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1년 1월 25일, 네덜란드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동생 테오 반 고흐 (Theodorus “Theo” van Gogh, 1857 ~ 1891) 별세
테오도르 “테오” 반 고흐 (네: Theodorus “Theo” van Gogh, 1857년 5월 1일 ~ 1891년 1월 25일)는 인상파 화가인 빈센트 반 고흐의 동생이자 미술상이다.
고흐 형제의 부친은 목사였고, 빈센트의 형이 어려서 요절했기 때문에 빈센트는 장남으로 자랐으며, 네 살 터울의 남동생 테오는 1857년 5월 1일에 출생했다.
빈센트는 화랑 점원, 광산촌 설교자 등의 일을 하다가 테오의 권유로 스물일곱 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사이 빈센트가 생전에 가족, 지인들과 교류했던 800통에 가까운 편지를 테오가 잘 보관하여 형제 사후 테오의 아내 요한나가 편찬해 출판해낸다.
고흐의 편지는 그의 삶의 이력과 예술세계를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그의 편지를 통해 지독한 가난 속에서도 많은 독서를 통해 얻은 풍부한 지식을 바탕으로 자연과 예술, 사랑과 인간에 대해 논했던 한 인간의 진솔하고 순수하며 맑은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고흐는 집안 내력으로 앓은 정신병이 악화되어 서른일곱 짧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다. 형인 빈센트 반 고흐가 별세하고 테오도 약 1년뒤 마비성 치매를 앓다가 별세했다.
고흐는 1890년 7월 27일 초라한 다락방의 침대 위에 스스로 가슴에 총탄을 쏘아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리고 7월 29일 새벽 1시 30분, 동생 테오의 품안에서 ‘이 모든 것이 끝났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기고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한다.
테오는 형이 별세한 이후 갑자기 건강이 악화되어 형이 별세한 지 6개월 만인 1891년 1월 25일, 서른셋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테오는 당시 빈센트 반 고흐와 많은 편지를 교환했다. 편지는 모두 688통이다.
이 방대한 편지는 오늘날 고흐 형제의 삶에 대한 퍼즐을 맞추는 데 많은 단서를 주고 있다. 그들이 주고받았던 편지 속에는 당시 그들의 행보, 고민, 생각들이 모두 담겨 있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지금 바로 나를 정신병원에 가둬버리든지 아니면 온 힘을 다해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내버려다오.
내가 미치지 않았다면, 그림을 시작할 때부터 약속해온 그림을 너에게 보낼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
나를 먹여 살리느라 너는 늘 가난하게 지냈겠지.
돈은 꼭 갚겠다. 안 되면 내 영혼을 주겠다.” _ 1888년 10월 24일 / 고흐가 테오에게
“형의 저번 편지에서 내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게 하나 있어. 이제 그게 뭔지 말할 테니 그후에 형이 원하는 대로 선택하기를 바라. 외인부대에 입대하겠다는 형의 계획을 말하는 거야.
그건 절망에 빠져서 내린 결정이야. 그렇지? 난 형이 그런 직업을 진심으로 좋아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 지금 형은 그림을 전혀 그릴 수 없고, 조금씩 건강을 회복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어. 그런 상황이 형에게 다시는 그림을 그릴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을 심어줬을 것 같아. 그러니 석 달 동안 일도 할 수 없으면서 비용만 드는 곳에 가서 보살핌을 받고도 벌어들이는 건 전혀 없을 거라고 고민했겠지.
하지만 형이 깊이 생각하지 않고 넘긴 게 있어. 형 말대로 군인이 되어 그림을 그릴 수는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럴 경우 형은 기숙학교에 있는 학생처럼 지내야 할거야. 만일 생레미의 요양원 같은 시설에서 받게 될 통제를 두려워한다면, 군대생활 속에는 형이 두려워할 일이 더 많을 거라고. 전체적으로 생각해 봤을 때, 그런 생각은 내가 과도한 지출을 하게 만들까봐 지나치게 두려워하고 걱정한 탓이 아닌가 싶어.
결국 형은 불필요하게 머리를 괴롭히고 있어. 작년은 내게 경제적으로 괜찮은 한 해였어. 그러니 내게 부담을 줄까 두려워하거나 망설이지 말고 내가 보내는 것을 받아 써도 괜찮아. 만일 생레미로 가는 것이 형에게 너무 불쾌한 일이 아니라면, 딱 한 달만 그렇게 하도록 해. 거기서 전문 의사들에게 검사를 받고 그들의 조언을 들을 수도 있을 테니 말이야.
생레미의 원장이 보낸 편지를 읽어 보니, 형을 직접 검진하기 전에는 외부 출입을 허용하는 일과 관련해서 어떤 언질도 줄 수 없다고 하더군. 하지만 그가 형을 만나보면 형이 밖에서 그림을 그리도록 허락할 게 분명해.
난 형이 아픈 원인의 대부분이 물질적 생활을 너무 무시해 왔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 생레미 요양원 같은 곳에서는 규칙적으로 식사시간을 지킬 테고, 그런 규칙성이 형에게는 덕이 되겠지. 형이 원한다면 엑스나 마르세유 쪽 시설들에서는 어떻게 하는지 알아볼게. 형이 알아야 할 건 어떤 관점에서도 형 자신을 불쌍히 여길 이유가 없다는 사실이야. 겉으로는 그렇게 보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야.
형이 완성한 작품들을 생각해 봐. 그런 그림을 그릴 수만 있다면 더 바랄게 없다고 소원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 형은 더 이상 뭘 바라는 거야? 뭔가 훌륭한 것을 창조하는 것이 형의 강렬한 소망 아니었어? 이미 그런 그림들을 그려낼 수 있었던 형이 도대체 왜 절망하는 거야? 게다가 이제 곧 더 훌륭한 작품을 만들 때가 다시 올 텐데 말이야. 퓌비 드 샤반, 드가, 그리고 다른 화가들을 봐도 그렇잖아? 형이 의지만 있다면 아주 빠른 시일 안에 다시 작업을 시작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해. 형이 작업실로 돌아가서 습기 때문에 그림에 곰팡이가 핀 걸 봤을 땐 절망감을 느끼기도 했겠지. 나도 무척 속이 상했어.
하지만 우리 희망을 갖기로 해. 형의 불행은 분명 끝날 거야.” _ 1889년 5월 2일 / 테오가 고흐에게
“가엾은 형 정말 안타까워.
우리는 드디어 귀여운 사내아이를 얻었는데
왜 형은 여전히 괴로움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걸까.
신은 형에게 대체 뭘 원하시는 걸까.
우리에겐 사내아이가 태어났어 형, 아내도 건강하고.
전에 말했듯이 형의 이름을 딴 빈센트 라는 이름을 붙이기로 했어.” _ 1890년 / 테오가 고흐에게
“저는 조카가 제 이름 대신 아버지 이름을 땄으면 더 좋았을 거예요.
요즘 들어 아버지 생각을 많이 하거든요.
하지만 이미 제 이름을 땄다고 하니, 조카를 위해 침실에 걸만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하얀 아몬드 꽃이 핀 커다란 나뭇가지 그림이지요.” _ 1890년 2월 15일 / 고흐가 어머니에게
“형의 죽음이 제게 얼마나 큰 슬픔을 안겨주었는지 상사도 못하실 거예요.
저는 평생 이 슬픔을 짊어지고 살아야 합니다.
이제 와서야 형의 작품을 칭찬하는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하지만 이젠 늦었습니다.
형은 제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유일한 형이었습니다.” _ 테오가 어머니에게
참고 = 위키백과, 교보문고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