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6년 7월 24일, 일본 메이지•쇼와 시대 소설가 다니자키 준이치로 (谷崎潤一郞, 1886 ~ 1965) 출생
다니자키 준이치로 (일: 谷崎潤一郞, 1886년 7월 24일 ~ 1965년 7월 30일)는 일본 메이지에서 쇼와 기 (期)에 걸친 소설가이다.

– 다니자키 준이치로 (谷崎潤一郎たにざき じゅんいちろう, Jun’ichirō Tanizaki)
.본명: 다니자키 준이치로 (谷崎 潤一郎たにざき じゅんいちろう)
.출생: 1886년 7월 24일, 일본 제국 도쿄시 니혼바시지구 니쵸메 14번지
.사망: 1965년 7월 30일 (79세), 가나가와현 아시가라시 유가와라정
.직업: 소설가, 수필가, 극작가
1910년 오사나이 가오루, 와츠지 데츠로 등과 제2차 <신시죠 (新思潮)>를 창간, 동년의 각 호에 <탄조 (誕生)> <조 (象)> <시세이 (剌靑)> 등을 발표했다.
그의 문학은 가후 (荷風)의 작풍을 이어 그것을 심화시켰다.
가후에 있었던 문학에의 전 인격적인 면은 불식되고 인생과 분리된 전적으로 예술 프로퍼 (proper)의 인위적인 탐미정신이 그 특색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후 33년 <슌킨 이야기 (春琴抄>, 1943 ~ 1948년에 걸쳐 쓰인 <세설 (細雪)>과 같은 고전적 분위기를 지닌 작품들을 발표한다.
“당시의 연극이나 구사 조시 에서조차 아름다운자는 모두 강자이고, 추한자는 약자였다. 그리하여 너나없이 앞을 다투어 아름다워 지겠다고 나서 더니 급기야 제 살 속에 색을 집어 넣기에 이르렀다. 강렬하고 현란한 선과 색이 그들의 몸에서 살아 움직였다.” _ 그의 대표작 (문신)의 내용

○ 생애 및 활동
1886년 7월 24일, 도쿄도 주오구에서 태어났다.
5남 3녀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나, 맏형이 태어난 지 3일만에 죽었기 때문에 그는 호적에 장남으로 올라갔으며 그래서 이름도 ‘준이치로 (潤一郎)’가 되었다.
다니자키는 어머니 쪽의 성으로, 그의 아버지인 구라고로 (倉五郎)가 유복한 상인이었던 다니자키의 외조부 규에몬 (久右衛門)의 데릴사위로 들어가 어머니인 세키 (関)와 혼인하였기 때문이다.
다니자키는 1892년 소학교에 입학했으나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나 유모와 한시라도 떨어지는 것을 꺼릴 정도로 응석받이였던 탓에 출석일수가 모자라 첫 해부터 유급을 하고 만다.
하지만 다음 해에는 학년 수석으로 2학년에 진급할 정도로 학교 생활에 적응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1897년에는 중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는데, 이미 훨씬 전에 사망한 외조부의 사업을 이어받은 다니자키의 아버지가 상업에 능하지 못하여 사업이 부진하였기 때문에 가세가 기울어 진학이 힘든 상황이었으나 큰아버지의 도움을 얻어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는 중학교에 다니던 중 여러 학생들과 함께 ‘학생클럽 (学生倶楽部)’이라는 문학잡지를 자체 발간하면서 문학에 대한 관심을 본격적으로 나타내기 시작했다.

1908년 도쿄제국대학 (현재의 도쿄대학) 국문과에 입학하였으나, 3년 뒤인 1911년 학비를 미납하여 퇴학처분을 당하게 된다.
그러나 이 시기 다니자키는 문단에 본격적으로 데뷔하게 되는데, 1910년 제 2차 ‘신사조 (新思潮)’에 소설 『문신 (刺青)』, 『기린 (麒麟)』과 희곡 『탄생 (誕生)』을 발표하게 된 것이다.
이 때는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하였으나, 1911년 『소년 (少年)』 등의 작품이 발표된 이후 소설가 나가이 가후 (永井 荷風)에게 격찬을 받으면서 인정받기 시작하였다.
이후에도 계속해서 탐미주의적인 작품을 써 나가면서 ‘악마주의 작가’로 불리며 문단에서 주목받기 시작한다.
1915년, 29세였던 다니자키는 9살 아래의 이시카와 지요 (石川 千代)와 혼인하게 된다.
이듬해인 1916년에는 장녀 아유코 (鮎子)가 태어났고, 1918년에는 조선, 만주를 거쳐 중국 각지를 여행하기도 한다. 당시 그의 조선 기행문은 <일본 작가들이 본 근대 조선>이라는 책에 실려 있다.
그러나 결혼 직후 다니자키는 자신의 기준으로 지나치게 정숙하고 순종적이었던 아내 치요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고, 결혼한 이듬해였던 1916년 아내 지요의 여동생이었던 당시 14세의 소녀 세이코 (せいこ)의 양육을 맡게 되면서 점차 세이코에게 빠져들게 된다. 다니자키는 어머니 세키를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활달하면서 남성에 대해 지배적인 성격을 가진 여성을 좋아했던 것이다. 다니자키는 점차 세이코에 빠져들게 되었고, 이에 따라 아내인 지요와의 사이는 악화되어 갔다.

그런데 이 때 다니자키의 친우였던 소설가이자 평론가인 사토 하루오 (佐藤 春夫)는 다니자키에게 냉대받던 지요에게 동정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것이 곧 사랑으로 발전하면서 삼각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아내에게 애정을 느끼지 못했던 다니자키는 사토에게 자신의 아내를 양도하겠다고 약속하고는 이것을 문단의 동료들과 여러 인사들에게 연하장으로 널리 알린다. 그러나 막판에 결심을 바꾸어 이 약속의 이행을 거절하는데, 격분한 사토는 다니자키와 절교하게 된다. 이것이 ‘오다와라 사건 (小田原事件)’이라 하여 일본 문단 내의 가장 큰 스캔들 중 하나이다. 실연당한 사토는 꽁치의 노래 (秋刀魚の歌)라는 자신의 작품에서 치요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둘은 1926년 화해하게 되고, 1930년 다니자키가 지요와 이혼한 뒤 사토는 지요와 재혼하면서 이 약속은 이행되게 된다. 사토와 치요 사이에 태어난 아들 마사야 (方哉)의 이름은 다니자키가 지어주었다. 또한 사토의 조카인 동양사학자 다케다 류지 (竹田龍児)와 다니자키의 딸 아유코가 결혼한다.
다니자키는 1923년 관동 대지진을 겪고 난 뒤, 지진을 두려워하여 일가족 모두와 함께 그때까지 지진에서 안전하다고 알려진 관서지방으로 이주하게 된다. 처음에는 교토에 있다가 나중에는 고베로 옮겨 거주하게 된다. 이후 다니자키는 도쿄로 돌아가는 일 없이 계속해서 관서지방에서 거주하게 된다. 관서지방 이주 직후 다니자키 초기 문학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치인의 사랑 (痴人の愛)』이 1924년부터 연재되기 시작한다. 이 소설은 처제 세이코를 모델로 한 소녀 나오미를 맡아 기르면서 자신의 취향에 맞게 길러 이상적인 여인으로 삼으려 하던 주인공이, 나중에는 도리어 자신을 가지고 노는 나오미에게 휘둘리면서도 헤어나지 못하는 모습을 그린 소설이다.
다니자키의 작품 세계는 『치인의 사랑 (痴人の愛)』을 경계로 해서 서양의 미를 동경하던 것에서 점차 일본적인 소재와 전통미를 추구하는 것으로 바뀌어가게 된다.

1928년 연재하기 시작한『만지 (卍)』와『여뀌 먹는 벌레 (蓼喰ふ虫)』가 그것이다.『만지』는 레즈비언 관계를 중심으로 하여 얽히고 섥힌 연애관계를 다룬 소설인데, 모든 내용이 여주인공의 1인칭으로 서술되어 있는 가운데 교토벤을 유려하게 구사하였고, 관서지방 상류 사회의 여성들을 주인공으로 다룬 점에서 그의 문학에서 새로운 세계를 열었다고 할 수 있는 작품이다.
1930년 아내 지요와 이혼한 다니자키는 1931년 후루카와 도미코 (古川 丁未子)와 재혼하지만, 그 이전부터 알고 지내던 모리타 마쓰코 (森田 松子)와의 관계가 깊어져서 도미코와 별거, 마쓰코와 동거하는 관계가 된다.
결국 다니자키는 1934년 도미코와 이혼하고, 1935년 마쓰코와 재혼하게 된다.
다니자키는 17살이나 어린 마쓰코를 숭배에 가까운 대상으로 생각할 정도였으며, 이러한 그의 여인숭배적인 생각은 『맹인 이야기 (盲目物語)』, 『춘금초 (春琴抄)』 등에서 잘 묘사된다.
이후 다니자키는 일본 전통 문화에 깊이 심취하게 되는데, 그가 『겐지 이야기』의 현대어역 (譯) 작업을 시작한 것도 이 시기 (1935년)의 일이다. 다니자키 역 (譯) 겐지 이야기는 1939년 초판이 출간되었으며, 이후에도 새로 번역하고 여러 차례 다듬는 등 다니자키는 겐지 이야기에 많은 애착을 보였다.
1942년부터 다니자키는 『세설 (細雪)』을 연재하기 시작하나, 이것이 ‘전시 시국에 맞지 않는 내용’이라 하여 군부로부터 발간을 정지당하게 된다.
이후 1944년 사가판 (私家版) 즉 자비출판으로 상권을 찍어 친구와 지인들에게 배부하였지만 이것도 군부에 의해 금지당하게 되었고, 『세설』 전권이 완성된 것은 태평양 전쟁이 끝난 뒤인 1948년에야 가능했다.『세설』은 관서 지방에 거주하는 상류층 네 자매의 일상을 담담하게 묘사한 작품으로, 다니자키의 작품 중에서는 이례적으로 잔잔한 흐름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네 자매의 모델은 세 번째 아내인 마쓰코의 자매들이라고 한다.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패전 이후 고혈압에 시달리며 한때 작품활동을 중지했지만, 1951년 『준이치로 신역 겐지 이야기 (潤一郎新訳源氏物語)』를 발표하였고, 말년에도 그의 탐미주의적 감각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준 『열쇠 (鍵), 1956』, 『미친 노인의 일기 (瘋癲老人日記), 1962』등의 작품을 발표하며 식지 않는 왕성한 창작열을 선보였다.
그는 1958년 노벨 문학상 후보로 오르기도 했으며, 1960년에 또다시 노벨상 후보로 오르기도 했는데 이때는 최종 후보 5명 중의 하나로 들어가기도 했다. 1965년 7월 30일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향년 79세.

○ 평가
초창기에 발표한 <문신 (刺青)> <소년 (少年)> <비밀 (秘密)> 등 탐미적 경향이 짙은 단편들이 단숨에 높은 평가를 받게 되어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여기에서 말하는 ‘탐미’란 ‘강렬한 에로티시즘’과 동의어라 할 수 있다.
젊은 시절에는 서양 문화를 동경해 서구적인 요소와 분위기를 적극적으로 자기 작품에 도입했으나, 1923년의 간토 대지진을 계기로 지진에 대한 공포 때문에 간사이 지방으로 이주하면서 차츰 일본의 전통 문화에 심취하게 된다.
후반기에는 교토를 중심으로 간사이 지방의 전통적 언어 (방언)를 구사하는 작품들을 완성했다.
1949년에 일본 정부로부터 문화 훈장을 수여받았다. 항상 ‘대문호 (大文豪)’라는 수식이 붙을 정도로 주위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아 온 다니자키의 작품은 무엇보다도 탁월한 문장이 일품이다.

○ 작품
- 주요 작품
.소설
문신(일: 刺青)(1910)
소년(일: 少年)(1911)
금빛 죽음(일: 金色の死)(1914)
치인의 사랑(일: 痴人の愛)(1924)
여뀌 먹는 벌레(일: 蓼喰ふ虫)(1929)
요시노 구즈(일: 吉野葛)(1931)
무주공 비화(일: 武州公秘話)(1935)
세설(일: 細雪)(1943~48)
열쇠(일: 鍵)(1956)
미친 노인의 일기(: 瘋癲老人日記)(1961)
.희곡
사랑을 느낄 무렵(일: 恋を知る頃)(1913)
흰 여우 온천(일: 白孤の湯)(1922)
.수필
음예예찬(일: 陰翳礼讃)(1933)
- 한국어 번역서
민음사의 쏜살문고에서 선집 전 10권을, 열린책들에서 세설을, 산지니에서 희곡 선집을 냈다.
.민음사
선집의 제1~9권은 소설, 제10권은 수필·평론이다.
1권: 문신, 소년, 작은 왕국(박연정 외 옮김, 2018년 8월 3일)
2권: 인어의 탄식, 마술사, 금빛 죽음(양윤옥 옮김)
3권: 치인의 사랑(김춘미 옮김)
4권: 여뀌 먹는 벌레(임다함 옮김, 2020년 1월 28일)
5권: 요시노 구즈, 장님 이야기(엄인경 옮김, 2018년 8월 3일)
6권: 무주공 비화(류정훈 옮김)
7권: 슌킨 이야기(박연정 외 옮김, 2018년 8월 3일)
8권: 열쇠(김효순 옮김)
9권: 미친 노인의 일기
10권: 활동 사진의 현재와 장래, 영화 잡감, 영화 감상-〈슌킨 이야기〉 영화화 무렵에, 내가 본 오사카와 오사카 사람, 음예 예찬, 반소매 이야기, 어린 시절 먹거리의 추억(김보경 옮김, 2020년 1월 28일)
.산지니
다음과 같은 희곡 5편이 번역되었다.
사랑을 느낄 무렵
기혼자와 이혼자
흰 여우 온천
만돌린을 켜는 남자
돈을 빌리러 온 남자
.열린책들
《세설》(細雪)이 전 2권으로 번역되었다.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