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8년 11월 7일, 오스트리아-스웨덴의 물리학자 리제 마이트너 (Elise “Lise” Meitner, 1878 ~ 1968) 출생
엘리제 “리제” 마이트너 (독: Elise “Lise” Meitner, 1878년 11월 7일 ~ 1968년 10월 27일)는 유대계 오스트리아-스웨덴의 물리학자다. 세부전공은 방사능과 핵물리학이다.
오토 한과 함께 우라늄이 중성자를 흡수하면 핵분열을 일으킨다는 것을 처음으로 발견했다. 그 내용은 1939년 초에 논문으로 발표되었다.
마이트너와 오토 로베르트 프리슈는 우라늄의 원자핵이 절반으로 나뉠 때 일부 질량이 감손되며, 질량-에너지 등가에 따라 그 감손된 질량만큼의 엄청난 에너지 방출이 핵분열에 수반될 것임을 깨달았다. 이것은 핵무기와 원자력 발전의 기본원리다.
마이트너는 대부분의 학술 경력을 독일 베를린에서 보내면서 물리학 교수,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 부서장 등을 역임했다. 독일에서 정교수직에 오른 최초의 여성이었다.
그러나 1930년대에 독일에서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나치당)이 집권하고 뒤이어 오스트리아를 병합하면서 ‘뉘른베르크법’의 적용 대상이 되어 모든 공직을 잃었다. 이에 스웨덴으로 도피했고 몇 년 뒤 스웨덴 시민권을 취득했다.
마이트너는 많은 상훈을 받았지만, 1944년 핵분열에 관하여 시상된 노벨 화학상을 수상하지는 못했다.
공동수상자 3명 제한에 걸린 것도 아니었고 마이트너와 오랫동안 함께 연구했던 동료 오토 한이 단독으로 수상했기에 노벨상 위원회는 많은 과학자들과 언론인들에게 불공정하다고 욕을 먹었다.
1997년 발견된 원자번호 109번 원소 마이트너륨은 리제 마이트너의 이름을 딴 것이다.
- 핵분열
독일의 화학자 오토 한 (O. Hahn, 1879∼1968)과 프리츠 슈트라스만 (F. Strassmann 1902∼ 1980 )은 우라늄의 원자핵에 중성자 (양자와 함께 원자핵을 구성하며 원자핵과 질량이 거의 같은 소립자)를 충격시켰을 때 원자량이 거의 반인 바륨 (Ba)이 되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 전 생각으로는 원자번호 93 이상인 초우라늄 원소가 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과 함께 실험을 하다가 이 발표 직전에 나치스 독일에서 망명한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마이트너 (L. Meitner, 1878∼1968)와 그 조카 프리슈 (O. R. Frisch, 1904∼ ? )는 이것을 우라늄 원자핵이 반쪽으로 분열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 노벨상 불발
마이트너는 생전에 상당히 많은 상훈들을 받았지만, 노벨상을 받지 못했다는 것은 그 모든 상훈들을 가려버릴 정도의 그림자를 만들었다.
1945년 11월 15일, 왕립 스웨덴 과학한림원은 오토 한에게 “중원소 핵분열 발견”의 업적을 평가하여 노벨 화학상을 수여했다.
마이트너 본인도 “한이 (실험 수행자로서) 화학상을 받을 만하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프리슈와 나도 우라늄 분열 과정을 밝히는 데 있어 사소하지 않은 기여를 했다고 생각한다.
그 과정이 어떻게 발생하는 것이고 왜 그렇게 많은 에너지를 발생시키는 것인지를 밝히는 것은 한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이야기다”라는 편지를 쓰며 서운함을 표시했다. 마이트너의 조교였던 카를 프리드리히 폰 바이츠제커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한은 분명히 이 노벨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 사실 이 발견이 아니었더라도 그는 언제고 (노벨상을) 받았을 것이다. 다만 원자핵 분열이 노벨상감이라는 것을 모두가 인정할 뿐이다.”라는 말을 했다.
프리슈도 1955년 쓴 편지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한의 노벨상 수상은 오래 전부터 예상되었던 바였다.
한과 마이트너 두 사람 모두 핵분열을 발견하기 이전부터 각각 화학상과 물리학상 후보자로 여러 번 지명되었다.
1945년, 스웨덴 노벨 위원회는 노벨 화학상을 한이 단독 수상하는 것을 결정했다.
1990년대가 되어 그동안 봉인되어 있던 노벨 위원회의 회의록이 공개되고, 1996년 루스 르윈 시메 (Ruth Lewin Sime)가 마이트너 평전을 쓰면서 마이트너가 노벨상을 받지 못한 것에 관한 이의제기가 재부상했다.
1997년 미국 물리학회 회지에 기고한 글에서 시메와 엘리자베스 크로포드 (Elisabeth Crawford), 마크 워커 (Mark Walker)는 “리제 마이트너가 1944년 노벨상을 공동수상하지 못한 것은 노벨 위원회가 그 구조상 학제간 연구를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으로 보인다.
화학상 담당 위원회의 위원들은 마이트너의 기여분을 정당하게 평가할 능력 또는 의지가 없었을 것이다. 또한 전쟁으로 인해 스웨덴 과학자들은 제한적인 정보에 의존해야 했다.
마이트너의 화학상 배제는 학문 분야상의 편향, 정치적 둔감함, 무지함, 조급함이 복합된 결과라고 요약할 수 있다”고 결론내렸다.
1962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인 맥스 퍼루츠도 노벨 위원회의 공동연구에 관한 이해 부족이 노벨상의 불공정성을 심화하고 있다며 마이트너의 예시를 사례로 들었다.
- 여생 및 말년
전쟁이 끝난 뒤 마이트너는 독일에 정나미가 떨어져 버렸다. 그는 오토 한과 막스 폰 라우에를 비롯한 독일 과학자들이 나치에 부역하면서 히틀러 정권의 범죄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독일에서 가장 선도적인 핵물리학자였던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의 경우 이름까지 거론해 가면서 강제수용소로 끌고 가 그 참상을 눈으로 확인하게 해야 한다고 비난했다.
1945년 6월 마이트너는 한에게 보내는 다음과 같은 날선 내용의 편지를 썼지만 끝내 부치지는 않았고, 죽을 때까지 한 가족과 관계를 유지했다.
당신들은 모두 나치를 위해 일했어. 당신도 그저 수동적인 저항밖에 하지 않았지. 물론 여기서 저기서 박해받는 사람들 몇몇을 구해주면서 스스로의 양심을 매수하려 들었겠지만, 수백만 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저항도 하지 못하고 살해당하는 가운데 … [누가 그러기를] 당신들은 처음에는 동료들을 배신했고, 그 다음에는 자기 자녀들을 범죄 전쟁의 판돈으로 내놓았고, 그리고 결국에는 독일마저 배신했다고. 이유인즉 전쟁이 이미 가망이 없어졌던 시점에서, 독일을 파괴하는 무의미한 짓에 맞서기 위해 무기를 들고 나선 사람은 당신들 중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지.
이후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마이트너는 독일을 종종 방문하며 한 및 한의 가족들과 여러 번 만나 함께 시간을 보냈다.
특히 1959년 3월 8일에는 괴팅겐에서 열린 한의 80세 생일 잔치 자리에 참여해 한을 칭송하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
한 역시 1968년 사망한 직후 출간된 회고록에서 자신과 마이트너가 평생의 친구로 남았다고 썼다. 물론 이 둘의 관계는 시련과 착오로 가득했고, 한과 마이트너 중 시련을 더 많이 받은 것이 마이트너 쪽임도 분명해 보이지만, 마이트너는 한에 대해 깊은 애정 이외의 다른 감정을 공개적으로 밝힌 적은 한 번도 없었다.
1947년, 마이트너는 시그반 연구소에서 퇴직하고, 스웨덴 원자력위원회가 왕립 기술연구소에 새로 만든 연구실로 옮겼다.
1949년 스웨덴 시민권을 취득했다.
1960년 완전히 은퇴하고 친지들 대부분이 살고 있는 영국으로 이주했다. 다만 그 뒤로도 때때로 비정규 업무나 강좌는 계속했다.
1964년 미국을 여행하던 중 심장마비를 일으켰고, 회복할 때까지 여러 달이 걸렸다. 마이트너는 죽상동맥경화증으로 심신이 피폐해져 있었다.
엔리코 페르미 상 수상을 위해 이동할 수도 없어서 친지들이 대신 수상해 전달해 주어야 했다.
1967년에는 넘어져서 엉덩이뼈가 부서지고, 경미한 중풍을 여러 번 겪었다. 그 뒤 잠깐 회복되는 듯 했으나 결국 케임브리지 요양소로 옮겨졌다.
1968년 10월 27일 수면 도중 사망했다. 향년 89세.
오토 한 (1968년 7월 사망)과 그 아내 에디트 한 (1968년 8월 사망)이 먼저 죽었다는 것을 모르는 채 죽었다.
그 소식을 전했을 때 마이트너가 정신적 충격을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한 가족들이 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언에 따라 햄프셔의 브램리 (Bramley)라는 동네의 세인트제임스 교구교회에 남동생 월터 (1964년 사망) 곁에 묻혔다.
묘비명은 조카 프리슈가 썼다.
리제 마이트너: 단 한번도 인도를 반하지 않은 물리학자
Lise Meitner: a physicist who never lost her humanity.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