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6년 11월 30일, 일제강점기 시인•문학평론가 김억 (金億, 1896 ~ ?) 출생
김억 (金億, 일: 岸曙生, 1896년 11월 30일 ~ ?)은 한국의 시인이다. 호는 안서(岸曙), 본관은 경주, 본명은 김희권 (金熙權)이며, 호를 따라 김안서 (金岸曙)로도 종종 불린다. 필명으로는 안서 (岸曙) 및 안서생 (岸曙生), A.S., 석천 (石泉), 돌샘 등을 썼다.
아버지 김기범 (金基範)과 어머니 김준 (金俊) 사이의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 김희권(金熙權)이라는 이름을 썼으나, 훗날 김억 (金億)으로 개명하였다.
○ 생애 및 활동
1895년 평안북도 정주 (定州) 출생으로, 1907년 오산학교 (五山學校)에 들어가 1913년 졸업했다. 1914년 일본 게이오의숙 [慶應義塾] 문과에 진학하였고, 같은 해 12월 재일본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의 (在日本東京朝鮮留學生學友會)의 기관지 『학지광 (學之光)』 제3호에 시 「이별 (離別)」을 발표하였다.
1916년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해 오산학교 교사로 부임하였으며, 1919년 폐교할 때까지 재직하였다. 1918년 『태서문예신보 (泰西文藝新報)』에 주로 프랑스 상징주의 시를 번역해 소개하였다. 11월부터는 같은 잡지에 자작시 「봄」·「봄은 간다」 등을 발표하며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1919년 2월부터 1921년 5월까지 『창조 (創造)』의 동인으로, 1920년 7월부터 1921년 5월까지 『폐허 (廢墟)』의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7월 세계어학회 (世界語學會)를 조직하고 회장을 맡아 에스페란토 (Esperanto) 보급운동에 나섰다. 1921년 1월 광익서관 (廣益書館)에서 간행된 『오뇌 (懊惱)의 무도 (舞蹈)』는 한국 최초의 현대 번역시집이었다.
1923년 4월 라빈드라나드 타고르 (Rabindranath Tagore)의 시집 『기잔탈리』를 번역하였다. 같은 해 6월 한국 최초의 현대 창작시집 『해파리의 노래』를 조선도서 주식회사에서 발간하였다. 1924년 5월부터 1925년 8월까지 『동아일보』 기자를 지냈고, 1924년 8월부터 1925년 1월까지 『영대 (靈臺)』의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1924년 8월 아더 시몬스(Arthur syrnons)의 시집 『잃어버린 진주』와 라빈드라나드 타고르의 시집 『신월 (新月)』과 12월 『원정 (園丁)』을 번역하였다.
1925년 3월 시집 『금모래』를 발간하였고, 같은 달 전조선기자대회 (全朝鮮記者大會) 준비위원회 서무부 (庶務部) 위원을 맡았다. 같은 해 8월 시집 『봄의 노래』를 간행하였으며, 11월에는 문예지 『가면 (假面)』의 편집장을 맡았다. 1930년 『매일신보』 문예란을 담당하였고, 1934년 경성중앙방송국에 입사하였다.
1937년 5월 조선총독부가 주도한 조선문예회에 참여하였고, 같은 해 9월 경성일보사와 매일신보사가 공동 주최하고 조선문예회가 후원한 ‘애국가요대회’에 「종군간호부의 노래」와 「정의의 사(師)」를 발표하였다.
1939년 10월 조선문인보국회 창립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1941년 1월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위원을 맡았다. 같은 해 2월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주최 좌담회 ‘문화익찬의 반도체제-금후 문화부 활동을 중심으로 하여’에 참석하였고, 8월 조선문인협회 간사, 9월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활동하였다. 1942년 3월 일본 육군기념일을 맞아 『매일신보』에 시 「육군기념일에서」를 기고하였다.
1943년 3월 조선문인보국회의 시부회 평의원을 맡았고, 1944년 1월 4일 『매일신보』에 태평양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신년송(新年頌)」을 발표하였다. 같은 해 8월 ‘애국 단가 (短歌)’를 편역한 『선역 (鮮譯) 애국백인일수 (愛國百人一首)』를 발간하였으며, 11월 첫 번째 조선인 가미카제[神風] 사망자가 나오자 『매일신보』 12월 7일자에 「님 따라 나서자-금원 (金原) 군조 영전에」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광복 후인 1946년 도서출판 수선사의 편집주간을 맡았고, 육군사관학교와 항공사관학교 강사를 지냈다. 1947년 2월 시집 『먼동 틀 제』를, 같은 해 3월 여류 한시를 번역한 시집 『금잔듸』를 발간하였다. 1948년 1월 김소월 작품집 『소월민요집』과 2월 시집 『민요시집』를 간행하였으며, 1949년 3월 번역시집 『옥잠화』를 출판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피난하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 있다가 계동 자신의 집에서 납북되었다.
저서로는 1925년 시집 『봄의 노래』, 1929년 『안서시집』, 1941년 『안서시초』, 1947년 『먼동 틀 제』, 1949년 『안서민요시집』이 있으며, 한시 번역시집으로는 1934년 『망우초 (忘憂草)』, 1943년 『동심초 (同心草)』, 1944년 『꽃다발』, 『지나명시선 (支那名詩選)』2권, 『야광주(夜光珠)』, 『선역애국백인일수 (鮮譯愛國百人一首)』, 1947년 『금잔듸』, 1949년 『옥잠화 (玉簪花)』가 있다.
편저로는 1939년 『소월시초』, 1948년 『소월민요집』이 있으며, 산문집으로는 학창여화 (學窓餘話)인 1931년 『사상산필 (沙上散筆)』과 1933년 서간집 『모범서한문 (模範書翰文)』 등이 있다. 이밖에 일본 고전 (古典)인 『만엽집 (萬葉集)』을 우리말로 번역하기도 하였다.
김억의 일제강점기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제2조 제11·13·17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Ⅳ-3: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 (pp.236~269)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참고 = 위키백과, 한국민족대백과사전, 교보문고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