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3년 10월 31일, 영국의 경제학자 조안 로빈슨 (Joan Robinson, 1903 ~ 1983) 출생
조안 로빈슨 (Joan Robinson, 1903년 10월 31일 ~ 1983년 8월 5일)은 영국의 경제학자이다.
– 조안 로빈슨 (Joan Robinson)
.출생: 1903년 10월 31일, 영국 서레이
.사망: 1983년 8월 5일, 영국 케임브리지
.부모: 프레데릭 모리스
.배우자: 오스틴 로빈슨
.분야: 경제학
.영향을 준 인물: 존 메이너드 케인스, 피에로 스라파, 애덤 스미스, 미샤우 칼레츠키
.영향을 받은 인물: 니콜라스 칼도어, 야니스 바루파키스, 로빈 하넬, Eprime Eshag 등
1945년 그녀는 건설부의 건축 연구 자문 위원회에 임명되어 그 위원회의 유일한 경제학자이자 유일한 여성 위원이 되었다. 1948년에 그녀는 독점 및 합병 위원회의 첫 경제학자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49년에 그녀는 Ragnar Frisch로부터 Econometric Society의 부회장으로 초대받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읽을 수 없는 잡지의 편집 위원회에서 일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거절했다. 1960년대에 그녀는 Piero Sraffa와 함께 Cambridge Capital Controversy의 주요 참여자였다. 그녀의 학생 중 적어도 두 명은 Alfred Nobel을 기리기 위해 스웨덴 Riksbank 경제 과학상을 수상했다. 그들은 Amartya Sen과 Joseph Stiglitz이다. 노벨 재단에 대한 그의 자서전에서 Stiglitz는 그들의 관계를 “격동”으로 묘사했으며 Robinson은 “건방진 미국 학생의 질문 태도”에 익숙하지 않았다. 따라서 Stiglitz는 임기 후 “Frank Hahn으로 전환”했다. 자서전에서 센은 로빈슨을 “매우 훌륭하지만 사납고 편협하다”고 불렀다. 그녀는 또한 Manmohan Singh 인도 총리가 경제 정책에 대한 접근 방식을 바꾸도록 영향을 미쳤다.
○ 생애 및 활동
조안 로빈슨 (Joan Robinson, 1903 ~ 1983)은 1903년 10월 31일, 영국 케임브리지에서 출생해 1983년 8월 5일 (79세)에 별세했다.
그녀는 케임브리지의 가튼 칼리지에서 경제학을 공부했고 1925년 졸업 직후 경제학자 오스틴 로빈슨과 결혼했다. 1937년 그녀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경제학 강사가 되었다. 그녀는 1958년에 British Academy에 입학했고 1962년에 Newnham College의 Fellow로 선출되었다. 1965년에 그는 Garton University의 정교수이자 Fellow로 임명되었다. 그녀는 사망하기 불과 4년 전인 1979년 킹스 칼리지의 첫 여성 명예 펠로우가 되었다. 경제학의 “케임브리지 학파”의 일원으로서 로빈슨은 케인즈의 일반 이론을 지지하고 설명하는 데 기여했으며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저술했다. 1936년과 1937년 고용에 대한 영향 즉 대공황 동안 고용 역학을 설명하려고 시도했다.
로빈슨은 비순응주의자였다. 글을 쓸 때도, 학생을 가르칠 때도, 모든 일상에서 거침없었다. 1933년 발표한 <불완전경쟁의 경제학>은 독점이론을 발전시켜 신고전주의 경제학을 새로 썼다. 그의 저서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책이자, 정통파 경제학자들이 가장 많이 수용한 이론서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이 책에서 점차 멀어지더니, 1969년 복간본 서문에 냉혹한 비판을 싣기까지 했다.
조안 로빈슨의 초기 논문들은 그녀를 경제학 분야의 최전선으로 이끌었지만, 자기 자신의 혁명을 따르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하녀가 되기로 결심했다.
1931년 그는 남편 오스틴 로빈슨, 그녀의 지적 동반자 리차드 칸 (Richard Kahn), 그녀의 멘토 피에로 스라파 (mentor Piero Sraffa), 연구생 제임스 미드 (research student James Meade)와 함께 유명한 “케임브리지 서커스”를 결성하여 존 메이너드 케인즈의 최근 화폐론을 논했다.
그들은 수년에 걸친 토론 내용을 케인즈에게 전달했다. 이후 1936년 케인즈는 “케임브리지 서커스”의 토론 내용을 고려하여 자신의 후속 일반 이론을 저술했다.
로빈슨의 유명한 1933년 논문은 앞으로 다가올 일을 성급하게 공표했다. 그는 그 여파로 경제학에서 케인즈 혁명의 주요 전파자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는 1937년 케임브리지에서 정식 강사로 임명됐으며, 그 사이에 두 딸을 출산할 수 있었다. 그가 폴란드의 경제학자 미샤우 칼레츠키 (Michał Kalecki, 1899 ~1970)와 접촉하게 된 것은 이 무렵이었다.
그러면서 곧 카를 마르크스 (Karl Marx, 1818 ~ 1883)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의 1942년 에세이는 마르크스를 경제학자로 진지하게 받아들인 최초의 연구 중 하나였다. 그 에세이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반쯤 씹힌 존재가 되어버린 마르크스 경제학을 효과적으로 이끌어내는 데 도움이 되고 있다.
그는 노동가치이론에 감명받지는 않았지만 마르크스의 “확장된 번식 계획 (extended scheme of reproduction)”을 마르크스의 가장 흥미로운 공헌으로 확인했다.
1940년대와 1950년대에 그의 활동은 빠르게 계속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노동당과 영국 정부를 위해 다양한 경제 위원회에서 일했다. 그녀는 구 소련, 중국, 실론을 공식 여행하기도 했다.
1949년 그는 케임브리지에서 부교수 (reader)로 승진하여 연구소로 돌아와 정착했다. 영국의 경제학자로 (존 메이나드 케인즈의 삶, 1951)를 펴낸 로이 해러드 (Sir Henry Roy Forbes Harrod, 1900 ~ 1978)와 미샤우 칼레츠키 (Michał Kalecki, 1899 ~1970)의 영감을 받아 케인즈 혁명의 “다음 단계”로 “일반 이론의 일반화”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즉, 케인즈의 이론을 정적인 단기 이론에서 동적인 장기 이론 (“Oxbridge 프로그램”)으로 발전시킬 생각을 한 것이다. 그는 1952년 저서에서 이 프로그램을 발표했다.
그는 1954년 자본 집적의 문제에 관한 유명한 논문을 생산했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1960년대 경제학을 뒤흔들었던 케임브리지 자본 논쟁 (the Cambridge Capital Controversy / the Capital Controversy / the two Cambridge debate)의 첫 장면으로 간주된다. 간단히 말해서, 로빈슨은 이기종 자본재를 수집할 때 “자본의 양”을 가치로 정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생산된 재화 (자본과 같은)의 가격은 생산비용에 의해 결정되며, 이는 차례로 요소시장의 균형에서 얻는 임금과 이윤에 의해 결정된다. 이것은 이미 문제이다. 자본 측정 단위의 모든 목적은 수요 및 공급 자본의 양을 결정하는 데 도움을 주려는 것인데, 이 단위를 얻으려면 이미 그 가격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가격을 사용하여 가격을 결정하는 데 사용할 수량 (“자본”)을 결정한다(we are using price to determine a quantity (“capital”) that we are then going to use to determine price)! 이러한 추론은 순환적이다 (The reasoning is circular).
케임브리지 자본 논쟁 동안 조안 로빈슨은 미국의 네오 케인지안들에 대한 케임브리지 공격을 이끌었지만, 신고전주의 생산 및 분배이론 전체로 전선을 확대했다. 따라서 조안 로빈슨은 스라파와 함께 이후의 신 리카도학설 또는 케임브리지에서의 “고전주의 부흥”에 대한 부분적인 책임이 있다.
그의 인생이 끝날 무렵 그의 연구 작업은 주로 경제학의 방법론적 문제 (methodological problems in economics; 특히, “균형”이론에 대한 그의 불만을 강조)에 천착했으며, 케인즈의 일반 이론의 원래 메시지를 되살리려고 노력했다. 그의 많은 인기 저작은 많은 대중에게 널리 읽히면서 그에게 더 큰 명성을 가져다주었다.
1971년에는 미국경제협회 (American Economic Association)에 초대되어 도발적으로 연설하기도 했다. 케임브리지 접근방식을 더 많은 청중에게 알리려는 시도는 1973년 존 이트웰 (John Eatwell, 1946년생)과 함께 다소 독특한 “원칙” 교과서의 출판으로 절정에 달했지만, 상당한 진전을 이루지는 못했다.
참고로 존 이트웰은 상원의 재무 및 경제업무를 담당하는 정부요원 대변인으로 1992년 당대 종신귀족으로 상원에 합류하기도 했다.
또한, 로빈슨은 저개발국과 개발도상국의 문제(경제성장에 대한 연구의 자연스러운 결과물)에 매우 관심이 많았으며, 그 방향으로도 상당히 많이 공헌했다. 그러나 나중에 조안 로빈슨은 마오쩌둥과 그가 주도한 문화대혁명에 대해 찬사를 늘어놓음으로써 많은 적과 친구들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다.
- 연구활동
1933년 저서 《The Economics of Imperfect Competition》에서 판매자 독점의 구매자 대화를 묘사하는 데 사용되는 “수요독점 (monopsony)”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수요독점은 노동 구매자에게 일반적으로 적용되는데, 고용주는 피고용자의 착취를 허용하고 근로자에게 한계 생산성보다 낮은 임금을 부여 할 수 있다. 로빈슨은 여성 노동자와 남성 노동자간에 동일한 생산성을 가진 임금 격차를 기술하기 위해 수요 독점의 개념을 사용했다.
로빈슨은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 이론》 (1936)에 대한 지지와 설명에 공헌했으며 특히 1936년과 1937년의 고용 영향을 다뤘다.
1960년대에 피에로 스라파와 함께 케임브리지 자본 논쟁의 주요 참여자였다.
로빈슨의 업적은 헤아리기도 어렵다. 미시경제학의 신지평을 열었다는 ‘불완전 경쟁의 경제학 (1933년)’과 케인스의 단기이론을 장기화한 ‘자본축적론 (1956년)’의 저자이자 1950~60년대 영국과 미국을 달군 ‘자본논쟁’을 촉발하고 승리한 주역이다.
마르크스 경제학에 대한 최고의 분석가로도 꼽힌다. 대부분의 국가가 이웃에 손해를 끼치며 발전했다는 ‘근린 궁핍화 이론’도 만들었다.
‘경제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경제학자들에게 속지 않기 위해서’라는 말도 남겼다.
한국에서 그는 생소하다. 이름조차 꺼내기 어려웠던 억압의 시대 탓이다. 논문 ‘코리아 미러클 (1965년)’에서 북한의 경제기적을 극찬했다. 로빈슨은 더욱 잊혀질 것 같다. 케인스 경제학의 입지가 갈수록 좁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앞날을 내다보고 한 말일까. 35년 전 그가 처음 사용한 용어가 여전히 회자된다. ‘경제학의 위기.’
○ J·로빈슨과 영국경제학의 조류 : 경제학의 제2위기 호소
영국경제학계의 거성인 조안·로빈슨교수가 1983년 8월 5일, 영국 케임브리지에서 작고했다. 로빈슨교수는 반세기이상 창조적 선구적인 업적을 통해 세계경제학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아왔다.
그는 경제학의 안일한 흐름을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경제학의 장래에 따끔한경고를 내리기도 했다. 일본동대의 우택홍문교수가 경제학의 제2위기설을 주장한로빈슨교수의 경제업적을 평가했다. 그 요지를 일본경제신문에서 발췌해 싣는다.
- 일반이론 명쾌히설명
금세기 영국이 낳은 위대한 경제학자의 1인인 로자·룩셈부르크와 더불어 가장 영향력이큰 여성경제학자의 한사람인 조안·로빈슨여사.
그는 왜 빈곤이 발생하는가,또빈곤을 해결하는 방법은 무엇인가를 알고싶다는 욕구에서 경제학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경제학은 빈곤문제와 연관되어있다」는 것은 그의 긴 학문적생애를 통해 일관된 주제였다.
1929년 로빈슨은 마샬의「대표적기업」개념을 연구하여 마샬이론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 특히 이탈리아에서 파시즘에 쫓겨 케임브리지에 온 피에르·슬라파가 1926년 이코노믹 저널에 발표한「경쟁조건하의 수확체증의 법칙」에자극을받아 1933년「불완전경쟁이론」을 간행했다.
이「불완전경쟁이론」의 구성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은 리처드·칸이었다. 슬라파와 칸과는학문적 선배로서 또한 창조력의원천으로서 로빈슨의 생애에 큰영향을 미쳤다.
1930년 케인즈의「화폐론」1931년 리처드·칸의 명논문「국내투자의 실업에대한 관계」가 발표되면서「일반이론」에의길이 열렸다. 여기서 1931년4월 나중에「케인즈 서커스」로지칭하게된 젊은 경제학자들의연구회가 케임브리지에서 결성되어새이론에의 모색이 이루어졌다.
케인즈 서커스의 주요인물들은슬라파·칸 조안·로빈슨외에 오스틴·로빈슨 제임즈·미드 니콜라스·칼도 해로드·러너 등을꼽을수가 있다.
이 케인즈서커스사상은 1936년에 간행된 케인즈의「일반이론」으로 결실을 보았고 케인즈혁명이란 새로운 경제학의 조류를 창출해냈다. 조안·로빈슨은이케인즈혀명에서 주도적인 역할을담당했을뿐 아니라 새로운 경제학의 사상에서도 가장 탁월한 계몽가였다. 「일반이론」 간행전후에조안·로빈슨은 수많은 논문을발표,새경제학의 내용을 「일반이론」 자체보다 더욱 뚜렷하게 제시하고있다. 특히 「이자율과 기타연구」 「고용이론입문」 「고용이론연구」는 「일반이론」의 의미를 명확히설명하고 있을뿐 아니라 한걸음더나아가 그발전방향을 제시하기까지했다.
「일반이론」에 대한 해석으로써널리 알려지고 있는것은 힉스의 IS|LM분석을 통해 정학적균형이론으로서 이해하려고 한 것이었다. 힉스의 사상은 폴·새뮤얼슨에 의해 정력적으로 전개되어 소위 아메리칸 케인지언의 경제학을 구축하게 되지만 조안·로빈슨은 이같은 생각을 「조잡한케인지언」이라고 비판했다. 조안·로빈슨은 오히려 폴란드의 경제학자인 칼레키야말로 케인즈를올바로 이해하고 이 이론발전에 큰공헌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 자본축적 과정분석
케인즈는「일반이론」을 쓰면서 마샬의 영향에서 벗어나기위해 장기간 노력해야 했지만 칼레키는 마르크스의 분석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문제의 소재를 정확히 파악할수 있었으며 투자결정매커니즘 그리고 그것과 총 고용량의 관계에 대해 종종케인즈 보다도 정확한 분석을 전개했다고생각된다.
그러나 조안·로빈슨은 칼레키의 분석에 있어서는 자본에 대한이윤율이 어떻게 결정되는가 하는문제가 미해결인채로 남겨져있다고 지적한다. 같은문제가 해로드가 동태경제학서설에서 행한케인즈이론의 동학화에 대해서도존재하는데 로빈슨은 자본의 일반적이론의 구축을 시도해 경제발전의 장기적 분석이라는 고전경제학의 주요문제로 다시연구 했다. 그것은「일반이론」의 동학화내지는 일반화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56년에 출판된「자본축적론」에 집대성되었다.
「자본축적론」은 난해한 저서다. 론빈슨의 다른저작에 비해논리적 명쾌함도 뒤진다.
그러나 여기서 전개하는 이론은 자본주의의 제도적인 조건을명시적으로 정식화하고 자본의축적과정을 분석하고 임금과 이윤배분의 장기적 동향을 고찰하고자 하는것으로 경제성장에 관한신고전파이론의 테두리를 넘어새로운 분석 말하자면 케인즈이론의 일반화를 시도하고자 하는것이었다.
조안·로빈슨은 이과정에서 자본을 어떻게 측정하는가 하는 문제에 직면했다. 신고전파 이론에서는 이점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않고 실질자본량이란 개념을 도입,이윤율을 계산한다.
로빈슨은 자본량의 계측은 사실 이윤율수준에 의존하는 것임을 제시하고 신고전파이론에 있어서 이윤율의 개념이 모순을 내포한 것임을 지적했다.
이문제는 후에 이자율 수준의변화와 기술선택과의 대응이 일의적인가에 대한 여부를 가리는「리스위칭문제」로서 제기되어새뮤얼슨을 중심으로 하는 미국의 케임브리지와 조안·로빈슨과의 사이에 논쟁이 전개되었다.
이른바「케임브리지대 케임브리지 논쟁」인데 그것은 신고전파의 자본이론의 핵심에 관한 문제이기도 했다. 이 논쟁은 결국 조안·로빈슨의 주장이 타당하다는것이 증명되어 미국측의 패배로끝나게 됐다.
이 자본논쟁을 통해 조안·로빈슨은 미국 각대학에서의 경제학조류에 대해 점차 비판적으로되었고 얼마안가서는 자기자신의과거의 경제학연구에 대해서도반성을 하게 됐다.
로빈슨은 65년 케임브리지대학의 경제학교수로 취임했는데 그때의 강연이 신중상주의 성격이었다.
제2차대전후 많은 나라가 식민지에서 독립,근대기술을 도입하여 공업화를 통해 경제성장을꾀했다. 그러나 결과는 기대했던대로는 아니었다. 개도국의 경제발전가능성을 봉쇄한 것이 자유무역, 자유방임사상이다.
- 케임브리지 논쟁
로빈슨은 이 강연에서 자유무역은 사실상 중상주의의 한 변형에 불과하고 그에 의해 이익을얻는 사람들만이 신봉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만약 선진국이개도국의 발전을 진정으로 원한다면 선진국 자본가에게는 대체적 보수를 그리고선진국노동자에게는 대체적 고용을 제공하고,개도국으로부터의 수입이 가능한조건을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통파의 신고전파이론에 대해조안·로빈슨이 품고있는 위화감은 까다로운 이론적 논쟁의 형태로 표현되게 된다. 우선 1971년에 간행된「리단의 경제학」에 있어서 케인즈이전의 정통파경제학의 결함을 밝히는 것으로시작된다.
케인즈혁명이전의 정통파경제학은 균형의 신화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으나 제2차대전후에는성장의 신화에 의해 지배되었다.
새로운 신화도이전의신화와 마찬가지로 오류에 가득찬 경제이론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 이 때문에 인간생활이 시간의 흐름을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정확히 인식한 케인즈혁명의 핵심은흐트러지고 경제이론에서 시간요소를 배제한 전케인즈적 이론이부활되었다. 조안·로빈슨은 이를 신신고전파라고 불렀는데 그기본적 전제조건은『자본은 언제나 그형태를 자유롭게 변화시킬수 있다』는 가정이었다.
앞서 기술한 자본논쟁은 바로이점에 관해서 전개되는 것인데과거와 장래사이에 어떤 차이도없다는 공상적인 가정하에 성장의 문제를 논하려는 것이 신신고전파라는것을 조안·로빈슨은 신랄하게 비판한다. 「리단의 경제학」은 왈라스,마샬까지 거슬러올라가서 정통파 경제학의 이론적 전제조건을 검토하고 케인즈이론의 한계를 논하여 새로운 경제학의뼈대를모색하는것이었다.
1971년 조안·로빈슨은 미경제학회에서「경제학의 제2의위기」라는 제목의 강연을 하여청중에게 큰감명을 주었다. 조안·로빈슨이「경제학의 제2의위기」라고 칭한 것은 그녀의 생애에 있어서 제2의 경제학의 위기를 말한다. 제1의 위기는 1930년대에 일어났다. 세계적차원의 대공황을 앞두고 당시의정통파경제학|신고전파이논|은그 실효성을 완전히 상실했지만새로운 이론은 아직 형성되지 않았을때 일어났다. 토머스·쿤이말하는 패러다임의 붕괴인데 제1의 위기는「일반이론」의 출현으로 해결되고 케인즈혁명이 일어났다.
- 분배의 공정을 과제로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1970년대 세계의 자본주의는 또다시 커다란 혼란에 빠지고 불균형의 시대에 들어서게 되어 케인즈이론은 그유효성을 잃고 현실적타당성이 결여되었다. 그러나 케인즈이론을 대신할 새 경제학의패러다임은 아직 그형태를 나타내지 않았다.
이것이 조안·로빈슨이 말하는제2의 위기인데 여기서는 효율성보다는 오히려 분배의 공정,빈곤의 해소등이 긴급한 문제이다. 제1의 위기에서는 보다많은고용이 요구되었으나 제2의위기에 있어서는 무엇을 위한 고용인가가 중심과제라고 조안·로빈슨은 호소했다.
조안·로빈슨의 이시각을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계몽적으로 서술한것이 이트웰과의 공저인「현대경제학」이다. 이 책에서 그녀는 복잡하기 이를데없는 현실경제의 움직임을 분석하기위해서는어떤 사고방식이 필요한가를 기나긴 경제학의 역사를 통해 찾아내는것부터 시작한다. 그 논의는모두 역사적시간의 흐름속에서전개된다. 현재는 이미 변할수없는과거와 아직 알수없는 장래사이에 존재하는 단층이며 끊임없이움직이는것이라는 입장에서 불균형동학의 구상이 펼쳐진다.
제1의 위기에대한「일반이론」과 같이 로빈슨의「현대경제학」이제2의 위기를 해결하는 단서가될지는 이후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이다. 경제학이 제2의 위기는 아직도 진행중이며 조안·로빈슨은 우리들에게 커다란문제를제기해놓고 이 세상을 떠났다.
○ 저서
*Major works
The Economics of Imperfect Competition (1933)
Essays in the Theory of Employment (1937)
An Essay on Marxian Economics (1942), Second Edition (1966) (The Macmillan Press Ltd)
The Production Function and the Theory of Capital (1953)
Accumulation of Capital (1956)
Exercises in Economic Analysis (1960)
Essays in the Theory of Economic Growth (1962)
Economic Philosophy: An Essay on the Progress of Economic Thought (1962)
Freedom and Necessity: An Introduction to the Study of Society (1970)
Economic Heresies: Some Old Fashioned Questions in Economic Theory (1971) (Basic Books, New York)
Contributions to Modern Economics (1978) (Basil Blackwell, Oxford)
Further Contributions to Modern Economics (1980) (Basil Blackwell, Oxford)
- Texts for the lay reader
Economics is a serious subject: The apologia of an economist to the mathematician, the scientist and the plain man (1932), W. Heffer & Sons
Introduction to the Theory of Employment (1937)
The Cultural Revolution in China, Harmondsworth: Pelican Original (1969)
An Introduction to Modern Economics (1973) with John Eatwell
The Arms Race (1981), Tanner Lectures on Human Values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