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8년 11월 21일, 만민공동회와 황국협회의 격돌
1898년 11월 21일 새벽 동틀 무렵 보부상들은 종로에서 집회를 열고 만민공동회를 규탄한 후, 두 패로 나뉘어 만민공동회를 습격했다. 한 진영은 남대문로를 거쳐 정동병문으로 향하고, 또 다른 진영은 길영수의 지도 아래 새문언덕 (서대문으로 향하는 광화문)을 거쳐 인화문으로 들어갔다. 이들은 좌우 양편에서 비무장의 만민공동회를 습격하여, 많은 부상자를 내고 만민공동회를 해산시켰다. 고종은 만민공동회가 해산된 줄로 알았고, 보부상들에게 백반과 육탕을 내어 격려했다. 시민들은 만민공동회의 피습 소식을 듣고 정동병문으로 모여들었고 종로의 상인들도 시장을 철시한 채 합세하였다. 인산인해를 이룬 인민들은 돌멩이를 산처럼 쌓고 보부상을 추격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파수를 보는 병정들의 도움을 받고, 새문 밖으로 달아났다. 이들을 추적했던 인민들은 다시 종로로 돌아와 대규모 만민공동회를 개최했다. 이날 서울 인민들은 5개 지역에 따라 기호 (旗號)에 맞추어 대오를 정비하고, 보부상에게 반격을 가하기 위해 돈의문으로 나아갔다. 결국 마포에서 만민공동회에 참여한 인민들과 보부상들이 격돌하였는데, 이 싸움에서 김덕구가 사망하였다.
- 내용
원래 황국협회는 1898년 7월 7일 鄭洛鎔을 회장으로 하여 황태자 (실제로는 황제)가 보낸 1,000원의 하사금으로 창립된 단체로서, 창립초에는 지방 행상인들인 보부상들의 권익단체의 성격을 표방한 것이었다. 그러나 황국협회는 실제로는 처음부터 수구파들이 의식적으로 독립협회에 대항하기 위해 창립한 단체로서, 황국협회의 보부상들은 황제와 수구파들의 정치적 폭력단체로 전화되고 있었다.
황제 고종이 11월 5일 독립협회를 혁파할 때 모든 협회를 혁파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으므로, 황국협회도 인민협회의 하나로 간주되어 함께 혁파되었었다. 그러나 서울 시민들에 의해 만민공동회가 자발적으로 조직되어 독립협회 지도자 17명의 석방과 독립협회 복설을 요구하게 되자, 황국협회는 실제로는 해산하지 않고 수구파의 비호와 조종을 받으면서 만민공동회를 공격하기 위한 본격적 도발행위를 시작하였다.
서울에 모인 보부상들은 11월 16일에는 머리에 패랭이 (平凉笠)를 쓰고 그 위에 목화송이를 꽂고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시위를 시도하였고, 총대위원을 농상공부에 보내어 <商務規則>의 개정과 인가를 요청하였다.
또한 11월 18일과 19일에는 전국 각도로부터 보부상들이 줄을 이어 서울로 들어와서 그 수가 수천이 되었으며, 경향 인심이 크게 소동하고 두려워하였다. 특히 11월 19일 보부상들은 농상공부 문 앞에서 대회를 열고 연좌시위를 하면서 인가장의 발급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황제가 농상공부대신 김명규에게 전화로 칙령을 내리어 황국협회의 <상무규칙>인가장을 발급해 주도록 명령했으므로, 농상공부대신은 부득이하여 이를 발급해 주었다. 이것은 사실상 황제의 특명에 의해 황국협회의 복설과 보부상들의 특권을 허여한 것이므로 이에 보부상들은 사기가 충천하게 되었다.
보부상들은 11월 20일 더욱 의기양양하여 집단행동을 시작해서 그들의 영수 吉永洙를 가운데 놓고 전후 좌우에서 호위하면서 종로를 향하여 시위행진을 감행하였다. 길영수는 마치 친위대 병정을 지휘하는 것과 같이 호령을 했으며, 그 위세가 전장의 군대와 같아서 길가의 사람들이 감히 길을 범하지 못하였다. 행렬이 종로에 도착하자 길영수는 마치 군인들 중의 대장과 같이 정좌하고 보부상들이 燭籠과 목봉 (나무몽둥이)을 들고 그 좌우에 나열한 것이 위세 당당하였다. 그들은 황제가 정책상 형식적으로 고등재판소에 구금한 이기동과 연락하여 그의 지령을 받으면서 각 방곡에 고시를 붙이고 시위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11월 20일 仁化門 앞에서는 시민들의 만민공동회가 연 16일째 벌어지고, 종로에서는 만민공동회에 대항해서 목봉으로 무장한 황국협회의 시위가 벌어져 사태는 매우 험악하게 되었다. 각국 공사관들도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보고 대비하기에 급급하였다.
1898년 11월 21일 마침내 충돌의 날이 밝았다.
만민공동회 제17일째인 이 날에도 만민들은 인화문 앞에서 철야 중에 총대위원을 정부에 보내어 정부 대신들을 초청해서 보부상의 폐해 작란에 대한 대책을 요구하였다. 정부 대신들은 보부상 단체의 혁파와 만민공동회의 피격 방지를 확약하고 돌아갔다. 정부 대신들이 돌아간 얼마 후 이른 아침, 보부상들은 종로에서 대회를 열고, 洪鍾宇가 등단하여 만민공동회 회장 고영근을 규탄하는 격렬한 선동연설을 한 다음 “일제히 인화문 앞에 진격하여 만민공동회를 쳐부수자”고 외치었다. 보부상들은 일제히 소리를 지르면서 호응한 다음 전원 몽둥이로 무장한 보부상 2,000여 명을 두 대로 나누어 오전 10시쯤 만민공동회를 향하여 진격하였다.
제1대의 약 1천여 명의 보부상들은 길영수의 지휘하에 정동 병문을 향하여 진격하였다. 경운궁 앞에 대로의 양면에 있던 소수의 파수 병정과 순검들이 이를 막다가 곧 물러서 버렸으므로 보부상들은 거의 저지를 받지 않고 만민공동회를 향하여 난입해 들어왔다. 제2대의 다른 1천여 명의 보부상들은 홍종우의 지휘하에 新門 고개를 넘어 들어오다가 병정과 순검들에게 처음에는 약간 저지되었으나 곧 이들이 밀리어 물러서자, 수미협공해서 인화문 앞에 만민공동회를 습격하였다.
이 때 시위대 대장 金明濟와 경무사는 칙령을 비밀리 받아 병정과 순검들로 하여금 보부상들이 만민공동회를 향해 진격하는 길을 열어주도록 하였다. 보부상들의 만민공동회 습격의 배후에는 고종이 관여되어 있었던 것이다. 의기충천한 보부상들은 일제히 소리를 지르며 만민공동회 대회장을 습격해서 몽둥이를 휘두르며 닥치는 대로 만민들을 난타하였다.
날씨가 흐리고 날이 채 밝지 않은 새벽인데 찬바람까지 불어닥치고 있는 중에, 17일째 연일 철야한 만민들은 애국심뿐이었지 정부의 말만 믿고 황국협회의 습격에 대한 방어대책은 처음부터 세우지 않았으며, 손에는 무기가 될만한 것을 전혀 갖고 있지 못했으므로, 물푸레나무 몽둥이로 잘 무장한 보부상들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도저히 대항할 도리가 없었다. 보부상들의 몽둥이에 난타당한 만민들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고, 몽둥이를 피하려고 이러 저리 쫓기게 되어 부상자가 부지기수로 나왔으며, 울음소리가 진동하여 만민공동회 대회장은 삽시간에 전쟁마당을 방불케 하는 참담한 수라장이 되었다. 梁弘黙 등 청년들이 길영수 등에 대항을 시도하다가 배재학당 안으로 쫓겨들어 갔으며, 일부의 만민들은 다급하여 바로 옆인 독일영사관 등 외국공관으로 담을 넘어 피신하였다. 이른 새벽 보부상들의 한바탕 몽둥이 폭력에 만민공동회는 막대한 부상자를 내고 패퇴하였다. 보부상들의 만민공동회 기습이 보부상들의 승리로 끝나자, 궁중에서는 이날 아침 백반과 육탕을 보내어 보부상들을 격려하였다.
황제와 수구파는 이것으로 만민공동회는 완전히 해산된 것으로 생각하였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지도자들은 신변의 위협을 느껴 은신상태이고, 회원들은 연 17일째의 철야시위로 지칠 대로 지쳐 있는데다가, 보부상들의 기습 난타로 많은 부상자를 내고 쫓기어 해산되었으므로, 이제는 시위대와 경무청으로 하여금 재집회만 못하도록 경비만 시키면 모든 것은 수구파의 전략대로 들어맞을 것 같이 보였다.
그러나 수구파와 황국협회 보부상들의 승리는 잠깐이었다. 분노한 시민들이 들고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이른 새벽 보부상들이 인화문 앞의 만민공동회를 습격했다는 소식이 성내에 퍼지자 격분한 시민들은 아침부터 정동 병문으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상인들까지도 모두 철시를 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모여들기 시작하여 정동 병문에 모인 시민들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격분한 시민들은 작은 돌멩이들을 주워다가 성처럼 쌓아놓고 보부상들이 쳐들어오면 타살하려고 기다렸다. 서울 시민들의 분위기는 마치 혁명 전야와 같이 들끓어 올랐다.
서울 시민들의 봉기에 놀란 보부상들이 사태가 완전히 역전되고 있음을 느끼고 오후 2시쯤 병정들의 호위 아래 新門 밖으로 도망치려 하자, 분노한 시민들은 돌을 던지며 추격하여 마침내 신문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신문의 파수 병정은 상부의 명령을 받고 보부상들은 통과시켜 주었으나 시민들은 제지하여 통과하지 못하게 막아 버렸다. 보부상들은 돈의문 밖에 있는 전 경기감영 건물에 쫓겨 도착해서 겨우 한숨을 돌리었다.
그러나 분노를 누르지 못한 시민들은 이번에는 다시 종로에 모여서 대규모의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였다. 이번에 모인 만민들은 인화문 앞에서 철야상소시위를 할 때 모인 만민보다 몇 배나 더 많은 대규모의 대회였다.
양홍묵 등이 등단하여 정부와 보부상이 야합해서 만민을 습격했다고 보고연설을 하였다. 다른 시민들도 다투어 올라가 정부와 수구파에 대한 성토연설을 하였다.
이에 더욱 분노한 서울 시민들이 궐기하여 보부상들을 완전히 분쇄해 버리려고 돈의문까지 이르렀으나, 병정들이 그들을 통과시켜 주지 않았다. 만민들의 울분을 이기지 못하는 호곡소리가 장안을 울리었다.
이 때 황제와 수구파들은 서울 시민들이 봉기하여 만민공동회를 지지하면서 보부상들을 몰아내어 보부상들이 쫓겨갔으며, 만민들이 다시 더 큰 규모로 종로에 모였다는 보고를 받고 매우 당황하였다. 황제는 경무사와 한성판윤을 만민공동회에 보내어 시민들을 회유하려 했으나, 시민들은 오히려 경무사를 포위하고 위협했으므로 긴급히 피신하는 형편이었다.
또한 이 때 일찍 서울 시내에 나무를 팔러온 나무장수들이 나무를 팔다가 만민공동회의 피습당한 소식과 이기동 등의 행패 소식을 듣고 분노를 이기지 못하여 이기동·조병식·민종묵·홍종우·길영수·유기환·윤용선·민영기 등의 가옥을 파괴해 버렸으며, 보부상들의 도가인 信義商務所도 파괴해 버렸다.
만민들은 시내의 곳곳에다 친러수구파 대신들과 보부상을 규탄하는 벽보를 붙이었다. 전 서울 시민들이 다투어 의연금과 의연품을 보내어 이날 종로에서 철야하는 만민들을 지지하고 성원하였다.
만민공동회 제18일째인 11월 22일에는 이른 아침부터 더욱 많은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종로에 모여들어 수만 명의 대규모 만민공동회가 개최되었다. 수만의 시민들은 각기 성내 5署의 깃발에 따라 나누어 대열을 지어서 기세를 올렸다. 분노한 시민들의 이러한 대규모의 자발적 궐기는 전에 없었던 일이었다. 만일 정부나 수구파가 이들에게 도발행위를 한다면 금방 혁명이 일어날 기세였다. 황제와 정부 대신들은 이 분노한 시민들의 자발적 봉기에 경악과 두려움을 금할 수 없었다.
이 때 마포에 사는 시민 하나가 만민공동회에 달려와서, 마포에 둔을 치고 있는 보부상의 행패가 크다고 보고하였다. 분격한 시민 수만 명은 보부상을 토파하기로 결의하고, 그 중 일부가 신문 밖으로 나가서 마포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이 때 시민들은 손에 목봉을 든 사람은 거의 없고 거의 모두가 빈손이었다. 반면에 보부상들은 폭력배화한 데다 긴 몽둥이를 들고 군사 편제로 진을 진 채 만일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으므로, 빈손으로서는 보부상들을 이길 수 없었다. 시민들과 보부상들 사이에 1회의 격렬한 전투가 전개되었으나, 시민들은 주먹을 휘두르고 보부상들은 물푸레 몽둥이를 휘둘렀으므로, 결국 회민 金德九가 중상을 입고 사망했으며, 李仁榮 등 10여 인이 모두 큰 부상을 입고, 마침내 시민들이 패퇴하였다.
시민들의 일부가 비록 보부상의 폭력에 패하였으나, 서울 시내 전체가 보부상에 대한 규탄으로 들끓고 있었으며, 절대다수의 시민들이 종로에서 대규모 만민공동회를 개최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학도들이 휴학하면서 계속 종로로 모여들고 있어 의기가 충천했으므로, 대세는 만민공동회의 완전한 승리로 예견되었다. 시민들은 보부상을 몰아내고 독립협회를 반드시 복설할 결의에 충만되어 있는 반면에, 보부상들은 시민들의 봉기에 극도로 위축되어 마포에 둔을 치고 움직이지 못하였다.
뿐만 아니라 군인들도 일부 고급장교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지지했으므로 사태는 만민들에게 결정적으로 유리하였다. 심지어 경무청의 순검들까지도 독립협회 · 만민공동회 (민회)를 지지하고 정부를 비판하여 사직하려는 움직임마저 벌어졌다. 이 때 황제 고종과 수구파들은 거의 고립무원의 상태에 있었다.
이미 서울 시내는 혁명 전야와 같은 분위기에 들끓고 있었으므로, 지도자들이 나와서 이 시민들을 조직하고 선동하면 시민혁명이 폭발할 형편이었다.
황제와 수구파정부는 이날 오전에도 만민공동회 탄압을 모색해 보다가 천하민심이 완전히 만민공동회로 돌아감을 보고 이날 오후부터 민의의 압력에 굴복하기 시작하였다. 황제는 태도를 돌변하여 조병식·유기환·이기동·김정근 등을 재판에 부치도록 하고, 홍종우·길영수·朴有鎭 등을 유배시키도록 명령하였다. 또한 황제는 독립협회 회장 윤치호를 불러들여 만민의 해산을 요청했으나, 이미 윤치호로서도 도저히 만민을 해산시킬 수 없는 상태에 있음을 듣고, 11월 22일자로 마침내 독립협회의 복설을 승인하였다.
만민공동회는 17명의 독립협회 지도자가 구속되고 독립협회가 강제 해산된 후 만 18일간의 불철주야의 완강한 투쟁을 통하여 마침내 독립협회 복설에 성공한 것이었다. 이것은 만민공동회와 시민들이 쟁취한 또 하나의 큰 승리였다.
만민공동회 제19일째인 11월 23일에도 시민들은 아직도 분한을 다 풀지 못하여 다투어 밀려가서 조병식·민종묵·유기환·이기동·홍종우 등의 가택을 수색하여 만민공동회를 모해한 서류들을 증거로 찾아내어 갖고 돌아왔다.
황제는 시위대와 순검들이 궁궐을 잘 호위하지 않고 만민공동회를 지지하여 사직을 원하므로, 11월 22일 밤부터는 각국 공사·영사와 그 가족들을 궁궐로 불러서 황제를 호위토록 하였다. 각국 공사·영사들은 황제 고종을 하룻밤 호위해 주고 나오는 길로 11월 23일 각국 사신회의를 열어 논의해 보았으나 여전히 통일된 대책이나 견해는 나오지 않았다. 오직 일본공사대리는 병력을 동원하여 만민공동회를 무력 탄압하도록 황제에게 권고하자고 영국공사와 미국공사를 설득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정부는 이날 내부대신서리와 경무사를 만민공동회에 보내어, 독립협회 복설이 승인되었으니 만민공동회를 해산하라고 요청하였다. 만민공동회는 다음과 같은 3개 조건을 내걸고, 그것이 수락되면 해산하겠다고 응답하였다.
①조병식·민종묵·유기환·김정근·길영수·박유진·홍종우 등 8逆을 즉시 체포하여 법률에 따라 처벌할 것.
②보부상들이 강변에 둔취하여 장정을 모집하고 金倉棒을 준비하는데, 이것은 서울을 바로 쳐들어가서 장안 백성들을 도륙하고 가옥을 불지르고 파괴하고자 함이니, 즉각 퇴산시키어 宗社를 편안히 하고 생령을 보호할 것.
③정부 대관은 賢良을 택용하여 반드시 나라 사람들이 可하다고 말한 연후에 임명할 것(鄭喬, ≪大韓季年史≫上, 345∼346쪽).
정부는 이에 대하여 3개 조항이 모두 정당한 것이므로 마땅히 실시하겠다고 약속하였다.
황제와 수구파정부는 만민공동회의 압력에 굴복하여 보부상 혁파를 명령하였다. 물론 비밀리에 궁중의 보호를 받는 보부상들은 이에 복종하지 않고 계속 마포 일대에 둔취하고 있으면서 지방에 통문을 보내어 자기 세력을 서울로 집중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보부상의 공식적 혁파는 일단 만민공동회의 승리라고 볼 수 있는 것이었다.
만민공동회는 보부상들이 정부의 해산명령에 불복하여 아직 퇴산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만민공동회를 일시 해산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하고, 윤치호 등이 중심이 되어 해산문제를 5시간이나 논의하였다. 윤치호는 지금까지 정부의 약속을 믿을 수는 없으나, 만민공동회의 불해산이 보부상의 불해산의 구실이 되고 있으니, ①황제의 해산 조칙을 전혀 불복하기는 어려운 실정이고, ②지금 단계에서 만민이 해산하지 않으면 각국인들의 오해를 받을 염려가 있으며, ③정부에게 무력 탄압을 자행할 구실을 제공해 주는 것이 되고, ④정부가 만민의 소원을 다 실시한다고 약속했으니 한 번만 더 속아보아 잘못된 점이 정부에 있음을 알게 함이 좋겠다고 제의하였다.
윤치호는 며칠동안 만민공동회가 해산하여 정부의 조치를 보아서, ①보부상도 퇴거시키고, ②보부상들을 일으켜 전국을 망하게 하려고 음모하던 무리도 법률에 따라서 처벌하며, ③五凶도 법률에 따라 처단하고, ④정부 대관들도 현량을 택용하고, ⑤무죄한 시민들도 다시 탄압하지 않으면 다행이요, 만일 그렇지 않으면 다시 모여 만민공동회를 계속하자고 제의하였다.
만민공동회는 이 제의를 채택하여 만민들이 사실상 승리했으니, ①만민공동회를 일시 해산하되, ②회원 중 300명을 선정하여 독립협회 사무소에 보내서 11월 24일부터 25일 오전 10시까지 대기하여 정부가 약속한 조항을 실시하는가의 여부를 지켜보고 있다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경우에는 즉시 만민공동회를 다시 소집하기로 하며, ③회원 중 200명을 별도로 선정해서 각 署내의 각 방곡에 순행 사찰케 하여, 보부상들이 문 안에 들어오는 것을 정탐하기로 하고, ④11월 23일 오후 8시를 기해 2일간 만민공동회를 해산하기로 결정하였다.
지난 11월 5일부터 11월 23일까지 만 19일 동안 찬 겨울비가 뿌려도 하루도 쉬지않고 수구파들의 폭력에 대결하면서 철야시위를 감행한 독립협회·만민공동회는 일단 지도자 17명 석방과 독립협회 복설의 쟁취에 성공하고, 11월 23일 밤 12시를 기해 2일간의 조건으로 일시 해산하여 귀가하였다.
황제와 정부는 만민공동회 해산에 대응하여 대신들을 개편하였다. 황제는 만민공동회의 지지를 받는 박정양을 의정부 참정, 閔泳煥을 내부대신 겸 임시서리 군부대신 사무, 김명규를 임시서리 의정사무, 權在衡을 농상공부대신, 李根澔를 경무사로 임명했으며, 문제의 탁지부대신 민영기는 사직케 하고, 협판 고영희를 서리 대신사무로 임명하였고, 한성판윤에는 윤치호를 임명하였다. 그러나 황제와 정부는 보부상의 해산에 대해서는 전혀 적극성을 보이지 아니하였다. 이를 본 참정 박정양과 내부대신 민영환은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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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 사는 김덕구씨가 충애하는 목적을 사랑하여 만민 공동회에 참례하였다가 천만 의외에 부상패의 난봉 (亂棒)중에 불행히 죽었다는 고로, 돌아간 일요일 독립협회 통상회에서 회원들이 공의하여 가라대 우리 독립 협회 회원들은 종로 공동회 만민과 전국 이천만 동포 형제를 대표한 총대라. 공동회 만민과 전국 동포가 곧 독립 회원이요, 독립 협회가 곧 전국 동포와 공동회 만민인즉, 만민 공동회와 전국 동포와 독립 협회가 무슨 분간이 있다 하리요.
금번에 부상패에게 맞아죽은 김덕구씨는 비록 독립협회 회원은 아니라도 만민 공동회에 참례하였던 이인즉, 공동회 만민은 우리들 대표시킨 전체라. 우리가 어찌 그 전체 되는 만민 중에 충의로 죽은 김씨의 죽음을 모른다 하여 심상히들 지내리요 하고, 독립 협회 회 중에서 우선 돈 십원을 그 죽은 김씨의 본집으로 보내어 상복들을 지어 입게 하고, 수전 위원 삼인을 뽑아 은행소에 앉아서 장례비 의조하는 돈을 받게 하며, 김씨의 장례에 호상할 위원 십인을 뽑아 일을 보살피게 하고, 음력 시월 십팔일 오전 팔시에 독립 협회 회원들이 일제히 사무소로 모여 김씨의 시신 있는 대로 가서 발인하여 산소로 가서 후히 장사 지내고 묘 앞에다 대한 충애하던 의사 (義士) 김덕구씨의 비라 새겨서 세우기로 결정이 되었는데, 독립 협회 회원들과 방청하는 만민 제씨가 각기 충애하는 마음으로 김씨의 죽은 것을 의리로 알며 영화로 여기고 비감한 눈물들을 금치 못하며 각기 자원하여 당장에 장례비 백원이 되었다더라.
독립 회원 아닌 이들도 충애지심이 간절한 이들은 각기 높은 의리로 장례비들을 은행소로 와서 자원들 하여 오늘부터 오일 내로 다들 대기로 작정하였다는데, 사람들이 다 말하기를 김씨는 충애하다가 죽었으니 참 대장부라 죽어서 꽃다운 이름을 천추에 유전한다고 모두 칭찬들 하였다더라. (독립신문 1898년 11월 29일자 잡보기사)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