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4년 12월 4일, 김옥균 등 개화파가 일으킨 갑신정변 (甲申政變, 1884년) 발발
갑신정변 (甲申政變)은 1884년 12월 4일 (음력 10월 17일)에 김옥균 · 박영효 · 서재필 · 서광범 · 홍영식 등 개화당파들이 청나라에 의존하는 척족 중심의 수구당을 몰아내고 개화정권을 수립하려 한 일종의 쿠데타 사건이다.
진압 후, 갑신난 또는 갑신전란으로 불리다가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는 이를 ‘갑신혁명당의 난’ (甲申革命黨의 亂)이라 불렀다.
12월 4일 저녁 우정국 (郵政局) 낙성식을 계기로 정변을 일으켜 고종 명성황후를 경우궁으로 피신시킨 뒤 민씨 척족들을 축출하거나 일부 처형하고 12월 6일 오후, 중국 간섭 배제, 문벌과 신분제 타파,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 인민 평등권 확립, 조세 제도 등의 개혁 정책을 내놓았다. 개화파가 당시에 내놓은 정책 중 현재 전하는 기록은 14개 조항이나, 일설에는 80개 조항이 있었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12월 4일 민씨 정권은 이미 청나라의 위안스카이에게 구원을 요청하여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였고, 명성황후는 창덕궁으로 되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김옥균이 일본에 의존했다는 비판도 있다.
그해 12월 말 조선 조정에서는 예조참판 서상우 등을 특차전권대사로 파견, 갑신정변 과정에서 일본 측의 개입을 문제삼았다가 오히려 한성 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다른 이름으로는 갑신의거, 갑신사태, 갑신봉기 등으로 부른다. 그밖에 3일만에 끝났기 때문에 ‘3일 천하’, ‘3일 혁명’ 등으로도 부른다.
○ 개요
1874년 흥선대원군의 실각 이후 1876년 2월 27일 일본과 강화도에서 강화도 조약을 맺었다. 일본은 1875년 2월부터 군함을 이끌고 동해와 남해, 황해 등에서 무력 시위를 벌이게 된다. 이때 조선군의 선제 발포가 문제가 되어 1876년 2월 27일 강화도에서 조일수호조규가 체결되면서 제물포항이 개항되고, 이후 부산과 원산항도 개항되었다. 이후 위정척사파들의 시위는 격화됐고, 1877년 흥선대원군의 쇄국을 반대하고 강화도 조약을 지지하였던 박규수가 별세, 1882년 임오군란으로 구식 군대 및 위정척사파의 추대를 받은 흥선대원군이 일시 집권했으나 명성황후는 청나라 군사를 끌어들여 대원군을 실각시킨다. 이후 조선의 정치는 청나라로부터 노골적인 간섭을 받기 시작하였다. 불만은 고조되어 북학파의 후신인 개화파들은 중국의 오랜 속국 노릇과 내정 간섭에서 벗어나야 된다고 주장했다.
1884년 초부터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서재필 등은 정변을 계획했고, 그해 7월부터 계획을 세워 그해 12월 4일 정변을 일으켰다.
김옥균 등은 우정국 개국 축하연 때 반대 세력을 제거하고 왕과 왕비를 경우궁으로 옮겼다. 민씨 정권 측은 위안 스카이 (袁世凱)가 이끄는 청나라 주둔군에 도움을 요청했고, 그 사이 명성황후는 창덕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김옥균 등은 소수의 병력으로 넓은 곳을 지키기 어려움을 들어 반대하였으나 명성황후의 강력한 요구로 결국 창덕궁으로 환궁하게 되었다. 12월 6일 개화파 일행이 국왕 내외를 대동하여 창덕궁에 돌아갔고, 그날 새벽 정강 정책을 결정하였으나, 오후 3시 위안 스카이가 이끄는 청나라의 군대 1,500명이 창덕궁 안으로 진입함으로서 3일 만에 진압되었다. 홍영식, 박영교 등은 청나라군과 싸우다 전사했고, 김옥균, 서재필, 박영효 등은 인천을 거쳐 일본으로 망명했으며, 윤치호 등은 외국 유학 형식으로 망명하였다.
현재 전하는 개화당의 개혁 정강 14개조는 문벌과 신분제를 폐지한다, 불필요한 재정 기관을 축소한다, 조정 대신들은 직접 회의를 개최하고 안건을 결정한다, 순사를 설치한다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혁신 정강의 조항은 상당히 많아 일본인의 기록에는 80여 개 조항에 달했다고 하나 김옥균의 《갑신일록》에는 그 중 일부인 14개 조항의 내용만이 현재 전한다.
○ 결과와 영향
갑신정변을 거치면서 사대당 정부는 더욱 보수적이 되었고 조선에서 청의 세력이 강대해진 가운데 청·일 두 나라의 조선 쟁탈전은 더욱 격화되었으며, 일본의 조선 침략이 본격화하기에 이르렀다.
갑신정변을 주도한 이들은 14개조의 개혁요강을 내세우는 등 개화·개혁의 순수성도 있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그들이 사대당으로 매도한 이들이 단순히 청나라와 친하자는 세력인지 무조건적 청나라에 사대하자는 세력인지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이 있으며, 또한 개화파도 철저하게 일본의 힘을 빌려 집권하려는 친일 사대정신을 바탕에 깔고 있었다. 따라서 이 사건은 일본으로 하여금 조선에 대해 내정간섭을 하게 한 구실을 만들었고, 나아가 청나라의 조선 간섭을 심화시켰다.
게다가 갑신정변을 선동한 일본은 이듬해인 1885년 4월 18일 톈진 조약을 맺고 청·일 양군의 공동 철병을 의정했다. 작게는 일본 병사 150명을 철수함으로써 청나라 병사 3천 명을 철병하는 성과를 이루었고, 크게는 조선에 대한 일본의 경제 침략을 더욱 가속화하여 1886년 한양에는 외국 상인은 오로지 일본 상인만 남게 되었다.
1884년 12월 말 조선 정부에서는 예조참판 서상우 (徐相雨)를 특차전권대신으로 보내 정변 지원을 추궁하고 김옥균을 내놓을 것을 요구했다. 이후 여러 차례 서신과 특차대신을 보내 같은 주장을 반복하였다. 한편 정변이 실패한 후 일본측이 갑신정변을 배후조종했다는 이유로 일본공사관은 불에 타고, 공사관을 지키던 서기관 등이 살해되었다. 이를 빌미로 일본측은 공사관이 불타고 공사관 직원과 거류민이 희생된 사실에 대한 책임을 조선정부에 묻고 배상을 요구하고, 조선정부의 사죄와 공사관 소각에 대한 배상금 지불, 희생자에 대한 구휼금 지급을 요구하였다 (한성조약).
- 전후 보상 문제와 후속 조치
일본은 갑신정변 직후 일본으로 피신했던 주한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를 다시 조선으로 파견하여 회담을 하였다. 조선 측 회담 대표인 전권대사 외무독판 조병호 (趙秉鎬)와 접촉했으나 일본측의 요구를 조선 조정에서는 수용하지 않았다. 일본은 즉시 외무대신 이노우에 가오루 (井上聲)를 전권대사로 임명하고, 이노우에 가오루가 이끄는 일본군 육·해군 2개 대대, 군함 7척을 이끌고 인천에 도착했다.
1885년 1월 2일 일본 전권대사 이노우에는 일본 육군을 이끌고 인천을 통해 한성부로 들어와, 당시 의정부좌의정이자 전권대사인 김홍집과 협상을 시도하였다.
그 결과 1885년 (고종 22년) 1월 9일 김홍집과 이노우에 사이에 전문 5개 조의 한성 조약 (漢城條約)이 체결되었다. 한성 조약의 내용 중에는 일본에 대한 조선 정부의 사과와 사망자 및 기물 손괴 배상금 10만 원 지급, 일본 공사관 수축비 부담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조약에 의해 조선은 일본 정부에 사과를 표명하고, 희생자와 각종 피해에 대한 보상금 10만 원을 지불하고, 한성에 일본 공사관을 새로 건축하는 비용 상당액을 조선 정부에서 부담하게 되었다.
또, 청나라군대의 개입이 문제되어 일본은 청나라측에 청ㆍ일 양국은 조선에서의 양국 군대의 철수할 것, 장래 조선에 변란 등이 일어나서 청ㆍ일 어느 한쪽이 파병할 때에는 그 사실을 상대방 국가에 알리고 출병할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톈진조약을 체결하는 원인이 된다.
- 주요 인물의 망명생활
망명한 갑신정변 주역들은 일본에서 냉대를 받았다. 조선 정부가 갑신정변에 다케조에 공사가 연루된 점을 항의하자, 일본은 갑신정변 주역을 조선으로 송환할 것을 비밀리에 추진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전해들은 갑신정변 주역은 일본도 안전하지 못하다고 판단하고, 일본에 많은 지인을 두고 있던 김옥균을 제외하고, 박영효를 비롯한 서광범, 서재필은 다시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1885년 5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이들은 각자의 살 길을 향해 뿔뿔이 흩어졌다.
그 와중에 김옥균은 암살되었고, 서광범과 임은명 (林殷明)은 병사했으며, 살아남은 류혁로를 비롯한 박영효, 신응희, 이규완, 정란교 등은 단순한 개화파에서 친일 개화파로 변신하게 된다. 엘리트, 지식인들이 중심이 되어 나라를 구하고 백성들을 계몽해야 된다는 사상은 이후로도 수많은 지식인, 엘리트, 관료들, 계몽주의 성향 학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 대규모 연좌제 적용 문제
갑신정변 주역은 역적으로 몰렸고 서재필의 가족들은 모두 살해당하였다. 갑신정변은 사육신 사건 이후로 대규모의 연좌제가 적용되었다. 이미 시집간 딸이나 고모에 한해서는 사육신 사건때와 마찬가지로 연좌시키지 않았다. 다만 사육신 사건과 다른 점은 갑신정변은 당사자들의 외가집과 처가에는 연좌제를 적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김옥균의 생부 김병태는 즉시 충청남도 천안군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옥사하고, 동생 김각균 (金珏均)은 대구 감영에 투옥되었다가 옥사하였다. 생모 송씨와 여동생은 독약을 먹고 자살하고 아내 유씨부인은 7세된 딸과 함께 충청남도 옥천군의 노비로 분배된다. 살아남은 그의 첩 송씨는 옥중에서 음행을 하였다고 한다.
홍영식의 아버지 홍순목 내외는 사랑채에서 독약을 먹고 조용히 자결하였다. 1884년 12월 17일 부친 홍순목과 형 홍만식은 모든 관직에서 삭탈되었다. 그날 부친 홍순목의 명령에 따라 일가 20여 명은 독약을 받고 집단 자살하고, 홍만식은 스스로 자수해서 살아남았으나, 1년이나 복역했다. 몰수된 홍영식의 집은 서양식 의료기관이었던 제중원 부지와 건물로 사용되었다.
한성부 감옥에 투옥된 서광범의 아버지 서상익은 8년간 수감생활을 하던 중 아사했다. 매천야록에 의하면 서광범의 아버지 서상익은 감옥에 수감되어 있었으나 그는 자기가 무슨 죄로 수감되어 있는지도 모르고 날마다 돼지가 먹던 음식찌꺼기를 먹고살다가 죽었다고 한다. 서광범의 아내 김씨는 옥중에서 절개를 지켜 1894년 이후 다시 서광범을 만났다.
미처 피신하지 못한 박영효의 어머니는 처형당하였고, 아버지 박원양은 투옥된다. 박영효의 아버지 박원양 (朴元陽)은 장손이자 박영교의 장남인 손자를 죽이고 자결을 시도했으나 바로 들이닥친 의금부 나졸들에 의해 체포되었던 것이다. 그해 11월 이조 (吏曹)의 탄핵으로 아버지인 대호군 (大護軍) 박원양, 형 사사 (司事) 박영호 (朴泳好)는 삭탈관직당한다.
아버지 박원양은 감옥에 갇혔다가 며칠간 굶고, 비참하게 아사하였다. 김구의 백범일지나 조병옥의 나의 회고록에 의하면 박원양은 감옥에서 섬거적 (볏짚으로 만든 거적)을 뜯어 먹다가 굶어죽었다고 기록해 놨다. 박영효의 가족들은 모두 처형당했는데, 일찍 이일영에게 시집간 큰 누나와 김철현에게 시집간 둘째 누나는 출가외인이라 하여 죽음을 모면했고, 관비가 되는 것을 모면했다. 둘째 형 박영호는 일본 공사관에 피신하여 극적으로 목숨을 건졌고, 박영교의 아들 중 박태서 (朴泰緖) 등만이 유모의 손에 의해 구출되어 피신, 극적으로 목숨을 구한다.
서재필의 생부 서광효는 옥중에서 절곡 끝에 ‘만일 관노사령배가 문전에 오거든 잡혀가서 욕을 당하느니보다는 차라리 자결하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맏형 서재춘은 독약을 먹고 자살하였고, 둘째 형 서재형은 관군에 의해 살해당했다. 관노사령들이 화석이 앞길에 나타난 것을 보고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마주보고 앉아 독약을 마셨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사망했지만 며느리는 못다 죽어 대청 대들보에 목을 매어 죽었다. 그러나 서재필의 생모 성주이씨나 부인 광산김씨는 바로 죽지 않고 노비로 끌려갔다가 1885년 1월에 자살했다는 설도 있다. 또한 그의 서모 역시 관비로 끌려갔고 이복 동생들 역시 죽임을 당했다. 종로방 화동 1번지에 있던 그의 집은 김옥균의 집과 인접해 있었는데, 김옥균의 집과 서재필의 집터는 조정에 의해 몰수당한 뒤 후일 관립한성고등학교의 부지가 된다.
군대에 있던 그의 동생 서재창 (徐載昌) 역시 처형당하였다. 서재창은 1884년 19세에 사직동에 살던 보국숭록대부를 지낸 서상우 (徐相雨)의 양손자로 입양되었다. 그런데 생가의 둘째 형이 서재필이라 연좌되었다. 서재창은 연좌제로 처형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상노를 앞세우고 도주하던 중 붙잡혀 의금부로 끌려갔다가 처형당했다. 이미 시집간 큰 누나는 이미 출가외인이라 하여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여동생 서기석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누군가의 도움으로 함경도로 피신했다. 이후 서기석은 이름과 신분을 숨기고 살다가 후에 이씨 성을 가진 평민과 결혼했다. 그의 양가(養家)에도 화가 미쳐 그의 양아버지이자 재종숙인 서광하는 재산을 몰수당하고 노비로 전락하였다.
서재필의 일가족이 몰살당한 소식이 외가인 보성군 문덕면 가내마을에 전해지자 그의 외삼촌들, 외사촌들 등 그의 외가 친척들은 약사발을 든 금부도사나 포졸들이 나타나지 않나 하고 문덕마을 어귀를 수시로 내다보며 오랫동안 전전긍긍했다 한다. 비통한 소식을 해외에서 접한 서재필은 가슴을 쥐어 뜯으며 분노와 슬픔에 치를 떨었다.
서재필과 평소 가까이 지냈다는 이유로 그의 친구들 역시 투옥, 심한 고문을 당했다.
○ 평가와 비판
개혁적인 성향의 관료와 지식인, 청년층의 주도로 일어난 계몽성 혁명이라는 긍정과 민중의 지지기반이 취약한 점과 준비 미숙으로 실패했다는 비판이 양립하고 있다. 한편 ‘개화파의 사상적 미숙함에도 불구하고 갑신정변은 그 지향으로 보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개혁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는 평가도 있다. 한국사에서 정치세력으로서 근대적 개혁문제를 최초로 제기한 것은 개화파였다는 평가도 있다.
박은식은 자신의 저서 《한국독립운동지혈사 韓國獨立運動之血史》의 제1장 ‘갑신독립당의 혁명실패’에서 갑신정변을 혁명으로 규정하였으며, ‘갑신독립당의 혁명실패’를 한국의 독립운동의 시발점으로 규정하였다.
학자들은 갑신정변이 일부 관료들과 지식인들의 주도로 일어난 거사이며, 민중들의 폭넓은 지지를 얻지 못한 것을 최대의 단점으로 비판했다. ‘갑신정변이 실패한 가장 큰 원인은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한 데 있다. 급진 개화파는 농민이나 상인의 지지를 얻으려는 어떤 구체적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다. 또 하나, 외세에 대한 인식 부족을 들 수 있다. 개화파는 반청 의식만 강했을 뿐, 외세, 특히 일본의 침략 의도를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문명개화는 곧 일본화라고 생각하여 일본을 모델로 삼는 데 그친 것이다.’고 지적했다.
서재필도 정변의 실패 이유로 그와 같은 견해를 제시하였다. 나중에 서재필은 스스로 갑신정변을 회고하면서 갑신정변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두 가지 이유를 지적하였는데, 첫 번째는 개화파들이 일반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외세, 특히 일본을 너무 쉽게 믿고 의존하였다는 점이다. 윤치호, 유길준, 박중양 등은 정변 실패에 대해 민중들이 혁명을 이해할 만큼의 지적 수준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봤다.
1950년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역사학에서는 갑신정변을 봉건체제를 전복하고자 했던 서양의 부르주아 혁명에 비견된다고 평가했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