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1월 9일, 러시아 피의 일요일 (Bloody Sunday) : 행진 시작
1905년 러일전쟁을 계기로 러시아 정교회 사제의 주도로 개혁을 요구하는 민중 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민중들은 차르의 실체를 보지 못하고 자신들의 아버지로 믿었다.
1905년 1월 9일 일요일에 개최된 청원 행진은 게오르기 가폰 신부의 주도 하에 진행되었다. 가폰은 러시아 정교회의 사제이자, 국가 비밀경찰의 급여를 받는 공작원이었다고도 전해지고 있다.
청원의 내용은 노동자의 법적 보호, 당시 일본에 완전히 열세가 있었던 러일 전쟁의 중지, 헌법의 제정, 기본적 인권의 확립 등으로 착취, 빈곤, 전쟁에 허덕이던 당시 러시아 민중의 소박한 요구를 대변한 것이었다.
당시 러시아 민중은 러시아 정교회의 영향 하에 황제 숭배의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황제의 권력 (왕권)은 신으로부터 받은 것이며, 또한 러시아 제국의 황제는 동로마 제국을 계승한 기독교 (정교회)의 수호자이라는 사상이다. 따라서 민중은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직접 탄원을 하면 정세가 개선된다고 믿었다.
행진에 앞서 거행된 파업에 참가자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전체 노동자 18만 명 중 11만 명에 이르렀다고 전해지며, 행진 참가자는 6만 명에 달했다. 당국은 군대를 동원해 시위대를 중심가에 진입시키지 않을 방침이었지만, 너무 인원이 많았기 때문에 진입을 막지 못했고, 군대는 각지에서 비무장 시위대에 발포를 했다.
발포로 인한 사망자 수는 불명확하다. 반정부 운동 측의 보고에서는 4,000명 이상에 이르렀다고 주장한다. 한편, 더 신중하게 추정한 보고에서도 사상자의 수는 1,000명 이상이 된다. 사건은 모스크바 시내로 빠르게 퍼졌으며, 시내 곳곳에서 폭동과 약탈이 이루어졌다.
가폰이 이 사건 이전부터 조직했던 노동자 집회는 당일 해산되었고, 가폰은 즉시 러시아 제국을 떠났다. 가폰은 같은 해 10월에 귀국했다가 이듬해인 1906년 4월에 사회혁명당에 의해 암살되었다.
미국 출신으로 20세기를 대표하는 댄서 이사도라 던컨은 이 사건 이틀 후 페테르부르크를 방문했다가 이 어수선한 상황을 자서전 《나의 생애》 (My Life, 1927년)에 기록했다.
1905년 1월 22일 사제 가폰 신부를 필두로 수많은 노동자와 그 가족들이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겨울 궁전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평화와 굶주림을 달랠 빵을 달라고 하였으며, 노동조합의 설립과 근로조건의 향상들을 아버지 차르에게 요구하였으나, 차르는 그 요구에 무력 진압으로 답했다. 비무장한 시위대를 상대로 차르의 군대가 발포하였고, 달아나는 군중들을 기마대가 추격하여 학살, 이날 하루에만 30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차르에 대한 환상이 깨어지고 러시아 제국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였다, 자본가의 착취와 노동자의 인권이 존중되지 않는 열악한 근무환경에 맞선 온갖 파업 투쟁이 끊이지 않았고 1905년 5월 흑해의 러시아 전함 타우리스 공작 포툠킨의 선원들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루마니아 정부에 항복하기도 했다.
1906년 한 해 동안 100만 명이 파업을 일으켰고 농민 반란이 2600건이나 일어났다. 이에 러시아 제국정부는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두마’라 불리는 의회를 설치하는 등 개혁을 추진하였으나 농민들과 노동자들의 생활은 여전히 나아지지 않았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