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3년 6월 5일, 영국의 경제학자로 ‘케인스 경제학 창시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 / 존 케인즈 (John Maynard Keynes, 1883 ~ 1946) 출생
존 메이너드 케인스 남작 (John Maynard Keynes, 1st Baron Keynesof Tilton in the Country of Sussex, CB, 1883년 6월 5일 ~ 1946년 4월 21일)은 거시경제학과 경제 정책 분야에서 기존의 이론과 관습들을 변화시킨 영국경제학의 대표자이다. 1883년 6월 5일 영국 케임브리지에서 태어났으며, 이튼을 거쳐 케임브리지의 킹스칼리지에서 수학하고, 수학과 우등시험에서 12위로 합격했다. 졸업 후 한 때 인도성에 근무하다가 대학에 돌아와 금융론을 강의했고, 그 후 약 20년간 앨프리드 마셜의 충실한 후계자로서 아서 세실 피구와 더불어 케임브리지 학파의 쌍벽을 이루었다. 또 Royal Economic Society의 서기로 있었고 Economic Journal의 명편집자로서 잡지를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경제학 잡지로 육성했다.
이전의 학설들을 토대로 하여 ‘케인스 경제학’이라는 독창적인 이론을 창시해, 경기후퇴와 불황에 대해서 재정정책을 사용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케인스의 이론들은 케인스 경제학의 뿌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거시경제학파들에도 큰 영향을 미쳐서, 케인스는 현대 거시경제학의 창시자들 중 한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20세기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경제학자로 인정받고 있기도 하다.
케인스는 1930년대에 ‘고용·이자 및 화폐의 일반 이론’, 흔히 일반이론이라고 불리는 책을 발표하였다. 이 책은 기존의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의 시장주의를 비판함과 동시에 유효수요이론을 제시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 후엔 선진 서양국가들은 케인스의 경제정책을 채택하였다. 후에 1950년대와 1960년대에는 그의 추종자들로 인해 대부분의 서양국가들이 케인스의 이론을 채택하게 된다.
1970년대에는 석유파동 등으로 인해 세계경기가 침체하게 된다. 그에 대한 해결책으로 밀턴 프리드먼 등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의 이론이 부각되기 시작하면서 케인스학파의 영향력이 감소하게 된다. 그러나 상대적일 뿐 정부의 개입을 촉구한다는 측면에서 케인스학파는 관료 사회에서 여전히 주류의 위치에 있었으며, 특히 2007 ~ 2010년 금융 위기 사태와 함께 신자유주의 노선이 쇠퇴하면서 케인스 경제학은 다시 조명받기 시작한다. 사실 대립이 부각되어서 그렇지, 큰 부분에선 꾸준히 정반합이 이뤄지고 있다.

– 존 메이너드 케인스 / 존 케인즈 (John Maynard Keynes)
.출생: 1883년 6월 5일, 잉글랜드 케임브리지셔주 케임브리지
.사망: 1946년 4월 21일 (62세), 사인은 심장마비
.국적: 영국
.모교: 케임브리지 대학교 학사
.배우자: 리디아 로포코바 (1925 ~ 1946년)
.학력: 킹스 칼리지 (1902 ~ 1904년), 이튼 학교 (1897 ~ 1902년), St Faith’s, Cambridge
존 메이너드 케인스 남작 (John Maynard Keynes, 1st Baron Keynesof Tilton in the Country of Sussex, CB, 1883년 6월 5일 ~ 1946년 4월 21일)은 1883년에 영국 케임브리지에서 중산계급 지식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케인스는 이튼을 거쳐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수학과 통계학을 전공하면서 철학과 경제학도 함께 공부했다. 1906년부터 식민지 인도를 지배하기 위한 영국 정부의 중앙부서인 인도부에서 근무하다가 2년 뒤인 1908년에 사직하고 케임브리지대학으로 돌아가 강사와 특별연구원의 신분으로 경제학 연구를 계속했고, 1913년에 첫 저서로 《인도의 통화와 재정》을 펴냈다.
일차대전 중에는 영국 재무부의 공무원이 되어 전시재정과 관련된 업무를 수행했고, 1919년에 열린 파리 강화회의에 영국 재무부 대표단의 일원으로 파견됐다. 그러나 이 강화회의의 논의가 패전국인 독일에 배상의무를 무겁게 부과하는 쪽으로 귀결되자 그렇게 하는 것은 전후 경제회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사직했다. 그는 1919년에 《평화의 경제적 결과》, 1922년에 《조약의 수정》을 잇달아 펴내 독일의 배상의무 규모를 축소시킬 것을 주장했고, 1923년에는 《화폐개혁론》을 통해 전후의 디플레이션적 정책을 비판했다. 그는 불황을 극복하는 데 필요한 경제학적 사고의 전환과 경제정책이 지향해야 할 방향에 관한 논의를 담은 《화폐론》과 《번영으로 가는 수단》을 1930년과 1933년에 각각 펴낸 데 이어 고전파 경제이론을 비판하고 불황타개를 위한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을 주장하는 내용의 대표작 《고용, 이자, 화폐의 일반이론》을 1936년에 펴냈다.
이차대전 중에는 영국 중앙은행의 이사와 자유당 상원의원을 지냈고, 연합국의 승전이 가시화되면서 부터는 전후의 국제경제 질서에 관한 연합국들 사이의 논의에 영국의 대표로 참여했다. 특히 1944년에 미국에서 열린 브레턴우즈 회의에서 가칭 ‘방코르’라는 세계 공통의 통화단위를 도입하고 세계중앙은행과 국제청산동맹을 설립하는 것을 뼈대로 한 전후구상을 제안했다. ‘케인스 안’으로 불리는 이 제안은 국제수지 불균형의 책임을 적자국가가 지게 하는 내용의 미국쪽 ‘화이트 안’에 밀려 극히 일부만 협상결과에 반영됐다. 그는 1946년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 생애 및 활동
케임브리지 대학교 킹스칼리지. 케인스의 할머니는 케인스가 케임브리지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모두들 그를 똑똑하다고 생각할 것이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곤 했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 (John Maynard Keynes)는 잉글랜드 케임브리지셔 주 케임브리지의 중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존 네빌 케인스 (John Neville Keynes) 역시 경제학자였으며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도덕과학 강의를 하였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 플로렌스 케인스 (Florence Ada Keynes)는 지역의 사회개혁가였다. 케인스는 2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마가렛이라는 여동생과 제프리라는 남동생이 있었다.
경제학자이자 케인스 전기 작가인 로버트 스키델스키 (Robert Skidelsky)에 따르면 케인스의 부모는 자식들에 대한 애정이 많았고 주의도 많이 기울였다고 한다. 그들은 자식들이 언제나 돌아와서 쉴 수 있도록 평생을 같은 집에서 살았다. 케인스는 그의 아버지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케인즈가 장학금 시험을 통과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으며 케인즈가 젊을 때에 재정적 지원도 해주었다. 특히 케인스가 1929년 대공황의 시작으로 그의 자산을 거의 잃었을 때에도 존 네빌 케인즈는 자식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케인스의 어머니는 자신의 취미를 아이들에게 주었다.
케인스는 유년기 시절 교육을 주로 집과 학교에서 받았다. 1892년에 세인트 페이스 (St Faith) 사립 초등학교의 학생이 되기 전에 2년 동안 퍼스 스쿨 유치원 (The Perse School nursery)에 다녔었다. 학교의 교사는 케인스는 똑똑하지만 때때로 주의력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이며 결정력이 부족한 아이라 평가하였다. 케인스는 유년기 때에 건강이 좋지 않은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에 장기 결석을 하곤 했다.
케인스는 1897년에 장학금을 받고 이튼 칼리지에 입학한다. 그 곳에서 그는 다양한 분야에서 재능을 드러냈다. 특히 수학, 고전, 역사에서 뛰어난 모습을 보였다. 이튼에서 케인스는 그의 인생의 첫사랑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 상대는 후에 영국의 수상이 되는 해럴드 맥밀런 (Harold Macmillan)이었다. 케인스는 중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상류층 학생들과 쉽게 어울리곤 했다. 1902년 케인스는 수학을 공부하기 위해 장학금을 받고 케임브리지 대학교 킹스칼리지 (King’s College)에 입학을 한다. 케인스가 철학에 큰 관심, 특히 조지 에드워드 무어 (George Edward Moore)의 철학체계에 영향을 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알프레드 마셜 (Alfred Marshall)은 케인스에게 경제학자가 될 것을 권유한다. 케인스는 뛰어난 학생들이 모여 논쟁을 펼치는 비밀결사 케임브리지 어포슬스 (Apostles Society)의 활동적인 멤버였다. 다른 멤버들과 마찬가지로 케인스 역시 졸업 후에도 사도회에 유대감을 유지 했으며, 평생동안 시간이 나면 클럽 모임에 나가곤 했다. 케인스가 케임브리지를 떠나기 전에 케임브리지 유니언 소사이어티 (Cambridge Union Society)와 케임브리지 대학 문학 클럽의 의장을 역임하기도 했었다. 1904년 5월 그는 수학에서 일등으로 학사학위를 받게 된다. 그 후 2년간 가족이나 친구들과 휴일을 보내는 대신에 대학에 나가는 것에 충실하였다. 그는 논쟁에 참여하였으며 철학을 공부했고 졸업생신분으로 경제학 강의를 듣고는 했다. 그는 1905년엔 케임브리지 졸업시험 (Tripos)을, 1906년엔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할 때 즈음, 스승 알프레드 마셜이 쓴 ‘경제원론 1’을 접하게 되는데 이 책이 케인즈의 인생을 바꾼 계기가 된다. 알프레드 마셜은 경제학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경제학적 직관’과 ‘실용주의’ 를 강조해, 수식 같은거 없이 경제학적 직관에 기반을 두면서 경제학 이론을 설명했는데 이게 딱 케인즈가 좋아할 만한 스타일이었던 것. 케인즈는 이 책을 통해 경제학에 흥미를 느껴 경제학 공부를 시작했고 마셜은 이런 케인즈의 열의와 노력이 기특해 케인즈의 논문에 응원의 메시지를 적기도 했다. 그리고 이 응원의 메시지를 본 케인즈는 친구에게 “어쩌면 난 경제학에 재능이 있을지도 몰라”라는 말을 남겼는데, 이 말은 경제학 역사상 가장 겸손한 말이자 위대한 경제학자가 막 경제학에 입문할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는 말로 자주 인용되는 문구가 되었다. 마셜은 케인즈를 아껴 그에게 같이 케임브리지에 남아 경제학 연구를 하자고 종용했지만, 케인즈는 당시엔 이 제안을 거절하고, 약 2년간 인도 사무부 (India Office)에서 근무한다. 하지만 관청 생활에 염증을 느꼈는지 이후 마셜의 제안을 받아들여, 1909년부터 모교였던 케임브리지에서 경제학 강사로 일하게 된다. 케인즈는 이후 1911년 당시 영국의 최대 경제단체였던 왕립경제학회의 공식기관지인 ‘이코노믹 저널’의 편집장으로 임명되었다. 고작 28살 때의 일이었다.
1914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 재무성의 근무위촉을 받아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며 이후 정부대표로 발탁되어 베르사유 조약에도 개입했다. 이 때 베르사유 조약, 특히 영국과 프랑스의 강력한 대 (對) 독일 압박에 불만을 표시한 걸로 전해진다. 그의 저서 중 하나인 ‘평화의 경제적 귀결’ (Economic Consequences of Peace)에서 그는 베르사유 조약이 전후 참전국들의 경제적 회생과 유럽의 경제적 안정성 모두 놓친 조약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베르사유 조약의 과도한 전쟁 배상금이 가져올 문제를 언급했다. 이후 과도한 전쟁배상금이 2차대전 발발의 씨앗이 되면서 케인즈의 예언은 맞아 떨어지게 되었다.
1920~30년대 케인스는 잇따라 ‘확률론’ (1921), ‘화폐개혁론’ (1923) 등을 발간하며 자신의 이론을 정립시킨다. 프랭크 램지의 지도교수로 활약하기도 했으며, 케임브리지에 램지와 같이 비트겐슈타인을 데려오려는 노력을 하기도 하였고, 이탈리아의 경제학자 피에로 스라파와 같이 수학과 철학을 논하기도 했다고 한다. 1936년 세계 대공황의 영향이 아직 가시지 않았던 시점에 그는 자신의 대표 저작이자 이후 세상을 바꾼 책인 ‘고용, 화폐, 이자에 관한 일반 이론’ (General Theory of Employment, Interest and Money)을 펴낸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 때에도 영국 재무성에서 일했으며 1944년 브레튼우즈 체제를 만드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는 본래 가상의 국제 공용통화인 방코르 (Bancor)를 사용하여 그것을 기축통화로 삼는 새로운 국제통화체계를 만들고자 하였으나, 그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달러를 기축통화로 하는 금본위제의 브레튼우즈 체제가 만들어진 것이다. 다만 이후 국제통화기금에서 케인즈의 Bancor안을 일부 차용하여 가치가 거의 변동하지 않는 개념화폐인 특별인출권 (SDR)을 만들긴 한다.
경제학자인 해리 존슨 (Harry Johnson)은 케인스의 낙관적인 성향을 이해하는데 그의 유년시절의 모습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케인스는 언제나 자신이 주의를 기울이기만 한다면 어떤 문제라든지 정답을 찾을 수 있다는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선한 일을 하는 공무원의 능력에 대한 신뢰를 평생 동안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케인스의 낙관적인 성향은 두 가지 측면에서 문화의 영향도 받았다. 첫 번째는 케인스는 영국의 절정에 오른 막강한 힘을 직접 본 마지막 세대이다. 두 번째로 케인스는 또한 전문적 지식보다는 문화에 의해 통치 받을 자격이 있다고 느낀 마지막 세대이다.
1942년 남작 작위에 서임되었고, 1946년 4월 21일 사망했다.

○ 학문
경제학에 관한 케인스의 초기 관심은 주로 화폐와 외환문제에 있었으나, 제1차 세계대전 후부터는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의 고용 및 생산수준을 결정하는 요인에 관하여 종래의 경제이론을 재검토 하게 되었다.
그 결과 대표적 저서인 ‘고용·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 (1936)에서 완전고용을 실현 ·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유방임주의가 아닌 소비와 투자, 즉 유효수요를 확보하기 위한 정부의 보완책 (공공지출)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이 이론 및 이에 입각한 정책, 그 기반을 형성하는 사상의 개혁을 ‘케인스 혁명’이라고 한다.
흔히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이 케인스의 이론에 입각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지만, 뉴딜 정책과 케인스의 이론은 사실 우연히 비슷한 시기에 나왔을 뿐 초기에 상호 영향을 준 것은 아니었다.

○ 평가
기존 자본주의에 중대한 수정을 가한 경제학자다. 케인스는 시장이 가격 등을 통해 자동으로 수급이 조정되지 않는 경우가 있으며, 세계 대공황이 그 경우에 들어맞음을 주장했다. 그는 물가나 임금 등 명목 변수의 경직성, 시장에 부정적인 전망이 팽배해 금융이 급속도로 냉각되는 현상 (금융가속도 효과로 나중에 발전됨) 등을 대공황의 요인으로 꼽았다. 이에 대한 처방으로 그는 정부 재정의 확대를 주장했다. 이는 그 이전까지 세계 경제학의 기본 원리였던 세이의 법칙을 정면으로 반박한 행동이었고 또 이것이 맞아 떨어졌다. 세이의 법칙 자체는 문제가 많이 제기된 이론이었다. 오히려 당대 경제학자들은 수급 차이가 단기적으로는 분명 존재하지만, 장기적으로 저절로 사라진다고 보았다. 호경기와 불경기, 노동 부족과 실업이 일시적으로 나올 수도 있지만 장기적으로 일정한 균형에서 머무르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케인스는 이런 관점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하였다. 이에 대한 케인스의 반박이 “그 장기적 계획은 현재 사안에 대해 잘못 알려주고 있다. 장기적으로 우리는 모두 죽는다.” (The long run is a misleading guide to current affairs–in the long run we are all dead.)이다. 당시 경제학계에서는 세이의 법칙에 의하든, 단기 경기 변동을 인정하든 상관없이 이론적 결론은 모두 외부에서 손을 대지 말고 경제가 안정될 때까지 시장의 자율적 회복력을 믿고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는 처방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경제학의 장기 개념은 사람의 일생보다 훨씬 길 수도 있는 것이고, 당장 공황이 닥친 상태에서 가만히 있으라는 것은 죽을 사람 다 죽고 나서 새로 경제 구조를 이끌어 내도 장기적 균형이 되는 것은 큰 차이가 없다는 소리와 같다. 조악하게 비유하면, 인구는 사회의 생산량에 비례하기 때문에 전염병이 생기거나 전쟁이 나서 사람이 죽어도, 혹은 우연히 대풍작이 들어서 인구가 상승하여도 그게 끝나고 시간이 지나면 전쟁과 전염병, 풍작 이전의 수준으로 결국은 돌아가게 된다. 이게 장기적 균형이라면 전염병이 도는 와중에 사람을 구하겠다고 하는 것은 사회 생산량에 따른 인구 균형에 큰 효과도 주지 못하면서 오히려 그 시스템을 망치기 때문에 치료하지 말고 죽게 내버려 두라는 것과 같다고 본 것이다.
케인스의 처방을 간단히 말하면 공급이 수요보다 많아지면 정부가 개입해 수요를 창출시켜 해결하라는 것. “빈 병을 땅에다 파묻고 정부가 사람을 고용해 빈 병을 파내라”는 이를 설명하는 유명한 글귀다. 물론 더 효율적인 방법을 찾으라는 식으로 부가 설명하긴 했다만.
그전까지 경제학계에서는 ‘보이지 않는 손’이 경제 문제를 장기적으로는 해결해 준다고 믿었기에 케인스의 이론은 많은 반향을 일으켰다. 지금이야 불황이라고 하면 정부가 나서서 무언가 해야한다는 생각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지만, 1920년대의 경제학자들에게 이런 생각은 금기와도 같았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같은 학자들은, 시장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터이니 힘든 시간이지만 버텨 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허나 실업자가 길거리에 넘쳐나고 실업자가 아닌 사람들이라도 월급삭감이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던 상황이었고 공산주의, 파시즘 등이 득세하며 자본주의 체제 자체에 대한 회의감과 환멸감이 강해졌다. ‘내버려 두고 버티게 해라’는 주장은 경제학자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그저 배부른 소리로 느껴졌고, 경제학자들의 말을 따른 정치인들도 손가락질을 당하여 줄줄히 실각해나갔기에 정치인들도 이들의 말에 대해서 회의적으로 변할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시장이 모든 것을 해결할 것이라고 믿던 경제학자들의 조언을 받아 긴축정책을 시행한 허버트 후버와 하인리히 브뤼닝은 지지율이 무너졌다. 이런 시기에 등장한 케인즈의 이론은 인간이 그저 시장에 지배받는 동물이 아니라, 스스로 나아가 시장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고 미래를 개척할 수 있는 존재임을 입증하는 일종의 빛과도 같았다.
여담으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영원하지 않고, 노예제나 봉건제와 같이 역사 속에서 잠시 지나가는 과정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케인스의 이론이 없었으면 마르크스의 말대로 자본주의는 멸망까지는 아니더라도 지금처럼 강력한 체계로 거듭나지는 못했을 것이다. 고전적 이론에 의하면 시장 시스템을 유지할 경우 경기는 아무리 불경기를 맞이하더라도 가만히 내버려만 두면 결국 자체적인 회복력으로 원형으로 돌아올 수 있다. 그리고 이건 대부분의 사회 구조나 체제에도 적용되는데, 문제는 다시 회복되어서 살아나기도 전에 바닥을 찍거나 찍어가는 과정에서 그 과정을 참다 못한 사람들이 체제나 시장 자체를 엎어버릴 수도 있다라는 것이다. 이걸 노동자들이 하면 그게 바로 공산주의 혁명이 된다. 이럼 장기적으로 회복할 자본주의 시장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다. 실제로 모든 체제나 시스템 등은 이렇게 무너진다.
게다가 미국의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이 시행한 뉴딜 정책이 케인스의 이론이 어느 정도 맞다는 것을 증명하자, 이후 케인즈학은 세계 각국 경제 정책의 기본 지침이 된다. 참고로 루스벨트가 케인스의 이론을 받아들여 뉴딜을 추진한 것으로 아는 사람들이 상당하지만, 정확히는 비슷한 시기에 따로 제시한 것으로, 루스벨트의 정책과 케인스의 이론이 알고보니 비슷했던 것이다. 루즈벨트는 케인스의 이론을 참고하긴 했지만 임기 초반만 해도 감명깊게 받아들이진 않았고, 더군다나 케인스의 유효수요 이론은 단기적 경제처방인 반면 루스벨트의 뉴딜은 경제 처방이라기보다는 정치적 정책에 가까웠다. 뉴딜의 광대한 범위 안에 케인스 이론의 일부가 들어간 셈. 다만 이후 케인즈가 자문을 해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의 저서에 일관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있는데, 이 부분에서 비주류 경제학자들은 그가 철학적 사상을 토대로 확고한 경제적 신념이 있었던 학자라기보다는 기존 체제에서 좋은 삶을 누리는 엘리트로서 체제 유지를 위해 그때그때 필요한 논리를 전개한 지배계층의 수호자 겸 대변인이였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때문인지 세간에 뉴딜 정책의 정책적 기초가 되었다고 흔히 알려진 <고용·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만 해도 사실은 케인스 자신이 보기에 체제 유지를 위해 적절한 행위를 하는 걸로 보이는 루스벨트 뉴딜의 ‘이론적 정당화’를 위해 저술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견해도 있다. 당장 이 책은 뉴딜이 시행된 이후인 1936년에 발간되었다 (루스벨트는 뉴딜을 최소 후보 시절인 1932년부터 주장했다). 다만 일반이론이 1936년에 출간되었다고 해서 불과 4년 전에는 그 구상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식의 논법도 너무 확대해석이 들어간 가정이긴 하다. 그리고 이 책이 출간되고 난 이후 세계 경제학의 기조가 바뀐건 사실이다.
한편, 당시 주류 경제학계는 케인스의 주장을 극히 이단적인 생각으로 치부했다. 케인즈를 비판한 이들이 ‘통화론자’나 ‘새고전학파’ 등의 원류이다. 새고전학파는 New Classical School로서 본문의 설명처럼 케인즈 경제학을 비판하면서 등장한 시카고 대학 중심의 거시경제학파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신고전주의 혹은 신고전학파는 ‘Neo’classical School로서 케인즈의 스승인 마셜이 창시하다시피 한 것이다.
케인즈의 후학들은 여러 분파로 갈렸다.

.포스트케인지언 : 케인즈와 거의 동시대에 활동하다시피 한 후학들이 만들어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등을 중심으로 모임. 포스트케인지언도 세 부류가 있는데, 민스키 등을 중심으로 한 미국 PK,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을 중심으로 한 영국 PK (소위 스라피언이라 불리기도 한다), 기타에 해당하는 부류다. 칼도어 등이 이런 기타 부류에 해당한다.
.네오케인지언 : 케인즈보다 약간 뒷 세대가 미국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케인즈 경제학과 종래의 신고전파 경제학을 결합하여 당대의 주류로 자리잡았다.
.새케인스 학파 : 네오케인지언이 경제학의 발전 과정에서 세대 교체를 성공적으로 이뤄낸 것.
이들의 논쟁은 현재 진행형이기도 한데, 1970년대 이후 스태그플레이션이 터지면서 케인스의 이론이 다소 의심받는 경우도 생기자 이때 등장한 것이 통화주의 및 새고전주의였다. 이 때부터 정부는 개입을 하긴 하되 너무 간섭하진 않는 방향으로 가야한다는 일종의 정반합적인 절충적 흐름이 창출되었다. 왜냐하면 정부가 너무 비대해져도 능률과 효율이 떨어지고 부정부패 등이 만연해질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당시 스태그플레이션의 원인은 케인스 이론이 잘못됐다기보단 안그래도 심각한 미국의 무역 적자에 불안감을 가진 달러 보유국들이 달러를 다른 통화로 바꾸려 들면서 달러의 가치가 하락하고, 그에 맞춰서 석유값까지 폭등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이러면 달러로 살 수 있는 재화가 줄어들며, 이는 원자재 가격에도 크게 영향을 미친다. 결국 공급은 감소하게 되며, 수요는 석유값 폭등 등을 이유로 동반하락한다. 거기에 돈을 들이부은 미국 정부의 삽질이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 즉, 정부의 개입이 나쁜게 아니라 오히려 정부가 케인즈의 이론을 따랐다면 다른 방식으로 개입을 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새고전학파는 합리적 기대 이론의 전기 새고전학파와 실물 경기 변동 이론의 후기 새고전학파로 나눌 수 있다. 전기 새고전학파의 출현을 논하려면 약간의 부연설명이 필요한데, 1950년대 들어 시카고학파 중 통화주의 학파가 출현해서 재정정책 대신 통화정책의 ‘가능성’을 제시했고, 케인즈학파가 이에 수긍하면서 대신 재량적 통화정책을 제시했다. 이러자 70~80년대 들어 합리적 기대를 배경으로 한 루카스의 이론이 시카고 대학에서 발흥하면서 재량적 통화정책은 결국 물가만 올릴 뿐이며, 애초에 민간은 과거 변수에 따라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이를 적응적 기대라고 한다) 온갖 잡다한 변수를 통해 움직이기 때문에 과거 변수를 추론해서 정책을 설계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잘못된 것이라는 루카스 비판이 나왔다. 이 결과 케인즈 이론은 당분간 무덤에 들어가야 했다.
그렇게 1930년대 거시경제학의 탄생 이래 케인스 경제학은 70~80년대 일시적 부침을 겪기도 했지만, 90년대 이후 신학파가 들어서고 2천년대 세계금융위기 등을 겪으며 평가받아 지금도 여전한 주류 경제학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물론 상기했듯 서로 논쟁하며 정반합이 꾸준히 이뤄져서, 이젠 내용은 비슷한데 명칭만 다른 정치적 싸움이 된 측면도 어느 정도는 있어보인다. 실제 통화주의와 그 후학인 전기 새고전주의와 케인스 경제학은 큰 틀에서 단기적으로는 총공급곡선은 우상향하므로 정부 개입이 일정 부분 효과가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소용없다는 견해를 공유한다. 다만, 단장기 기간이나 효과를 보이는 정책 등의 기술적, 세부적 관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 성향
케인스는 현대 리버럴, 진보 (중도좌파, 넓게 보면 중도우파까지)의 경제 관념에 큰 영향을 끼쳤고, 실제 그 역시 당시 보수당에 대립하던 자유당 당적을 가진 리버럴한 성향이 있던 사람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마르크시즘을 혐오했다. 그는 1930년대 파시즘이 대두하자 마치 이에 대한 대항마인양 ‘가장 총명하고 뛰어난 사람들’이 모였다는 대학가에서 마르크스주의가 전쟁 · 파시즘 · 실업의 치유책으로 환영받는 현실을 개탄했다. 당연히 러시아 혁명도 좋게 보지 않았는데, 그는 혁명을 반대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첫째, 기존의 질서는 개혁이 불가능할 정도로 불량한 것이 아니며, 둘째, 혁명이 가져다 줄 훗날의 체제가 현 체제보다 낫다는 확신이 없고, 셋째, 설사 새로운 체제가 전복된 그것에 비해 낫다는 것이 증명됐다 할지라도, 과연 그것이 혁명 과정에서 치르게 될 희생을 보상할 만한 것인지 누구도 확답을 줄 수 없다.”
그는 자유방임주의자들이나 사회주의자들 모두 자본주의와 자유시장 체제를 동일시하고 자본주의의 변화 가능성을 외면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소련 경제학자들 앞에선 집단주의적 기조를 따라 개조된 자유주의만이 무정부주의적 자본주의와 마르크스주의적 공산주의 모두에 대한 진정한 대안이라는 내용의 연설문 “나는 자유주의자인가?”를 낭독하기도 했다.
케인스는 당시 보수 진영 지도자들은 자본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참신한 수단과 볼셰비즘을 구별할 능력조차 없다고 혹평했고, 사민주의 세력은 정의감은 인정하지만 계급투쟁이 일어날 경우 자신의 계급을 대변하지 못하기에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고 했다. 그래서 자유당이 제대로만 한다면 인류의 진보를 위한 가장 최선의 선택이 될 것이라고 하며 매력을 느낀 것이.
실제 케인스는 엘리트 계층 출신이었고, 인명 부분을 보면 알겠지만 남작위까지 가진 귀족이었다. 때문인지 아래 문장에서도 보듯 계급관 등 특정 부분은 오히려 당대 기준으로도 상당히 보수적인 엘리트주의자였다. 그는 만약 민주주의에서 엘리트가 배척당한다면 대중들이 조작이나 감언이설에 속아 넘어갈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How can I accept a doctrine which sets up as its bible, above and beyond criticism, an obsolete text-book which I know to be not only scientifically erroneous but without interest or application for the modern world? How can I adopt a creed which, preferring the mud to the fish, exalts the boorish proletariat above bourgeois and the intelligentsia who, whatever their faults, are the quality in life and surely carry the seeds of all human advancement? Even if we need a religion, how can we find it in the turbid rubbish of the red bookshop? It is hard for an educated, decent, intelligent son of Western Europe to find his ideals here, unless he has first suffered some strange and horrid process of conversion which has changed all his values.”
“어떻게, 과학적으로 틀렸을 뿐만 아니라 흥미도 현대 세계에의 실용적 가치도 없는 한물간 책 따위를, 그 한심한 교리를 어떤 비평을 초월하여 성경처럼 떠받들 수 있겠는가? 어떻게 촌티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부르주아 계급과 지식인 계급 (여러 오점을 제쳐 두더라도 결국 삶의 질을 높여주었으며, 인류 발전의 밑바탕이 될 계급들)보다 높게 보라는, 물고기보다 흙탕물을 선호하라는 그런 한심한 교리를 받아들이란 말인가? 설령 우리에게 어떤 신념이 필요하다 하더라도, 그걸 어떻게 빨간 서점의 혼탁한 쓰레기 속에서 찾을 것인가? 서유럽의 교육받고 품위 있으며 지적인 어떤 젊은이가 이런 곳에서 이상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 젊은이의 가치관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을 어떤 지독한 종교적 개종에 시달리지 않는 한 말이다.” – Keynes, John Maynard (1931). Essays in Persuasion
케인스는 진보의 씨앗을 가지고 있는 부르주아와 지식인 계급보다 교양 없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찬양하는 신조에 거부감을 표했다. 그는 자유와 인권이 보장받는 사회에서 유산계급이 문화를 선도해가는 것이 맞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그는 무산계급도 환경의 변화를 통해 얼마든지 문화를 이끄는 주체가 될 수 있다고 말하며, 태생적 우월성을 주장하던 일부 보수적 생물학자들의 논쟁에 반기를 표했다. 공산주의도 비판은 했지만, 개인과 공동체의 소유욕에 대한 인식 변화에 끼친 영향은 놀라웠다고 평하기도 했다.
오늘날 그는 진보 경제학의 대두처럼 취급받기도 하지만, 상기했듯 마르크시즘에 대해선 비판적인 그였기에 그의 경제 사상도 사회주의적 평등 개념보단 유효 수요를 끌어올림으로써 어떻게 사회적 후생을 극대화시켜 경기를 안정된 상태로 유지하냐에 초점이 맞춰져있었다. 그에 따라온 복지 개념은 유효 수요를 끌어올리기 위한 수단 중 하나였고, 이런 유효 수요 창출을 위해 정부의 역할을 강조하되 정부가 가계를 지원하든 기업을 지원하든 그건 핵심사안은 아니었다. 물론 현실에선 둘 다 지원하는 형태가 되는게 당연했지만. 결과적으로 극단적인 마르크시스트 입장에서 보자면 케인스는 오히려 일부 계획 경제 도입 등 자기들 이론과 우연찮게 겹치는 부분을 잘 이용해 사회주의 세력을 견제하고 자본주의를 튼튼하게 먹여살린 웬수일지도 모른다.
본인 스스로의 집산주의적 정부개입 옹호와 후대의 좌파 학자들이 케인스의 발언을 많이 인용한 탓에 일반인들과 보수 학자들은 케인스를 공산주의 인사로 착각하기도 하지만, 보면 알다시피 케인스는 어디까지나 친자본주의적 목적성을 가지고 있던 경제학자였다. 결국 케인스경제학을 요약하면 “단기에 시장은 완전하지 않을 수 있다”라는 것이다. 극단적인 합리적 기대를 가정하거나 오스트리안 학파가 아닌 한, 이 명제는 오늘날 대부분의 주류경제학에서 인정하고 있다. 그것이 정부개입을 얼마나 옹호할건지에 대한 문제는 그 다음의 일이다. 요컨대 일부 극단주의자들이 그가 시장의 완전성을 부정했다는 이유로 좌파 운운하는 것은, 오늘날 주류경제학 대부분을 좌파라고 우기는 황당한 말이 된다. … 반대로 말하면 오늘날 경제학이 그만큼 케인즈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는 말도 된다.

○ 저서
– 주요저서
고용·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
화폐개혁론
화폐론
– Publications
* Books
1913 Indian Currency and Finance
1919 The Economic Consequences of the Peace
1921 A Treatise on Probability
1922 Revision of the Treaty
1923 A Tract on Monetary Reform
1926 The End of Laissez-Faire
1930 A Treatise on Money
1931 Essays in Persuasion
1936 The General Theory of Employment, Interest and Money
1940 How to Pay for the War: A radical plan for the Chancellor of the Exchequer
1949 Two Memoirs. Ed. by David Garnett (On Carl Melchior and G. E. Moore.)
* Articles and pamphlets
(A partial list.)
1915 The Economics of War in Germany
1922 The Inflation of Currency as a Method of Taxation
1925 Am I a Liberal?
1926 Laissez-Faire and Communism
1930 Economic Possibilities for our Grandchildren
1931 The End of the Gold Standard (Sunday Express)
1931 The Great Slump of 1930
1933 The Means to Prosperity
1933 An Open Letter to President Roosevelt (New York Times)
1933 Essays in Biography
1937 The General Theory of Employment
○ 서훈
1917년 바스 훈장 3등급 (CB) 수훈
1942년 남작작위 (1st Baron Keynes of Tilton in the County of Sussex) 서임

○ 어록
“장기적으로 우리는 모두 죽는다.”
(In the long run, we are all dead.)
“자유방임 자본주의는 1914년 8월에 끝났다.”
“자본주의는 가장 사악한 사람들이 공공의 선을 추구하기 위해 가장 사악한 행동을 하는 어떤 놀라운 형태의 믿음이다.”
(Capitalism is the astounding belief that the most wickedest of men will do the most wickedest of things for the greatest good of everyone.)
“그런데, 이와 같은 사태는 어느 정도의 개인주의 (個人主義)와 완전히 양립할 수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또 이자 생활자들의 안락사 (安樂死)를, 또 따라서 자본의 희소가치를 최대한 이용하려는 자본가의 누적적인 압력이 안락사 당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경제학자들의 사상은 옳든 틀리든 일반인들의 상상과는 달리 훨씬 더 막강하다. 세상은 이들에 의해 지배된다. 그리고 어떤 지적 영향력으로부터도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실무가들조차도 대개는 죽은 경제학자들의 노예에 불과하다.”
“정부가 낡은 병에 돈을 가득 채워 넣은 후 그것을 어느 폐광에다 묻어두고는, 기업들에게 마음대로 그 돈을 파 가도록 내버려 둔다고 가정해 보자. 그때부터는 모두 그 돈을 파내기에 혈안이 될 터이므로 실업이 줄어들고, 실질소득과 부도 증가할 것이다. 물론 이 방법보다는 그 돈으로 주택을 짓거나 하는 편이 더 현명하다. 그렇지만 최소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가격이 신축적이라 주장하는 고전파 이론은 경제가 이렇게 움직이고 있다고 설명하는게 아니라 이렇게 움직여야 한다는 당위를 설명하고 있는지 모른다. 이렇게 실제와 당위를 혼동하기 시작하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당신이 은행에서 100파운드를 빌린다면 그건 당신의 문제다. 하지만 당신이 100만 파운드를 빌렸다면, 그건 이제 은행의 문제다.”
(If you owe your bank a hundred pounds, you have a problem. But if you owe a million, it has.)

참고 = 위키백과, 교보문고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