니 독약을 준비하라고 한다.
콘월에 도착해서 배에서 내릴 때가 되자 이졸데는 트리스탄이 직접 모시러 와야 내리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결국 트리스탄이 나타나서 신부를 데려갈 때 다른 남자는 신부에게 가까이 가지 않는 것이 풍습이라고 해명한다. 이졸데는 모롤트의 복수를 하겠다면서 브랑게네가 준비한 독약을 마시라고 하는데, 트리스탄이 그대로 약을 마시자 이졸데가 잔을 뺏어서 나머지 절반을 마신다. 그런데 브랑게네는 잔에 독약대신 사랑에 빠지는 묘약을 넣어두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쓰러져 죽는 대신 서로 끌어안고 사랑에 빠져 버린다.
– 2막 : 늦은 밤, 마르크왕의 궁전 정원
마르케왕의 성에서 시작된다. 마르케 몰래 계속 트리스탄과 붙어먹었던 이졸데는 이번에도 불을 꺼서 트리스탄에게 신호를 보내고 트리스탄이 나타나자 다정하게 끌어안고 2중창을 부른다. 그런데 망을 보고 있던 브랑게네와 쿠르베날이 소리를 지르고 이윽고 두 사람 앞에 마르케 일행과 그의 심복 멜로트가 나타난다. 두 사람 관계를 의심하고 있던 멜로트가 눈치를 채고 마르케에게 현장을 덮치도록 한 것.
난감한 상황에 처한 트리스탄은 마르케에게 대담하게 이졸데와 함께 콘월을 떠나겠다고 이야기하는데, 이에 화가 난 멜로트는 트리스탄을 칼로 찔러 중상을 입히나 왕이 말려서 죽이지는 못한다.
– 3막 : 브리타니에 위치한 트리스탄의 성
프랑스 브르타뉴 지역의 한 성에서 시작된다. 쿠르베날이 부상당한 트리스탄을 여기까지 옮겨 왔는데 부상은 차도가 없어서 트리스탄은 죽어가고 있다. 쿠르베날은 그 지역 목동에게 트리스탄의 연인 이졸데가 여기로 오고 있으니 그녀가 탄 배가 보이면 신호하라고 요청하는데, 배가 도착하자 목동이 피리를 울려서 신호한다.
마침내 이졸데가 성에 도착하자 트리스탄은 마지막 힘으로 이졸데를 끌어안은 후 그대로 죽는다. 그런데 뒤에 또 한척의 배가 도착하고 여기에는 멜로트와 마르케 일행이 타고 있었다. 쿠르베날은 먼저 내린 멜로트와 마르케의 수행원들과 싸워 그들을 죽이고 자신도 큰 부상을 입고 쓰러진다. 뒤이어 나타난 마르케는 자신은 트리스탄을 죽이려고 온 것이 아니며, 두 사람의 불륜이 사랑의 묘약 때문이었고 트리스탄은 죄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둘을 결혼시키기 위해 온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미 트리스탄과 쿠르베날이 죽었다는 것을 알고 안타까워 한다. 이졸데는 정신을 잃고 트리스탄의 모습에 완전히 빠져 찬양하다가 트리스탄의 시신 위에 쓰러져 숨을 거둔다.
○ 작품성과 음악사적 의의
예술적 기준에서 바그너의 최고 걸작을 꼽으라면 대개 발퀴레나 이 작품이 꼽힌다. 둘 다 1850년대에 작곡되었는데, 이 시기가 바그너의 창작성이 정점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트리스탄과는 이졸데는 문학성이 높은 고트프리트 폰 슈트라스부르크의 작품을 토대로 대본이 작성되었기 때문에 그의 필체와 운율에 상당히 많은 영향을 받았다. 때문에 대본 자체도 좋은 평가를 받는다. 다만 슈트라스부르크의 원작은 13세기 작품이며 중세 고지독일어로 되어 있기 때문에 바그너에 의해 당대의 문체에 맞도록 고쳤다. 또한 원작은 애정행각이 발각된 후 트리스탄이 콘월에서 쫓겨나는 대목에서 끝나기 때문에 이후 부분은 바그너가 별도로 창작해야 했는데, 이 부분의 가사와 스토리도 슈트라스부르크의 스타일로 위화감 없이 잘 작성되었다. 바그너가 음악뿐만 아니라 문학에도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였다는 것을 입증하는 예시이다.
게다가 본인 스스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빠져 괴로워하면서 작곡했던 만큼 가사에 대한 감정이입과 음악적 표현력은 비할 데가 없다. 가사와 음악의 혼연일체성에 있어서 고금의 오페라 중 가히 최고라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2막의 사랑의 장면은 그 가사와 음악적 표현의 융화가 매우 뛰어난 것으로 유명한데,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만나서 부르는 2중창은 무려 40분이 넘게 진행되며 가사도 자신이 직접 작사한 것으로 운명적이면서도 비극적인 결말을 암시하고 있다. 오페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랑의 노래라는 평을 받고 있는 이 부분은 가수들에게도 굉장한 도전을 주는데, 물론 노래 자체도 어렵지만 아무리 가창실력이 우수해도 제대로 감정 이입이 되지 않으면 절대 훌륭한 노래가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일각에서 이 노래는 음악적으로 육체적 사랑을 구현한 것이라고 말하는데, 대사에는 쇼펜하우어의 사상이 깊이 반영되어 있으며 오히려 정신적인 사랑에 가깝다.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현대 음악의 문을 연 곡으로 평가받는데, 이 작품에서는 음악사에서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트리스탄 코드 (a minor; F―B―D♯―G♯)가 등장한다. 그냥 듣기에는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줄 뿐이지만 음악적으로 따지고 들어가보면 기존의 조성 체계를 완전히 박살내는 혁명성을 갖고 있는데, 무조성 음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쇤베르크지만 그 서막을 연 것은 바로 이 작품이다. 이런 특이한 화음은 모차르트나 베토벤과 같은 선배들도 실컷 사용했지만, 바그너는 선배들과 달리 기존 조성 체계에서 쓰이던 일정한 도착 지점을 없애 버리고 으뜸음의 개념도 사실상 사라졌다. 레너드 번스타인은 “홈이 없는 야구장”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어느 시점이 되면 지금의 음이 끝나고 새로운 음이 시작해야 하는데 이게 ‘끝이 안나고’ 새로운 음이 연주되는 지라 이런 표현을 사용했다.
이러한 점 때문에 바그너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난해한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심지어 이 작품보다 나중에 작곡된 니벨룽의 반지나 파르지팔 조차도 트리스탄과 이졸데만큼 파격적이지는 않다. 때문에 작품성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지만 이와 별개로 대중적 인기는 바그너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덜한 편이다. 다만 바그너를 열렬히 연호하는 바그네리안들은 정말 ‘중독’ 수준으로 이 작품을 좋아한다.
– 기타
한국에서는 굉장히 늦게 초연이 이루어졌다. 1961년에 1막이 공연된 기록이 있고 2005년에는 2막만 공연되었는데, 전곡 초연은 2012년 정명훈의 서울시립교향악단에 의해 이루어졌다.
반음계적 화성의 사용에서 모차르트의 영향이 발견되는 작품이다. 코지마는 “남편은 모차르트를 ‘위대한 반음계주의자’ (der große Chromatiker)라 여기며 존경했습니다”라고 증언하였으며 바그너 자신도 일생동안 모차르트의 수많은 작품을 접하고 연구하였다고 한다.
독일의 작곡가로 ‘악극의 거장’ 빌헬름 리하르트 바그너 (Wilhelm Richard Wagner, 1813 ~ 1883)
빌헬름 리하르트 바그너 (Wilhelm Richard Wagner, 1813년 5월 22일 ~ 1883년 2월 13일)는 독일의 작곡가, 극작가, 음악 비평가, 저술가, 극 연출가, 그리고 지휘자이다. 음악극으로써 19세기 유럽의 음악에 비중있는 영향을 끼쳤다.

– 빌헬름 리하르트 바그너 (Wilhelm Richard Wagner)
.출생: 1813년 5월 22일, 독일 라이프치히
.사망: 1883년 2월 13일, 이탈리아 베니스 카 벤드라민 칼레르지
.국적: 작센 왕국
.오페라 대본 작가: 니벨룽의 반지, 발퀴레, 발퀴레의 기승, 탄호이저, 트리스탄과 이졸데
.배우자: 코시마 와그너 (1870~1883), 미나 플래너 (1836~1866)
“이전과 이후 어느 작곡가도 바그너 만큼 자신의 예술과정으로 그렇게 깊은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기획자, 철학자, 시인, 지휘자, 그리고 역사상 가장 중요한 작곡가 중 한 명이자 19세기의 가장 뛰어난 인물인 바그너는 그가 천재라는 것을 알았다.” ― 그라모폰
독일의 작곡가. 음악사의 영향력있는 위대한 음악가 중의 한 명이자 오페라 역사상 위대한 작곡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영향력은 현대 음악 뿐만 아닌 미술, 철학, 문학, 정치, 시각 예술과 극장으로까지 퍼져 나갔다. 특유의 정교하고 화려하며 스케일이 큰 음악으로 많은 지지자들이 있으며, 또한 그의 논란들에 의해 반대자들도 있다. 한마디로 19세기부터 현재까지 활발하게 논쟁이 벌어지는 명실상부한 클래식 음악계의 뜨거운 감자다.
○ 생애 및 활동
– 어린 시절
리하르트 바그너는 1813년 5월 22일에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칼 프리드리히 바그너는 리하르트의 출생 후 여섯 달 만에 장티푸스로 세상을 떠났고, 1814년 8월에 그의 어머니는 배우 루드비히 가이어와 재혼을 했다. 9세 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젊은 리하르트 바그너는 극작가가 되겠다는 야망을 갖고 있었고, 그는 곧 음악을 공부하기로 방향을 돌렸다. 그것을 위해 라이프치히 대학에 1831년 입학했다. 초기, 그의 음악에 영향을 준 인물은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었다.
1832년 19세때 첫 교향곡인 교향곡 C장조를 작곡했으며 1833년에 나이 스물의 바그너는 그의 첫 완성된 오페라인 요정을 작곡했다. 이 오페라는 명백히 칼 마리아 폰 베버의 양식을 모방한 것으로, 반 세기 넘게 상연되지 않았으며, 초연은 그의 죽음 직후인 1883년에 뮌헨에서 있었다. 그 동안에 바그너는 마그데부르크와 쾨니히스베르크의 오페라 극장의 음악 감독으로서 약식 계약을 맺었으며, 그 동안에 그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자에는 자에 기초한 연애금지를 썼다. 이 두 번째 오페라는 1836년에 마그데부르크에서 상연되었지만, 반응은 그리 좋지 않았다.
1836년 11월 24일에 바그너는 “미나”라고 불리는 여배우 크리스티네 빌헬미네 플라너 (Christine Wilhelmine “Minna” Planer)와 결혼했다. 그들은 리가로 이사해서 바그너는 거기에서 지역 오페라단의 음악 감독이 되었다. 몇 주 후에, 미나는 군인과 야반도주했고, 그 군인은 나중에 단 돈 한 푼도 안 남기고 그녀를 떠나 버렸다. 바그너는 미나를 다시 맞아들였지만, 1839년까지 부부는 많은 빚을 지게 되었고 그래서 그들은 빚쟁이들을 피해 리가를 떴다 (빚은 그의 남은 생애 동안 바그너를 따라다녔다). 그들의 도주 행각 동안에, 그들은 영국으로 가는 항로에서 폭풍우를 만났는데 이 경험이 그의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의 영감을 제공했다. 바그너는 파리에서 여러 해를 보냈으며, 거기에서 리하르트는 기사를 쓰고 다른 작곡가의 오페라를 편곡하는 것으로 생계를 이었다.

– 드레스덴
바그너는 그의 세 번째 오페라 ‘리엔치’를 1840년에 썼다. 뜻밖에 독일의 작센의 드레스덴 왕립 극장이 이 오페라를 공연하기로 했다. 1842년에 부부는 드레스덴으로 이사했으며, 리엔지는 상당히 성공했다. 바그너는 드레스덴에서 다음 여섯 해를 보냈으며, 결국 30세에 작센 왕립 지휘자로 임명되었다. 이 기간 동안에 그는 그의 첫 두 중기 오페라인 ‘방황하는 네덜란드인’과 ‘탄호이저’를 쓰고 상연했다.
바그너의 드레스덴 체류는 바그너의 좌익 정치의 가담으로 끝나 버리고 말았다. 국가주의 운동은 독일 내 영방국가들에서 힘을 얻고 있었으며, 자유와 약한 주들의 한 나라로 통일에 대한 열망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리하르트 바그너는 이 운동에서 매우 열성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극단 좌익 잡지인 Volksblätter를 편집하던 그의 동료 아우구스트 뢰켈 (August Röckel)과 러시아 무정부주의자 미하일 바쿠닌 (Mikhail Bakunin) 등을 포함한 손님들을 받아들였다.
작센 정부에 대한 널리 퍼진 불만은 1849년 4월에 작센의 왕 프레데릭 아우구스투스 2세가 국회를 해산하고 사람들이 그에게 요구했던 새 헌법을 거부하면서 결국 끓어넘쳤다. 5월 혁명이 발발했고, 바그너는 거기에서 사소한 도움을 주었다. 혁명은 초기에 작센과 프로이센 연합 병력에 의해 재빨리 진압되었고, 혁명 주도자에 대한 체포 영장이 발부되었다. 바그너는 처음에는 파리로, 또 취리히로 도망해야 했다. 뢰켈 (Röckel)과 바쿠닌 (Bakunin)은 도망치는 데에 실패했고 오랜 기간의 수감 생활을 감수해야 했다.
– 망명, 쇼펜하우어, 마틸데 베젠동크
바그너는 다음 열두 해를 망명 생활로 보내야 했다. 그는 드레스덴 봉기 이전에 로엔그린을 완성했고, 그의 스승 프란츠 리스트에게 그가 없는 상태에서 그것이 상영되도록 간절한 편지를 썼다. 리스트는 1850년 8월에 바이마르에서 초연을 지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그너는 극심한 개인적 궁핍에 시달렸고 독일 음악계에서 고립되었으며 아무런 소득도 없었다. 그가 쓰고 있던 음악 단편은 나중에 거대한 작품인 ‘니벨룽의 반지’로 성장할 것이었는데, 공연될 가망이 전혀 없어보였다. 그의 아내 Minna는 그가 ‘리엔치’ 이후에 써 나간 오페라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우울증만 깊어져 갔다. 바그너는 단독 (피부병의 일종)을 앓았고, 작곡을 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취리히에서의 처음 몇 해 동안 일련의 주목할 만한 수필이 나왔는데, “미래의 예술-작품 (1849)”에서 그는 음악, 노래, 춤, 시, 시각 예술, 무대 기술 등이 종합된 개념인 “총체예술 (종합예술작품, Gesamtkunstwerk)”로 오페라의 비전을 설명했다. “음악 속의 유대주의 (1850)”는 유대인 작곡가를 반대하여 겨냥한 반유대주의 작품이다. 그리고 “오페라와 드라마 (1851)”는 그가 반지 사이클에서 사용하고 있던 미학 개념에 대한 설명을 담고 있다.
계속되는 몇 년 동안 바그너는 두 개의 독립적인 영감의 원천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이것들이 그의 유명한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창작으로 그를 이끌었다. 첫 원천은 1854년에 그의 시인 친구였던 게오르그 헤베그 (Georg Herwegh)가 그에게 철학자 아르투르 쇼펜하우어의 저작을 소개한 것이다. 바그너는 나중에 이를 그의 생애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고 얘기하였다. 그의 개인 환경은 분명히 그가, 인간 조건에 대한 깊이 비관적인 관점인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쉽게 이해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그의 운이 더 나아진 후에도 남은 생애 동안 쇼펜하우어의 신봉자로 남았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에서 음악은 예술 가운데에서 최고의 지위를 점하며, 이는 음악이 물질계와 연관되지 않은 유일한 예술이라는 이유 때문이라고 하였다. 바그너는 이 주장을 환영했으며, 그가 그의 “오페라와 드라마”에서 이와 직접 상반되는, 오페라의 음악이 드라마의 원인에 따라가야 한다는 주장을 폈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강하게 공명을 이루었음에 틀림없다. 바그너 학자들은 이러한 쇼펜하우어의 영향이 바그너로 하여금 그의 반지 사이클의 뒤쪽 절반을 포함하는 후기 오페라에서 음악이 더 강한 명령을 하는 역할을 맡도록 했다는 주장을 했다. 많은 측면의 쇼펜하우어적 사상은 바그너의 이어지는 대본에서도 발견된다. 예를 들어, 마이스터징거에 나오는 구두장이 시인 한스 작스는 일반적으로 바그너가 자신을 가장 많이 반영하는 인물로 간주되는데, (실제 인물을 바탕으로 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쇼펜하우어적인 창조의 전형이다.
바그너의 두번째 영감의 원천은, 비단 상인 오토 폰 베젠동크의 아내 시인 마틸데 베젠동크였다. 바그너는 베젠동크 부부를 취리히에서 1852년에 처음 만났다. 오토는 바그너 음악의 팬이었는데, 바그너의 뜻에 따라 자신의 땅에 작은 집을 세워 주었다. 1857년까지 바그너는 마틸데에게 푹 빠져버렸다. 마틸데는 그의 애정에 일부 답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녀는 그녀의 결혼을 위험에 빠뜨릴 의도는 없었으며, 그녀의 남편에게 그녀와 바그너의 만남을 계속 알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애정 행각은 바그너가 링 사이클을 잠시 제쳐놓고 (이후 12년 동안 재개되지 않았다), 기사 트리스탄과 (이미 결혼한) 귀부인 이졸데의 사랑 이야기에 기초한 트리스탄과 이졸데 작업을 시작하게 했다.
불편한 애정 행각은 1858년에 Minna가 바그너로부터 마틸데에게 보내는 편지를 보게 됨으로써 막을 내렸다. 이어진 대면 후에, 바그너는 혼자서 취리히를 떠나 베니스로 향했다. 그 다음 해에 그는 다시 파리로 이동해 Metternich의 공주의 노력 덕분에 상연되는 탄호이저의 개정판 상연을 보게 되었다. 새 탄호이저의 1861년 초연은 대실패로 끝났는데, 이는 Jockey Club 소속의 귀족들에 의한 방해 때문이었다. 이후의 공연은 취소되었고, 바그너는 서둘러 도시를 떠났다.
1861년에 바그너에 대한 정치적인 추방이 해제되었고, 작곡가는 프로이센의 비브리히에 머무르면서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 작업을 시작했다. 주목할만한 사실은 이 오페라가 그의 작품 가운데에 가장 밝은 작품이라는 것이다 (그의 두번째 아내인 코지마는 나중에 “미래 세대가 이 독특한 작품 안에서 상쾌함을 찾는다면, 그들은 눈물 속에서 미소가 떠오르는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라고 썼다). 1862년에 바그너는 결국 Minna와 이혼했지만, 그는 (또는, 적어도 그의 채권자는) 그녀에 대한 경제적인 지원을 1866년 사망할 때까지 계속했다.

– 국왕 루트비히 2세의 후원
바그너의 행운은 1864년에 바이에른 왕국의 루트비히 2세가 나이 19세로 즉위하자 극적인 계기를 맞았다. 젊은 왕은 어린 시절부터 바그너의 오페라의 열렬한 숭배자였기에 작곡가를 뮌헨으로 데려왔다. 그는 바그너의 상당한 빚을 해결해 주었고, 그의 새 오페라가 상연될 계획을 세웠다. 리허설에서의 각고의 어려움 끝에,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뮌헨 왕립 극장에서 1865년 6월 10일에 큰 성공을 거두며 초연되었다.
그 때 바그너는 또 다른 애정 행각을 벌이게 되는데, 이번에는 바그너의 가장 큰 후원자이자 트리스탄 초연의 지휘자였던 한스 폰 뷜로의 아내인 코지마 폰 뷜로와 함께였다. 코지마는 프란츠 리스트와 유명한 백작 부인인 마리 다구 Marie d’Agoult (필명 다니엘 스턴) 사이의 사생아로, 바그너보다 24살 연하였다. 리스트는 바그너와 친분이 있었지만, 그의 딸이 바그너를 보러 다니는 것을 금했다. 1865년 4월에, 그녀는 바그너의 사생아를 낳았고, 이름을 이졸데라고 지었다. 그들의 부주의한 애정 행각은 뮌헨에 추문으로 떠돌았고, 설상가상으로 바그너는 왕에 대한 영향력을 의심하던 뮌헨의 왕궁 일원 사이에서 선호받지 못하는 인물이 되었다. 1865년 12월에, 루트비히는 결국 작곡가가 뮌헨을 떠나도록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분명히 왕위를 버리고 그의 영웅을 따라 망명할 생각도 했었지만, 바그너가 재빨리 그를 말렸다.
루트비히는 바그너를 스위스의 루체른 호 인근의 빌라 Triebschen에 보냈다. 마이스터징거는 Triebschen에서 1867년 완성되었고, 다음 해 6월 21일에 뮌헨에서 초연되었다. 10월에, 코지마는 결국 한스 폰 뷜로를 설득해 그녀와 이혼하게 했다. 리하르트와 코지마는 1870년 8월 25일에 결혼했다. (바그너는 그의 새 장인에게 몇 년간 보러 오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그 해 크리스마스에, 바그너는 코지마의 생일 선물로 지크프리트 목가를 선사했다. 코지마와의 결혼은 바그너의 생애 마지막까지 지속되었다. 그들 사이에서 또 한 명의 딸인 에바와 아들인 지크프리트가 태어났다.
Triebschen에서 1869년에 바그너는 처음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와 만났고, 곧 굳은 친구가 되었다. 바그너의 사상은 니체에게 주요한 영향을 주었고, 그때 니체의 나이는 서른 한 살이었다. 니체의 첫 책인 “비극의 탄생” (Die Geburt der Tragödie, 1872)는 바그너에게 헌정되었다. 둘 사이의 관계는 니체가 점점 바그너의 다양한 측면의 생각, 가령 그의 평화주의와 반유대주의와 같은 것에 환상이 깨지면서 결국 멀어졌다. “바그너의 경우” (Der Fall Wagner, 1888)와 “니체 대 바그너” (Nietzsche Contra Wagner, 1889)에서, 그는 바그너를 퇴폐하고 타락한 것으로 비난했고, 심지어 그 자신의 이른 시절의 미숙한 시야에 대해서도 자기 비판했다.
– 바이로이트
바그너는 그의 새 가정에 안착하여, 그의 에너지를 반지 사이클을 완성하는 데 집중했다. 바그너는 반지 전곡 사이클이 이 작품을 위해 특별히 설계된 새 오페라 극장에서 공연되기를 원했다. 하지만 후원자인 루트비히2세가 전곡의 완성될 때까지 참을 수 없어 그의 명령에 따라 사이클 중 이미 완성된 첫 두 작품인 라인의 황금과 발퀴레은 뮌헨의 “특별 시사회”에서 초연되었다.
1871년에, 그는 작은 마을인 바이로이트를 그의 새 오페라 극장의 위치로 결정했다. 바그너 일가는 그 다음 해에 이주하였고,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의 초석이 놓였다. 공사를 위한 자금 조달을 위해, “바그너 협회”가 각 도시에 결성되었고, 바그너 자신도 독일 전역에 콘서트 여행을 시작했다. 하지만 결국 루트비히2세가 또 다른 거액의 보조금을 1874년에 지원한 후에야 충분한 자금이 모였다. 그 후년에, 바그너 일가는 바이로이트에 리하르트가 반프리트 (독일어로 “미혹과 광기로부터의 평화와 자유”)라고 이름붙인 빌라를 그들의 영구적인 집으로 삼아 이주를 마쳤다.
축제극장은 결국 1876년 8월에 ‘반지’ 사이클의 초연과 함께 문을 열었고, 그 때부터 현재까지 계속 바이로이트 축제의 개최지로 남았다.

– 말년
1877년에 바그너는 그의 최후의 오페라인 파르지팔에 대한 작업을 시작했다. 작곡에는 4년이 걸렸으며, 그 동안에 그는 또한 일련의 종교와 예술에 대한 수필을 썼다.
바그너는 파르지팔을 1882년 1월에 완성했는데 이 작품을 오페라라 하지 않고 신성한 무대용 축전극이라 하였다.
그 해 여름 파르지팔을 초연하기 위해 두 번째로 바이로이트 축제가 열렸다.
바그너는 이 때에 심하게 아팠으며, 점점 심한 협심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바그너는 평소 협심증이 있었는데 이 때는 상태가 심해졌다. 파르지팔은 총 16회 상연되었는데, 마지막 공연날인 8월 29일에는 지휘자 헤르만 레비가 아팠기 때문에 3막이 연주되는 도중에 바그너 본인이 비밀리에 오케스트라 피트에 들어가 지휘자 헤르만 레비로부터 지휘봉을 받아서 작품의 종결부에 이르기까지 공연을 지휘했다.
이 축제 이후에, 바그너 가족은 베니스로 요양을 하기 위하여 여행을 떠났다.
1883년 2월 13일, 리하르트 바그너는 심장마비로 베니스 대운하 위의 Palazzo Vendramin에서 향년 71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바이로이트로 되돌아와 반프리트의 정원에 묻혔다.

○ 반유대주의와 나치의 전용 (專用)
20세기 동안, 바그너에 대한 공공의 이해에는 그의 반유대주의가 점점 더 중심에 서게 되었는데, 이는 대부분 작곡가의 죽음 뒤에 일어난 사건 때문이었다: 1930년대에 그의 음악을 나치 당이 전용한 것이다.
바그너는 꾸준히 그리고 열심히 유대인, 특히 유대인 작곡가가 독일의 해로운 외래 요소라고 비난했다. 그의 반유대인 수필 중 처음이자 가장 찬반 논란이 큰 것은 1850년에 “K. Freigedank” (“자유로운 생각”)이라는 필명으로 Neue Zeitschrift für Musik에서 출판한 “음악 속의 유대주의” (“Das Judenthum in der Musik”)이었다. 수필은 유대인 작곡가, 가령 바그너의 동시대인이자 경쟁자였던 펠릭스 멘델스존이나 지아코모 마이어베어와 같은 유대인 작곡가들이 “대중적인 비선호”되는지 설명하는 내용이다. 바그너는 유대인들은 그들의 이질적인 외모와 행동 때문에 독일인들에게 불쾌감을 주고 있으며, 따라서 “… 우리는 항상 본능적으로 그들과의 실질적인 접촉에 불쾌감을 느낀다” 고 썼다. 그는 유대인 음악가들은 얕고 인공적인 음악만 쓸 줄 알며, 이는 그들이 “민족의 참 정신”과의 연결을 전혀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수필의 결론에서, 그는 유대인에 대해 “너희들이 너희들의 저주라는 짐으로부터 정화될 방법은 단 하나다: 아하수에로 (방랑하는 유대인, 전설의 인물)의 정화 – 복종하는 것!”이라고 썼다. 이것이 실제적인 물리적 소멸을 의미하기 위해 취해진 것이지만, 수필의 문맥상 그것은 유대주의의 박멸을 가리킨다. 근본적으로, 바그너는 유대 문화의 포기와 유대인을 독일 문화계로 흡수시키기를 부르짖고 있는 것이었다. 이 글의 첫 출판은 별로 관심을 끌지 못했지만, 바그너는 그 자신의 이름을 걸고 소책자로 1869년에 재출판하여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 공연 시에 여러 대중적 항의를 야기시켰다. 바그너는 비슷한 시각을 여러 다른 글, 가령 “독일인이란 무엇인가?” (1878) 등에서 반복했다.
20세기 후반에 들어, 로버트 구트만 같은 학자들은 바그너의 반유대주의가 그의 글에 국한되지 않고 오페라 또한 숨겨진 반유대주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주장을 발전시켰다. 가령, 반지의 미메 (Mime)나 마이스터징어의 직스투스 베크메서 (Sixtus Beckmessere)와 같은 인물은, 비록 유대인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반유대적인 전형적인 인물로 생각된다는 것이다. 그런 주장은 논란이 많다. 그런 식으로 가정된 “숨은 메시지”는 종종 복잡하게 얽혀 있고, 편견 어린 과대해석의 결과일 수도 있다. 바그너는 그의 생애 전반에 걸쳐, 엄청난 양의 자신의 모든 측면 (자기 자신의 오페라, 자신의 유대인에 대한 관점, 기타 태양 아래에 있는 실질적인 모든 다른 주제까지)을 분석하는 글을 써 왔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이런 가정된 반유대인 메시지는 전혀 언급된 바가 없다.
바그너 자신의 종교에 대한 관점은 독특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존경했지만, 그는 유대인이 아닌 그리스 혈통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간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이스라엘의 신은 예수의 아버지인 그 신과 다르고, 십계명은 기독교의 교훈에 있는 자비와 사랑을 결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바그너는 또한 불교에 매료되었고, 여러 해 동안 불교 오페라인 “승리자” (Die Sieger)를 구상했고, 이것은 붓다의 마지막 여행을 비유한 Sârdûla Karnavadanaan에 기초할 계획이었다. “승리자”의 면면은 결국 파르지팔에 흡수되어, 기독교의 바그너화된 기묘한 판을 그려낸다. 가령 성찬식에서의 화체설 (포도주와 빵이 그리스도의 피와 살도 된다는 설)은 미묘하게 재해석되어, 뭔가 기독교적인 것보다는 이교도의 이식에 더 가깝에 되었다. 그의 매우 공공연한 반유대주의적인 시야에도 불구하고, 바그너는 유대인 친구와 동료의 광범위한 망을 갖고 있었다. 이들 중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이, 그의 마지막 오페라인 파르지팔의 초연을 지휘하도록 고른 유대인 지휘자 헤르만 레비였다. 바그너는 처음에, 아마도 오페라의 종교적인 내용 때문에 그러했겠지만, 파르지팔을 지휘하기 전에 레비가 세례를 받기를 원했지만, 나중에 그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다. 레비는 바그너와의 가까운 우정을 계속 이어갔으며, 작곡가의 장례식에서 운구를 부탁 받았다.
바그너의 죽음 무렵에, 유럽의 국가주의자 운동은 1848년의 낭만적이고 이상적인 인류 평등주의를 상실하고 있었고, 군사주의와 공격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으며, 이에는 비스마르크의 정권 교체 및 1871년 독일의 통일이 적지 않은 부분 영향을 주었다. 1883년 바그너의 죽음 후에, 바이로이트는 신화와 오페라에 끌린 우파 독일 국가주의자의 초점이 되어갔고, 이들은 바이로이트 모임으로 불렸다. 이 모임은 코지마 공인을 받았는데, 그녀의 반유대주의는 리하르트의 그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복잡하고 더 악의에 찬 것이었다. 이 모임의 한 사람은 Houston Stewart Chamberlain으로, 나치라면 읽어야 했던 수많은 철학적 저술의 저자였다. Chamberlain은 바그너의 딸인 에바와 결혼했다. 코지마와 지크프리트 바그너가 1830년에 사망한 후, 축제의 운영권은 지크프리트의 미망인이었던, 영국 태생의 비니프레트에게 넘어갔는데, 그녀는 아돌프 히틀러와 개인적 친분이 있었다. 히틀러는 바그너 음악의 숭배자였고, 바그너의 음악과 독일인 국가 (1871년 이전에는 형식적인 정체성이 없었던 국가)에 대한 히틀러 자신의 영웅적인 신화를 융합할 길을 물색했다. 예를 들어, 나치의 뉘른베르크 집회는 매번 마이스터징거 서곡 연주로 문을 였었다. 히틀러는 바그너의 원본 악보 다수를, 빌란트 바그너가 이러한 소중한 문서를 잘 보존해 달라고 탄원했음에도 불구하고 2차 세계대전 동안에 그의 베를린 벙커에 보관했다; 그 악보들은 전쟁의 최후의 순간에 히틀러와 함께 사라졌다.
몇몇 학자들은 바그너의 시각, 특히 그의 반유대주의가 나치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주장해 왔지만, 이런 주장은 찬반 논란이 많다. 바그너의 작품은 나치 식의 영웅주의와 별로 상통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반지 사이클의 표면상의 “영웅”인 지크프리트는 얕고 별로 호소력 없는 시골뜨기일 뿐이다; 바그너의 공감은 분명히 염세적이고 여성같은 보탄에게 있었다. 바그너의 개인 철학의 많은 측면 분명히 나치에게 별로 호소력이 없었을 터인데, 가령 그의 평화주의와 유대인과의 동화와 같은 것이 그러하다. 예를 들어, 괴벨스는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1939년에 파르지팔을 상영 금지했는데, 이는 오페라 전체에 평화주의적 목소리가 넘쳤기 때문이었다.
누군가에 대해 후세의 다른 사람이 그에 대해 가진 관점을 가지고 비평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히틀러의 바그너에 대한 숭배는 되돌려질 수 없는 것이었는데, 바그너는 (1889년 4월 20일에) 히틀러가 태어나기 6년 전에 죽었기 때문이다. 정치 철학자 레오 슈트라우스는 히틀러가 좋아한 것은 무조건 싫어해야 한다는 느낌 (혹은 정반대의 상황)은 불합리한 것이라고 쓴 바가 있다. … 그는 이런 것을 Reductio ad Hitlerum (히틀러가 관련되었다는 것으로 돌리면 그건 무조건 틀린 게 된다는 뜻, Reductio ad absurdum (귀류법)의 패러디) 라고 했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라면 히틀러가 채식주의를 실천했다고 (그는 채식주의를 아리아인의 순수성에 대한 그의 생각에서 중심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그것을 경멸하는 꼴이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그너의 작품은 이스라엘에서 사실상 연주 금지되어 왔으며, 그리고 극히 적은 수의 공연이 행해지기는 했으나 엄청난 찬반 논란을 일으켰다. 바그너의 곡은 사실 공영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국에서는 흔히 방송되고 있지만, 공공 공연으로 무대에 올리려는 시도는 반대 시위, 특히 유대인 대학살 생존자들에 의해 저지되어 오고 있다. 예를 들어 다니엘 바렌보임이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한 소절을 2001년 이스라엘 축제의 앙코르로 연주한 뒤에, 의회의 위원회는 지휘자를 쫓아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결국 처음에는 계획되어 있었던 발퀴레 공연을 포기해야 했다. 다른 경우에, 주빈 메타는 관중석의 항의성 퇴장과 야유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에서 바그너를 연주했다. 바그너와 그의 음악이 일으키는 반응의 복잡함을 반영하는 수많은 역설 중 하나는, 현대 시오니즘의 창시자인 Theodore Herzl이 바그너의 작품에 대한 열렬한 숭배자였다는 것이다.

○ 바그너의 영향과 유산
그는 음악사에 있어서뿐 아니라 문학사에서도 뚜렷한 위치를 차지한 천재이다. 음악사에서는 초기 낭만파의 뒤를 이어 낭만파 음악을 대성한 최고봉이며, 문학사에서는 신낭만파의 희곡 영역에 있어서의 거봉이었다. 또한 니체에게도 영향을 준 그는,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아 염세주의, 종교적인 신비주의, 탐미주의적인 경향의 작품으로 19세기 말 낭만주의 부흥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바그너의 유럽 예술과 문화에 기여한 바는 부인할 수 없으며 기념비적이다. 그의 생전과 사후 여러 해 동안, 바그너는 그의 다수의 팬들 사이에서 광적인 호응을 이끌어냈으며, 그들 사이에서 거의 신과 같은 지위를 가지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의 음악인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특히 중요한 새 지평을 열었다. 이후 여러 해 동안 많은 작곡가들은 바그너 편에 서거나 바그너에 반대하는 편 중 하나에 설 수밖에 없었다. 안톤 브루크너와 휴고 볼프는 그에게 특히 많은 빚을 졌으며, 세자르 프랑크, 앙리 뒤팍, 에르네스트 쇼송, 쥘 마스네, 알렉산더 폰 쳄린스키, 한스 피츠너 등등의 수많은 음악가들 또한 그러하였다. 구스타프 말러는 “오직 베토벤과 바그너만이 있었다”고 말했다. 클로드 드뷔시와 아르놀트 쉔베르크의 이십 세기 화성 혁명은 트리스탄으로부터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처음으로 어떤 종류의 드라마적인 공연 동안에 불빛을 희미하게 해야 한다고 처음 요구했던 사람이 바그너였으며, 처음으로 관현악단 피트 (바이로이트에서는 관중석과 완전히 차단되어 있다)를 바이로이트 극장에서 사용했던 것도 그였다. 바그너는 그의 작품이 청중들의 상상 속에서 경험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극장”을 꿈꿨다. 오디오 기기의 발달로 이 꿈은 현실이 되었다.
바그너의 문학과 철학, 미술에 대한 영향 또한 분명하다. 영향력 있는 저작물인 비극의 탄생의 저자인 프리드리히 니체는 처음에 바그너를 숭배했는데, 그의 음악에서 유럽 정신이 다시 젊어지는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니체는 ‘파르지팔’ 이후에 바그너와 결별했다. 그는 ‘파르지팔’를 기독교 신앙심에 영합하는 표현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20세기에, W. H. 오든은 한때 바그너를 “아마도 모든 사람들 가운데 가장 위대했던 천재”로 불렀으며, 제임스 조이스, 토마스 만, 그리고 마르셀 프루스트도 바그너에게 크게 영향을 받아 그들의 소설에서 바그너를 논했다. 바그너는 T. S. 엘리엇의 ‘황무지’의 주요 주제 중 하나이며, 그의 오페라에서 많은 부분을 인용하고 있다. 반지의 제왕 작가 존 로널드 로웰 톨킨은 바그너와 그의 음악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톨킨 자신이 옥스포드의 고대영어 교수이었기에 북구 신화와 사가에는 정통했었고, 따라서 북구 신화를 차용한 바그너의 작품을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또한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C.S. 루이스가 열렬한 바그네리안이었으며, 20세기 초의 유럽 문화계의 풍토를 보아도 바그너에 대한 자기만의 관점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상태였었다. 게다가 톨킨은 C.S. 루이스와 함께 종종 바그너 공연을 보러 갔었으며, 한때는 C.S. 루이스와 함께 ‘니벨룽의 반지’의 2부 발퀴레를 영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시도하기도 했다. 또, 그는 바그너를 즐겨 들었고 또 열심히 연구를 했다. 스테판 말라르메, 폴 베를렌느, 그리고 샤를르 보들레르는 그를 숭배했다. 사랑과 죽음 (즉 에로스와 탄토스)의 관계에 대한 것 등 그의 음악 속의 많은 발상은, 지그문트 프로이트에 의한 정신 분석을 예고했다. 추상미술의 아버지 바실리 칸딘스키는 바그너 신봉자이기도 했다.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아 음악을 들으면서 색을 보는 공감각을 경험했다. 그 후 칸딘스키는 음악이 그림이 될 수 있고, 또 그림이 음악이 될 수 있다고 믿었고 그의 그림들은 대상에 연연하지 않는 추상화로 바뀌게 된다. 또 칸딘스키는 ‘로엔그린’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아 “바그너의 음악에서 바이올린, 베이스, 관악기의 울림, 나의 마음 속에서 나의 모든 빛깔을 보았다. 야성적이며 미친 것 같은 선들이 내 앞에 그려졌다. 회화는 음악이 갖고 있는 것과 같은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일이었다.”라고 말했다
바그너의 영향이 꼭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한 때, 독일 음악계는 바그너 지지자와 요하네스 브람스 지지자의 두 파로 나뉘었다. 브람스 지지파는 강력한 비평가인 에두아르트 한슬릭의 도움을 받고 있었는데, 그는 전통 형태를 최고로 인정하고 바그너식 혁신에 반대하는 보수파를 이끌었다. 클로드 드뷔시는 바그너를 심하게 비판했던 사람이지만 (“그 오래된 중독자”), 바그너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작곡자 중 한 사람임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사실 드뷔시는 바그너의 영향을 의심할 여지도 없이 받았기 때문에 바그너와 결별할 필요가 있었던 많은 작곡가들 중에 한 명이었다.
바그너의 음악은 강한 반응을 계속 일으켰다. 그의 후기작에서, 그는 바그너 작품의 그것처럼 긴 시간과 깊은 맥박을 만들어내어 음악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청자들이 바그너의 시간 개념에 완전히 익숙해지기를 요구하는 그런 음악을 만들어 냈다. 로시니 (“바그너는 굉장한 순간과 진절머리나는 15분을 가지고 있다”)를 포함해 많은 저항이 있었지만, 그 자신의 “Guillaume Tell”이 네 시간 이상의, 어떤 바그너 작품 하나보다도 긴 시간을 요구했다. 바그너의 이상은, 지크프리트의 “금발의 괴물” 영웅주의로부터, 그의 열성적인 쇼펜하우어 오독과 더불어 죽음과 신격화에 대한 매혹에 이르기까지, 이제는 심하게 유행에 뒤떨어져 있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오페라는 계속 강한 추종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바그너는 나폴레옹의 뒤를 이어 두 번째로 그에게 자극받은 이차 문학의 양이 많은 역사적 인물로 꼽히고 있다. 그렇게 그는 계속적으로 많은 찬반 논란과 존경을 동시에 받고 있다. 그 원인이 그의 음악의 뿌리에 있는 능가할 자 없는 숭고함, 힘, 장엄함, 그리고 때때로 위험한 초월적인 아름다움 때문이다.
종합적인 음악 표현과 유도동기의 사용은 20세기의 영화음악에 강한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바그너는 또한 극도로 찬반이 엇갈리는 평가를 받는 인물로서, 이는 그의 음악과 드라마에 대한 혁신으로 인한 것뿐만 아니라, 그의 반유대인적 시각에도 기인한다.

○ 음악
– 전체 경향
바그너는 새로운 교향악적인 오페라 (또는 “음악극”)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작품에 새로운 화성, 연속적인 대위법적 텍스처, 풍부한 오케스트레이션, 그리고 유도동기 (라이트모티프, Leitmotif; 특정한 인물이나 상황에 연관된 음악 동기)을 사용하였다. 바그너의 반음계적 음악 언어는 유럽의 고전음악에 중대한 변화를 끼쳤으며, 이는 극단적인 반음계법과 무조성을 지향한다. 그의 음악극들은 “총체예술 (Gesamtkunstwerk)”이라는 미학적 개념에 기반을 두었으며 ‘니벨룽의 반지’ (1876)의 4부작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 음악극
바그너의 오페라와 음악극은 그의 대표적 예술적 유산이며 시기별로 세 범주로 나눌 수 있다.
바그너의 초기 단계는 나이 열 아홉에 그의 첫 오페라 도전 혼례 (Die Hochzeit)로 시작되었는데, 작곡의 초기 단계에서 1832년에 포기했다. 바그너의 완성된 초기 단계 오페라는 세 개로, 요정 (Die Feen), 연애금제 (Das Liebesverbot – 쉽게 말해서 연애 금지), 그리고 리엔치이다. 이 작품들의 작곡 양식은 전형적인 것으로 음악사에서 바그너의 위치를 매김해 준 혁신적인 발상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의 생의 나중에, 바그너는 이 비성숙한 작품들은 그의 예술 작품의 일부로 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작품들은 거의 연주되지 않지만, 리엔치 서곡은 콘서트용 작품이 되었다.
바그너의 중기 단계의 작품은 굉장히 뛰어난 것으로 여겨지며, 그의 드라마 작가이자 작곡가로서의 힘이 깊어가는 것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이 시기의 작품은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Der Fliegnde Holländer), 그 뒤를 이어서 ‘탄호이저’ (Tannhäuser)와 ‘로엔그린’ (Lohengrin)을 포함한다. 이 작품들은 오늘날 광범위하게 연주되고 있다.
바그너의 후기 단계의 오페라 작품들은 총체예술을 본격적으로 실현시킨 음악으로서 음악극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트리스탄과 이졸데 (Tristan und Isolde)은 그의 가장 위대한 단편 음악극 작품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 (장인 가수)(Die Meistersinger von Nürnberg)는 바그너의 유일한 희극이며 (그의 잊혀진 초기작인 연애금제를 제외하면) 현재 공연되는 오페라 가운데 가장 긴 것들 중 하나이다. 니벨룽의 반지는 흔히 반지 사이클이라고 회자되며, 독일과 스칸디나비아 신화에 기초한 네 개의 오페라 모음이다. 연주에 걸리는 시간은 대략 16시간 가량으로, 반지 사이클은 이제까지 작곡된 음악 작품 중 가장 야심찬 것으로 불린고 있다. 바그너의 최후의 오페라, 파르지팔 (Parsifal)은 바그너의 바이로이트 축제를 위해 특별히 작곡되었으며 악보에 “무대신성제전극” (“Bühnenweihfestspiel”)이라고 쓰여 있다. 이 작품은 성배에 대한 기독교 전설에 기초해 쓰여진 명상적인 작품이다.
그의 오페라와 음악 이론에 대한 수필에 걸쳐, 바그너는 오페라라는 매체에 대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그는 그가 “악극”이라고 부른, 음악과 드라마의 요소를 모두 함께 융합한 새로운 오페라 형태에 대한 옹호자였다. 대본 작성 작업을 직접 하지 않은 다른 오페라 작곡가들과 달리, 바그너는 그의 오페라를 위한 대본을 직접 썼으며 자신은 그것을 “시”라고 지칭했다. 그의 작품의 줄거리 대부분은 북유럽 신화와 전설에 기초해 있다. 거기에 더해, 바그너는 오케스트라의 역할이 가수의 그것과 동등한 작품 양식을 개발해 냈다. 오페라의 드라마에 대한 오케스트라의 역할에는, 특정한 인물, 장소, 줄거리 요소를 알려 주는 음악 주제인 유도동기의 연주가 포함된다; 유도동기가 서로 복잡하게 얽히고 진화해 나가는 양상이 드라마의 발전을 설명하고 있다.
바그너의 음악적인 양식은 종종 서양 고전음악의 낭만파 시기의 축약으로 간주되는데, 이는 전례가 없는 감정적 표현에 대한 탐구 때문이다. 그는 화성과 음악 형식에 있어서 새로운 생각을 소개했으며, 여기에는 극단적인 반음계법이 포함된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그는 전통적인 조성 체계의 한계를 탐구하여 조와 화음을 각각 인물과 동일시하는 방법으로, 20세기의 무조성으로의 길을 가리켰다. 몇몇 음악 사학자는 현대 서양 고전음악의 시작을, 소위 트리스탄 화음이라고 불리는 트리스탄의 첫 음표들로 보고 있다.
.초기 단계
(1832) 혼례 (Die Hochzeit, 완성 전에 포기)
(1833) 요정 (Die Feen)
(1836) 연애금지 (Das Liebesverbot)
(1837) 리엔치, 마지막 호민관 (Rienzi, der Letzte der Tribunen)
.중기 단계
(1843)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Der fliegende Holländer)
(1845) 탄호이저 (Tannhäuser)
(1848) 로엔그린 (Lohengrin)
.후기 단계
(1859) 트리스탄과 이졸데 (Tristan und Isolde)
(1867)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 (장인 가, Die Meistersinger von Nürnberg)
니벨룽의 반지 (Der Ring des Nibelungen)는 다음 네 개의 악극으로 구성됨: (1854) 라인의 황금”(Das Rheingold), (1856) 발퀴레(Die Walküre), (1871) 지크프리트(Siegfried) [이전에 젊은 지크프리트(Jung-Siegfried, Der junge Siegfried)로 제목을 붙였음], (1874) 신들의 황혼 [Götterdämmerung, 원래는 지크프리트의 죽음(Siegfrieds Tod)으로 제목을 붙였음]
(1882) 파르지팔(Parsifal)
– 이외의 음악
오페라를 떠나서는, 바그너는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음악을 작곡했다. 여기에는 2개의 교향곡 (나이 19세와 21세에 씀)과 몇 개의 서곡, 합창곡 및 피아노곡, 그리고 글룩의 아울리데의 이피게니의 관현악 재편곡 등이 포함된다. 이들 중에 가장 자주 연주되는 작품은, 그의 두 번째 아내인 코지마의 생일을 위해 작곡된 실내악 작품인 지크프리트 목가이다. 목가는 반지 사이클에서 여러 모티프를 끌어오지만, 반지의 일부는 아니다. 그 다음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베젠동크 가곡으로, 이전에는 여성 성악을 위한 다섯 개의 노래로 알려졌으며, 바그너가 트리스탄을 작곡하는 동안에 마틸데 베젠동크를 위해 작곡되었다.
파르지팔을 끝낸 후, 바그너는 분명히 교향곡 작곡으로 방향을 전환하려 의도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그가 죽을 때까지 아무것도 작곡되지 않았다.
바그너의 중기와 후기 오페라에서 서곡과 관현악 소절은 콘서트 작품으로 흔히 연주된다, 이들의 대부분에 대해, 바그너는 이 발췌부에 대해 짧은 소절을 덧붙여서 곡이 갑자기 끝나지 않도록 만들었다. 예를 들어, 이런 경우에 파르지팔 전주곡과 지크프리트의 장송 음악이 해당된다. 흥미로운 사실은 트리스탄 전주곡의 콘서트용 판은 인기가 없고 거의 들을 수 없다는 것이다; 전주곡의 원래 형태가 콘서트 연주를 위해서도 보통 더 나은 것으로 간주된다.
영어권 국가에서 신부의 입장 시에 연주되는 가장 대중적인 결혼 행진곡 중 하나 (흔히 “여기 신부가 온다” (“Here Comes the Bride”)라고 알려져 있다)는 그 가락을 로엔그린의 “혼례 합창곡”에서 따 온다. 오페라에서 이 곡은 신부와 신랑이 축하 행사장을 떠나 결혼식장으로 들어갈 때에 불린다. 로엔그린과 엘자의 재앙과도 같은 결혼은, 합창곡이 불리는 20분 후에 회복할 수 없이 파경으로 도달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이런 이상한 사용을 막는 이유가 되지는 못했다.
.교향곡
교향곡 다장조 (1832년)
.관현악곡
지크프리트 목가파우스트 서곡
.가곡
베젠동크 가곡 WWV. 91
.합창곡
사도들의 애찬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