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4월 5일, 대한민국의 소설가 이효석 (李孝石, 1907 ~ 1942) 출생
이효석 (李孝石, 1907년 4월 5일 / 음력 2월 23일 ~ 1942년 5월 25일)은 일제강점기의 작가, 언론인, 수필가, 시인이다. 한때 숭실전문학교의 교수를 지내기도 했다. 호는 가산 (可山)이며, 강원 평창 (平昌) 출생으로 한국의 대표적인 단편소설 작가이다.

– 이효석 (李孝石)
.출생: 1907년 4월 5일,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창동리 681
.사망: 1942년 5월 25일 (향년 35세)
.호: 가산(可山)
.본관: 전주 이씨
.학력: 평창공립보통학교 (졸업),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졸업), 경성제국대학 예과 (수료),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영어영문학 / 학사)
.경력: 숭실전문학교 교수, 대동공업전문학교 교수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의 본마을에서 태어나 1914년 8세때 외학을 하게 되어 봉평에서 100리가 떨어진 군 소재지 평창공립보통학교 (현 평창초등학교)에 입학한다. 졸업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무시험으로 입학하였다.
한국문학 단편 수작으로 손꼽히는 ‘메밀꽃 필 무렵’으로 유명한 일제강점기 작가이자 대학교수. 호는 가산(可山)이며, 필명은 아세아(亞細兒), 문성(文星) 등을 사용했다.
작품 경향은 초기 동반자 작가로 불리며 사회주의적 경향문학의 띄다가 후기로 가면서 색채가 바뀌어 순수 문학의 길을 걸었고, 향토색이 짙은 작품을 다수 발표했다. 사실 향토색 짙은 작품만 쓴 것은 아니고, 모던보이나 근대 문화를 기반으로 한 작품도 있으며, 성(性) 본능과 개방을 추구한 새로운 작품경향으로 주목을 끌기도 했는데, 현대 대한민국의 국민공통교육과정 의무교육에서 다루어지는 메밀꽃 필 무렵의 그늘이 너무 강하기 때문인지 이효석은 향토적인 작품을 쓴 작가라는 이미지가 크게 강조되는 편이다. 그의 문체는 세련된 언어, 풍부한 어휘, 시적인 분위기로 요약할 수 있으며, 시적인 정서로 소설 (산문문학)의 예술성을 높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 생애 및 활동
1907년 4월 5일 (음력 2월 23일),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하진부리에서 한성사범학교 출신으로 교직에 있었던 부친 전주 이씨 안원대군파 이시후 (李始厚)와 성결교단 집사였던 모친 곡산 강씨 강홍경 (康洪卿) 사이에서 1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한학자였던 부친의 사숙에서 한학을 공부한 이효석은 1914년 4월 평창의 군청 소재지에 있는 평창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고 하숙 생활을 시작하였다.
하숙집에서 본가에 다녀올 때면 100리가 넘는 거리를 오가게 되었는데, 이는 훗날 그의 대표작인 “메밀꽃 필 무렵”에 등장하는 배경이 되었고 물놀이와 고기잡이 꽃놀이를 즐긴 경험, 그리고 특히 ‘오대산에서 내려오는 목기류 행상, 심마니의 모습, 머루와 다래 같은 산과, 꿀 뜨기, 농산물 품평회’ 등을 본 기억은 그의 작품의 바탕이 될 정도로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보통학교 6년 과정을 수석으로 마치고 1920년 3월 평창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그는 동년 4월 당시 조선 최고의 고등보통학교였던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 이후 평생을 절친한 벗으로 지내게 되는 1년 선배 현민 유진오 선생과 만나게 되었다.
고등보통학교 시절부터 서로 평을 교환하며 서구문학을 섭렵했고, 유진오는 시를, 이효석 본인은 소설을 써서 서로 돌려 읽고 비평하며 우정을 다졌다고 한다.
등단한 후 없는 살림에도 이효석이 잡지에 글을 써서 받은 고료로 술을 마신 사람도 유진오였고, 이효석이 임종하기 직전 보고 싶다고 했던 사람도 친우인 유진오였다고 한다.
이효석은 경성제일고보 역시 우등으로 졸업하고, 1924년 제1회 입학생 수석 유진오의 뒤를 따라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1925년 제2회 신입생으로 입학한다.

- 주요 활동
이효석은 경성제일고보 (현 경기고등학교)를 거쳐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영문과를 나왔다.
이때 만난 친구로는 영문학자이자 법학자이며 제헌국회에서 헌법을 기초하는데 참여한 유진오, 해방후 초대~5대 국회의원을 연임한 5선 국회의원이자 자유당의 온건파 정치인 이재학이 있었다.
이들은 그의 경성고등보통학교와 경성제국대학 영문과 동문으로 학사 학위 취득 후에도 그와 연락을 주고 받았다.
1928년 《조선지광 (朝鮮之光)》에 단편 《도시와 유령》이 발표됨으로써 동반자작가(同伴者作家)로 데뷔하였다.
계속해서 《행진곡 (行進曲)》, 《기우 (奇遇)》 등을 발표하면서 동반작가를 청산하고 구인회 (九人會)에 참여, 《돈 (豚)》, 《수탉》 등 향토색이 짙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젊은 시절의 그는 ‘가난뱅이 작가’였다. 그는 돈없이 자신의 가난하고 빈한한 처지를 스스로 ‘가난뱅이 작가’라고 자조하기도 했다.
가난뱅이 작가였던 이효석은 경성 토호 집안이었던 처가에 떳떳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백방으로 직업을 구했다.
중학 시절 은사가 주선해준 취직 자리는 조선총독부 경무국 검열계였다. 문인들의 작품을 사전 검열하는 곳이다.
동료들의 지탄이 빗발쳤다.
결국 이효석은 열흘 만에 조선총독부를 그만뒀다.
1933년에는 구인회를 결성했다.

- 교수 생활과 작품 활동
1934년 평양 숭실전문학교의 국문학과 영문학 교수가 된 후, 강의 활동과 동시에 《산》, 《들》 등 자연과의 교감을 수필적인 필체로 유려하게 묘사한 작품들을 발표했다.
1936년에는 1930년대 조선 시골 사회를 아름답게 묘사한 《메밀꽃 필 무렵》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정작 이효석의 삶은 시골과는 거리가 멀었다. 서양 영화를 즐겨 보았고, 서양에서 온 가수나 무용단의 공연을 보며 넋을 잃기도 했던 도시인의 삶이 그의 삶이었다.
숭실전문학교가 신사참배 거부로 자진 폐교한 뒤 이를 승계한 대동공업전문학교가 신설되면서 이효석은 대동공업전문학교에서 교수 생활을 이어갔다.
서구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장미 병들다》, 동성애를 다룬 작품으로 평가받는《화분》(花粉) 등을 계속 발표하여 성(性) 본능과 개방을 추구한 새로운 작품 경향으로 주목을 끌기도 하였다.
당시 이태준· 박태원 등과 더불어 대표적인 단편작가로 평가되었다.
- 최후
1940년 부인 이경원과 차녀를 잃은 후 실의에 빠져 건강을 해치고 작품 활동을 활발하게 못하다가 1942년 5월 25일 결핵수막염으로 숨을 거두었다.

- 사후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에 모친의 유골과 합장했으나, 1972년 영동고속도로 건설공사로 인해 용평면의 고속도로 변으로 이장하였다.
그러나 1998년 영동고속도로 확장 공사로 인해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동화경모공원으로 이장하였다.
2021년 고향인 평창군으로 다시 이장되었다.
○ 기념
이효석이 태어난 평창군 봉평면에는 이효석의 생가와 이효석 문학관, 효석문화마을이 있다.
창동리와 원길리 일대에 이효석길이라는 길이 있다.
1982년 10월, 문화의 날을 맞아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 작품
그의 저작 활동은 100편에 가까운 단편에 집중되어 있으나, 경성제일고보 재학 중에 발표한 시를 비롯하여 장편소설, 수필, 평론, 희곡 · 시나리오, 번역 등 다방면에서 작품을 발표하였다.
단편집 기준으로 그의 대표작을 추리면, <노령근해 (露領近海)>, <해바라기>, <이효석단편집> 등이 있다.
장편으로는 『화분 (花粉)』(1939년 작), 『벽공무한 (碧空無限)』(1941년 작)이 있으며 이 중 『화분』은 1972년 하길종 감독이 영화화하였다.
110편이 넘는 수필을 발표하여 당대에는 수필가로서도 명망이 높았으며 중 · 고교 교과서에 실린 바 있는 「낙엽을 태우면서」가 대표작이다.
1달에 7~8편의 영화를 감상한 영화광이라 전하며, 직접 희곡과 시나리오를 창작하기도 하였다. 1930년에는 김유영 (金幽影), 서광제 (徐光齊), 안석영 (安夕影) 등과 함께 ‘조선씨나리오·라이터협회’를 결성하고 연작 시나리오 「화륜 (火輪)」을 발표하였는데, 이 작품은 침체의 늪에 빠진 당시 조선 영화계에 활력을 주었다고 평가 받는다. 그가 창작한 희곡 · 시나리오 7편 중 생전에 영화화한 작품은 <화륜>(1931년 개봉, 김유영 감독), <애련송 (愛戀頌)>(1939년 개봉, 김유영 감독)이 있다.
단편소설 중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황제>라는 작품이 있다. 말년에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된 나폴레옹이 임종 직전 자신의 일생을 회고하는 형식의 1인칭 소설. 삼국지 등 동아시아식 영웅 소설을 연상케 하는 문장과 표현을 사용해 색다른 장엄함과 비장함을 느낄 수 있다.
제목 없는 미발표 단편 소설이 2011년 번역 공개되기도 하였다.

– 주요 작품
《도시와 유령》 – 1928년(22세)
《돈(豚)》
《수탉》
《장미 병들다》 – 1938년 (32세)
《산》
《들》
《메밀꽃 필 무렵》 – 1936년 (30세)
《화분(花粉)》- 1939년 (33세)
《행진곡(行進曲)》 -1929년(23세)
《기우》 – 1929년(23세)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