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6년 1월 8일, 프랑스의 시인 폴 베를렌 (Paul-Marie Verlaine, 1844 ~ 1896) 별세
폴마리 베를렌 (Paul-Marie Verlaine, 1844년 3월 30일 ~ 1896년 1월 8일)은 프랑스의 시인이다.
프랑스 시 (詩)에서 가장 위대한 팽 드 시에클 (Fin de siècle, 세기말이라는 뜻)의 대표자 중 한 명이다.
○ 생애 및 활동
- 초기 생애
베를렌은 메스에서 태어나 파리의 리세 앵페리알 보나파르트 (Lycée Impérial Bonaparte)에서 공부하고, 파리 시청의 서기가 되었다.
어린 나이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으며, 고답파 운동과 그 선봉인 르콩트 드 릴 (Leconte de Lisle)의 영향을 받았다. 1863년 시인 루이자비에 드 리카르도 (Louis-Xavier de Ricard)가 창간한 출판물 ‘라 르뷔 뒤 프로그레’ (La Revue du progrès)에서 시를 최초로 출판하였다.
베를렌은 그가 그 당시의 특출난 예술가들인 아나톨 프랑스, 에마뉘엘 샤브리에, 샤를 크로 등과 교류하던, 루이자비에 드 리카르도의 어머니인 리카르도 후작 부인이 운영하는 살롱과 그외 다른 사교 장소의 단골이었다.
베를렌의 첫 번째 시집인 ‘사투르누스의 시’ (Poèmes saturniens)는 그를 장래성과 독창성을 가진 시인으로 올려놓았다.
- 결혼과 복무
마틸드 (Mathilde Mauté de Fleurville)를 향한 그의 사랑을 시작으로 베를렌의 사생활은 그의 작품에 흘러들어갔다. 1870년 마틸드는 베를렌의 아내가 되었다. 프랑스 제3공화국 선포로 국민위병에 가담하였고, 1871년 3월 18일에 코뮌 지지자가 되었다. 베를렌은 파리 코뮌의 중앙 위윈회 홍보국 국장이 되었으나 “피의 일주일”로 알려진 시가전을 탈출하여 파드칼레주로 피신하였다.
- 랭보와의 관계
1871년 8월 파리로 돌아와 9월에 아르튀르 랭보가 보낸 첫 번째 편지를 받았다. 1872년 새로운 애인인 랭보와의 함께 하며 마틸드에게 흥미를 잃고 아내와 아들을 방치하였다. 랭보와 베를렌의 폭풍과 같은 연애는 1872년 둘을 런던으로 인도하였다. 1873년 7월 브뤼셀에서 베를렌은 술에 취해 질투로 인한 분노로 랭보에게 2발의 총알을 쏘았고 1발이 랭보의 왼쪽 손목을 상처입혔다. 그러나 랭보의 상처는 그다지 심각하지는 않았다. 이 사고의 간접적인 결과로 베를렌은 체포되어 몽스에서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곳에서 베를렌은 가톨릭으로 개종하였고 이는 그의 작품에 영향을 주었으며, 랭보의 날카로운 비판을 유발하였다.
‘말 없는 연가’ (Romances sans paroles)에 수록된 시는 마틸드와의 생활에 대한 향수에 젖은 기억과 한편으로는 랭보와의 혼란스러운 일탈에 대한 스케치에 영감을 받아 1872년과 1873년 사이에 쓰여졌으며, 베를렌이 감옥에 있는 동안 출판되었다. 감옥에서 출소한 후 베를렌은 다시 영국으로 여행을 갔으며, 링컨셔 스티크니 (Stickney)에서 몇 년 동안 프랑스어와 라틴어, 그리스어를 가르치고 그림을 그리며 지냈다. 영국에서 또 다른 성공적 시집 ‘예지’ (Sagesse)를 펴냈다. 1877년 프랑스로 돌아왔으며, 르텔 (Rethel)의 한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중 제자 중의 한 명인 뤼시앵 레티누아 (Lucien Létinois)와 사랑에 빠졌고, 뤼시앵은 베를렌에게 시를 쓰도록 영감을 주었다. 베를린은 뤼시앵이 발진티푸스로 죽자 큰 충격을 받았다.
- 말년
베를렌의 말년은 약물 중독, 알콜 중독, 빈곤으로의 몰락을 맛보았다. 슬럼과 공공 병원에서 살았으며, 파리 카페에서 압생트를 마시며 나날을 보냈다. 다행히도 프랑스인들의 예술에 대한 사랑은 그에 대한 지원을 부활시켜 베를렌에게 수익을 가져다 주었다. 초기 작품은 재발견되었고, 생활 방식과 군중 앞에서의 이상한 행동은 감탄을 이끌어냈다. 1884년 그의 동료들은 그를 “시인의 왕자”로 뽑았다.
그의 시는 존경을 받았고 혁신적인 것으로 인식되었으며, 작곡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으로 작용하였다. 가브리엘 포레는 연작 가곡인 《베니스의 다섯 노래》(Cinq mélodies “de Venise”), 《우아한 노래》(La bonne chanson) 같은, 베를렌의 시에 곡을 붙인 다수의 가곡 (mélodie)을 작곡하였다. 클로드 드뷔시는 《우아한 축제》(Fêtes galantes)에서 6개의 시에 곡을 붙인 《클레르 드 륀》(Clair de lune)을 작곡하였다.
약물 의존과 알콜 중독은 베를렌의 발목을 잡아, 그의 인생에서 대가를 치르게 하였다. 베를렌은 파리에서 51세인 1896년 1월 8일에 죽었으며, 심티에르 데 바티뇰 (Cimetière des Batignolles)에 묻혔다.
○ 스타일
팽 드 시에클 동안 창작된 많은 프랑스 시는 선정적인 내용과 도덕적인 공상으로 인하여 퇴폐적이라고 특징지어졌다. 비슷한 문맥에서 베를렌은 스테판 말라르메 (Stéphane Mallarmé), 아르튀르 랭보 등의 시인들을 가리켜 “저주받은 시인” (poète maudit)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으며, 이들은 사회적 관행과 싸우고, 사회적 비난에 시달렸으며, 평론가들에게 무시당했다. 그러나 이는 1886년 장 모레아스 (Jean Moréas)의 《상징주의 선언》(Symbolist Manifesto)의 출판과 함께 그 새로운 문학적 환경에 가장 빈번히 적용되는 상징주의 용어가 되었다. 베를렌과 함께 말라르메, 랭보 등은 “상징주의 시인”으로 불리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쇼펜하우어의 미학과 유사한 주제와 의지력, 숙명론, 무의식적인 힘의 개념을 공유하였으며, 성 (性), 도시, 비이성적인 현상 (섬망, 꿈, 마약, 술)에 관한 주제와 모호하게 중세적인 배경을 사용하였다.
베를렌이 특징지은 바와 같이 상징주의적 시작 (詩作)의 절차는 엄밀한 서술보다는 모호한 암시를 사용하고, 언어의 마력을 통하여 분위기와 느낌을 환기시키며, 소리와 운문의 억양을 반복하는 것이다.
○ 평가
랭보와의 동성연애 스캔들로 더욱 유명해진 베를렌, 그 자신 더할 나위 없이 <저주받은 시인>이었던 베를렌의 방종 생활은 당대에 이미 전설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그토록 방종, 난폭했던 베를렌은 평생 다치기 쉬운 섬세한 감수성을 지니고 다녔다. 랭보는 한 편지에서 베를렌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아주 기이하고 무척 우스꽝스럽지만, 정말 근사합니다!”.
상징주의 시인들은 대체로 자신들의 시의 음악성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아무 것도 말하고 있지 않지만 모든 것을 말하고 있는 음악, 특히 음악의 환기성을 시에 가져오기 위해 상징주의 시인들은 부단히 애를 쓴다. 베를렌 시의 단순성과 음악성은 우수와 결합되어 깊은 감수성의 울림으로 독자에게 다가온다. 클로드 드뷔시를 비롯한 많은 음악가들이 그의 시에 곡을 붙인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시의 음악성과 관련해서 베를렌은 자신의 시 작법을 한편의 시로 쓴 것이 있는데, 그 처음 부분은 다음과 같다.
“무엇보다도 음악적인 것을, 그러려면 기수각을 선호하도록 보다 더 모호하고, 공기 속으로 더 잘 녹아들 수 있는, 짓누르거나 가라앉는 것이 그 안에 없는 기수각을. 그리고 의미가 분명한 시어를 선택하지 않도록 할 것. 애매한 것과 분명한 것이 결합되는 회색빛 노래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는 법.“ (시론 Art poétique 중에서)
베를렌의 대표적인 시집으로는 『아름다운 노래 : La Bonne Chanson (1870)』, 2년간 감옥 생활 중 쓴 『말 없는 연가 : Romances sans paroles (1874)』, 출옥 후에 쓴 『예지 : Sagesse (1880)』가 특히 유명하다.
1884년 그의 동료들은 그를 “시인의 왕자”로 추대한다.
○ 폴 베를렌의 시들
- 가을의 노래
가을 날
바이올린의
긴 흐느낌
단조로운
우수로
내 마음 쓰라려.
종소리 울릴 때면
나는 창백하고
숨이 막혀
옛날을
추억하며
눈물 흘리네.
그리하여 나는 가네
모진 바람이
날 휘몰아치는 대로
이리, 저리로,
마치
낙엽처럼.
Chanson d’automne – Paul Verlaine
Les sanglots longs
Des violons
De l’automne
Blessent mon coeur
D’une langueur
Monotone.
Tout suffocant
Et blême, quand
Sonne l’heure,
Je me souviens
Des jours anciens
Et je pleure
Et je m’en vais
Au vent mauvais
Qui m’emporte
Deçà, delà,
Pareil à la
Feuille morte.
< 주 >
이 시는 『토성시집 Poèmes saturniens, 1866』에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단순한 형식에 음악성이 뛰어나 레오 페레를 비롯해 많은 음악가가 이 시에 곡을 붙여 노래하고 있다.
이 시는 베를렌의 대표작 중의 하나이며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것이지만, 우리말 번역으로 이 시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느낀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프랑스 시를 우리말로 번역할 때 그 한계를 절실히 느끼게 되는 시이다. 얼핏 보면 사춘기 소녀의 애잔한 감상에 불과한 것처럼 보이는 이 시가 뭐가 그렇게 훌륭하다는 것일까.
1연만 분석해 보도록 하자.
Les sanglots longs
Des violons
De l’automne
Blessent mon coeur
D’une langueur
Monotone.
번역시를 가지고 운율은 따질 수가 없으니 그건 접어두기로 하자.
이 시의 내용은, 가을날에 어디선가 바이올린 소리가 들려와서 내 마음이 아프다는 얘긴데, 이것이 뭐가 그리 특별한가. 그런데 원문을 보면 사정이 달라진다. 프랑스어를 몰라도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여기서 바이올린 소리의 정체는 무엇일까. 원문의 1연을 자세히 보면 압도적으로 많이 쓰인 모음을 발견할 수 있다. ‘o’라는 모음이다. 이 짧은 싯귀 안에 무려 10개 ‘o’라는 모음이 들어있다. 심지어 마지막 6행에는 한 단어(Monotone)에 3개의 ‘o’가 들어있다. 우연일까. 그럴 리가 없다. 이 ‘o’ 하나하나는 가을날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메마른 나뭇잎들이다. 우선 형태상으로 ‘o’라는 모음은 나뭇잎과 상사를 이루며, 더 나아가 나뭇잎은 바이올린과 유사한 모습을 갖고 있다. 여기에 ‘o’라는 모음이 갖는 어둡고 음울한 음색이 더해진다. 이렇게 볼 때 ‘바이올린의 긴 흐느낌’이란 어디선가 누군가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소리라기보다는, 바람이 마른 나뭇잎을 스치고 지나가는 소리, 바람이라는 활대가 나뭇잎이라는 바이올린을 켜는 소리라고 유추할 수 있다. 시는 언어의 의미와 소리의 음악성의 복합체이다. 음악은 형식 그 자체일 뿐이다. 이 시는 의미보다 훨씬 형식(음악성)에 무게가 실려 있다. 시의 형식이 언어의 의미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이것이 상징주의 시의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이다.
- 하늘은 지붕 너머로
하늘은, 지붕 너머로,
어찌 저토록 푸르고 고요할까!
종려나무 한 그루, 지붕 너머로,
잎새들 바람에 나부끼네.
하늘 위로 보이는 종,
부드럽게 울리고,
나무 위 새 한 마리,
탄식을 노래하네.
아, 삶은 저기 저렇게,
단순하고 평온하게 있는 것을.
시가지에서 들려오는
저 평화로운 웅성거림.
ㅡ뭘 했니? 여기 이렇게
끝없이 울고만 있는 너,
말해봐, 뭘 했는지? 여기 이렇게 있는 너는,
네 젊음을 가지고 뭘 했는지?
Le ciel est par-dessus le toit – Paul Verlaine
Le ciel est, par-dessus le toit,
Si bleu, si calme !
Un arbre, par-dessus le toit,
Berce sa palme.
La cloche, dans le ciel qu’on voit,
Doucement tinte.
Un oiseau sur l’arbre qu’on voit
Chante sa plainte.
Mon Dieu, mon Dieu, la vie est là
Simple et tranquille.
Cette paisible rumeur-là
Vient de la ville.
Qu’as-tu fait, ô toi que voilà
Pleurant sans cesse,
Dis, qu’as-tu fait, toi que voilà,
De ta jeunesse ?
< 주 >
이 시는 『예지 Sagesse』에 수록된 것으로, 베를렌이 몽스 감옥으로 이감되기에 앞서 브뤼셀 감옥에 있었을 때 씌어졌다. 1873년 7월 베를렌은 랭보에게 2발의 권총을 쏘고 2년의 형량을 받아 감옥에 수감된다. 감옥에서 그는 젊은 아내와의 이혼 통지서를 받게 되는데, 이에 크게 충격을 받은 베를렌은 열렬한 가톨릭 신자가 된다. 이러한 개종으로부터 나온 시집이 『말 없는 연가 : Romances sans paroles』와 『예지 : Sagesse』이다.
- 내 마음에 눈물 내리네
거리에 비가 내리듯
내 마음에 눈물 내리네.
가슴 속에 파고드는
이 울적함은 무엇일까 ?
대지에도 지붕 위에도
오, 저 부드러운 빗소리!
답답한 마음에 스며드는
오, 비의 노래여!
울적한 마음에
까닭 없이 눈물 흐르네.
웬일일까! 아무런 원한도 없는데?…
까닭 없는 이 크나큰 슬픔은 무엇이란 말인가.
왠지 알 수 없는 슬픔이
가장 견디기 어려운 슬픔
사랑도 미움도 없는데
내 마음 이토록 괴롭다니!
Il pleure dans mon coeur – Paul Verlaine
Il pleure dans mon coeur
Comme il pleut sur la ville;
Quelle est cette langueur
Qui pénètre mon coeur ?
Ô bruit doux de la pluie
Par terre et sur les toits !
Pour un coeur qui s’ennuie,
Ô le chant de la pluie !
Il pleure sans raison
Dans ce coeur qui s’écoeure.
Quoi ! nulle trahison ?…
Ce deuil est sans raison.
C’est bien la pire peine
De ne savoir pourquoi
Sans amour et sans haine
Mon coeur a tant de peine !
<주>
이 시는 1874년에 나온 『말 없는 연가 Romances sans paroles』에 수록된 작품이다. 여기에서 ‘말이 없다는 것’은 시어의 의미보다 음악성을 강조한 말이다. 음악은 의미가 아니라 형식이다. 원문에서 보면 이 시에서도 동일한 시어의 반복과 운율을 통해 음악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빗소리는 시인의 슬픔을 증폭시키기도 하지만, 또한 ‘부드러운 노래’가 되면서 시인의 슬픔을 진정시킨다.
원문에서 특이한 표현은 베를렌의 신조어라 할 수 있는 ‘Il pleure’라는 표현이다. 문맥으로 보아 이것은 ‘나는 눈물 흘린다’라는 의미인데, 그렇다면 3인칭 주어인 ‘Il pleure’가 아니라 1인칭 주어의 « Je pleure »가 되어야 한다. 여기서 ‘Il’는 3인칭의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비가 온다’고 할 때 « Il pleut »에서처럼 비인칭주어로 사용된 것이다. 그런데 « pleurer 울다 »라는 동사는 비인칭동사가 될 수 없다. 이렇게 « Il pleure 울다»와 « Il pleut 비오다 »는 서로 혼융되면서 동일화하는 효과를 갖는다. 눈물과 빗물이 하나가 된다. 이런 이유로 « Il pleure »를 ‘눈물 흐르네’로 하지 않고 ‘눈물 내리네’로 번역하였다.
참고 = 위키백과, 교보문고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