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0년 3월 31일, 호주 출신 영국의 물리학자 윌리엄 로렌스 브래그 / 로런스 브 래그 (William Lawrence Bragg, 1890 ~ 1971) 출생
윌리엄 로렌스 브래그 경 (Sir William Lawrence Bragg, CH, OBE, FRS, 1890년 3월 31일 ~ 1971년 7월 1일)은 1915년 아버지 윌리엄 헨리 브래그와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한 영국의 물리학자이다.

– 윌리엄 로렌스 브래그 (William Lawrence Bragg)
.출생: 1890년 3월 31일, 오스트레일리아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주 노스애들레이드
.사망: 1971년 7월 1일 (81세), 잉글랜드 서퍽주 왈드링필드
.국적: 영국
.부모: 윌리엄 헨리 브래그, 그웬돌린 토드
.배우자: 앨리스 홉킨슨
.주요 업적: X선 회절, 브래그 법칙
.수상: 노벨 물리학상 (1915)
.분야: 물리학
.학력: 세인트 피터 컬리지 (졸업), 애들레이드 대학교 (수학 / 학사),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자연과학 / 석사)
.소속: 맨체스터 대학교, 케임브리지 대학교
.박사 교수: 윌리엄 헨리 브래그
.저서: X-rays and Crystalline Structure, Ideas and discoveries in physics, Inorganic Crystals 등
윌리엄 로렌스 브래그 (William Lawrence Bragg, 1890 ~ 1971)은 호주 출신 영국의 물리학자이자 생화학자이다.
X선을 이용한 결정구조 분석을 고안해 아버지인 윌리엄 헨리 브래그와 같이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였다.

○ 생애 및 활동
윌리엄 로렌스 브래그 (William Lawrence Bragg)는 1890년 3월 31일, 오스트레일리아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주 노스애들레이드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윌리엄 헨리 브래그 (William Henry Bragg)는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 (Trinity College of Cambridge University)에서 수학을 공부하였으며, 카벤디시 연구소 (Cavendish Lab)에서 물리학을 공부한 후, 1885년 23살의 나이에 애들레이드 대학교 수학 및 물리학 교수가 되었다.
헨리 브레그는 일 년 전 유럽에서 행한 뢴트겐의 실험에 대한 기사를 읽고 매혹당하여 X-레이 장치를 만들었다.
그가 장비를 만든 지 얼마 안 되어 6살의 아들 로렌스는 세발자전거를 타다가 떨어져 팔꿈치를 다쳤다.
헨리는 아들의 팔꿈치 골절치료를 돕기 위하여 X-레이 사진을 찍는데, 이것이 호주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진단용도로 X-레이를 사용한 최초의 기록이다.
여하튼 로렌스가 6살 때 미지의 X-선과 처음으로 접하게 된 19년 후 똑같은 X-선으로 노벨 물리상을 타게 된 것은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려서부터 지적으로 매우 총명한 로렌스는 나이 많은 반 친구들과는 공통점도 별로 없을 뿐 아니라 ‘재미있는 괴짜’로 취급당하여 매우 외로운 학교생활을 보내면서 항상 자신이 아웃사이더처럼 느꼈다.
1906년 초, 15살의 로렌스는 애들레이드 대학에 입학하여 수학, 물리, 화학을 공부하는데 어느정도 남을 지배하려드는 강한 성격의 아버지 헨리는 자신의 연구실에서 아들을 공부하도록 만들었다.

로렌스는 평생 동안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있는 것 보다는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내성적이고 사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후일 이 기간 동안 또래들과 상호 작용을 못하였던 것이 적절한 사회적 기술을 개발하지 못한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여하튼 이러한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로렌스는 1908년 애들레이드대학을 졸업하는데, 때마침 아버지도 같은 해 영국의 리즈 (Leeds) 대학에서 교수직에 임용되어 가족들은 영국으로 온다.
호주에서 세인트 피터 컬리지 (졸업), 애들레이드 대학교 (수학 / 학사)를 졸업후 영국에서는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자연과학 / 석사)에서 학업했다.
로렌스 브래그는 1909년 가을 장학금을 받고 캠브리지 대학 트리니티 칼리지 (Trinity College, Cambridge University)에 수학전공으로 입학하여 천천히 친구들을 사귀면서 생애 처음으로 비슷한 동지속에 있다고 느낀다.
그는 처음에는 수학을 전공하지만 아버지의 조언에 따라 나중에 전공을 물리로 바꾸어 1911년 매우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이 기간 동안 그가 같이 공부한 학생들 중에는 닐스 보어 (Niels Bohr)가 있으며 또한 그에게 가장 영감을 주었던 교수는 이온화 입자의 경로를 관측하기 위한 장치인 안개상자를 발명한 윌슨 (C.T.R. Wilson)이다.
1911년 21살에 캠브리지 대학을 졸업한 후, 전자의 발견으로 1906년 노벨물리상을 수상한 톰슨 (J. J. Thomson)을 지도교수로 대학원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일년 후, 1912년 22살의 로렌스는 X-선 회절에 관한 ‘브래그 법칙 (Bragg’s Law)’이란 중대한 발견을 한다.

여름방학 동안 로렌스가 휴가로 집에 왔을 때 아버지는 결정을 통해서 X-선이 회절될 수 있다고 최근에 쓴 라우에 (Max Von Laue)의 연구 결과에 대해서 이야기하였다. 그런데 라우에의 논문발표 이전에는 헨리 브래그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X-선은 입자여서 회절될수 없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회절은 입자가 아닌 파동에서만 나타나는 성질로 입자는 진행경로에 틈이 있는 장애물이 있으면 그 틈을 지나 직선으로 진행한다.
반면에 파동의 경우, 틈을 지나는 직선 경로뿐 아니라 그 주변의 일정 범위까지 돌아 들어가며 회절의 정도는 틈의 크기와 파장에 영향을 받는다. 가령 틈의 크기에 비해 파장이 길수록 회절이 더 많이 일어나며 파장이 일정할 때는 틈의 크기가 작을수록 회절이 잘 일어난다. 라우에 연구의 경우 결정속의 원자들이 X-선의 파장들과 비슷한 간격을 가지고 있었는데, 만일 파동의 파장과 비슷한 간격을 가진 장애물을 파동이 만나게 되면 간섭무늬가 생기게 된다.
그런데 간섭무늬란 회절된 파동들이 위상을 달리해서 한 점에 도달할 때 서로를 보강하거나 상쇄하는 간섭에 의해 형성되는 무늬를 말한다.
로렌스는 라우에 논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매우 영감을 받아 자신도 이 주제에 도전해 보려는 생각을 가지고 학교로 돌아갔다. 결정 구조를 풀기위해서 두 가지를 해결하기로 한다. 첫째, 아버지 브래그는 원하는 세기를 갖는 단색광을 산출할 수 있는 X-선 분광계를 만들고 둘째, 아들 브래그는 회절 이미지의 패턴을 기본 구조와 연관시키도록 회절에 관련된 수학을 계산하기로 한다.
어느 날 로렌스는 켐 강의 둑을 따라 걷다가 이 문제에 대한 계시가 마른하늘에 번개처럼 떠올랐다. 그는 극적으로 단순화된 절묘한 분석에서 아래 사진에서 보는것처럼 라우에 회절사진이 결정 안에서 원자들의 평평한 층으로부터 반사된 간섭무늬라는 것을 입증한다.

1912년에 결정에 의한 X선 회절 연구에 관한 논문을 Proceedings of Cambridge Philosophical Society에 게재한것으로 시작해 1913년부터 아버지인 윌리엄 헨리 브래그와 함께 X선 회절을 이용한 결정 구조를 공동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한편 아버지 헨리 브래그의 새로운 X-선 분광계에 대한 논문은 1913년 1월 ‘Nature’에 게재되었다.
로렌스는 결정격자로부터 회절 되어 나온 X-선이 나타나는 조건을 nλ=2d sin θ 이라고 유도하였다. 여기서 λ는 X-선의 파장, d는 결정격자 내에서 원소들의 일정한 배열을 가진 평면들 사이의 거리 (d-spacing), θ는 입사된 또는 회절된 X-선과 결정면 사이의 각, n은 양의 정수이다
아버지와 X선 회절로 브래그 격자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회절각과 회절 패턴을 분석하여 이론적인 정리를 담당했고, X선 회절 실험을 통해 회절각과 파장의 관계를 설명하는 다음과 같은 브래그 법칙을 고안했다. nλ=2dsinθ
이 식이 바로 유명한 브래그의 법칙 또는 브래그 공식으로 로렌스는 캠브리지 대학원 1년차 학생일 때 이식을 유도하였다. 이 발견은 과학사에서 획기적인 돌파구중의 하나로 사상 최초로 과학자들은 물질이 원자의 스케일로서 어떻게 보이는지를 잠재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으며 물질의 원자 구조에 대한 3D 모델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로렌스는 리즈 (Leeds)에서 X-선 분광계를 개발한 아버지 헨리 브래그와 자신의 아이디어를 토론하였으며 또한 많은 종류의 결정 구조를 분석할 수 있었다.

1914년 로렌스는 박사학위 논문을 끝내고 캠브리지 대학 트리니티 칼리지의 펠로우로 선정된다.
그가 막 트리니티에서 펠로우를 시작할 때 세계 제1차 대전이 일어나자 로렌스는 즉시 참전하여 전쟁동안 적의 포병대 위치를 포탄의 폭발음을 이용하여 음향측정법으로 알아내는 현장연구를 수행하였는데, 후에 그 공로로 십자훈장을 받았다. 한편 로렌스의 동생은 1차 대전때 연합군의 수많은 사상자를 낸 갈리폴리 상륙작전에서 전사하였으며, X-선 산란에 관한 연구로 ‘모즐리의 법칙’을 발견하여 노벨상 수상이 거의 확실시되었던 영국의 물리학자 모즐리도 이 전투에서 27세의 나이로 전사하였다.
동생의 죽음이란 가슴아픈 비극적인 소식이 전해진지 얼마 안 되어 브래그 부자는 1915년 “X선에 의한 결정 구조 해석에 대한 업적”으로 노벨 물리상을 수상한다. 이때가 로렌스가 25세일 때로 지금까지 노벨 평화상 (2014년 17세의 파키스탄 소녀가 수상)을 제외하고 가장 나이어린 노벨상 수상자란 기록은 깨지지 않고 있다.
1915년 아버지와 함께 25세 6개월이라는 나이로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이는 17세의 말랄라 유사프자이 이전까지 최연소 기록이며 유일한 20대 수상 기록이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아버지와의 노벨상 공동수상이 로렌스에게는 반듯이 영광만은 아니었다. 가령 로렌스의 ‘브래그 법칙’이 출판된 직후 명망 있는 두 번째 솔베이 회의 (Solvay Conference)가 열렸는데, 아버지 윌리엄 브래그는 회의에 초청된 반면, 그는 초청되지 않았다. 대신 로렌스는 마담 퀴리, 아인슈타인, 라우에, 로렌츠, 러더포드 같은 유명한 솔베이회의 참가자들로 부터 “자연과학의 과정을 발전시킨 것을‘ 축하하면서 보낸 사인된 엽서를 받았을 뿐이다. 항상 아버지 그늘에 가려져 과학 커뮤니티로부터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을 유감스러워 하던 그는 강연할 때 “때로는 나의 아버지와 내가 함께 X-선 분석을 했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라고 말하면서 시작하였다고 한다.
로렌스 브래그는 1937년 러더포드 (Rutherford) 뒤를 이어 카벤디쉬 연구소 소장이 되었으며 1941년에는 조지 6세 (King George VI)로 부터 기사 작위를 받아 로렌스 브래그경이 되었다. 세계 제2차 대전 후 그는 카벤디쉬 연구소에서 X선 결정학을 이용하여 분자 생물학의 출현을 주도한다. 실제로 그가 연구소 소장으로 있을 때 일하던 4명의 카벤디쉬 연구원들 (켄드루, 페루츠, 크릭, 왓슨)이 노벨상을 수상하였다. 즉 1962년 헤모글로빈과 미오빈의 구조를 연구한 페루츠 (Max Perutz)와 켄드루 (John Kendrew)는 노벨 화학상 그리고 DNA 구조를 규명한 크릭 (Francis Crick)과 왓슨 (James Watson)은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1950년에는 결정 구조의 X선 회절 실험을 통해 펩타이드 구조를 분석했다.

1953년 Pippard의 초전도체 내부 자기장의 관통 깊이와 영역 크기의 관계를 다루는 방정식의 정립과 실험값과의 비교를 다룬 논문 평가에 편집장으로써 참여했다.
그는 1953년 2월 제임스 D.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에 의해 DNA의 구조가 발견될 당시 케임브리지의 케번디시 연구소 소장이었다.
1954년 64세의 브래그는 캠브리지를 떠나 런던으로 가서 왕립연구소 소장과 데이비-파라데이 연구소 소장이 되었으며 1966년 76살에 은퇴하였다.
그는 은퇴할 때까지 X-선 결정학에서 거의 모든 중요한 발전과 관련되어 있다.
초기의 수많은 무기 결정의 구조해석에서부터 금속 합금, 헤모글로빈 및 DNA와 같은 복잡한 생물학적 거대분자 구조해석에 이르기 까지, 브래그의 삶의 이야기는 또한 50년의 X-선 결정학과 현대 재료과학 및 분자생물학 탄생의 개인적인 역사이다.
윌리엄 로런스 브래그 (William Lawrence Bragg)는 1971년 7월 1일, 잉글랜드 서퍽주 왈드링필드에서 별세했다. 향년 81세
로렌스 브래그는 런던에서 물리교수로 일하는 동안 비밀리에 정원사로 파트 타임으로 일할 정도로 정원 가꾸는 일을 무척 좋아하였다.
그는 81세로 1970년에 영면하였으며 캠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의 예배당에 묻혔다.

○ 주요 경력
- X선 결정학의 업적
브래그는 결정에서 X선을 이용한 회절에 관한 법칙으로 유명하다. 브래그의 법칙은 X선이 결정의 격자에 의해 회절되는 방법으로부터, 결정 내부의 원자들의 위치를 계산 가능하게 했다.
그는 1912년 케임브리지에서 학생으로 연구를 시작한 첫해에 이것을 발견했다.
그는 그의 생각을 당시 Leeds에서 X선 분광기를 만들고 있던 그의 아버지와 토의하였다.
이 방법은 많은 다른 형태의 결정을 분석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의 공동 연구는 사람들에게 아버지가 연구를 제안한 것으로 오해되었고, 이는 아들을 화나게 하곤 했다고 한다.
- 단백질 연구
1948년 그는 단백질 구조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물리학을 이용하여 생물학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그룹을 만드는데 부분적 책임을 맡게 되었다.
그는 케임브리지의 케번디시 연구소에서 그의 후원 아래서 일했던 제임스 D. 왓슨과프랜시스 크릭을 지원하여, 그들이 1953년 DNA의 구조를 발견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 수상과 서훈
1915년 노벨 물리학상, Matteucci Medal
1916년 Rumford Medal
1918년 대영 제국 훈장 4등급(OBE)
1930년 Copley Medal
1941년 Knight Bachelor (기사작위) 서임
1967년 컴패니언 오브 아너 (Order of the Companions of Honour, CH)

○ Select Bibliography
K. Grant, The Life and Work of Sir William Bragg (Brish, 1952)
C. C. Gillespie (ed), Dictionary of Scientific Biography, vol 2 (New York, 1970)
G. M. Caroe, William Henry Bragg, 1862-1942: Man and Scientist (Lond, 1978)
G. Caroe, ‘Notes on Gwendoline Bragg’, R. Biven (ed), Some Forgotten, Some Remembered (Adel, 1976)
Votes and Proceedings (Legislative Assembly, Victoria), 1901, 3 (36)
Obituary Notices of Fellows of the Royal Society, vol 4 (1943), and for publications
British Journal for the History of Science, 5 (1970-71)
Physics Bulletin (London), 22 (1971)
Australian Physicist, May 1976
‘Obituary’, Times (London), 2 July 1971, p 19, 8 July 1971, p 16.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