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12월 7일, 영국의 수리물리학자•공학자 제1대 켈빈 남작 윌리엄 톰슨 (William Thomson, 1st Baron Kelvin, 1824 ~ 1907) 별세
제1대 켈빈 남작 윌리엄 톰슨 (William Thomson, 1st Baron Kelvin, OM, GCVO, PRS, 1824년 6월 26일 ~ 1907년 12월 7일)은 아일랜드에서 태어난 영국의 수리물리학자이며 공학자이다.
– 제1대 켈빈 남작 윌리엄 톰슨 (William Thomson, 1st Baron Kelvin)
.출생: 1824년 6월 26일, 영국 벨파스트
.사망: 1907년 12월 17일, 영국 락스
.국적: 영국
.부모: 마가렛 톰슨, 제임스 톰슨
.배우자: 프란시스 블랜디 (1874년–1907년), 마가렛 크럼 (1852년–1870년).저서: Popular Lectures and Addresses, Volume 3, Atlantic Telegraph Cable 등
.형제자매: 제임스 톰슨, 안나 톰슨
글래스고 대학교에서 일하면서 전기와 열역학에 대한 많은 수학적인 분석을 했으며, 물리학을 오늘날의 형태로 정립한 중요한 공헌자이다.
그의 이름을 따서 지은 절대 온도의 단위 켈빈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의 다른 이름인 켈빈은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 대학교의 캠퍼스 앞에 흐르던 강 이름인 켈빈 강을 따 남작 작위를 받으면서 지은 것이다.
이 작위는 세습 작위였으나, 톰슨이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던 까닭에 그의 대에서 작위가 단절되었다.
그는 전자기학, 열역학, 지구물리학 등의 여러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고, 그 중에서도 열역학 분야에 남긴 업적이 가장 크다.
○ 생애 및 과학적 업적
제1대 켈빈 남작 윌리엄 톰슨 (William Thomson, 1st Baron Kelvin)은 1824년 6월 26일, 영국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출신의 물리학자이자 공학자이다. 본명은 윌리엄 톰슨 (William Thomson)이나 1892년 열역학에서의 업적으로 켈빈 남작 (Baron Kelvin)이라는 작위를 얻은 뒤로는 거의 켈빈으로 통한다. 1대 켈빈 남작에 해당하며, 켈빈 남작에게 후손이나 가까운 친척이 없어서 그가 죽은 후에는 작위가 단절되었다. 따라서 세계적으로도 켈빈 남작보다는 켈빈 경 (Lord Kelvin)으로 불리는 경우가 잦다. 켈빈이라는 이름은 글래스고 주변을 흐르는 강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절대온도의 단위인 ‘켈빈’은 그의 이름에서 따왔다.
- 전자기학
1842년, 케임브리지 대학교 재학 중이던 톰슨은 독자적인 연구를 시작했다. 이 해 발표한, 열의 분포와 정전기력의 분포의 비교 논문은, 전자기장과 비압축성 탄성체 사이의 유사점을 지적하고 있었다. 1845년의 논문에서는, 전자기 유도가 어떠한 매체에 의한다는 패러데이의 생각을 수학적으로 표현 하였다. 이것들은 후에 맥스웰에게 중대한 시사를 주었다.
1849년부터 10년간, 톰슨은 패러데이가 발견한 상자성과 반자성 및 그 이론을 일반화하기 위한 연구를 실시했다. 여기서 투자율과 자화율이라고 하는 개념을 도입해, 자석이 가지는 에너지를 나타내는 식을 이끌어냈다. 전기에서는, 전류가 흐르는 회로가 가지는 에너지를 나타내는 식을 얻고 1853년에 진동회로의 이론을 발전시켰다. 이것은 1857년에 실험으로 확인되었고 후에 헤르츠에 의해 전파를 발생시키는데 사용되었다.
1851년 베버가 국제단위계에서 전자기학의 확장을 제안했을 때 톰슨은 다니엘 전지에서의 기전력과 줄의 법칙의 계산을 실시했고, 또한 영국 학술 협회에 전자기 표준을 결정하도록 제안하기도 하였다.
- 열역학
1847년, 톰슨은 영국 과학 진흥 협회의 연례회의에 참석했다. 그 회의에서, 그는 제임스 프레스콧 줄이 열소설과 사디 카르노와 에밀 클라페롱의 열기관에 대해 비효율적인 연구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줄은 열과 기계적 일 사이의 상호적 변환 가능성과 기계적 동등성을 주장했다.
톰슨은 흥미를 느꼈지만 비판적이었다. 그는 줄의 결과가 이론적 설명을 필요로 한다고 느꼈다. 그는 얼음의 녹는점이 압력에 따라 감소할 것이라고 예상했고, 그렇지 않으면 빙결 팽창은 영구 기관으로 사용될 것이라 했다. 그의 실험실에서 이루어진 실험적 확인은 그의 믿음을 굳건하게 했다.
1848년, 그는 가스 온도계가 온도의 조작적 정의만을 제공한다는 것을 보완하는 과정에서 카르노-클라페롱 이론(Carnot–Clapeyron theory)을 확장시켰다. 그는 1도간의 간격이 물체의 온도 T와 상관없이 같은 양의 기계적 일을 주는 절대 온도 단위를 제안했다.
톰슨은 줄의 주목할 만한 발견에서 참고한 열소설(caloric theory)에 대한 의심의 첫 번째 발자취인 그의 출판물을 줄에게 보내지 않았다. 하지만 줄은 우연히 그것을 읽었고 톰슨에게 8월 6일 편지를 썼다. 그의 연구는 일로의 열의 변환에 대한 입증이지만 그는 추가 실험을 계획하고 있었다. 톰슨은 8월 27일에 답장을 했다. 그는 자신이 자신만의 실험을 계획하고 있다고 드러내고 그들의 두 관점을 조화시키기를 바랐다.
톰슨은 카르노의 출판물 비평으로 돌아와서 그의 분석을 읽었다. 그러나 그는 카르노의 이론에 불만족하고 줄의 것에 납득되었다. 1851년 2월, 그는 그의 새로운 생각을 표현하는데 주력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이론을 어떻게 표현할지 불확실했고 논문은 그가 카르노와 줄을 조화시키는 시도를 할 때까지 여러 초안을 거쳤다. 그가 논문을 재작성하는 중, 열역학 제 2법칙에 대한 생각을 고민한 것으로 보인다. 카르노의 이론에서, 열을 잃는다는 것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다. 하지만 톰슨에 따르면 열은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완전히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더 나아가, 그의 이론적인 믿음은 열사에 대한 추측을 하게 했다.
마지막 출판물에서 톰슨은 열역학 제2법칙의 원리를 언급하였다.“온도가 일정한 하나의 열원으로부터 열을 취하여 이것을 전부 일로 바꾸고 그 외에 어떤 변화도 남기지 않도록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논문에서 톰슨은 열이 운동의 한 종류라는 이론을 지지했지만 그가 험프리 데이비 경과 줄과 율리우스 로베르트 폰 마이어의 실험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인정했다.
줄은 이 논문을 읽자마자 톰슨에게 그의 논평과 질문들을 썼다. 줄이 실험을 지휘하고 톰슨은 결과를 분석한 뒤 다음 실험을 제시하는, 두남자의 생산적인 협력이 시작되었다. 협력은 1852년부터 1856년까지 지속되었다. 이것에서 줄-톰슨 효과가 발견되었다.
- 지구물리학
1862년, 톰슨은 푸리에 급수를 이용한 구의 냉각 속도를 계산해, 지구의 연령이 수 천만 년, 길어도 4억년을 넘길 수는 없다고 결론 내렸다. 이것은 지구 전체가 고온용융 상태로부터 현재의 온도가 될 때까지의 시간을 요구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논문은 지구가 존재하고 나서는 식기만 한다고 전제했다. 방사성 원소의 붕괴열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후에 어니스트 러더퍼드에 의해서 계산된 올바른 값에서 크게 어긋나 있었다.
1863년에 톰슨은, 지구의 형상이 태양이나 달의 조석력에 의해서 변형하고 있는 것(지구 조석)을 이용해 지구의 강도를 구했다.
- 대서양 횡단 케이블
1854년, 마이클 패러데이가 해저 케이블로 가는 전신 신호가 늦는 것을 공표해, 거기에 흥미를 가졌다. 1855년 5월, “대서양 횡단 케이블의 신호가 늦어지는 시간은 길이의 제곱에 비례해 증가한다 (제곱법칙).”를 왕립 협회에 보고했고 곧 공개되어 5월 왕립학회에서는, 패러데이나 윌리엄 톰슨 등에 의해서 대서양 횡단 케이블의 전기적 특성이 검토되었다.
1856년에 대서양 전신 회사가 설립되어 대서양 횡단 케이블 부설 사업에 수학자로서 채용되었지만, 회사의 방침과 다른 견해를 가져 해고되었다. 그러나 다시 무급의 조언자로서 이 계획에 참가했다.
1857년에서 1858년까지 대서양 횡단 해저 전신 케이블 부설 때는 무급의 조언자로서 케이블 부설선에 승선해 해저 케이블 부설의 기술적 지도를 했고, 고감도의 거울검류계를 개발해, 1858년에 전신을 수신하는 것에 성공했다. 1859년 12월 영국 정부는 대서양 횡단 해저 케이블 실패에 대해서 조사위원회를 설립했고, 켈빈은 그 위원으로서 참가해 케이블의 전기적인 특성에 대해 연구했다. 이 시기 톰슨의 공로로 전기의 기본인 도체나 절연에 관한 기술이 확립되었다.
1866년 11월에는 대서양 횡단 해저 전신 케이블 성공의 공적으로 기사작위 (Knight Bachelor)가 주어졌다.
○ 수상과 명예
1847에든버러 왕립학회의 회원
1851스웨덴 과학 아카데미의 외국인 회원
1851왕립학회 회원
1856왕립학회 로열 메달
1864케이스 메달
1866Knight Bachelor(기사작위) 서임
1873에든버러 왕립학회장(1873~1878, 1886~1890, 1895~1907)
1873제국 장미 사령관 훈장 (브라질)
1881레지옹 도뇌르 훈장 코망되르 (프랑스)
1884푸어 르 메리트 훈장 (프로이센)
1887거닝 빅토리아 쥬빌리 상
1889레지옹 도뇌르 훈장 그랑도피시에
1890왕립학회 회장 (1890-1895)
1890레오폴드 훈장 커맨더 (벨기에)
1892남작으로 승작(에어셔 라르그의 켈빈 남작)
글래스고 대학교에 흐르던 켈빈 강의 이름을 땄다. 친인척이 없었기 때문에, 작위는 그의 사망과 함께 소멸됐다.
1896로열 빅토리아 훈장 1등급
1901서보장 1등급 (일본)
1902메리트 훈장(Order of Merit, OM), 첫 번째 수훈자 중 한명으로 기록
1902추밀원 위원
1907웨스트민스터 사원 아이작 뉴턴의 옆에 묻힘
1971년에는 20파운드 지폐에, 현재는 100파운드 지폐에 삽입된 인물이다. 조정 컴퍼스를 들고 있는 모습이고, 뒷면은 대서양 횡단 케이블의 모습이 있다.애리조나의 켈빈 마을은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윌리엄 톰슨은 이 지역의 광산 개발에 큰 투자를 했다.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