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2년 5월 13일, 프랑스의 미술가 ‘입체주의의 창시자’ 조르주 브라크 (Georges Braque, 1882 ~ 1963) 출생
조르주 브라크 (Georges Braque, 1882년 5월 13일 ~ 1963년 8월 31일)는 프랑스의 화가이다.
파리 미술 학교 (프랑스어판)에서 배우고, 1906년에는 앵데팡당 전에 입선하였다. 처음에는 야수파라고 하는 대담하고 거친 붓놀림으로 선명한 색조를 나타내는 그림을 그렸으나, 폴 세잔의 영향으로 인상파에 접근하였다.
1907년에는 피카소와 친구사이로 사귀면서부터 사물을 입체적으로 보는 데 주력하게 되었으며, 피카소와 함께 입체파로서 프랑스 화단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신고전주의적 필치로 정물, 실내화를 그렸다.
그의 작품으로 《포르투갈 인》, 《탁상 정물》, 《해변 풍경》, 《기타와 클라리넷》, 《기타를 가진 소녀》 등이 있다.

– 조르주 브라크 (Georges Braque)
.출생: 1882년 5월 13일, 프랑스 아르장퇴유
.사망: 1963년 8월 31일, 프랑스 파리
.묘소: Varengeville-Sur-Mer Churchyard
.직업: 조각가, 화가, 조각사, 석판화가, 디자이너, 보석 디자이너, 무대 디자이너, 그래픽 예술가, 판화가, 콜라주 제작자, 제도사, 데생화가
.학력: 파리 보자르, École supérieure d’art et design Le Havre-Rouen
.사조: 입체파, 야수파
.수상: 코망되르 드 라 레지옹 도뇌르 (1951), 펠트리넬리상 (1959)
.배우자: Marcelle Lapré
.주요 작품: Houses at l’Estaque, La Guitare, Mandola
.영향: 폴 세잔, 아프리카 조각, 파블로 피카소
1882년 파리 근교의 아르장튀유에서 태어났고, 8세에 집안이 르 아브르로 이사, 브라크도 그 곳에서 성장하였다. 부친은 도장업을 하였는데 그도 소년시절부터 그 직업을 견습하면서 1897년 르 아브르의 미술학교 야간부에서 그림을 공부하였다. 이윽고 장식화가를 지망하여 그 수업을 위해서 1900년 파리로 갔다. 파리에서는 아카데미 운베르에 다녔는데 여기에서 로랑생과 피카비아와 사귀었다. 그러나 그는 노르망디 출신인 프리에스와 가장 절친하여 이 두 사람은 1906년에 네덜란드로, 1907년에는 남프랑스의 라 시오타로 여행을 하였다. 그동안 브라크는 포비즘에 가담하여 색채가 선명한 작품을 그렸으며, 당시의 그는 프리에스와 나란히 마티스나 드랭의 영향이 농후하였다. 시오타에서 돌아온 뒤에 브라크는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는 포비슴의 그룹을 떠나 에스타크에서 지내면서 고독한 가운데에 세잔이 시사한 자연의 양식화 방향을 추구했다.
1908년 큐비즘 명칭의 유래가 된 <에스타크 풍경>이 살롱 도톤에서 거부당하여 칸와이러의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이것으로 피카소와의 친교가 깊어지고 폴 세잔의 영향을 받은 퀴비슴에서 점차로 풍경을 제거한 분석적 큐비즘으로 나갔다. 이 시기에 브라크와 피카소는 서로를 가려 볼 수 없을 만큼 그림이 비슷하였다. 1911년경부터 두 사람의 화면에는 현실 회복의 징조가 나타나 숫자와 알파벳이 구성 요소로 취급되고, 이듬해에는 이것이 파피에 콜레로 발전하여 총합적 큐비즘에 옮겨 갔다. 화사한 피카소와 대조적인 성격의 탓도 있지만 브라크는 친한 친구들 사이에서 마담 피카소란 별명으로 불린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으나 머리에 부상을 입어 1917년에 제대한 후 회화의 길에 복귀하여 예의 총합적 큐비즘을 완성하였다. 화면에 색채와 대상성을 회복하고 나체와 풍경의 모티프도 받아들여서 피카소와 별도의 길을 걷는 독자적 양식에 도달하였다. 1920년 피카소가 고전주의로 전환하였을 때에 브라크는 최초로 조각에 손을 대어 형태애 관한 사고를 더욱 연마해 나갔다. 1930년대 재차 피카소와 가까워졌으나 브라크의 모뉴멘털한 장식성의 추구는 벌써 피카소와 질적으로 다른 침정과 세련을 구하는 것이었다.
파블로 피카소와 함께 입체파를 발전시킨 20세기 미술의 중요한 혁신가이다. 그의 회화작품들은〈만돌린이 있는 정물 Still Life with a Mandolin〉(1935) 에서 볼 수 있듯이 대체로 대담한 구도와 오두운 색 배합, 차분하고 묵상적인 특징을 지닌 정물들로 이루어져 있다.
1902~04년에 파리의 한 사설 아카데미와 에콜 데 보자르에서 공부했다. 이집트와 고대 그리스 작품들에 깊이 매료되었고, 그의 초기 작품들은 인상주의 화가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905년 ”야수파’ 화가들의 색을 주관적으로 사용한 작품들을 접한 후 브라크는 자신의 양식을 찾기 시작했다. 그뒤 2년 동안 그는 약간 신중하고 전통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뚜렷한 야수파 화가가 되었다. 이 때의 작품으로 〈앙베르 항구 Le Port d’Anvers〉 등이 있다. 1907년 파리에서 활동하던 피카소를 만났고, 서로 지대한 영향을 주고받아 마침내 입체파가 출현했다. 초기 입체파 작품에 기하학적 형태를 적용하는 데 크게 이바지한 사람은 브라크였다. 〈레스타크의 집들 Houses at L’Estaque〉에서는 이미 분석적 입체파의 초기에 해당하는 특유의 평면성과 차분한 색채, 뒤틀린 원근법 등이 보인다.
1911년 브라크는 〈포르투갈인 The Portuguese〉이라는 작품에 문자들을 인쇄로 찍어넣음으로써 미술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으로, 그림이란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자율적인 사물 그 자체라는 견해를 강력하게 밝혔다. 1912년 그는 이 방향으로 더욱 정진하여 〈과일접시와 유리잔 Fruit Dish and Glass〉이라는 작품에서 3조각의 벽지를 붙임으로써 일반적으로 파피에 콜레 (papier colle : 프랑스어로 ‘종이를 붙인 그림’이라는 뜻) 기법을 창안했다.
제1 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제대한 후, 그는 다시 입체파 운동에 가담해 1917~18년에 그는 기하학적이고 색이 강렬하며 거의 추상적인 〈악사 여인 Woman Musician〉을 그렸다. 이후 그는 다시 엄격한 기하학적 형태에서 보다 유연한 드로잉과 자유로운 붓놀림에 의해 부드러워진 형태로 급속도로 전환했는데, 이러한 변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 〈카드가 있는 정물 Still Life with Playing Cards〉(1919)이다. 이때부터 그의 양식은 입체파의 발전단계에 따라 나아가지 않고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의 파란만장한 시기로부터 물려받은 양식을 나름대로 변형하여 일련의 양식으로 발전시켰다.

○ 생애 및 활동
브라크는 파블로 피카소와 함께 입체파라는 혁신적인 회화 표현양식을 창시하고 발전시켰다.
20세기 미술의 중요한 혁신가이자 현대 미술의 거장으로 평가받는다.
인상주의 중심지인 노르망디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영향으로 초기 작품들에선 인상주의 화풍을 보였다.
1905년 경에는 대담하고 거친 붓놀림을 특징으로하는 야수파적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피카소를 만나 서로 지대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함께 입체파를 창시했다.
또한 근대 회화의 아버지라 불리는 폴 세잔을 높이 평가하며, 그의 정신을 이어 초기 입체파 작품에 기하학적 형태를 적용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대체로 정물화를 그렸으며, 작품들은 대담한 구도와 어두운 색 배합, 차분하고 묵상적인 특징을 보인다.

- 초기생애
브라크는 1870년대 인상주의 운동의 중심지였던 파리 근처 센 강 유역에 있는 한 작은 마을에서 피카소가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번창하는 가옥도장회사의 소유주였으며 두 사람 모두 아마추어 미술가였다.
1890년 브라크의 가족은 해양화가인 외젠 부댕과 젊은 클로드 모네가 활동하던 초기 인상주의의 중심지였던 르아브르로 옮겨갔다. 그는 그 지방의 공립학교에 다니면서 아버지를 따라 스케치 여행을 다녔으며 권투 등 스포츠에도 관심을 가져 어른이 되어서는 직업적인 운동선수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또한 플루트를 연주하는 법도 배웠다.
15세 때 브라크는 르아브르 미술 아카데미의 야간반에 입학했다.
17세 때 학교를 그만두고 1년 동안 르아브르와 파리에서 가옥도장업자 겸 실내장식가의 견습생으로 지냈다. 이 시기에 그는 재료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법과 장인의 솜씨(예를 들면 나뭇결의 모방)를 배웠는데 이것들은 후에 그의 입체파적 그림들에서 자주 활용되었다.
1년 동안 군대에서 복무한 뒤 그는 가족들의 도움을 받아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1902~04년에 파리의 한 사설 아카데미와 에콜 데 보자르에서 공부했으며, 한가할 때에는 루브르 박물관에 자주 들렀는데 그는 특히 그곳에 있는 이집트와 고대 그리스 작품들에 깊이 매료되었다. 그의 초기 작품들은 노르망디에서 보낸 어린시절에서 예상할 수 있듯이 인상주의 화가들, 즉 모네와 카미유 피사로를 비롯한 인상주의 화가들의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뒤이은 작품들에서는 폴 세잔의 작품에서와 같은 안정된 구도와 색과 색조 변화의 통일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브라크가 비로소 자신의 양식을 찾기 시작한 것은 1905년 파리의 가을 살롱 전에서 ‘야수파’라는 별명이 붙은 화가들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는 방에서 색을 주관적으로 사용한 작품들을 접한 후이다.
그뒤 2년 동안 그는 약간 신중하고 전통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뚜렷한 야수파 화가가 되었으며 한동안 안트웨르펜에서 활동하다가 지중해 연안에 인접한 마르세유 근처의 레스타크와 라시오타에서 작업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앙베르 항구 Le Port d’Anvers〉· 〈라시오타 항구 The Port of La Ciotat〉· 〈레스타크의 오텔 미스트랄에서 본 풍경 View from the Hôtel Mistral, L’Estaque〉 등이 있다.
1907년 봄에 그는 파리 앙데팡당전에 6점의 그림들을 전시했는데 이들은 모두 팔렸다. 그해말에 그는 당시 현대미술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소규모 화랑을 파리에 연 그림상인 다비드 앙리 칸바일러와 계약을 맺었다.
칸바일러는 아방가르드 시인이자 비평가인 기욤 아폴리네르를 설득하여 피카소의 몽마르트르 화실에서 브라크를 피카소에게 소개하도록 했다. 브라크는 처음에 피카소의 최근작 〈아비뇽의 처녀들 Demoiselles d’Avignon〉(뉴욕 현대미술관)을 보고 당황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작품에 대한 당신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작품은 마치 당신이 우리에게 삼 부스러기를 먹이거나 휘발유를 들여마시게 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이는군요.”
그러나 두 미술가는 곧 가까운 친구가 되었으며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서로 지대한 영향을 주고받아 마침내 입체파가 출현했다.
두 사람 중 누가 이 혁신적인 새 양식의 주요한 창안자였는지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한창 공동작업을 할 때 거의 매일 생각을 나누었으며 실제로 구별하기 힘들 만큼 비슷한 그림들을 그렸기 때문이다. 피카소는 최초의 입체파 작품 〈아비뇽의 처녀들〉로 처음으로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세잔을 높이 평가하여 초기 입체파 작품에 기하학적 형태를 적용하는 데 크게 이바지한 사람은 브라크였다.

1908년 여름 프랑스 남부에서 그는 매우 혁신적인 유화 연작들을 그렸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레스타크의 집들 Houses at L’Estaque〉로 여기에서는 이미 분석적 입체파의 초기에 해당하는 특유의 평면성과 차분한 색채, 뒤틀린 원근법 등이 보인다.
그해 가을에 칸바일러의 화랑에서 전시회를 가졌으며, 파리의 비평가인 루이 보셀이 이 작품들에 대해 ‘정6면체들’ (Les Cubes)이라고 언급한 것을 계기로 ‘입체파’ (Cubism)라는 명칭이 생겨났다.
1911년경 나중에 브라크 자신이 말했듯이 마치 로프로 서로 동여맨 등반가들처럼 이제는 피카소와 긴밀한 협력관계를 맺게 된 그는 이른바 분석적 입체파 시기로 완전히 들어섰으며,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는 〈기타를 든 남자 Man with a Guitar〉가 있다.
이 작품에서는 갈색·회색·녹색이 사용되었으며 회화적 공간은 거의 평면적이고 시점과 광원은 다양하며 윤곽선은 불연속적이고 양감은 대체적으로 얕게 처리되고 분할된 면들은 비합리적인 다각시점으로 전환되었다.
또한 1911년 브라크는 〈포르투갈인 The Portuguese〉이라는 작품에 문자들을 인쇄로 찍어넣음으로써 미술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으로, 그림이란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자율적인 사물 그 자체라는 견해를 강력하게 밝혔다.
1912년 그는 이 방향으로 더욱 정진하여 〈과일접시와 유리잔 Fruit Dish and Glass〉이라는 작품에서 3조각의 벽지를 붙임으로써 일반적으로 파피에 콜레(papier collé : 프랑스어로 ‘종이를 붙인 그림’이라는 뜻) 기법을 창안했다.
초기 입체파 시절에 그는 몽마르트르에 화실을 가지고 있었으나 다른 곳에서 그림을 그리는 경우가 많았다.
1909년에는 파리 서쪽 센 강 유역에 있는 라로슈기용에서, 1910년에는 레스타크의 외딴 곳에서, 1911년에는 피레네 산맥의 산기슭 언덕에 지중해를 바라보고 있는 마을인 세레에서 작업했다.
1912년 마르셀 라프레와 결혼하여 아비뇽 근처의 론 계곡을 끼고 있는 작은 도시 소르그에서 지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보병 중사로 군대에 들어가 두드러진 활동을 했으며 용감한 행동으로 1914년에는 2번이나 훈장을 받았다.

1915년 머리에 심한 부상을 입고 뇌수술을 받은 뒤 병원에서 몇 달을 지내다가 소르그의 집으로 돌아와 오랫동안 요양을 했다.
이 시기에 그는 예전에 소묘작품들의 가장자리에 아무렇게나 써놓곤 했던 경구들을 보충했으며, 1917년에 그의 친구이자 시인인 피에르 르베르디가 이 경구들을 한데 모아 평론지인 〈노르쉬드 Nord-Sud〉에 〈그림에 관한 사색과 반성 Thoughts and Reflections on Painting〉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다음과 같은 짧은 인용에서조차 브라크의 시적이면서도 합리적인 정신과 함께 입체파의 배경에 깔려 있는 사고방식을 알 수 있다.
“새로운 방법과 새로운 주제… 그 목적은 이야깃거리가 되는 사실을 ‘재구성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회화적인 사실을 ‘구성하는 것’이다. … 자연을 모델로 하여 그린다는 것은 즉흥적으로 그린다는 것이다. … 오감은 형태를 왜곡시키고 이성은 형태를 구성한다. … 나는 감정을 바로잡는 규칙을 좋아한다.”
군대에서 제대한 뒤 그는 다시 입체파 운동에 가담했는데 그무렵 이 운동은 때때로 종합적 입체파 단계 (예전의 거미줄과 같은 분석적 기호가 아니라 비교적 큰 상징적 면들로 대상을 표현하고 더 많은 색을 사용하는 경향을 나타내는 용어로 쓰이기는 하지만 그리 적절하지 않음)에 이르렀다.
1917 ~ 18년에 그는 기하학적이고 색이 강렬하며 거의 추상적인 〈악사 여인 Woman Musician〉과, 그밖에 종합적 입체파 회화를 그린 스페인 태생의 입체파 대가이자 그의 친구인 후안 그리스의 영향을 부분적으로 받으면서 작업했다. 그러나 그는 엄격한 기하학적 형태에서 보다 유연한 드로잉과 자유로운 붓놀림에 의해 부드러워진 형태로 급속도로 전환했는데, 이러한 변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 〈카드가 있는 정물 Still Life with Playing Cards〉(1919)이다.
이때부터 그의 양식은 입체파의 발전단계에 따라 나아가지 않고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의 파란만장한 시기로부터 물려받은 양식을 나름대로 변형하여 일련의 양식으로 발전시켰다.

- 국제적 명성
이제 그는 전후 프랑스 사회의 새로운 부유층의 후원에 힘입어 현대미술의 대가로 명성을 얻는 데 성공했다.
그는 파리에서 주로 일하게 됨에 따라 1922년 화실을 몽마르트르에서 몽파르나스로 옮겼으며, 그로부터 3년 뒤에는 현대적인 성향의 건축가 오귀스트 페레가 설계한 레프방크의 새 집으로 옮겼다.
1923, 1925년에는 유명한 발레 흥행주인 세르게이 디아길레프로부터 무대장치의 설계를 의뢰받았다.
1930년 노르망디 해안에 인접한 디에프 근처 바랑주빌에 별장을 마련했다. 이 시기의 그의 작품들은 주제를 바탕으로 하는 양식의 다양성으로 말미암아 아주 쉽게 분류할 수 있다.
1922 ~ 26년경 그는 이교도처럼 보이는 과일 나르는 여인들을 소재로 ‘카네포르’ (canéphores: 바구니를 머리에 인 여인) 연작을 제작했다. 과일과 기타를 올려 놓은 벽난로 선반을 그린 ‘슈미네’ (cheminées: 벽난로) 연작은 이것들과 시기적으로 중복되고 있다.
1928년경에는 예전에 벽난로 선반에 올려 놓았던 물건을 테이블에 올려 놓고 ‘게리동’ (guéridons: 탁자) 연작을 제작했다.
1931년 새로운 표현매체 (흰 선으로 그린 고대 그리스의 도기처럼 검은색 바탕의 소묘)를 실험했다.
1930년대 후반에는 일련의 인물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중 뛰어난 작품으로는 〈2인조 Le Duo〉·〈화가와 모델 The painter and His Model〉이 있다.
1937년 카네기상을 탔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신화를 주제로 하여 고대 그리스 양식을 생각나게 하는 대체로 납작하고 작은 장식조각들을 만들었다.
전쟁이 끝난 뒤 다시 1가지 주제를 가지고 많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당구대를, 그후에는 작업실의 실내장식과 새 (무엇인가 잊혀진 고대의 상징적 의미로서의 크고 볼품없는 생물)를 연작으로 제작했다.
말년에는 세계 곳곳에서 그를 기념하여 중요한 회고전이 열렸으며, 1961년 12월 살아 있는 미술가로서는 처음으로 루브르 박물관에 그의 작품이 전시되었다.

○ Gallery
Georges Braque, 1908, Plate and Fruit Dish, oil on canvas, 46 × 55 cm, private collection
Georges Braque, 1908, Cinq bananes et deux poires (Five Bananas and Two Pears), oil on canvas, 24 × 33 cm, Musée National d’Art Moderne
Georges Braque, 1908, Maisons à l’Estaque (Houses at l’Estaque), oil on canvas, 73 × 59.5 cm, Kunstmuseum Bern
Georges Braque, 1908–09, Fruit Dish, oil on canvas, 54 × 65 cm, Moderna Museet, Stockholm
Georges Braque, 1909, Port en Normandie (Little Harbor in Normandy), 81.1 × 80.5 cm,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Georges Braque, 1909, La Roche-Guyon, le château (The Castle at Roche-Guyon), oil on canvas, 80 × 59.5 cm, Moderna Museet, Stockholm
Georges Braque, 1909 (September), Violin and Palette (Violon et palette, Dans l’atelier), oil on canvas, 91.7 × 42.8 cm, Solomon R. Guggenheim Museum
Georges Braque, 1909–10, Pitcher and Violin, oil on canvas, 116.8 × 73.2 cm, Kunstmuseum Basel
Georges Braque, 1910, Femme tenant une Mandoline, 92 × 73 cm, Bavarian State Painting Collections
Georges Braque, 1910, Portrait of a Woman, Female Figure (Torso Ženy), oil on canvas, 91 × 61 cm, private collection
Georges Braque, 1911, Nature morte (Still Life), Reproduced in Du “Cubisme”, by Albert Gleizes and Jean Metzinger, 1912
Georges Braque, 1911, Nature Morte (The Pedestal Table), oil on canvas, 116.5 × 81.5 cm, Georges Pompidou Center, Paris
Georges Braque, 1911–12, Girl with a Cross, oil on canvas, 55 × 43 cm, Kimbell Art Museum, Fort Worth, Texas
Georges Braque, 1911–12, Man with a Guitar (Figure, L’homme à la guitare), oil on canvas, 116.2 × 80.9 cm (45.75 × 31.9 in),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Georges Braque, 1912, Violin: “Mozart Kubelick”, oil on canvas, 45.7 × 61 cm, Metropolitan Museum of Art
Georges Braque, 1913, Nature morte (Fruit Dish, Ace of Clubs), oil, gouache and charcoal on canvas, 81 × 60 cm (31.8 × 23.6 in), Musée National d’Art Moderne, Centre Georges Pompidou, Paris
Georges Braque, 1913, Femme à la guitare (Woman with Guitar), oil and charcoal on canvas, 130 × 73 cm, Musée National d’Art Moderne, Centre Pompidou, Paris
Georges Braque, 1913–14, Still Life on a Table (Duo pour Flute), oil on canvas, 45.7 × 55.2 cm, Lauder Cubist Collection,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Georges Braque, 1914, Violon et verre (Violin and Glass), oil, charcoal and pasted paper on canvas, oval, 116 × 81 cm, Kunstmuseum Basel
Georges Braque, 1914, Man With a Guitar, oil on canvas, 130 × 73 cm, Musée National d’Art Moderne, Centre Georges Pompidou, Paris
Georges Braque, 1918, Rhum et guitare (Rum and Guitar), oil on canvas, 60 × 73 cm, Colección Abelló, Madrid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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