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3년 5월 13일, 필리핀의 독립운동가•초대 총리 아폴리나리오 마비니 (Apolinario Mabini, 1864 ~ 1903) 별세
아폴리나리오 마비니 (스: Apolinario Mabini, 1864년 7월 23일 ~ 1903년 5월 13일)는 필리핀의 혁명가이자 독립운동가, 언론인, 작가, 정치인이다. 필리핀의 현대 헌법의 초안자이자 작성자이기도 하다. 필리핀의 행정원장을 역임했다. 필리핀 역사에서 그는 “위대한 마비니”, “혁명의 뇌” 등으로 불린다.

– 아폴리나리오 마비니 (Apolinario Mabini)
.출생: 1864년 7월 23일, 필리핀 도독령 탈라가 (現 필리핀 바탕가스주 탈라가)
.사망: 1903년 5월 13일, 필리핀 군도 도민정청 마닐라
.성별: 남성
.국적: 필리핀
.학력: 산후안데레트란대학, 산토 토마스 대학 법학박사
.경력: 필리핀 혁명정부 행정원장(수상), 외무부장관
.직업: 혁명가, 독립운동가, 언론인, 작가, 정치인
.소속: 카티푸난
농촌 출신으로 마닐라의 산후안데레트란대학에서 수학하고 1894년 산토 토마스 대학에서 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소아장애와 가난을 극복하고 법률가가 되었으며, 독립과 독립 이후의 혁명정부를 꿈꾸었지만 투옥 생활을 반복했다. 혁명정부를 구상해 낸 필리핀의 위대한 역사적 인물로 후에 필리핀의 국부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았으며 초대 수상과 외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1896년 8월 민족주의자 반란에 가담해 애국지사 안드레스 보니파시오 장군의 군대에 들어가 그의 심복이 되고 카티푸난의 이론가로 활동했다. 뒤이어 에밀리오 아기날도의 심복이 되어 그를 돕다가 필리핀 혁명정부 행정원장 (수상)과 외무부장관에 선임되었다.
1898년부터 미국의 식민통치에 저항하여 독립을 꾀하다가 1899년 미국에 의해 강제로 해임당한 뒤, 체포되어 괌으로 유배되었고, 1903년 석방되어 필리핀으로 귀국했으나 같은 해 5월 콜레라로 39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하였다. 필리핀 최초의 현대 헌법 초안의 작성자이기도 하다. 필리핀 화폐 1페소 지폐 도완에 들어간 인물이자 현행 10페소 도안에 안드레스 보니파시오와 함께 들어갔다.

○ 생애 및 활동
– 학창 시절
아폴리나리오 마비니는 1864년 7월 23일 필리핀 바탕가스의 탈라가에서 이노센시오 마비니와 디오니시아 마라난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가난하였지만 아폴리나리오는 어려서 할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글쓰기와 읽기를 배웠다. 총명하였지만 집안 형편상 학업을 할 수 없었던 그는 심플리시오 아벨리노 초등학교에 입학, 소아장애로 고통을 받으면서도 어린나이에 심부름꾼, 잡부, 숙박업소의 종업원 등을 하며 심플리시오 아벨리노 초등학교를 고학으로 졸업하였다.
그 후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고, 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뒤 아폴리나리오는 마닐라의 산후안 데 레트란 단과대학의 문과에 입학하여 세계사를 전공하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마비니의 어머니는 그를 성직자로 키우려 했지만 그는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겠다는 신념으로 어머니의 뜻을 저버린다. 그 후 산후안 데 레트란 단과대학 졸업 후 대학 편입학을 포기하고, 잠시 교사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마비니는 공부를 더 하고싶은 욕심에 노동으로 1888년 산토 토마스 대학에 입학하여 법학을 전공했다.
– 민족 해방과 혁명 운동
그 뒤 열강의 침략이 가시화되자 안드레스 보니파시오, 에밀리오 아기날도 등과 함께 스페인 등에 저항하는 민족 해방 운동에 참가하였다. 1896년 8월 민족주의자 반란에 가담해 애국지사 안드레스 보니파시오 장군의 군대에 들어가 그의 심복이 되고 카티푸난의 이론가로 활동했다. 뒤이어 에밀리오 아기날도의 심복이 된다. 그러나 1896년말 아폴리나리오는 갑자기 열병에 걸려 몸에 마비증상이 왔고, 전신마비라는 신체적인 결함으로 인해 마비니는 안드레스 보니파시오와 카티푸난의 무장 혁명운동당시 활동적인 부분을 담당하지는 못했으나 카티푸난의 이론가이자 혁명의 이론가로서 참모 역할을 하였고 혁명의 제2단계 실현에 기여하였다.
1897년 병중에도 필리핀을 지배해 온 스페인에 맞서는 독립 운동에 가담했으며 카티푸난의 이론가이자 핵심 참모로 활동했다. 스페인-미국 전쟁 당시 그는 아기날도의 수석 고문으로 활동했다. 이때 그는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미국과 손잡을 것을 주장했다. 그 뒤 카티푸난에서 아기날도를 대통령으로 선출하자 이를 지지하였다.

– 정부 수립
.미국과의 갈등
그는 혁명정부를 구상하고 1898년 1월 아기날도 정부의 행정원장과 외무부장관을 역임하였다. 미국과 필리핀 혁명 정부 사이에 무력 총돌이 발생하자 그는 평화를 위한 협상을 제안했다. 그러나 협상 중 그가 제시한 조건에서 미국인들이 아기날도의 새로운 정부와 마비니 내각의 자율성을 인정할 것을 주장하는 조건이 있어 미국측은 협상을 거절했다. 마비니는 다시 협상을 추진하지만 회담은 또 다시 결렬되었다. 결국 그는 미국의 협상 거부가 필리핀 침략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라고 보고 독립 전쟁을 결심한다. 1899년 5월 7일 일단 총리직을 사임했다.
그러나 그는 외무장관이었고, 1899년 8월 혁명국회에서 대법원장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1898년 9월부터 최초의 현대 필리핀 헌법 초안을 작성, 10월 교역도시 말롤로스에서 열린 정치집회에서 이를 발표하였다. 마비니는 미국헌법을 참조, 이와 유사한 헌법을 기초했다.
.독립 전쟁 참여와 투옥
독립선언을 한 후 아귀날도가 정부를 개편하자 아폴리나리오 마비니가 아기날도 정부의 고문이 되었다. 마비니는 아귀날도에게 독재 정부를 포기하고 개방형 혁명 정부를 세울것을 충고했으나 거절당했다. 아기날도는 슬하에 5명의 장관을 두고 혁명국회는 새 법을 제정했다.
스페인을 몰아내고 독립하는데 성공했지만 다시 미국의 필리핀 침략이 가시화되자 그는 미국의 영향력 확장에 맞서 자립론을 주장하였다. 미국이 필리핀에서 영향력을 강화하자 이를 합병하려 하는 것으로 보고 아폴리나리오는 아기날도와 다시 독립운동을 벌였다.
1899년 12월 아서 C. 맥아더 주니어는 미국 상원을 움직여 마비니를 추방해야만 될 이유를 설명했고, 그는 미 당국에 의해 강제로 해임당한 뒤 체포, 투옥되었다가 1900년 10월 3일 풀려났다.
– 투옥과 최후
그러나 옥중에서 심해진 질병으로 운신이 불편하였고 그 뒤 마닐라의 작은 오두막 집에서 정치 기사와 칼럼 등을 작성하며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미국 식민지 정부에 협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1901년 괌으로 유배되어갔다. 저서로는 사후 출간된 <필리핀 혁명 La revolución filipina>이 있다.
1903년 2월 다시 풀려나 필리핀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지만 5월 13일 콜레라에 걸려 마닐라 외곽의 자택에서 39세로 사망했다.
– 사후
마닐라 외곽에 있던 그의 집은 1968년도 사적지로 공인되었으며 그의 생존당시 고가구, 도기 및 식기류, 부엌의 모습이 담긴 사진들이 그대로 보존되었으며, 후일 마비니 기념관으로 개편되었다.
후일 필리핀의 독립 이후 필리핀 지폐 1페소 도안에 들어갔다가, 나중에는 10페소 도완에 들었다. 그 뒤 현행 필리핀 화폐 10페소 도안에 안드레스 보니파시오와 함께 들어있다.

○ 사상과 업적
마비니는 필리핀 혁명과 필리핀-미국 전쟁 시기에 활동한 법률가이자 정치가로, 그의 사상과 업적은 필리핀 근대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는 뛰어난 법률 지식과 정치 철학을 바탕으로 혁명 정부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고 초기 공화국의 운영에 깊이 관여했다. 이러한 핵심적인 역할로 인해 그는 종종 “혁명의 두뇌”(Cerebro de la Revolución 세레브로 데 라 레볼루시온)로 불린다.
마비니는 호세 리잘 등이 활동한 개혁 운동에 참여했으며, 리잘 처형 이후 본격적으로 혁명에 투신했다. 에밀리오 아기날도의 신임을 얻어 그의 핵심 고문이 되었고, 필리핀 독립 선언 이후 수립된 혁명 정부의 법령과 말롤로스 헌법 초안 작성에 기여하며 정부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제1 필리핀 공화국의 초대 총리 겸 외무부 장관으로서 신생 국가의 중대사를 처리하고 미국과의 협상에 임했으나, 필리핀의 완전한 자치를 주장하며 미국의 제안을 거부하고 결국 전쟁을 지지하게 되었다.
한편, 젊은 시절 소아마비로 인해 평생 다리를 쓰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혁명에 헌신한 그의 삶은 많은 필리핀인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고결한 불구자” (Dakilang Lumpo 다킬랑 룸포) 라는 별칭으로 기려진다. 그는 법을 통한 사회 정의 실현과 민주주의 원칙을 중시했으며, 특히 지도자의 도덕성과 능력주의를 강조하며 아기날도 정부의 문제점을 비판하기도 했다. 그의 저술과 활동은 필리핀의 민주주의와 인권 사상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 ‘혁명의 두뇌’
마비니는 필리핀 혁명과 필리핀-미국 전쟁 시기에 그의 법률 지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언론인이자 필리핀 국민예술가인 닉 호아킨은 마비니의 모든 역사적 기여가 법과 관련되어 있다고 지적하며, “그는 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아이디어로서, 이상으로서의 법에 관심이 있었다 […] 그가 우리 역사에 나타날 때마다 그는 합법성의 문제를 논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마비니는 1892년 9월 프리메이슨에 가입했으며, 이듬해 호세 리잘 체포 후 부활한 라 리가 필리피나의 회원이 되어 최고 평의회 서기를 맡았다. 그는 개혁 운동을 지지했으나, 리잘의 처형 이후 혁명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입장으로 돌아섰다.
1898년, 건강 악화로 로스 바뇨스에서 요양 중이던 마비니는 에밀리오 아기날도의 부름을 받았다. 아기날도는 마비니가 저술한 El Verdadero Decálogo| 엘 베르다데로 데칼로고 (참된 십계명)와 Ordenanzas de la Revolución 오르데난사스 데 라 레볼루시온 (혁명의 법령)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그를 혁명 정부의 고문으로 삼고자 했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교대로 해먹을 운반하여 마비니를 카위트로 데려왔다.
마비니는 1898년 6월 12일 필리핀 독립 선언 이후 아기날도의 수석 고문으로 활동하며, 1898년 6월 18일 필리핀의 독재 정부 수립 칙령을 작성했다. 그는 또한 말롤로스에서 수립된 혁명 정부의 틀을 마련하고 말롤로스 헌법 초안 작성에 기여했다. 1899년 1월 21일 제1 필리핀 공화국의 말롤로스 헌법이 공포된 후, 마비니는 초대 총리 겸 외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첫 내각을 이끌었다.
총리로서 마비니는 신생 공화국의 중대한 문제들을 다루어야 했다. 특히 1899년 3월 6일부터 시작된 미국과의 협상은 중요한 과제였다. 미국은 아기날도 정부에 자치를 제안했지만, 마비니는 휴전을 협상의 전제 조건으로 내세웠다. 이 조건이 거부되면서 협상은 결렬되었다. 마비니는 재차 협상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자, 미국이 ‘선의’를 가지고 협상에 임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전쟁을 지지하는 입장으로 돌아섰다. 그는 1899년 5월 7일 정부에서 사임했다.
이러한 혁명 정부 수립 과정에서의 핵심적인 역할과 정치적 기여로 인해 마비니는 종종 “혁명의 두뇌” (Cerebro de la Revoluciónes)라고 불린다. 이는 초기 혁명 운동인 카티푸난에서 비슷한 역할을 했던 에밀리오 하신토와 공유하는 칭호이기도 하다. 그러나 암베스 오캄포와 같은 현대 역사가들은 이 별명이 마비니의 복합적인 삶과 유산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
– ‘고결한 불구자’
마비니는 필리핀 혁명 직전에 소아마비로 인해 다리를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혁명에 헌신한 공로로 필리핀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이러한 그의 삶은 “고결한 불구자” (Dakilang Lumpo 다킬랑 룸포) 라는 별칭으로 상징되며, 이는 마비니를 필리핀에서 가장 시각적으로 인상적인 국가 영웅 중 한 명으로 만들었다.
마비니가 필리핀 역사에 남긴 복합적인 기여는 종종 “혁명의 두뇌”와 “고결한 불구자”라는 두 가지 역사적 별칭으로 요약되곤 한다. 그러나 암베스 오캄포와 같은 현대 역사가들은 이 두 별칭이 마비니의 삶과 유산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며 “영웅의 삶과 유산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아니다”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필리핀의 전 군정 장관이었던 아서 맥아더 장군은 1902년 미국 상원의 로지 위원회에서 마비니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마비니는 불행히도 마비된 고도로 교육받은 젊은이입니다. 그는 고전적인 교육을 받았고, 매우 유연하고 상상력이 풍부한 정신을 가지고 있으며, 마비니의 견해는 제가 만난 어떤 필리핀 사람들보다 더 포괄적이었습니다. 그의 아이디어는 말레이 연방의 꿈이었습니다. 루손이나 필리핀 군도가 아니라, 그 피를 의미합니다. 그는 몽상가이지만 매우 강인한 성격과 매우 뛰어난 업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불행히도 그는 마비되었습니다. 그는 젊은이이며 그의 질병이 아니었다면 의심할 여지 없이 그 섬들의 미래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_ 맥아더
필리핀 대통령 베니그노 아키노 3세는 2015년 영화 헤네랄 루나에서 마비니가 묘사된 것을 계기로, 필리핀 학생들이 마비니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 언급하며 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우리는 우리가 ‘고결한 불구자’와 ‘혁명의 두뇌’라고 부르는 사람의 우리나라에 대한 기여의 깊이와 폭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 없습니다. 그는 필리핀 국민의 지성과 신념을 대표했습니다. 그의 날카로운 정신은 우리 민주주의 제도의 토대를 강화하는 그의 무기였습니다.’

– 민주주의와 인권 사상
마비니는 어머니의 바람과는 달리 사제가 되는 대신, 가난한 이들을 돕고자 하는 열망으로 법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이는 그의 사상이 사회 정의와 약자 보호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아테네오 데 마닐라 대학교에서 문학사를 최우수로 마치고 라틴어 교수 자격을 얻었으며, 이후 산토토마스 대학교에서 법학 학위를 취득했다.
언론인이자 필리핀 국민예술가인 닉 호아킨은 마비니 세대가 호세 리잘과 같은 이전 세대와 달리, 필리핀 내에서의 교육만으로도 국가를 운영할 지적 역량을 갖추었음을 증명했다고 평가했다. 이는 필리핀 지식인 사회의 성장을 보여주는 중요한 대목이다. 마비니는 법학 학위를 받은 후에도 변호사 개업 대신 공증인 사무실에서 일하며, 자신의 법 지식을 필리핀 혁명과 필리핀-미국 전쟁 시기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는 단순한 법률 기술자가 아니라, 법을 이상적인 사회 건설의 도구로 여겼으며, 특히 ‘합법성’의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었다.
건강 문제로 요양 중이던 1898년, 마비니는 에밀리오 아기날도의 요청을 받아 혁명의 핵심 고문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이 시기 그는 El Verdadero Decálogo 엘 베르다데로 데칼로고 (참된 십계명)와 Ordenanzas de la Revolución 오르데난사스 데 라 레볼루시온 (혁명의 법령)과 같은 중요한 문서를 저술했다. 아기날도는 그의 능력에 깊은 인상을 받아 그를 카위트로 불렀고, 마비니는 필리핀 독립 선언 이후 아기날도의 수석 고문으로서 활동하며 혁명 정부의 기틀을 마련하고 말롤로스 헌법 제정에 기여했다. 1899년 제1 필리핀 공화국이 수립되자 초대 총리 겸 외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첫 내각을 이끌었다.
총리로서 마비니는 신생 공화국이 직면한 여러 난제, 특히 미국과의 관계 설정 문제에 몰두했다. 그는 미국과의 평화 협상에서 필리핀의 자치권을 확보하고자 했으나, 휴전을 전제 조건으로 내세운 그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미국의 협상 태도에 실망한 그는 전쟁을 지지하며 1899년 5월 정부에서 사임했다. 이는 외세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국가의 자주성을 지키려 했던 그의 의지를 보여준다.
마비니는 자신의 정치 철학을 다음과 같이 명확히 밝히기도 했다. “… 어떤 정당에도 속하지 않으며, 정당을 만들고 싶어하지도 않습니다. 조국을 위한 이익 외에는 아무것도 대변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는 에밀리오 아기날도의 리더십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남겼다. 그는 혁명의 실패 원인을 지도자의 잘못된 리더십, 즉 개인의 영달 추구, 정실인사, 유능한 인재 배척, 국민 경멸 등에서 찾았다. 마비니는 “혁명은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어졌기 때문에 실패했습니다. 지도자는 칭찬할 만한 행동이 아닌 비난받을 만한 행동으로 지위를 얻었고, 국가에 가장 유용한 사람들을 고용하는 대신 질투심으로 그들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는 국민의 진보를 자신의 개인적인 진보 이상으로 여기지 않고, 능력, 인격, 애국심에 따라 사람들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그들 사이의 우정이나 친족 관계의 정도에 따라 평가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위해 희생할 의향이 있는 총애를 받는 사람들을 원했기에, 그는 그들의 과오에 관대했습니다. 그는 국민을 경멸했기 때문에 역경의 열기에 녹는 왁스 우상처럼 넘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의 대가로 얻은 이러한 끔찍한 교훈을 결코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라고 지적하며, 공정하고 능력 중심적인 리더십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러한 그의 비판은 민주주의 사회 운영의 기본 원칙과 지도자의 덕목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다.
○ 저서
대표저서로 <필리핀 혁명 La revolución filipina> (1931) 외 다음과 같은 저작들이 있다.
El Verdadero Decálogo 엘 베르다데로 데칼로고 (참된 십계명) 1898년 6월 24일
Contestaciones y Consideraciones Al Pueblo y Congreso Norte-Americanos (미국 국민과 의회에 보내는 답변과 고찰)
Ordenanzas de la Revolución 오르데난사스 데 라 레볼루시온 (혁명의 법령)
Programa Constitucional de la República Filipina (필리핀 공화국 헌법 프로그램) 약 1898년
La Revolución Filipina (필리핀 혁명) 1931년 (사후 출판)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