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7년 6월 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성립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독: Österreich-Ungarn Monarchie)은 1867년부터 1918년까지 중부 유럽에 존재했던 입헌군주제 국가이자 열강 중 하나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합스부르크 왕가가 다스렸으며, 1867년의 대타협으로 형성되었고,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함으로 인하여 해체되었다.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기간: 1867 ~ 1918년
.표어: Indivisibiliter ac Inseparabiliter (라: 갈라질 수도 없고 분리될 수도 없다.)
.국가: 하느님 황제를 지켜주소서 (Gott erhalte den Kaiser)
.수도: 빈
.정부 형태: 입헌군주제, 동군연합체
.카이저: 프란츠 요제프 1세 (1848 ~ 1916), 카를 1세 (1916 ~ 1918)
.성립, 해체, 소멸: 1867년 5월 29일, 1918년 10월 31일, 1919년 9월 10일
.면적: 676,615 km2
.공용어: 독일어, 헝가리어
.인구: 1914년 어림 52,800,000명
.통화: 굴덴 (1867 ~ 1892), 크로네 (1892 ~ 1918)
.이전 국가: 오스트리아 제국
.다음국가: 독일계 오스트리아 공화국, 헝가리 인민 공화국, 체코슬로바키아 제1공화국, 서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폴란드 제2공화국,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 이탈리아 왕국, 루마니아 왕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의 여파로 1867년 3월 30일에 맺어진 아우스글라이히로 형성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오스트리아 제국과 헝가리 왕국 양국간의 동군연합이었고 1867년의 재편으로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양국은 제국 내에서 동등한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양국의 외교부와 국방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명의로 존재하였으나, 이를 제외한 나머지 정부 부처들은 각국에 개별적으로 존재하였다.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은 당시 유럽의 강대국 중 하나이자 다민족 국가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유럽에서 러시아 제국 다음으로 큰 나라였고, 세번째로 인구가 많은 나라였으며, 세계에서 4번째로 기계 산업의 규모가 큰 나라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제1차 세계대전의 동맹국이었으며, 1918년 패전하여 분할되었다. 헝가리 왕국과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이 제국을 계승한 국가로 여겨졌고, 슬라브인들은 체코슬로바키아 제1공화국과 유고슬라비아 왕국, 서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으로 독립해 나갔으며, 일부는 폴란드 제2공화국과 루마니아 왕국으로 흡수되었다.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은 인종적으로, 언어적으로, 종교적으로 서로 다른 다양한 집단들이 모여 사는 국가였다. 제국의 주요 민족은 독일인과 헝가리인이었으나, 그 외의 12개가 넘는 다양한 민족들이 살고 있었다.

○ 형성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양국 사이에서 맺어진 협약인 대타협 (독: Ausgleich)은 오스트리아의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의 권력이 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으로 실추되고 1866년 프로이센 왕국에게 독일 연방의 맹주 자리를 빼앗기고 점차 제국 내에서의 위상도 떨어졌던 시대적 배경 하에 체결되었다. 대타협으로 인하여 오스트리아 제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으로 재편되었으며, 헝가리 왕국은 1848년 헝가리 혁명 이후 잃어버렸던 자주권을 되찾아올 수 있었다.
이러한 구조적인 변화의 발생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통치가 헝가리인들에게 만족스럽지 못하였고, 오스트리아 제국 내에서의 국민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이 점점 세력을 얻어 나갔기 때문이었다. 헝가리인들의 오스트리아 당국의 통치에 대한 불만은 1848년에서 1849년까지 전개된 헝가리 혁명으로 나타났고 오스트리아 당국이 이를 탄압함으로써 고조되었다. 그러나, 헝가리에서의 오스트리아의 통치에 대한 반발은 표출되지 않았을 뿐이지 계속하여 제기되어 왔었다.
1850년대 후반, 헝가리 혁명을 지지하였던 많은 수의 헝가리인들이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아들이겠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들은 1713년 국사원칙하에서 헝가리 왕국이 완전한 자치를 할 수 있는 한 외교권과 국방권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양국이 공통으로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쾨니히그레츠 전투에서 대패한 이후, 오스트리아 제국 정부는 헝가리와 제국의 통치를 양분해야 한다는 사실을 체념하고 받아들였다. 새로운 외교부 장관인 프리드리히 페르디난트 폰 보이스트는 교착상태에 빠진 헝가리인들과의 협상을 종결하고 싶어했다. 제국을 지키기 위해서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는 데악 페렌츠가 이끄는 헝가리인 귀족들과의 협상에 들어갔다. 1867년 3월 20일, 헝가리 혁명으로 사라졌다 페스트에 재설립된 헝기리 의회는 제국을 재편하기 위한 새로운 법률을 3월 30일까지 통과되게 하기 위하여 의논에 들어갔다. 그러나 헝가리의 지도자들은 같은 해 6월 8일에 새로운 법률이 헝가리 내에서 통과되기 위해서는 오스트리아의 황제가 성 이슈트반 왕관령 (헝가리)의 국왕으로써 즉위해야 한다고 통보받있다. 7월 28일, 헝가리의 왕이 된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는 공식적으로 이중제국을 탄생시킬 새로운 법률을 승인하고 공표하였다.
○ 역대 황제
1848년 – 1916년 프란츠 요제프 1세 (1830 ~ 1916)
1916년 – 1918년 카를 1세 (1887 ~ 1922)

○ 군사
오스트리아-헝가리 군대는 근대화에 반대하는 테첸의 공작인 알브레흐트 대공 (1817 ~ 1895)의 지휘를 받았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군사 체제는 양국에서 모두 유사했으며, 1868년 이후 시민들의 무기 보유의 보편적, 개인적 의무의 원칙에 따라 이어졌다. 그 군대는 오스트리아 란트베어와 헝가리 혼베드와 같은 특수 부대와, 별도의 국가 기관으로 구성된 연합군, 그리고 국민군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공통군은 합동군사부 장관 직속이었고, 특수군은 각 국방부 직속이었다. 육군의 연간 모집인수는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의회가 의결한 군사 법안에 의해 결정되었고, 전체 인구 조사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인구를 기준으로 결정되었다.
1905년에는 103,100명에 달했고, 오스트리아는 59,211명을, 헝가리는 43,889명을 징병하였다. 그 외에 오스트리아 란트베어에는 연간 10,000명이, 헝가리 혼베드에는 12,500명이 배치되었다.
복무 기간은 2년 (기병 3년), 예비군이 7년 또는 8년, 란트베어가 2년이었다. 현역 군대에 징집되지 않은 병사들의 경우, 같은 기간 동안 다양한 특별 예비군에서 복무했다.
공통의 전쟁부 장관은 오스트리아 랜드베어와 헝가리 혼베드를 제외한 모든 군정의 수반으로서, 두 국가의 국방부에 헌정되었다. 그러나 군대의 최고 지휘권은 명목상 전군에 대한 모든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군주에게 주어졌다. 실제로 황제의 조카인 알브레흐트 대공은 그의 수석 군사 고문이었고 정책 결정을 내렸다.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은 주로 해안 방어군이었으며, 다뉴브강의 정찰 소함대도 포함되어 있었고, 전쟁부 해군성에 의해 관리되었다.
징병제를 채택하여, 남자들은 병역의 의무를 수행해야 했다.
제1차 세계 대전 기간동안 병력의 90%가 손실을 입었으며 (이 중 대부분이 포로), 이는 참전국 중 가장 많은 수치이다. 120만 명이 전사하였고, 360만 명이 부상을 당했다

○ 문화
오스트리아는 19세기까지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를 독점하며 오랜 세월 동안 독일어권 문화의 중심지였으나, 비스마르크가 소독일주의에 따라 오스트리아를 배제하고 통일독일제국을 수립함에 따라 독일어권 문화의 중심지 자리를 독일 제국에게 내줬다.
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완전히 해체되어 여러 나라로 분열됨에 따라 제국의 문화적 유산 역시 국경에 따라 흩어지게 되었다.
기존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문화’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던 것들이 각국의 독립된 문화로 분리되어 나갔다.
이러한 이유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문화는 영국, 프랑스, 독일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축소 평가되어 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19세기 당시 유럽의 주요국가 (유럽 대륙에서 면적은 2위, 인구는 3위)이자 열강으로서 1867년 ~1918년 존속하면서 수많은 문화적 유산을 남겼다.

– 철학
이 시기에 활동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출신 사상가 중 가장 대표적인 사람은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비트겐슈타인이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을 창시함으로써, 비트겐슈타인은 논리 철학을 발전시킴으로써 후대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에드문트 후설도 오스트리아 출신이며, 신칸트학파에 대항하여 독일-오스트리아 학파를 세운 프란츠 브렌타노도 오스트리아 사람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 유대 및 독일계 심리학자
알프레트 아들러 – 독일계 심리학자
빅토르 프랑클 – 유대계 심리학자
알렉시우스 마이농 – 이탈리아계 심리학자, 철학자
에른스트 마흐 – 독일계 철학자
오토 바이닝거 – 유대계 철학자
에드문트 후설 – 유대계 철학자
카를 포퍼 – 유대계 철학자
카를 카우츠키 – 체코계 철학자
테오도르 헤르츨 – 유대계 언론인, 시오니즘 운동가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 유대 및 독일계 철학자
쿠르트 괴델 – 독일계 수학자, 철학자
– 경제학
오스트리아 학파를 세운 카를 멩거, 오이겐 폰 뵘바베르크, 프리드리히 폰 비저가 활동했다.
조지프 슘페터 – 독일 및 체코계 경제학자, 철학자
오토 노이라트 – 독일계 경제학자
카를 폴라니 – 헝가리, 유대계 경제학자
– 건축학
건축가 오토 바그너가 대표적이다.
그는 유럽 근대 건축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였다.
– 음악과 미술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가 활동하였다.
‘입맞춤’ 등이 대표작인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가 이 나라 출신으로서, 빈 아르누보 운동을 이끌었다.
다음은 유명 화가 및 음악가이다.
구스타프 클림트 – 독일계 화가
에곤 실레 – 독일계 화가
구스타프 말러 – 유대계 음악가
안톤 브루크너 – 독일계 음악가
프란츠 폰 주페 – 독일계 음악가
한스 로트 – 독일계 음악가
한스 리히터 – 독일계 음악가
슈트라우스 가문 – 독일계 음악가 가문
요한 슈트라우스 2세
요제프 슈트라우스
에두아르트 슈트라우스
요한 슈트라우스 3세
칼 미하엘 치러 – 독일계 음악가
안톤 베베른 – 독일계 음악가
알반 베르크 – 독일계 음악가
아르놀트 쇤베르크 – 유대계 음악가
한스 아이슬러 – 유대계 음악가
프리츠 크라이슬러 – 유대계 음악가
에리히 클라이버 – 독일계 음악가
카를 뵘 – 독일계 음악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 그리스, 슬로베니아계 음악가
한스 리히터 – 헝가리계 음악가
에리히 볼프강 코른골트 – 유대계 음악가
프란츠 리스트 – 헝가리계 음악가
코다이 졸탄 – 헝가리계 음악가
벨라 바르톡 – 헝가리계 음악가
도라 페야체비치 – 크로아티아 및 헝가리계 음악가
에르뇌 도흐나니 – 헝가리계 음악가
베드르지흐 스메타나 – 체코계 음악가
안토닌 드보르자크 – 체코계 음악가
레오시 야나체크 – 체코계 음악가
요제프 호프만 – 폴란드계 음악가, 발명가

– 문학
프란츠 카프카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라하 출신이다.
유명 작가는 다음과 같다.
프란츠 카프카 – 유대 및 체코계 작가
카렐 차펙 – 체코계 작가
라이너 마리아 릴케 – 독일계 작가
로베르트 무질 – 독일계 작가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 – 독일 및 우크라이나계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 – 유대계 작가
아르투어 슈니츨러 – 유대계 작가
– 수학 및 과학
오스트리아의 병리학자인 란트슈타이너에 의해 ABO식 혈액형과 Rh인자가 발견되었다. 그는 1930년에 노벨상을 수상하게 된다.
유명 학자는 다음과 같다.
에르되시 팔 – 헝가리, 유대계 수학자
존 폰 노이만 – 헝가리, 유대계 수학자
루트비히 볼츠만 – 독일계 물리학자
볼프강 에른스트 파울리 – 유대 및 독일계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 – 독일 및 영국계 물리학자
그레고어 멘델 – 독일계 사제, 유전학자
카를 란트슈타이너 – 유대계 병리학자
다음은 유명 발명가 및 사업가이다.
페르디난트 만리허 – 독일계 및 체코계 발명가
헤디 라마르 – 유대계 배우, 발명가
니콜라 테슬라 – 세르비아계 발명가
오스카 쉰들러 – 독일계 사업가
– 종교
국교는 로마 가톨릭이었다.

○ 민족 관계
체코인 (보헤미아, 모라바, 오스트리아령 실레시아의 다수 민족) · 폴란드인 · 우크라이나인 (갈리치아), 슬로베니아인 (카르니올라, 카린티아, 스티리아 남부), 크로아티아인, 이탈리아인, 이스트라의 슬로베니아인은 각각 시스라이타니아의 정치에서 발언권을 확대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동시에 트란스라이타니아에서의 헝가리인 (머저르인) 지배는 트란실바니아와 바나트 동부의 루마니아인, 오늘날의 슬로바키아 영토의 슬로바키아인,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과 달마티아 왕국 (오늘날의 크로아티아 영토)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 보이보디나의 크로아티아인과 세르비아인의 도전을 받았다.
루마니아인들과 세르비아인들은 또 새로 세워진 독립국 루마니아 (1859 ~ 1878년)와 세르비아의 동족들과의 합병을 원하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인구통계 조사에서 민족이 아닌 모어 또는 일상에서 사용하는 언어를 조사했다.
즉 통계자료는 엄밀하게 말하면 민족 분포가 아닌 언어 분포인 셈이다.
따라서 인구통계에는 어느정도 누락되는 정보가 존재했다. 왜냐하면 민족적 정체성이 아닌 언어 사용을 기준으로 했기 때문이다.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