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9년 9월 19일, 드레퓌스 사건으로 종신형으로 복역중인 알프레드 드레퓌스 (Alfred Dreyfus, 1859 ~ 1935)가 대통령 특사에 의해 석방
알프레드 드레퓌스 (프: Alfred Dreyfus, 1859년 10월 9일 ~ 1935년 7월 12일)는 드레퓌스 사건으로 알려진 프랑스 육군의 주요 인물이다.
드레퓌스는 포병 대위로서 참모 본부에 근무하던 중, 1894년 독일에 군사 기밀서류를 팔아넘긴 혐의로 체포되어 종신형을 받았다.
그러나 1899년 9월 19일에 종신형으로 복역중인 알프레드 드레퓌스가 대통령 특사로 풀려나고, 1906년 7월 2차 재심에서 무죄가 확인되어 복권되었다.

– 알프레드 드레퓌스 (Alfred Dreyfus)
.출생: 1859년 10월 9일, 프랑스 제2제국 뮐루즈
.사망: 1935년 7월 12일, 프랑스 제3공화국 파리
.배우자: 뤼시 드레이퍼스 (1891 ~ 1935)
.자녀: 피에르 드레이퍼스, 잔느 드레이퍼스
.형제자매: 마티외 드레이퍼스, 레옹 드레이퍼스, 자크 드레이퍼스 등
*군경력
.복무: 프랑스 제3공화국
.복무 기간: 1880 ~ 1918
.최종 계급: 프랑스 중령 (Lieutenant-colonel)
1859년 10월 9일, 프랑스 제2제국 뮐루즈에서 태어난 드레퓌스의 어린 시절은 풍요롭고 평범했다. 당시는 방직 산업이 잘 돌아가던 때였다. 그는 친구들과 친하게 지냈으며 친구들도 매우 신뢰했다고 전해진다. 학교 선생님들도 ‘성실하다’고 평가했다. 그는 유대인이었지만 그가 살고 있는 조국에 대한 애국심이 강렬했다. 군에서도 그를 ‘성실하며 군에 대한 충성심이 강렬하다’고 평가했다.
드레퓌스는 포병 대위로서 참모 본부에 근무하던 중, 1894년 독일에 군사 기밀서류를 팔아넘긴 혐의로 체포되어 종신형을 받았다. 재심의 가부를 둘러싸고 양 파가 생겼는데, 드레퓌스 파에는 인도주의 · 자유주의 · 공화주의적인 정치가와 지식 계급이 합세하고, 반대파에는 군국주의 · 국수주의, 반유대주의 · 국가주의, 카톨릭 교회등의 보수 세력이 합세하여 심각한 정치적 · 사회적 문제로 발전하였다.
1898년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라는 공개장 발표 후 재심되었으나 다시 유죄 판결을 받았다 (1899).
그러나 1899년 9월 19일에 종신형으로 복역중인 알프레드 드레퓌스가 대통령 특사로 풀려나고, 1906년 7월 2차 재심에서 무죄가 확인되어 복권되었다.
제3공화정 최대의 위기였다고 전해지는 이 드레퓌스 사건으로 프랑스의 정치는 민주적 방향으로 재편성되고, 사상 · 문학면에 있어서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 생애 및 활동
알프레드 드레퓌스는 독일 국경에 가까운 알자스 지방 밀조우에서 방직공장을 경영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남부럽지 않은 환경에서 자라났다.
그러나 그가 11세가 되던 1870년 보불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배함으로써 알자스는 독일영토로 병합되고 말았다. 이때 그는 정치가 개인의 삶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오는 것을 실감하면서, 군인이 되기로 결심하였다. 드레퓌스는 장교가 되겠다는 야망을 굽히지 않는 매우 고집 센 소년이었고, 우수한 학업성적과 뛰어난 두뇌 그리고 열성으로 1878년 수많은 직업군인을 배출한 폴리테크닉 사관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그는 성실한 사람이었지만, 말수가 적고 약간은 재미없는 고지식한 사람이었다.
또한 그의 관심은 오로지 학과성적 뿐이기에 동료들 사이에서 매우 재미없는 아이로 취급되었고 그는 자신의 이러한 평판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이러한 그의 사교성은 훗날 재판에서의 주변증언을 불리하게 한 요인으로도 작용하였다.
그는 학교생활과 군 생활에서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여러 가지 차별과 모욕을 당했지만 조국 프랑 스에 대한 사랑과 군에 대한 충성심으로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마침내 프랑스군 참모본 부의 수습참모로 등용됨으로써 착실히 군인의 길을 밟아 나갔다.
그는 1890년 31세에 대위가 되었으며 ‘뤼시 아다마르’라는 유태인 여성과 결혼했다. 온순하면서도 강인한 성격의 뤼시는 고지식한 드레퓌스를 매우 편하게 해주는 정숙한 아내였다. 자신이 처한 문제를 아내와 즐겨 상의했던 드레퓌스는 그녀가 있었기에 훗날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이겨낼 수 있었다.
그는 반유태주의적 경향은 일시적인 정치상황이라 여기고 자신의 뜻을 포기할 생각은 없었지만, 군의 핵심부서에 유태인이 한명 끼어있다는 사실은 프랑스 엘리트층, 그리고 군대와 같은 보수집단에서는 하나의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사회정치적 반유태주의적 경향은 장차 드레퓌스 사건의 예고라 할 수 있었다.

– 드레퓌스 사건
드레퓌스 사건 (Dreyfus Affair)이란 보불전쟁후 19세기 후반 프랑스를 휩쓸었던 군국주의, 반유대주의, 강박적인 애국주의 때문에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프랑스 포병대위 드레퓌스의 간첩혐의를 놓고 프랑스 사회가 무죄를 주장하는 드레퓌스파와 유죄를 주장하는 반드레퓌스파로 양분되어 격렬하게 투쟁했던 정치적인 스캔들로서, 국가권력에 의해 자행된 대표적인 인권유린, 간첩 조작사건을 말한다.
사회정의 실현과 진실규명을 위해 재심을 요구했던 드레퓌스파 (재심요구파)는 진보, 좌파, 공화파, 사회주의자들이었고, 반드레퓌스파는 재심을 반대하였으며 국시, 군대의 명예, 국익을 위해서라면 판결이 번복될 수 없음을 주장했고 군부와 로마 카톨릭 교회, 왕당파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본 사건은 블랑제 사건, 파나마 운하 스캔들과 함께 프랑스 제3공화국을 뒤흔든 3대 사건중 가장 큰 위기를 겪게 만든 정치적 사건이라는 평가가 있다.
이 사건은 1894년에 참모본부에서 근무하던 드레퓌스 대위의 필체가 프랑스 정보요원이 파리주재 독일 대사관에서 빼돌린 문서 (명세서)의 필체와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외딴섬에 유배되면서 시작되었다.
증거, 범행동기, 범행방법과 시기등이 명확치 않는 상태에서 무리하게 기소되었으며 실질적으로는 유대인이라는 이유가 드레퓌스를 진범으로 몰아갔던 것이다.
가족의 구명운동과 소수 지성인들의 노력으로 1897년 진범이 구속되었으나, 명백한 증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군부는 신뢰추락을 이유로 사건을 은폐하고 증거를 조작한후 진범을 풀어주었다.
이런 사실에 격노한 프랑스의 대문호 에밀 졸라가 “나는 고발한다”라는 글을 1898년 1월 신문에 게재하여 군부의 부도덕성을 대중에게 고발하며 진실을 알렸다.
이 글은 가히 폭발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며 대중을 분노하게 만들었고 프랑스 사회는 본격적으로 드레퓌스파 (재심파)와 반드레퓌스파 (재심반대파)로 나뉘어 내전 수준에 준할 정도로 격렬하게 투쟁하였다.
시위, 폭동, 결투, 테러, 빈번한 폭력사태와 유혈충돌이 벌어졌고, 가족간에도 이 문제로 인하여 심하게 다투는 일이 다반사로 벌어졌다.
정치적인 쟁점으로 비화되었고 국제사회도 이 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결국 다소간에 우여곡절을 겪기는 했으나 1906년에 재심을 통해 무고함이 입증되며 사건이 종결되었다.

이 사건으로 군부는 개혁이 진행되었으며 왕정복고를 기대하던 왕당파의 세력은 사라지고 공화정이 안착 되어갔다.
또한 사건이후 집권한 공화파 세력은 매우 엄격한 수준의 정교분리 정책을 과감하게 실시하여 공적영역에서 로마 카톨릭의 영향력을 철저하게 배제시키며 교회를 응징하였다.
이는 프랑스의 카톨릭 교회가 드레퓌스 사건중에 진실을 외면한채 거짓을 옹호하고 반유대주의 선동에 앞장서며 공화제를 반대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프랑스식의 정교분리인 라이시테 원칙이 수립되었으며 더 나아가 드레퓌스 지지파들의 이념과 전략들은 포르투갈과 스페인 그리고 라틴아메리카 전역에서 반교권주의 운동의 모델이 되었다.
한편, 파리에 주재하며 이 사건을 지켜본 유대계 오스트리아 언론인 테오도르 헤르츨은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건국하겠다는 시오니즘 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그의 주도로 1897년 스위스 바젤에서 제1차 시오니스트 대회가 개최되었으며 시오니스트 기구와 조직을 조직하였다. 시오니스트 회의는 이 후 1901년까지 5차례 개최되었다.
비록 테오도르 헤이츨이 1904년에 사망하였으나 그의 노력은 훗날 1948년 이스라엘 건국의 씨앗이 되었다.
에밀 졸라를 비롯한 소수의 정의로운 지식인들의 용기있는 활동으로 인해 지식인의 이미지가 좀 더 긍정적으로 변화하였다.
기존의 전통적인 지식인이란 단순히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는 엘리트 지성인 계층이었으나 드레퓌스 사건이후에는 사회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사회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앞장서며 참여하는 계층이라는 이미지가 더해지게 된것이다.
– 그 이후
그 이후 계급장을 돌려받고 소령으로 승진함은 물론, 레지옹 도뇌르 훈장까지 받게 된다. 제1차 세계 대전에도 참전하고 진급도 하고 일반 군인들처럼 생활하다가 1918년 최종계급 중령으로 전역했고, 1935년에 지병으로 별세했다. 파리의 몽파르나스 묘지에 묻혔다.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교보문고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