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6년 10월 16일, 이스라엘의 정치인 • 초대 수상 데이비드 벤구리온 (David Ben-Gurion, 1886 ~ 1973) 출생
다비드 벤구리온 (David Ben-Gurion, 히: דָּוִד בֶּן-גּוּרִיּוֹן, 1886년 10월 16일 ~ 1973년 12월 1일)은 이스라엘의 초대 총리를 지낸 정치인이다.
어릴 때부터 그는 열정적으로 시오니즘을 지지했으며 영국의 팔레스타인 통치가 만료한 후 이스라엘을 세우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1970년에 정계 은퇴를 선언한 뒤 그가 살던 키부츠로 돌아갔고 그 곳에서 별세했다.
1998년 5월,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지에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명 중의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 데이비드 벤구리온 (David Ben-Gurion)
출생: 1886년 10월 16일, 러시아 제국 프리비슬린스키 크라이 플론스크
.사망: 1973년 12월 1일, 이스라엘 텔아비브 구 라마트간
.국적: 러시아 제국 → 이스라엘
.학력: 이스탄불 대학교, 바르샤바 대학교
.종교: 무종교(무신론)
.직업: 정치인
.정당: 마파이당 → 라피당 → 국민명단
.배우자: 파울라 벤구리온
.자녀: 아모스 벤 구리온

○ 생애 및 활동
– 성장 과정과 가족 관계
벤구리온은 그 당시 러시아 제국의 일부였던 폴란드의 프원스크에서 다비트 그륀 (폴: Dawid Grün)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아비그도르는 변호사이자 시온주의 단체에서 활동했으며 그의 어머니는 11세때 사망했다. 어린 나이 때부터 시온주의와 사회주의를 긍정적으로 지지했다.
17세 당시 노동 시온주의 단체였던 포알레이 시온에 가입했다. 동유럽에서 일어나던 포그롬과 반유대주의에 충격받아 1906년 아버지와 함께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다.
애초에는 오렌지 과수원에서 노동자로 일했으나 기자가 되었다.
터키 생활 당시 이스탄불 대학교에서 또다른 시온주의자였던 이츠하크 벤즈비와 법을 공부했을 당시 그의 이름을 히브리어 이름으로 개명했다. 그의 성은 히브리어로 “아기 사자”를 의미한다. 이 시기에 정치를 시작했다.
1915년 그의 정치 활동으로 팔레스타인에서 추방당한후 뉴욕에서 유대계 러시아인 파울라를 만났다.
이 둘은 1917년 결혼했고 세 아이를 가졌다.
1918년 영국 군대에서 싸웠고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왔다.

– 정치 경력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했을 때 벤구리온은 이스라엘이 “모든 시민을 위한 사회적과 정치적 평등을 보호”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벤구리온은 유대인들에게 영국 군대에 가담하라고 권했다.
동시에 영국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는 것을 금지하자 그는 불법으로 수천명의 유대계 유럽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올 수 있게 도와주었다.
노동당을 이끌었고 수정 시오니즘을 강하게 반대했다. 지하 단체였던 메나헴 베긴의 이르군에 가담하기도 했다. 팔레스타인을 통치하던 영국군의 망신을 목적으로한 다윗 왕 호텔을 폭파하려는 계획에 애초에 찬성했으나 인명위험이 너무 크다고 판단, 반대했으나 베긴은 취소하지 않았다.
1948년 6:4의 표로 이스라엘의 독립을 선언하는 안을 통과시켰다. 이스라엘이 독립된 첫 주안에 영국에게 저항하던 지하단체들을 모두 해산시키고 하나의 조직으로 통일했다. 제1차 중동 전쟁당시 이스라엘을 이끌었으며 이집트와 첫 휴전을 한 후 1949년 2월 25일 이스라엘의 첫 총리가 되었다.
그당시 거의 빈 지역이었던 네게브를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곳으로 만들기를 원했다.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냉전당시 서독과 관계를 맺는 데 열중했다.
취임 당시 예멘에 있던 4만 5천 명의 유대인들을 비행기로 이스라엘로 이송한 마술융단 작전으로도 잘 알려져있다. 이송된 유대인들의 과반수는 아이들이었고 이 작전은 비밀리에 일어나, 끝난 지 몇 달 후에야 언론에게 알려졌다.
1953년 그가 잠시 정치를 그만둔 사이 모셰 샤레트가 총리가 되었고 샤레트의 임기 뒤에 1955년 다시 이스라엘의 총리가 되었다.
1963년 레비 에슈콜이 그의 자리를 이어받았으나 정치적인 대립이 있었다. 라피라는 새로운 좌익 정당을 시작했고 크네셋에서 10석을 차지할 수 있었다. 이 정당은 이스라엘 노동당의 기원이 되었다.
1970년에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라마트간의 그가 살던 소박한 키부츠로 돌아갔으며, 그 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 이츠하크 벤츠비와 함께 쓴 《투쟁》(전 5권, 1949)이 있다.
그의 이름을 딴 텔아비브의 벤구리온 국제공항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큰 공항이자, 이스라엘의 관문 역할을 하고 있다.

○ 평가 : 다비드 벤구리온, 이스라엘의 國父
.이스라엘의 國父 벤구리온, 77세에 총리직서 물러나 사막 마을서 농사짓고 글 써
.약속의 땅은 거저 주어지지 않고 거친 땅에 땀으로 일궈야 한다는 묵직한 울림 후세에 남겨
현대 이스라엘의 국부로 추앙받는 초대 총리 다비드 벤구리온은 폴란드 출신의 유대인이다. 바르샤바 대학에 다니던 1906년, 스무 살 나이에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다. 새 조국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었다. 그가 마주한 시온은 황량한 광야의 한 농장이었다. 동료와 함께 물길을 잇고 광야를 개간하며 젊은 시절을 보냈다. 이후 정치에 투신한 그는 건국 과정을 주도해 두 차례 총리를 역임하는 등 이스라엘 정치를 상징하는 인물이 됐다. 그런 그의 삶은 은퇴 후에 더욱 빛났다.
77세에 총리직에서 물러난 벤구리온은 예루살렘의 안락한 저택을 마다하고 네게브 사막으로 들어갔다. ‘아침의 땅’이라는 뜻을 가진 옛 유목민 마을 스데 보케르 (Sde Boker)에 정착했다. 주변 사람들은 만류했다. 이스라엘의 국부 (國父)가 변변한 의료시설도 없는 사막 마을에서 사는 모양새는 생소하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젊은 시절 광야를 회상하며 사막의 노후 생활을 즐거워했다.
“사막은 우리에게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여기가 이스라엘 르네상스의 터전이라네. 우리가 이 척박한 땅에 심은 저 나무들을 보게. 내 눈에는 스위스나 스칸디나비아의 울창한 숲보다 아름답다네. 마치 어미가 자식을 키우듯 우리가 물 주고 정성 들여 키웠기에 그렇겠지. 우리 유대인에게 사막은 창조의 공간이라네.”
그는 그렇게 사막에서 살았다. 팔순 노인이 낮엔 농사일하고, 밤에는 글을 썼다. 총리는 한 번에 딱 한 사람만 할 수 있지만, 사막에 꽃을 피우는 일은 수천, 수만 명이 함께 할 수 있지 않느냐며 사막 사는 기쁨을 칭송했다. 그랬던 그가 8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을 때, 방 두 칸 허름한 가옥에 그가 남긴 것은 단출했다. 네 평짜리 침실에 덩그러니 놓인 간이 침대 둘, 작은 서재, 가죽 옷 한 벌, 그리고 신발 한 켤레와 평생 애용하던 놋 주전자, 부부 찻잔 한 벌이었다고 한다. 그는 국립묘지 안장을 마다하고 모세의 광야가 내려다보이는 네게브 사막 한편, 아인 아브닷 협곡에 묻혔다.
벤구리온의 이야기는 미담 (美談)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이스라엘 국민 사이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청년들이 사막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약속의 땅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거친 땅에 땀을 뿌려가며 일구는 것이라는 비전에 하나 둘 동참하기 시작했다. 네게브 사막에 그의 이름을 딴 벤구리온 대학이 세워졌고, 연구 개발의 중심이 되었다.
벤구리온 대학 사막 연구소에서는 지금도 태양광 발전, 환경 및 생태 연구, 수자원 개발 연구 등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열사의 땅 깊은 곳에 잠긴 물길을 끌어내어 조성한 양어장에서 팔뚝만 한 물고기가 뛰어오르는 장면은 경이롭다.
물론 아랍의 눈에 벤구리온은 자신들 땅을 탈취하고 동족을 학살한 시온주의자의 앞잡이로 비칠 것이다. 점령지를 돌려주고 팔레스타인과 이웃으로 공존하자던 그에 대한 이스라엘 내부의 비판도 만만찮다. 하지만 그의 정치 이력에 관한 판단은 논외로 하자. 적어도 사막을 향해 홀연히 걸어 들어갔던 노 (老) 정객의 뒷모습은 진한 여운을 남긴다.
많은 정치인이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 할 때, 심지어는 이미 세상 떠난 권력자의 시신까지 부여잡고 우상화하는 시대에 그는 완전히 다른 길을 걸었다. 그의 진짜 무대는 예루살렘의 크네세트 (국회)가 아니라 어쩌면 사막 작은 집이 아니었을까? 지금은 작은 박물관으로 변한 벤구리온의 거처 (Ben-Gurion’s Hut)와 무덤은 그 어떤 오랜 신전이나 교회 건물에서 얻기 힘든 묵직한 울림을 준다. (신정선 기자, 2016.10.26)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언론보도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