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1월 20일, 러시아의 화학자로 최초 주기율표를 작성한 드미트리 멘델레예프 (Dmitri Mendeleev, 1834 ~ 1907) 별세
드미트리 이바노비치 멘델레예프 (Dmitri Mendeleev, 러: Дмитрий Иванович Менделеев, 1834년 2월 8일 ~ 1907년 1월 20일)는 러시아의 화학자이다.
주기율표를 최초로 작성한 이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
– 드미트리 멘델레예프 (Dmitri Mendeleev)
.출생: 1834년 2월 8일, 러시아 토볼스크
.사망: 1907년 1월 20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국적: 러시아 제국
.직업: 화학자
.부모: 이반 파블로비치 멘델레예프, Maria Dmitrievna Mendeleeva
.배우자: 안나 이바노바 포포바 (1882 ~ 1907)
.자녀: 류보비 블로크, 올가 멘델리바, 마리아 멘델리바, 바실리 멘델레예프 등
.형제자매: Masha Mendeleeva
.학력: 중앙 교육학 연구소
.분야: 화학, 물리학, 경제학, 지질학, 도량형학
.업적: 주기율표 작성
러시아의 화학자로 원소들이 가진 규칙성에 따라 원소들을 나열한 표인 주기율표를 최초로 고안한 화학자이다.
멘델레예프 전에도 원소를 질량 순으로 나열하는 등 여러가지 방법으로 규칙성을 찾아 나열하려는 시도는 있었다. 하지만 전부 조잡한 수준이었고, 제대로 사용할 수 있을 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원소들에 모종의 규칙성이 있음은 모두가 추측하던 것이지만, 이걸 제대로 파악하여 제대로 된 표로 정리한 것은 멘델레예프가 최초다. 세계 과학계에 그야말로 혁명을 일으킨 원소 주기율표를 발표했을 때가 고작 35세였다. 멘델레예프는 원소를 일정한 규칙에 따라 나열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발견되지 않은 원소의 성질까지도 예측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현대 화학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기율표가 정립되기 전에는 화학은 연금술의 연장이었을 뿐, 제대로 된 과학 취급조차 못 받았다.
○ 생애 및 활동
드미트리 멘델레예프 (Dmitri Mendeleev, 1834 ~ 1907)는 시베리아 서쪽에 있는 토볼스크현 Verkhnie Aremzyani에서 11, 13, 혹은 17명의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 수는 출처마다 다르며, 정확한 수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가 태어난 해에 그의 선생님이었던 아버지 이반 파블로비치 멘델레예프 (Ivan Pavlovich Mendeleev)가 시력을 상실하여 그의 어머니 마리아 드미트리브나 (Maria Dmitrievna Mendeleeva)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게 된다. 그녀는 그녀 가족의 유리공장을 다시 세워 살림을 꾸려나간다.
1847년 아버지가 사망하고 유리공장이 화재로 파괴되는 등 일련의 시련을 겪는다.
멘델레예프가 15세이던 1849년 그의 어머니는 멘델레예프에게 고등교육을 시키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남은 두 자녀(멘델레예프와 리자)를 데리고 시베리아에서 모스크바로 건너가 정착했다.
멘델레예프는 모스크바에 있는 대학에 지원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곧 그의 어머니는 그를 데리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죽은 남편 친구의 도움을 받아 Main Pedagogical Institute에 들어가게 된다. 그가 이 기관에 들어간지 10주가 안되어 그의 어머니가 사망하고, 2년 후 그는 결핵 진단과 함께 단지 수개월 정도 살 수 있을 거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1869년 3월 6일, 러시아화학회에서 그는 주기율표에 관한 자신의 논문을 처음으로 공식 발표했다.
그는 원소를 일정한 규칙에 따라 나열하여 발견되지 않은 원소의 성질까지도 예측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으며, 실제로 멘델레예프가 예측한 원소들의 성질과 실제 원소의 성질이 맞아떨어진 사례가 몇 개 존재한다.
로타르 마이어도 거의 같은 시기 거의 유사한 주기율표를 생각해 내었으나 발견되지 않은 원소의 성질을 예측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주기율표 101번째 원소는 그의 이름을 따 멘델레븀이라 불린다.
멘델레예프는 1906년 노벨 화학상 수상 후보에 올랐지만 그 상은 프랑스의 무아상이 수상했고 멘델레예프는 끝내 노벨상을 수상하지 못한 채 1907년 생을 마감했다.
- 주기율표
드미트리 멘델레예프 (Dmitri Mendeleev, 1834 ~ 1907)는 당시 알려져 있던 63개 원소 사이의 규칙성을 찾는 연구를 했다.
그 결과 1869년 ‘원소의 구성 체계에 대한 제안’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에는 원자량 증가 순서와 성질별로 원소를 배열한 주기율표가 담겼다.
일설에 따르면 그가 연구에 지쳐 깜빡 잠든 사이에 꾼 꿈에서 주기율표를 봤다고 한다.
이 표에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원소를 의미하는 빈칸도 있었다. 그는 빈칸에 들어갈 원소들의 특성까지 예측했다.
당시 멘델레예프가 주기율표를 발표하자 과학계 분위기는 싸늘했다. 하지만 그가 예측한 원소들이 속속 발견되면서 멘델레예프의 이론에 힘이 실렸다.
그는 1906년 노벨화학상 후보에 올랐으나 플루오르 (불소)를 최초로 분리해낸 앙리 무아상에게 한 표 차이로 수상하지 못했다.
현실 속의 학문은 멘델레예프가 평생 추구했던 과제였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멘델레예프의 삶을 역동적이고 다양하게 만들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학자로서의 생명을 위협하는 독이 되기도 하였다. 1880년 러시아의 과학 아카데미에서는 멘델레예프에게 학자 최고의 영예를 줄 것인가의 여부를 결정하는 선거가 열렸다. 불행히도 반대표는 찬성표를 압도했다. 원소 주기율표의 발견이라는 위대한 업적도 충분하지 못했다.
전 세계 50여 개가 넘는 나라에서 최고의 영예를 얻은 멘델레예프가 정작 고국인 러시아의 과학 아카데미에서 외면당했던 이 사건은 러시아 사회에 대단한 충격을 주었고 현재까지도 러시아 과학계에서 가장 치욕스런 역사로 기억되고 있다.
- 일화
평생 약한 자의 편에 서서 검소한 생활을 했으며, 거칠고 볼품없는 옷을 입고, 여행을 할 때도 늘 3등칸을 탔다. 따라서, 소련 시절에도 격하되지 않고 오히려 영웅시될 수 있었다.
항공학에도 관심을 기울여 과학관측용 풍선기구를 만들기도 했으며 공기보다 무거운 물체의 비행 가능성을 주장했다.
석유화학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여 유조선과 송유관을 설계하고 저장 탱크도 만들었다.
그는 ‘석유는 태워버리기엔 너무 귀한 물건이다’라는 발언도 하였다.
당시만 해도 석유화학은 막 발전하기 시작한 단계여서 석유 가공품도 대부분 경유나 등유 등의 연료 제품이었는데, 이미 멘델레예프는 석유를 이용한 각종 화학 합성수지의 가능성을 제시한 것.
세상의 관행이나 부조리에 저항했던 모친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서인지 진보적이고 사회 개혁을 지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미망에 빠지지 말아라, 말이 아니라 행동을 앞세워라. 신성한 진리와 과학 탐구를 위해 꾸준히 노력해라”라는 유언을 소중히 간직하여, 훗날 자신의 논문에 “드미트리 멘델레예프는 어머니의 유언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라는 구절을 적어놓기도 했다.
인세로 벌어들인 돈으로 사들인 농장을 경영할 때도 근대적인 농법을 도입해 수익을 올렸는데, 그는 이 농법을 주변의 다른 농가들에게도 흔쾌히 가르쳐주었으며, 아울러 치즈 제조법까지 가르쳐주었다.
그야말로 화학자라는 공인으로서도, 드미트리 멘델레예프라는 개인으로서도, 유능하면서도 선량했던 인물이다.
알렉산드르 보로딘과도 친분이 있었는데, 그의 음악에는 별 관심이 없었으나 보로딘의 화학에 대한 열정에 흥미를 느껴서, 그와 함께 자신의 업적인 주기율표에 대한 논의를 하기도 했다.
○ 경제학자로의 멘델레예프
경제학자로의 멘델레예프는 화학자로서의 업적에 가리워진 면이 있으나 사실 그는 러시아의 산업화 문제에 일생의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 이미 1860년대부터 멘델레예프는 각 지역별 경제 발전의 조건 및 구체적인 생산 분야에 관심을 가졌다. 연구를 심화하면서 멘델레예프는 러시아 전체의 사회, 경제 발전 프로그램을 고안하기 시작했다. 188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상공업 회의 개막식에서 멘델레예프는 『러시아의 공장 발전의 제 조건들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한다. 『러시아의 공업 발전 촉진안』(1883-1884), 『공장들에 관한 서한』(1885-1886)들은 러시아의 산업화와 관련한 논문들의 일부이다.
멘델레예프는 경제학 관련 논문을 총 100여편 남겼는데 그중 상당 부분은 산업화와 보호무역주의, 관세 정책 등을 다루고 있다. 러시아의 산업 발전에 대한 역사적 필연성을 역설하면서 멘델레예프는 국내 산업 육성책의 하나로 관세에 기반한 보호 무역주의를 주장했다. 그의 경제개혁안은 실제 러시아 경제에 상당 정도 반영이 되었다. 1890년대 러시아의 수입 관세는 33%에 달했는데 이는 1869-1876년 사이의 관세율 13%에 비해 두 배 이상 늘어난 수치였다. 당시에는 높은 관세율을 ‘멘델레예프’ 관세라고 부르기도 했다.
멘델레예프의 관세 정책 및 경제 정책은 그와 생각이 통했던 재무장관 비테에게 영향을 미쳤지만 동시에 비난의 화살을 피하지는 못했다. 중상주의와 보호무역주의의 결합은 국민의 희생에 기반한 국가의 수입 증대를 유도한다는 비판이 자유주의, 혹은 사회주의 경제를 지향하는 양측에서 쏟아져 나왔다. 경제학자로서의 멘델레예프가 잘 알려지지 않았던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러시아에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면서 멘델레예프의 경제 이론은 시대성을 상실했던 것이다.
멘델레예프의 화학 및 경제 저서들이 당대에 어떤 영향을 미쳤든 그 결과물들은 이 학자가 뜨거운 열정과 호기심, 그리고 실험정신에 투철한 인물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대단히 현실적이었지만 동시에 돈키호테적인 꿈을 지니기도 한 사람이었다.
1887년 8월 7일에는 개기 일식이 일어났다. 러시아에서는 기구를 타고 태양에 좀더 가까이 날아가 일식을 관찰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조종사와 멘델레예프는 함께 탑승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부력이 약해 기구 비행을 중단해야 할 상황에 처했다. 멘델레예프는 조종사와 기타 무거운 짐들을 기구 밖으로 던져 버리고 혼자 하늘로 날아갔다. 구름과 안개를 뚫고 약 600미터 상공으로 날아가 멘델레예프는 태양에 더 가까이서 일식을 관찰할 수 있었다. 착륙해야 할 시간이 왔을 때 조종끈이 기구 안으로 들어가 버렸지만 53살의 대화학자는 풍선 안으로 올라가 조종끈을 다시 꺼내 무사히 땅에 내려앉는 묘기를 보여주기도 했다.
멘델레예프는 사진에도 관심이 깊어 1878년 러시아 최초의 사진 동아리를 조직하기도 했다. 화학자이자 작곡가였던 알렉산드르 보로딘과 평생 친구로 지내며 보로딘의 음악을 항상 곁에 두고 들었다. 자신의 옷을 지어 입거나 여행용 수트케이스 및 각종 상자를 만드는 일은 멘델레예프의 취미이기도 했다. 멘델레예프의 본업을 가방 제작업자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을 정도로 그의 솜씨는 뛰어났다.
위대한 화학자, 경제학자, 석유 채굴과 정제에 관심이 있었던 유전 전문가, 1900년 파리 만국 박람회의 러시아 부스 제작에 참여했던 기획자이자 예술에 조예가 깊었던 사람, 그리고 마흔을 훌쩍 넘은 나이에 진실한 사랑을 위해 이혼을 감행하기도 했던 그는 꿈을 현실로 만드는 천재였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