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1년 1월 20일, 하와이 왕국의 마지막 군주 릴리우오칼라니 여왕 (Liliʻuokalani, 1838 ~ 1917) 즉위
릴리우오칼라니 (하: Liliʻuokalani, 1838년 9월 2일 ~ 1917년 11월 11일)는 하와이 왕국의 마지막 군주 (재위 1891년 1월 20일 ~ 1893년 1월 17일)로 1891년 1월 20일 즉위했다.
– 릴리우오칼라니 (Liliʻuokalani)
.휘: Lydia Liliʻu Loloku Walania Wewehi Kamakaʻeha
.생사: 1838년 9월 2일 ~ 1917년 11월 11일
.배우자: John Owen Dominis (m. 1862–1891)
.자녀: Lydia Kaʻonohiponiponiokalani Aholo, Joseph Kaiponohea ʻAeʻa, John ʻAimoku Dominis
*하와이 왕국의 여왕
.재위: 1891년 1월 20일 ~ 1893년 1월 17일
칼라카우아 군주와 케오칼로레 왕비 사이에서 출생한 그녀는 사탕수수 농장을 통해 경제적으로 잠식하는 미국 자본가들을 국유화 조치로 견제했으며, 이에 위기감을 느낀 미국에 의해 하와이는 공화국이 되었다.
또한 그녀는 하와이의 유명한 노래인 알로하 오에를 작곡, 작사한 사람이다.
하와이 왕국의 군주로 하와이 왕국의 유일한 여왕이며 마지막 군주이다.
○ 생애 및 활동
일찍이 신식 문물을 배워 하와이어와 영어 양자에 둘 다 능통했고 작곡까지 했던 영민한 인물이었으나, 하와이 내 미국인들의 농장을 국유화해버리자 미 해군 수병 150명의 지원에 힘입은 미국인들에 의해 폐위당했고 하와이의 군주정은 폐지된다.
이때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 인물이 샌퍼드 돌이다. 릴리우오칼라니가 폐위되고 하와이의 군주정이 폐지된 이후 건설된 하와이 공화국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으며 원주민들이 소유한 토지를 백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그 특혜를 받은 사람 중에는 파인애플 농장을 물려받은 사촌, 제임스 돌이 있었다. 이 제임스 돌이 하와이의 파인애플 농장을 기반으로 세운 기업이 바로 파인애플 통조림으로 유명한 돌(Dole)이다.
추방생활 내내 미국과 영국을 오가며 하와이 왕국을 되살릴 길을 찾았으나, 아무도 그녀의 말을 귀기울여 듣지 않았다. 결국 하와이가 미국에 편입된 후로는 무슨죄로 벌금과 징역을 선고받았으나 집행되지는 않았고, 이올라니 궁전의 구석방에 유폐되었다. 후에 풀려나 노년에는 평범한 미국 시민으로 살았고 79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미국은 당연히 하와이 왕국을 지배하는 것에 대해 아무런 사과도 하지 않았다. 하와이 왕국을 지배한지 약 100년이나 지나고 나서야 빌 클린턴 행정부 당시에 미국은 공식적으로 하와이 왕국을 무너뜨린 일에 대해 사과했다.
– 혈연 관계
릴리우오칼라니와 그의 가족은 하와이 왕국을 세운 카메하메하 1세의 후손이 아니나, 카메하메하 1세의 종조인 칼라니누이아마마오 왕자의 직계 후손으로 혈연 관계가 있다. 5대 국왕인 카메하메하 5세가 직계 자손이 없이 사망하는 바람에 국가를 선거군주제로 개편하였으며 이때 카메하메하 1세의 남동생의 손자인 루나릴로가 6대 국왕이 되었으나 역시나 직계 자손 없이 사망하여 칼라니누이아마마오 왕자의 직계 후손인 칼라마우가 7대 국왕이 되어 칼라마우 왕조를 열었다. 릴리우오칼라니는 칼라마우의 여동생으로 칼라마우가 사망한 후 선거로 뽑힌 군주다. 다만 작은 섬나라에서 좀 유력하면 어떻게든 혈연관계는 나오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녀 또한 자손을 남기지 않았다. 형제들 중 한 명만이 딸 하나를 남겼는데, 일본과의 동맹을 위해 일본 황실과의 결혼을 추진하여 후시미노미야 구니이에 친왕의 아들 히가시후시미노미야 요리히토 친왕과의 혼인을 추진했었으나 미국과의 갈등을 우려한 메이지 덴노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녀는 그 후 24세로 요절했다. 그러므로 지금 하와이 군주의 직계 후손은 단 한 명도 없다. 다만 현존 중이면서 가장 하와이 군주 가족과 가까운 혈연관계인 카와나나코아 가문의 경우도 칼라니누이아마마오 왕자의 직계후손이다. 카와나나코아 가문의 창시자인 데이비드 카와나나코아가 하와이 설탕 산업의 대부호였던 제임스 캠벨의 딸 아비게일 캠벨과 혼인하여 그 후손이 캠벨 가문의 재산을 상속받게 되었고 현 가문장인 쿠엔틴 카와나나코아가 주의원도 역임했던 전례가 있는지라 현재에는 하와이에서 가장 유력한 가문이 되었다.
– 노래 ‘알로하 오에’ (Aloha ʻOe)
알로하 오에 (Aloha ʻOe)는 하와이어로 ‘안녕 그대여’라는 뜻으로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의 마음을 노래한 하와이의 민요이다. 작사ㆍ작곡자는 하와이 왕국의 마지막 국왕인 릴리우오칼라니 (Queen Liliʻuokalani, 1838 ~ 1917)로, 음악의 재능이 뛰어나 많은 노래를 남겼다.
이 노래는 그녀가 왕녀이던 1878년 오아프 섬의 마우나우일리라는 곳으로 승마 여행을 하고 돌아올 때, 함께 갔던 보이드 소령과 하와이 처녀가 작별을 아쉬워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아 만들었다고 한다.
여왕의 음악 교사인 독일인 헨리 바거가 편곡하여 하와이의 온 섬에 퍼졌고, 1883년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연주되어 미국 본토에서도 곧 대중적인 노래가 되었다.
‘안녕’이란 단어의 오해로 장례식장에서까지도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노래로 불리는 것을 보고는 이 노래를 만든 여왕 본인도 놀랐다는 뒷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설사 노래 제목이 ‘Good bye’라는 뜻일지라도 여왕 스스로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것은 분명히 사랑의 노래임을 강조하고 있다.
하와이에서는 졸업식과 공식 행사에서 알로하 오에를 부르기도 한다.
– 하와이 왕국의 멸망
1778년에 영국의 탐험가인 제임스 쿡이 유럽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하와이 제도에 도달하였다. 그 때 당시에는 폴리네시아인들과 타히티에서 도래해 온 사람들이 부족을 이루어 살아가고 있었다.
비록 제임스 쿡 본인은 이곳에서 자신의 부하 선원들과 원주민들과의 사이에서 발생한 무력 분쟁에 휘말려 살해당하였지만, 뒤에 통일 하와이 왕국의 초대 국왕이 되는 카메하메하 1세는 제임스 쿡의 일행으로부터 영국식의 문화와 기술을 적극 수용하였고, 그들과의 교류를 통해 얻은 무기를 이용해 통일 전쟁을 시작했다.
1810년에는 하와이 제도 전체를 통일시키고 하와이 제도 최초의 통일 국가를 선포하고, 영국의 정치 체제를 크게 모방한 입헌군주제에 기초한 정치 체계를 세웠다.
1874년에 6대 국왕인 칼라카우아가 미국인들의 이주를 허용한 직후부터 점점 미국에게 경제적으로 속박당하고 만다. 결국 마지막 국왕인 릴리우오칼라니가 실시한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에 대한 국유화 조치에 반발하여, 친미주의자인 샌포드 돌이 일으킨 반란에 미국계 이주민과, 소수의 공화파 농장주들이 가담하였고, 국왕의 거처인 이올라니 궁전이 함락당한다.
1893년에 릴리우오칼라니 여왕은 폐위되고, 일시적으로 샌포드 돌을 대통령으로 하는 하와이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이후, 하와이 공화국도 초대 대통령인 샌포드 돌이 미합중국 가입을 선언하면서, 1893년 1월 17일 하와이 왕국은 멸망하고 만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