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7년 6월 12일, 영국의 정치인 • 전 총리 앤서니 이든 / 제1대 에이번 백작 로버트 앤서니 이든 (Robert Anthony Eden, 1st Earl of Avon, 1897 ~ 1977) 출생
제1대 에이번 백작 로버트 앤서니 이든 (Robert Anthony Eden, 1st Earl of Avon, KG, 1897년 6월 12일 ~ 1977년 1월 14일)은 예비역 영국 육군 중위 출신의 영국 정치가로 3회의 외무장관(1935 ~ 38, 1940 ~ 45, 1951 ~ 55)과 45대 영국 총리, 영국 보수당 명예고문위원을을 지냈다.

– 앤서니 이든 (Robert Anthony Eden)
.출생: 1897년 6월 12일, 잉글랜드 더럼주 웨스트 오클랜드
.사망: 1977년 1월 14일 (79세), 잉글랜드 윌트셔주 솔즈베리
.국적: 영국
.학력: 옥스퍼드 대학교
.정당: 보수당
.배우자: 베아트릭스 베켓, 클래리사 이든
.자녀: Nicholas Eden, 2nd Earl of Avon, 사이먼 에덴, 로버트 에덴
.작위: 1대 에이번 백작, 가터 기사 (Order of the Garter)
.학력: 샌드로이드 스쿨 (졸업, -1910년), 이튼 칼리지 (졸업, 1910-1914년), 옥스퍼드 대학교 크라이스트 처치 (페르시아어학, 아랍어학 / B.A., -1922년)
.종교: 성공회
*영국의 제45대 총리
.임기: 1955년 4월 6일 ~ 1957년 1월 10일
.전임: 윈스턴 처칠(제44대) / 후임: 해럴드 맥밀런(제46대)
그의 막내아들은 예비역 영국 육군 중령 니콜라스 이든이다.
○ 생애 및 활동
- 초기 생애
영국 잉글랜드 지방 더럼주 웨스트 오클랜드에서 출생한 이든은 제1차 세계 대전에 복무한 후 옥스퍼드 대학교 크라이스트처치에서 동양어 (아랍어와 페르시아어)를 전공하였다 (1919년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 동양어학과 중퇴 이후 1932년 명예 학사 학위).
- 정치 경력
1923년 외무차관, 1934년 옥새관과 1935년 6월 국제연맹 정세를 위한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해 12월 외무장관이 되었으나 1938년 2월 네빌 체임벌린 총리의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에 유화 정책을 쓴 일에 대항하는 데 장관직을 사임하였다.
1939년 9월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지는 동안에 이든은 자치령 장관으로서 체임벌린 내각에 다시 들어갔다. 1940년 5월 10일 윈스턴 처칠이 총리가 될 때 이든은 전쟁장관으로 임명되었으나 12월 23일부터 보수당이 1945년 7월 패할 때까지 그는 다시 한번 외무장관을 지냈다.
그는 전쟁이 일어나는 동안에 외무장관으로서 여러 차례의 연합국 회담들에 참석하기로 알려졌고, 그 시기에 한국의 독립문제가 연합국 지도자들 사이에서 최초로 논의된 것은 1943년 3월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국무장관 코델 헐이 워싱턴 D. C.에서 당시 외무장관이었던 이든과 가진 회합 때였다. 이때 루스벨트는 “한반도를 일정 기간 동안 미국, 중국 및 소련 등 3국의 ‘신탁통치’아래 두었다가 독립시킨다.”는 의견을 처음으로 밝혔으며, 이든은 호의적 반응을 보였다.
1951년 처칠과 보수당이 다시 권력에 돌아온 후, 이든은 다시 외무장관이 되었고 또한 지정된 부총리이기도 하였다. 1954년 그는 영국-이란 간의 석유 논쟁을 가라앉히고, 이탈리아와 유고슬라비아 사이에 트리에스테를 두고 일으킨 불화를 해결하고, 인도차이나 전쟁을 멈추고, 동남아시아 조약 기구를 설립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1953년 심각하게 병이 든 이든은 몇몇의 수술을 받았어도 그는 완전히 자신의 건강을 회복할 수 없었다.
- 총리 재임
1955년 4월 6일 처칠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된 이든은 소련의 지도자들 니키타 흐루쇼프와 니콜라이 불가닌을 영국으로 환영하면서 국제적 긴장을 안정시키는 시도를 하였다.
1956년 6월 26일 영국 정부가 1875년 이래 주주로 지녀온 수에즈 운하 회사를 이집트이 지도자 가말 압델 나세르가 국유화할 때 이든의 몰락이 시작되었다. 이 행위는 이스라엘의 이집트 공격이 일어난 지 1주 후인 11월 5일 영국과 프랑스의 이집트 공격으로 이끌어졌다.
영국의 여론 조사는 노동당과 자유당이 기대해 온 것보다 이든의 군사 출연에 더욱 호의를 가졌으며, 그의 지지자들은 후회하였다. 하지만, 포트사이드, 이스마일리아와 수에즈의 주요 입장들을 점령하는 데 자신의 의지를 이행하지 않았다.
12월 22일 부분적으로 미국의 압박을 통하여 영국군과 프랑스군들은 유엔 긴급군들에 의하여 대체되었으나 수에즈 운하는 국제적 통치로 지배로 받기 보다 이집트의 손 안으로 놓아졌다.
1957년 1월 9일 건강 악화로 총리직을 사임하였다.
- 이후의 세월
1954년 가터 훈장 (The Order of the Garter, KG) 수훈이 내려졌고, 1961년 백작 작위 (1st Earl of Avon)에 서임되었다. 그의 회고록들은 3권으로 발행되었으며, ‘완전히 1회전하여’ (1960년), ‘독재자들을 향하며’ (1962년)과 ‘청산’ (1965년)이다.
79세의 나이로 윌트셔주 솔즈베리에서 간세포암으로 사망하였다.

○ 기타
낯을 무척 가리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대중 연설을 싫어했던 건 당연하고 심지어 내각 각료들과 만나는 것도 부끄러워했고, 내각 회의에 참가한 횟수보다 자신을 보좌하는 비서들과의 회의에 더 많이 참석했다.
왠만한 전문가보다도 셰익스피어와 그의 작품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었을 정도였다. 상술한 낯 가리는 성격도 대화에 ‘셰익스피어’일 경우에는 눈 녹듯이 사라졌다.
세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 사이먼 개스코인 이든은 공군 장교 (소위)로 62 비행대대에서 C-47의 항법사로 복무하던 도중 1945년 6월 종전을 코앞에 두고 버마 전선에서 실종됐다. 아들과 각별한 사이였던 앤서니 이든은 이 사실에 큰 충격을 받지만 담담히 외무장관으로의 책무를 다했다. 반면 이든의 아내는 아들의 실종 소식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결국 두 사람은 이혼을 하고 만다. 차남인 로버트는 태어나자마자 죽었고, 막내 아들이었던 니콜라스 이든은 아버지의 작위를 이어받았지만 1984년 에이즈로 사망하며 계승자가 없었기에 에이번 백작위는 2대 만에 단절되고 만다. 한편 이든은 부인과 이혼하고 비티 백작의 부인과 불륜을 저질렀고, 결국 이혼한다. 정작 이든은 처칠의 조카와 1952년에 재혼한다.
베니토 무솔리니에게 놀림받은 적이 있다.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당시 이탈리아가 국제연맹에서 나서는 것을 영국이 말렸을 때의 상황인데, 무솔리니는 이든을 가리켜 ‘유럽에서 가장 옷을 잘 입는 멍청이’라고 비웃었다. 반면 니키타 흐루쇼프는 이든을 ‘세기의 거물’이라고 대단히 호평했다고 전해진다.
외국어의 귀재였다고 한다. 외교관이라면 당연히 해야할 불어와 독일어, 중국어, 심지어는 페르시아어까지 원어민 수준으로 할 줄 알았다고 한다. 실제로 아돌프 히틀러, 저우언라이와 회담할 때 통역관이 딱히 필요하지 않았을 정도지만 외교 예절상 통역관을 대동했다고 전해진다.
재임 기간중 프랑스의 기 모레 전 총리가 프랑스와 영국 양국의 합병을 제안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영국 기밀문서를 인용한 BBC의 보도에 따르면 모레 전 총리는 지난 1956년 9월 10일 런던을 방문해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국가원수로 양국을 통일하는 방안을 타진했었다고 한다. 프랑스, 1950년대 영국에 국가합병 제안 프랑스는 이 시기 실지로 영연방 덕을 좀 보려고 했던게 있는데, 그런 발상으로서의 여왕 옹립이라고 보면 된다.
‘더 크라운’에도 등장한다. 윈스턴 처칠 재임기에는 그에게 은퇴를 종용하며 후임 총리를 노리지만, 정작 본인도 보수당 내부의 사퇴 압박으로 물러난다. 명예를 지키며 은퇴한 처칠과는 달리 병에 시달리며 수에즈 전쟁 벌였다가 해럴드 맥밀런에게 배신당한 끝에 초라하게 물러나야 했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