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6년 12월 22일, 대한민국의 국어학자 주시경 (周時經, 1876 ~ 1914) 출생
주시경 (周時經, 1876년 12월 22일 ~ 1914년 7월 27일)은 조선말 개화기에 우리말과 한글을 과학적으로 연구한 국문학자이자 언어학자이다. 전문적인 이론 연구를 통해 한글 표준화를 추진하였고 후진양성과 더불어 민족자주 차원에서 한글 보급운동을 펼치며 한글의 대중화와 근대화에 노력한 개척자이자 선각자였다.
본관은 상주, 자는 경재(經宰), 호는 한힌샘이다. 독립협회 활동을 하던 도중 한글 표기법 통일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한국어 문법을 정리하였다. 독립신문 발행과 각종 토론회, 만민공동회의 자료를 민중이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한글로 써야 했기 때문이었다. 홀대받던 우리글 훈민정음을 ‘으뜸가는 글, 하나 밖에 없는 글’이란 뜻을 지닌 ‘한글’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부를것을 제안하여 사용하게 하였다. 현대 한글 체계를 정립하고 보급하였으며, 한국어 연구에 공헌하였다. 민족주의 사상을 지녀 한글 교육에도 힘썼으며, 개신교에서 대종교로 개종한 것 또한 민족적인 정체성 추구 때문이었을 거라 추측된다. 근현대 한글 연구에 있어 최현배와 함께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
주시경은 “나무가 자라는 것은 하늘이 하는 일이요, 그 나무를 가꾸는 것은 사람이 하는 일이니,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우리말을 다듬어서 바르게 말하고 적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한국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80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 생애 및 활동
– 생애
서당에서 한문을 계속 배우면서 신학문에 눈뜨자 1894년 9월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하였다. 도중에 인천부 관립이운학교(官立利運學校) 속성과 관비생으로 선발되어 졸업하였으나, 정계의 격변으로 해운계로의 진출이 무산되고, 1896년 4월 다시 배재학당 보통과에 입학하였다. 마침 1896년 4월 『독립신문』을 창간한 서재필(徐載弼)에게 발탁되어 독립신문사 회계사무 겸 교보원(校補員)이 되었다.
순한글 신문제작에 종사하게 되자, 그 표기통일을 해결하기 위한 국문동식회(國文同式會)를 조직하여 그 연구에 진력하였다. 동시에 서재필이 주도하는 배재학당협성회·독립협회에 참여하였다가 그의 추방과 함께 물러나서 『제국신문』 기재(記載), 영국 선교사 스크랜턴(Scranton, W. B.)의 한어교사,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 강사를 지내면서 1900년 6월에 배재학당 보통과를 졸업하였다. 그러나 신학문에 대한 지식욕은 대단하여 야간에 흥화학교(興化學校) 양지과(量地科)를 마치고, 정리사(精理舍)에서는 수물학을 3년 간 34세가 되도록 공부하는 열성을 가졌다.
경력으로는 간호원양성학교·공옥학교(攻玉學校)·명신학교(明信學校)·숙명여자고등학교(淑明女子高等學校)·서우학교(西友學校) 교원 등을 역임하였고, 협성학교(協成學校)·오성학교(五星學校)·이화학당(梨花學堂)·흥화학교(興化學校)·기호학교(畿湖學校)·융희학교(隆熙學校)·중앙학교(中央學校)·휘문의숙(徽文義塾)·보성중학교(普成中學校)·사범강습소·배재학당 등의 강사를 맡아 바쁜 생활을 보냈다.
그 담당과목은 1913년 3월 중앙학교의 예로 보아서 지리·주산·조선어 등으로 광범하나, 그의 연구업적으로 보아 국어교육이 중심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활동은 계몽운동·국어운동·국어연구로 나누어지는데, 계몽운동은 배재학당협성회 전적과(典籍課) 찬술원, 독립협회 위원, 『가정잡지』 교보원, 서우학회 협찬원, 대한협회 교육부원, 보중친목회 제술원(製述員) 등을 통한 애국계몽운동이었다. 이에 관한 논저는 『가정잡지』와 『월남망국사』(1907), 『보중친목회보』 등에 나타나 있다.
– 활동
국어운동은 특히 한어개인교사, 상동사립학숙 국어문법과 병설, 상동청년학원 교사 및 국어야학과 설치, 국어강습소 및 조선어강습원 개설 등에서 심혈을 기울였다. 경술국치 후에는 숙명여자고등학교를 비롯하여 무릇 9개교에서 가르치는 한편, 일요일에는 조선어강습원에서 수많은 후진을 깨우치기에 ‘주보따리’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동분서주하며 정열을 불태웠다.
그가 가장 정성을 다한 국어연구는 국문동식회를 비롯한 의학교내 국어연구회 연구원 및 제술원, 학부 국문연구소 주임위원 (奏任委員), 국어강습소 졸업생과 설립한 국어연구학회, 조선광문회 사전편찬 등의 활동을 통하여 깊어졌다.
그의 연구는 새받침을 처음으로 주장한 1897년 『독립신문』에 발표한 논설 「국문론」에서 그 방향이 시사된 바와 같이 우리말을 핵심으로 한 국어문법의 체계화였다. 주된 업적은 필사본 『국문문법』(1905), 유인본 『대한국어문법』 (國文講義, 1906), 국문연구소 유인본 「국문연구안」(1907∼1908), 『국어문전음학』(1908), 필사본 『말』(1908년 경), 국문연구소 필사본 『국문연구』(1909), 유인본 『고등국어문전』(1909년 경) 등이며, 학문적 축적을 거쳐 대표적 저술인 『국어문법』(1910)을 이룩하였다.
이 책은 독자적으로 개척한 초기국어문법의 하나로서 국어의 특성에 입각한 음운·품사·구문·어휘의 4부를 갖추고 있다. 특히, 그 구문론은 직소분석(IC분석)의 원리가 엿보이는 구문도해를 최초로 이룩한 것으로 크게 평가되고 있다.
그의 연구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거듭된 그 수정판(1911·1913), 유인본 『소리갈』(1913년 경)을 거치는 동안에 순우리말로 서술하기에 그 나름대로 성공한 『말의 소리』(1914)를 저술하였다. 마지막 저술인 이 책은 구조언어학적 이론을 구체적으로 창안한 세계 최초의 업적으로 높이 평가된다. 즉, 음운론에서 음소(音素, phoneme)에 해당하는 ‘고나’의 발견, 형태론으로 어소(語素, morpheme)에 해당하는 ‘늣씨’의 발견은 서구언어학에 수십 년 앞선 큰 업적이었기 때문이다.
수리학을 바탕으로 한 논리적 구성으로 심화시켜 이러한 학문을 이룩하였는데, 그것은 황무지에서 국어학을 개척한 공로로 인정된다. 그는 또한 이러한 논리에 입각해서 새받침에 의한 표의주의적 철자법, 한자폐지와 한자어의 순화, 한글의 풀어쓰기 등 급진적인 어문혁명을 부르짖었다. 그의 이러한 학문과 주장은 학교와 강습소에서 길러낸 많은 후진이 형성된 후 주시경학파를 통해서 이어졌으며, 후대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그의 후진양성에 관해서는 새로 나타난 「한글모죽보기」(1917년 경)에서 최현배(崔鉉培)·신명균(申明均)·김두봉(金枓奉)·권덕규(權悳奎)·정열모(鄭烈模)·이규영(李奎榮)·장지영(張志暎)·정국채(鄭國采)·김원우(金元祐)·안동수(安東洙) 등 550여 명의 강습생 명단으로 구체적으로 밝혀졌다.
– 죽음과 사후
1914년 7월 27일 급작스러운 복통을 호소하다가 사망하였다. 사인에 대해서 정확히 표기되어 있지 않지만 대부분은 급체로 인해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다. 향년 37세라는 너무나도 안타까운 요절이었으며 이로 인해 한국 국어학계는 아까운 인재를 보내야 했다.
제자인 한글학자 열운 장지영은 주시경 선생 50주기 추도식에서 통곡하며 스승의 요절을 애석해 했으며 장지영이 쓴 <주시경 회고록>은 1990년대 중학교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는데 여기서도 가난했던 주시경 이야기를 안타깝게 언급했다.
그의 시신은 처음에는 서대문 밖 수색 고택골 (현 서울특별시 은평구 신사동)에 안장하였다가 1960년 한글학회의 주선으로 경기도 양주군 진접면 장현리 (현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장현리)로 이장 하였고, 1981년 12월 12일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재이장하였다.
남양주에 묻혔을 때의 묘비는 서울 동대문구의 세종대왕기념관에 남아 있다.
○ 사상 : 언어관과 국어관
주시경이 처음 한글 전용을 주장한 것은 우리말과 일치하는 한글을 통해 보다 효과적으로 신학문을 보급하고 나라의 자강과 독립을 이룰 수 있다는 실용적인 목적 때문이었다. 배재학당에 재학 중이던 1897년 4월 22~23일자 『독립신문』에 기고한 국문론 (國文論)에서는 한자와 같은 표의문자보다 한글과 같은 표음문자가 훨씬 배우기 쉽고 유용하다고 주장하였다. 즉, 한글은 “어리석은 어린 아이라도 하루 동안만 공부하면 넉넉히 다 알 만”한데, 이러한 글자를 두고 한자와 같은 “어렵고 어려운 그 몹쓸 그림을 배우려고 다른 일은 아무 것도 못 하고 다른 재주는 하나도 못 배우고 십여 년을 허비하여 공부하고서도 성취하지 못하는 사람”이 반을 넘는다. 그 때문에 백성은 무식하고 가난해지며 나라는 어둡고 약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세종대왕이 “남녀노소 상하 빈부 귀천 없이” 편리하게 사용하도록 창제한 훈민정음으로 모든 일을 기록하고, 사람들은 이로써 의회, 내무 외무, 재정, 법률, 육해군, 경제학 등 실상에 유익한 학문을 익혀 “우리나라 독립에 기둥과 주초”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처럼 한문을 폐지하고 한글을 사용하자는 주장은 문자를 대중화하여 실력을 양성한다는 계몽적인 측면 외에,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부정하고 조선의 독자성을 추구하려는 흐름과도 궤를 같이 했다. 조선 정부도 1894년 갑오개혁 때 이미 언문으로 업신여겨 왔던 한글을 ‘국문(國文)’이라 칭하고, 공문서나 관보에 국문 또는 국한문을 사용하게 하는 등 정책적으로 국어와 국문을 보급하려 했다. 주시경의 경우, 대한제국이 망국의 길을 걷게 되는 러일전쟁을 전후로 한 시기에 국문을 자주독립의 상징이자 고유의 민족문화로 인식하는 국수주의적 인식을 본격화하였다. 주시경은 이 시기 『대한국어문법 (大韓國語文法)』(1906), 『국어문전음학 (國語文典音學)』(1908), 『국어문법 (國語文法)』(1910) 등 그 동안의 연구 성과를 책으로 출판했는데, 그 서문에서 국수주의적 국어관을 표출한 것이다. 먼저 기본적으로 서로 다른 구역과 인종으로부터 각각의 언어가 자연 발생했음을 전제로 하여, 민족에 따른 언어의 특수성과 고유성을 주장했다. 이러한 시각은 『대한국어문법』에서 시작해 1907년 4월 『황성신문』의 기사 등 이후 거의 모든 저술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난다. 나아가 『국어문전음학』에서는 “그 영토[域]는 독립의 기초 [基]요, 그 종족 [種]은 독립의 형체 [體]요, 그 말은 독립의 본성[性]”이라고 하여, 언어를 국가 혹은 민족의 생성과 존립의 핵심으로 설정하였다. 즉, 나라가 강해도 백성의 자국성 (自國性)이 약하면 나라도 약함을 면치 못하고, 나라가 약해 맘대로 숨 쉬지 못하더라도 백성의 자국성이 강하면 결국 강해질 것이기 때문에, “자국을 보존하며 자국을 흥성케 하는 길은 국성 (國性)을 장려함에 있고, 국성을 장려하는 길은 국어와 국문을 숭상하며 사용함”에 있다는 것이다. 또한 반대로 “남의 나라를 빼앗으려 하는 자는 그 말과 글을 없애고 제 말과 제 글을 가르치려” 하는 등, 국가의 존립과 흥망성쇠는 말 그대로 언어의 존재와 성쇠에 달렸다는 것이 주시경의 생각이었다. 그가 프랑스의 식민지로 전락한 베트남의 사정을 다룬 『월남망국사』(1907)를 한글로 번역하거나 국어 교육에 열심이었던 것도, 국어와 국문을 통해 단군 이래 고유하게 지녀 온 민족과 국가를 유지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결국 1910년에 대한제국은 일제에 병합되었고, 한국어도 일본어에게 ‘국어’의 지위를 빼앗겼다. 이 때문에 『국어문법』도 주시경의 국수주의적 국어관을 담은 서문을 삭제한 채 『조선어문법』(1911)으로 재간행되어야 했다.
○ 주시경의 생애 및 활동 약사
1876년 황해도 봉산군 무릉골에서 서당 훈장 주학원(周鶴苑)과 연안 이씨의 4남 2녀 중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상주 주씨 시조 주이(周頤)의 17세손. 어린 시절 이름은 상호(相鎬)이고 관명(冠名)은 시경(時經)이다. 할아버지 방렬(方烈) 대에 황해도 평산군 차돌개에 와 살다가 아버지 대에 봉산군 무릉골로 옮겼다. 정승 주세붕(周世鵬)의 후예이다.
1887년 12세에 서울 남대문 안 시장에서 해륙물산객주업을 하는 둘째 백부 주학만(周鶴萬)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1887년 수박다리(水橋)에 사는 진사 이희종의 글방에서 한학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1892년 진사 이희종에게 시전(詩傳)을 배우던 중 한문을 한국어로 풀이하는 과정에 의문을 품고 한국어로 해석하기의 가능성을 모색하며 한국어 연구에 뜻을 세웠다.
1893년 배재학당의 강사 박세양과 정인덕을 찾아 산술과 만국지지(역사, 지리)를 배웠다.
1894년 배재학당의 특별과인 만국지지과에 입학.
1895년 탁지부 관비생으로 선발되어 제물포에 있는 이운(利運) 학교 속성과에 입학하여 항해술을 배웠다.
1896년 배재학당에 다시 입학하여 학당 안에 있는 활판소에서 잡역을 하며 공부를 했다. 독립신문사의 회계 겸 교정원으로, 또는 총무로 일하면서 학비를 벌었다.
1896년 배재 학당 내 활판소와 독립신문사 및 협성회의 동지들을 모아 ‘국문 동식회’를 조직하였다. 이 모임의 목적은 국문 동식법(맞춤법)을 연구하고 국문 전용을 권장하며 국어사전을 편찬하고 국어 문법을 연구하는 일이었다.
1896년 김명훈과 결혼.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다.
1896년 배재학당의 학생회인 협성회의 찬술원 및 사적으로 피선되어 ‘협성회보’를 편집하게 된다.
1897년 독립협회 임원으로 피선.
1898년 6월 배재학당 만국지지 특별과를 졸업. 독립신문사의 총무직 사임.
1898년 국어 문법의 연구에 필요한 추가 공부를 위해 영어 문법을 연구하기로 하고 배재학당 보통과에 입학.
1898년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 사건으로 이승만, 서상대, 이동녕, 양기탁 등과 함께 감옥에 투옥되었다. 황제의 특사령으로 11월에 석방됨.
1898년 12월 31일 ‘대한국어문법’의 원고본 집필.
1899년 남대문 안에 있는 제국신문사에 입사하여 기자로 활동.
1900년 6월 배재학당 보통과 졸업. 졸업 예배 식전에서 아펜젤러 목사의 집례로 세례를 받고 감리교에 입교.
1900년 상동교회 부설 상동 청년 학원(야학)에 국어문법과를 부설. 1900년 2월 15일은 한국에서 최초로 국어 문법이 근대 교육의 한 과목이 된 날임. 이 당시 교재는 ‘대한 국어 문법’ 원고본이었음.
1901년 1905년까지 외국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침.
1906년 수진동 흥화학교 측량과(야간 속성과) 졸업.
1906년 이화 학당 사무원으로 근무.
1906년 서우(西友) 학회 협찬원으로 근무.
1906년 ‘대한 국어 문법’ 목각 인쇄본 출간.
1906년 창동에 있는 학교 ‘정리사’에 입학하여 수학과 물리학을 배움.
1907년 지석영이 만든 국어연구회의 회원으로 4개월간 활동.
1907년 7월 학부(지금의 교육부) 내의 국문 연구소 주임위원으로 임명되어 3년 동안 국문연구안을 작성·제출·토의.
1908년 ‘국어 문전 음학’ 출간.
1908년 ~ 1910년 상동청년학원 안에 개설된 하기(夏期)국어강습소의 졸업생과 유지들을 규합, 국어연구학회를 조직.
1909년에는 캐나다 개신교 선교사인 J.S.게일, 다카하시 도루(高橋亨) 등과 더불어 한어연구회를 조직.
1911년 학회이름이 국어연구학회에서 조선언문회(배달말글몯음)로 개명되었다. 그리고 국어강습소는 조선어강습원으로 개칭.
1913년 학회의 이름이 한글모로 재개명.
1914년 조선어강습원의 이름이 한글배곧으로 재개칭. 7월 27일 별세. 39세.
– 강의활동
이화학당·흥화학교·기호학교·융희학교·중앙학교·휘문의숙·배재학당 등에서 강의
상동감리교회 내의 상동청년학원과 여러 강습소를 중심으로 국어 강의를 전개
1907년 여름에 상동청년학원의 국어강습소에서 강의
같은 해 11월 같은 학원에 설치된 국어야학과에서 강의
1908~09년 국어강습소에서 강의
1910년 재령 나무리강습소에서 강의
강의과목: 음학 (音學) · 자분학 (字分學) · 격분학 (格分學) · 도해학 (圖解學) · 변체학 (變體學) · 실용연습 등을 가르쳤다.
○ 어록
말이 오르면 나라도 오르고, 말이 내리면 나라도 내리나니라
“오늘날 나라의 바탕을 보존하기에 가장 중요한 자기 나라의 말과 글을 이 지경을 만들고 도외시한다면, 나라의 바탕은 날로 쇠퇴할 것이요 나라의 바탕이 날로 쇠퇴하면, 그 미치는 바 영향은 측량할 수 없이 되어 나라 형세를 회복할 가망이 없을 것이다. 이에 우리 나라의 말과 글을 강구하여 이것을 고치고 바로잡아, 장려하는 것이 오늘의 시급히 해야 할 일이다.” – 주시경의 저서 <국어문전음학> 중에서
문명 강대국은 모두 자국의 문자를 사용한다.
참고 = 위키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