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년 3월 23일, 소련의 군인•전차 설계자 조제프 코틴 (Josef Yakovlevich Kotin, 1908 ~ 1979) 출생
조제프 코틴 (Josef Yakovlevich Kotin, 1908년 3월 23일, 우크라이나 파블로그라드 ~ 1979년 10월 21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은 소련의 군인이자 공학자로 키로프 공장 SKB-2 국장 및 수석설계자 등을 역임했다.

– 조제프 야코블레비치 코틴 (Josef Yakovlevich Kotin)
.출생: 1908년 3월 23일, 러시아 제국 예카테리노슬라프 현 파블로그라드
.사망: 1979년 10월 21일 (71세), 소련 러시아 SFSR 레닌그라드
.국적: 소련
.학력: 하리코프 기술대학교, 제르진스키 군사기술학교
.직업: 군인, 공학자
.복무: 소련군 (1931~1972)
.최종 계급: 상장
.정당: 소련 공산당
.경력: 키예프 공장 SKB-2 국장 및 수석설계자
1937년 5월 ~ 1968년
.서훈 내역: 사회주의노력영웅, 스탈린 상 X4, 레닌훈장, 수보로프훈장 1등근, 수보로프훈장 2등급, 적기훈장 X3
조제프 코틴, 간혹 조제프 코친이라고도 한다.
전간기부터 냉전기에 이르기까지 ‘소련 중전차 개발사의 아버지’로 키로프 공장 SKB-2 수석 설계자 및 국방공업부 차관을 역임했다.
KV-1 등 전차 설계와 생산을 통해 2차대전 당시 기여한 공로로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노력영웅 칭호를 받았으며 스탈린 훈장도 4번 받은 바 있다.

○ 생애 및 활동
코틴은 1908년 러시아 제국령 파블로그라드 (현재는 우크라이나 영토)에서 태어났다.
1927년 하리코프 기술대학 졸업을 시작으로 1931년 소련 공산당에 입당하고, 1932년에 제르진스키 군사기술학교를 졸업했다.
그후 1937년 5월 키로프 공장 SKB-2 (2번 특별설계국) 국장 및 수석 설계자로 임명되어 당시 키로프 공장에서 양산되던 T-28 개량 프로젝트 T-29 (미국 프로토타입 중전차 T29와는 다르다) 개발을 진행했다.
1939년 무렵에 소련군 기계화 및 차량화 사무국 소속 엔지니어였던 나탈리아 포클로노바와 결혼했고 이 당시부터 SMK와 그의 일생의 역작 KV-1 중전차 등을 설계해 내놓았다.
1941년에 첼랴빈스크 트랙터 공장로 대피하여 부설계수석으로 있으면서 니콜라이 듀호프 합작으로 IS-2와 IS-3 설계에 관여했다. IS-3 설계가 끝나고 키로프 공장 (코친 설계팀)은 신형 전차인 IS-6을, 첼랴빈스크 (듀호프 설계팀)는 기존 IS-2를 개량한 IS-4로 경쟁했고, 도중인 1944년에 다시 키로프 공장으로 복귀했다.
이후 IS-6 개발팀은 키로프 공장의 수석 설계자 니콜라이 샤쉬무린을 위시로 IS-7을 내놓지만 너무 무거운 중량 때문에 이것도 채택을 거부당했고, 이후 코틴이 직접 소련군의 요구사항을 맞춰 오비옉트 730을 설계해 1953년 11월 28일에 T-10이라는 이름으로 채택되었다.
1968년까지 키로프 공장 SKB-2 국장으로 있다가 퇴임하고, 곧바로 소련 국방공업부(Министерство оборонной промышленности СССР) 차관을 72년까지 역임했으며, 79년 모스크바에서 71세로 타계했다.

- 기타
스탈린 시기 SMK를 개발했다가 KV-1을 만들긴 했지만 그 후에도 개인적으로 KV-5같은 설계도를 작성한 것으로 볼 때 다포탑 전차에 대한 미련을 완벽하게 떨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독소전쟁 기간동안 다포탑 전차가 힘을 못 쓰고 KV-1이 좋은 전과를 올리는 것을 목격한 후 다포탑 전차에 대한 생각은 완전히 접은 듯하다.
클리멘트 보로실로프를 후원자로 두었기 때문에 다른 설계자처럼 숙청당하지도 않았다.
다만 코틴이 보로실로프의 사위라는 낭설의 경우, 윗 문단의 설명과 같이 코틴은 소련군 소속 엔지니어였던 나탈리아 포클로노바와 결혼했기 때문에 사실이 아니다.
유력했던 후원자 보로실로프가 2차대전을 전후해 스탈린의 입김으로 뒷전으로 밀려날 때는 라브렌티 베리야가 후원해줌으로써 살아 남아 근 20년 간 키로프 공장에 머물며 전차 개발을 지속할 수 있었다.
다만 베리야를 후원자로 둔 것은 후에 베리야의 적인 미사일 빠돌이니키타 흐루쇼프가 서기장으로 올라오면서 마이너스 요소가 되었고 보병전투차-주력전차-미사일전차로 편성된 기동군으로 지상군을 개혁하려던 흐루쇼프의 계획과 맞물리면서 코틴의 마지막 작품이던 T-10M 중전차는 양산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양산 중지되게 된다.

○ 소련 기갑부대의 명성을 쌓은 공학자
1908년 3월 10일, 우크라이나 지방의 파블로그라드 (Павлоград)란 작은 도시에서 훗날 독소전에서 경이적인 활약을 펼친 전차들을 만들어낸 개발자 조제프 야코블레비치 코틴 (Жозеф Яковлевич Котин)이 태어났다. 물론 모든 밀리터리 매니아들은 소련의 승리는 쾌속의 중형 전차 T-34 덕분이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어왔을 것이다. KV (КВ)와 IS-2 (ИС-2) 처럼 강철의 요새와도 같은 중전차가 해낸 역할은 상대적으로 덜 회자되지만, 그런 중전차들이야말로 전선에 돌파구를 뚫고 나치 비장의 신무기 티거와 같은 반칙으로 여겨질 정도로 강력한 전차를 갖춘 독일군에게 맞서 싸울 유일한 수단이었으며, 적에게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면서 많은 승리에 이바지할 수 있었다. 독소전 지상전을 영국 본토 항공전과 비교한다면, 마치 호커 허리케인과 수퍼마린 스핏파이어라는 두 라이벌이 전투의 승리에 서로가 반드시 필요했던 존재였다는 역사적 팩트에 정확히 대입된다. 소련군은 T-34 한 가지 전차만으로는 절대로 승리를 거둘 수 없었다.
원래는 소련 군부도 다른 대부분의 열강들과 마찬가지로 설계와 제작이 어렵고 재료와 비용이 많이 필요한 중전차에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따라서 드넓은 러시아를 통틀어도 중전차의 본격적인 개발은 우랄 지역에 있는 첼랴빈스크 (челябинск) 한 군데에서만 시작되었는데, 이 공장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조제프 코틴의 “전차도시 (Танкоград)”라고 불렸다. 독소전에서 승리를 거둔 후에도 책임자 코틴은 기갑 엔지니어로 계속 종사하는 한편, 평화 시대를 맞아 농업용 트랙터를 만들기도 했고 로켓 프로그램에까지 참여하면서 러시아 기술사 전반에 걸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 하르코프에서 레닌그라드까지
유태계 소년이었던 조제프 코틴의 타고난 손재주와 공학적인 재능은 그가 10대였을 때 처음으로 나타났다. 아직 앳티를 벗지 않은 소년은 일찌감치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니즈니노브고로드 (Нижний Новгород)에 있는 트루드 공장 (ЗАО Завод Труд)에 견습 기계공으로 취직했다. 소년 코틴은 휴식 시간을 이용해 공장에 굴러다니는 쇠토막 하나를 선반에 끼워 돌리고 줄로 깎아 자물쇠를 하나 만들어냈는데, 나중에 이 장치는 발명 특허까지 받게 된다.
자신의 기계적 재능을 깨달은 코틴은 노동학원 (рабфак)을 다니면서 공장 일을 배우기 시작했으나, 그의 부모들은 아들이 블루 칼라를 벗어나 의사가 되었으면 했다. 이런 압박에 못이겨 코틴은 의학 공부를 시작했지만 생체 조직들을 설명하는 해부학 서적들은 도무지 그의 적성에 맞지 않았다. 의학과 생물학은 원인과 결과를 찾아내는 과정이 너무나 불분명했지만 기계는 그렇지 않았다. 작용과 반작용이 정확히 작동하는 기계는 코틴으로 하여금 미래를 예측하고 엿볼 수 있게 해주는 창구였고, 이 소년은 거기에 관해 확실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결국 부모의 강권보다 기술에 대한 갈망이 훨씬 더 컸던 코틴은 하르코프 공과대학 (Харьковский Политехнический Институт : ХПИ)의 자동차 학부로 전공을 바꾸게 된다. 코틴은 21살이 되던 1929년에 군사기술 아카데미 (Военно-Техническая Академия)가 있는 레닌그라드 (Ленинград)로 옮겨가 기계 및 기관 학부에서 학문의 깊이를 더하게 된다. 이 시기 소련군 최고지휘관을 맡고 있던 투하체프스키 (Михаил Николаевич Тухачевский : 1893~1937) 장군은 그의 졸업식에 참석했는데, 이 폴란드계 귀족 출신 장군은 당시 붉은 군대를 재정비하고 현대화시키는 작업에는 코틴과 같은 젊은 기술 인력들을 육성시키는 일이 무엇보다도 선행되어야함을 이해하고 있는 몇 안되는 인물이었다. 조제프 코틴은 아카데미에서 거둔 좋은 성적으로 인해 35살이 되던 1937년에 3급 기술장교 (Военинженер 3-го ранга)로 그곳에 남아 전차 같은 중장비를 연구하는 연구부장으로 승진했다.
사실 코틴의 재능은 자물쇠 특허건에서 알수 있듯이 그보다 6년 전인 29세에 이미 러시아 최대의 기계 제작소인 키롭스키 공장 (Кировский завод)에 부속된 전차 설계국 SKB-2 (СКБ-2)의 실무 책임자 구실을 하면서 활짝 꽃피우고 있었다. 코틴은 엔지니어들이 장비 개발 도중에 자주 겪게 되는 기계적 문제를 해결하는데 놀라운 효율을 보였고, 덕분에 개발팀은 활력을 얻고 작업에 속도를 붙일 수 있었다. 1938년부터 SKB-2는 코틴의 선임자인 알렉세이 S. 예르모라예프 (Афанасий Семёнович Ермола́ев : 1904 ~ 1977)의 손에 의해 차세대 중전차인 SMK (СМК / Сергей Миронович Киров) 개발을 시작했다. 이 다포탑 중전차 연구개발 사업은 나중에 지도자 스탈린에 의해 혹평을 받은 후 단일 포탑을 가진 KV(КВ / Клим Ворошилов) 계획으로 탈바꿈하게 되는데, 바로 조제프 코틴이 그 일을 맡게 된 것이다.

- 공과대 여학생과 결혼
1929년, 코틴이 다니던 군사기술 아카데미에 빅 뉴스가 떴다. “학교에 소녀 생도가 입학했다!”는 것이다. 이 센세이셔널한 소식은 군사기술 아카데미의 모든 학과에 즉시 퍼졌다. 군사 분야에 있어서 여성의 참가가 극히 드물던 당시만 해도 이 뉴스는 퍽이나 놀라운 것이었다.
“그녀는 누구지? 어디서 온 거야? 결혼은 했나?” 등등 의문이 꼬리를 물었고, 곧 몇 가지 정보가 알려지게 되었다. 소녀의 이름은 나탈리아 포클라노바 (Наталья Поклонова)로, 루간스크 (Луганск)에서 왔고 이 학교에는 국방장관 보로실로프 (Климент Ефремович Ворошилов : 1881~1969)로부터 직접 허가를 받아 입학했다. 학교측은 그녀를 기숙사의 독립된 방에 수용했으며, 미혼이었다. 포클라노바 생도는 루간스크 기관차 공장의 보일러 공장에서 근무하며 기계공 경험을 쌓았는데, 키가 커서 학교에 입학한 후에도 한동안 군복을 입을 수 없었다. 지급되는 모든 여성용 군복이 너무 작았기 때문에 그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입는 모든 제복과 부츠까지도 손바느질을 해서 수선해야만 했다. 복장 규정을 위반하지 않기 위해 포클라노바 생도에게는 특별히 스커트 착용과 바느질 수선을 허가하는 특별 명령이 내려졌다.
거의 모든 남자 생도들은 이 늘씬하게 키 크고 씩씩하며 당찬 소녀에게 감탄했고, 이끌렸다. 그녀는 노동학원에서 수학을 배우지 못해 입학했을 때 이과 성적이 미달되었으나 화학 성적을 인정받아 들어올 수 있었기 때문에 1학기 내내 밤을 새우며 기하학과 삼각법을 공부해 마침내 수학 시험을 통과했고, 꿈꿔왔던 강사진으로 옮겨갔다. 독립심이 강했던 나탈리아는 남자들에게 배려받는 모든 보호를 거부했고, 군 생활의 어려움을 견뎌내면서 트럭부터 전차까지 모든 전투 차량을 운전하는 법을 배웠다. 그녀는 아카데미를 졸업하기 1년 전에 이미 “우수 전차 조종수 기장 (За отличное вождение танков)을 받았다. 결과적으로 학교를 마친 포클라노바는 소련 전체를 통틀어 유일무이한 여성 기갑 엔지니어로 활동하게 된다.
많은 남학생들이 그녀에게 환심을 사려고 애썼고 심장을 내주었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3학년 때 비로소 그녀는 동기생들 사이에서 눈에 띄는 생도를 볼 수 있었다. 그 생도가 바로 뛰어난 학과 성적에다 운동 경기와 전투 훈련에서도 탁월함을 보이는 조제프 코틴이었다. 코틴은 훤칠한 키에 회색 눈동자, 매력적인 미소를 가진 남자였다. 포클라노바는 특히 그의 우크라이나 억양의 바리톤 음성에 강하게 끌렸다. 그는 많은 우크라이나 노래를 알고 있었고, 종종 스스로 발랄라이카를 튕기며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코틴 생도는 떠들썩한 생도 모임을 좋아했고, 동기들과 함께 사냥을 나가 잡은 동물로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대접하는 매너도 보여줬는데, 그럴 때면 종종 기숙사 전체를 위한 축제가 벌어졌다. 뿐만 아니라 코틴 생도는 그림과 시를 좋아해서 푸쉬킨 (Александр Пушкин), 레르몬토프 (Михаил Лермонтов), 예세닌 (Сергей Есенин)의 시를 줄줄 외웠으며 오페라 관람도 좋아했다. 그녀가 보기에 코틴은 흠잡을 데 없는 매너를 갖춘 남성미의 화신으로 보였다. 조제프… 그와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을까?

- 전장의 퀸 요괴 전차
신형 탱크인 KV는 소련이 핀란드를 침공하여 벌어진 겨울 전쟁 동안 최단 시간 내에 설계되고 시험되었다. 소련군은 완강하게 버티는 만네르하임선 (Mannerheim-linja)을 돌파하는 작전에서 그 신무기를 동원했고, 핀란드군이 가진 어떤 총포도 75mm 두께의 장갑을 두른 보로실로프 전차를 격파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다만 이 임무에서 KV가 가진 단포신 76mm 주포로 철근으로 강화된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진지 구조물을 파괴하기에는 위력이 현저히 모자랐다. 어쨌든 데뷔 무대에서 놀라운 강인함을 보여준 KV 전차는 며칠 만에 제식 전차로 소련군에 채택되었다. 핀란드에서의 전투가 끝날 무렵, 코틴은 KV-2 (КВ-2)라는 더 큰 화력을 가진 중전차를 개발하고 시험하기 시작했다.
강화된 장갑 외에도 KV 전차의 또 다른 장점은 디젤 엔진이었다. 이전의 전차에는 쉽게 불이 붙고 폭발 사고도 일으키는 휘발유로 주행하는 개솔린 엔진을 얹고 있었던 탓에 전차는 피격되면 곧바로 횃불처럼 불타올랐지만, 디젤 엔진을 쓴 코틴의 전차는 심지어 화염병으로도 점화시키는 것이 더 이상 쉽지 않았다. 독소전이 시작될 무렵, 코틴의 전차는 여전히 몇몇 기술적 문제로 잔병치레를 앓고 있었으나, 그런 상태에서도 적들로 하여금 공포심과 경외감을 불러일으켰다. 보로실로프 전차는 혼자서 독일 기갑사단의 절반을 막아내거나 단 한번의 교전으로 수십 대의 독일 전차들을 격파하는 꿈과 같은 일을 실제로 해내는 교전 사례가 나타면서 중전차의 가치와 중요성이 입증되었다. 독일 장병들은 전선에 나타난 KV 전차를 가리켜 “요괴 (Призрак)”라고 부르며 두려워했다. 다음 문단은 코틴이 남긴 회고록에서 일부 발췌한 것으로, 스탈린의 유명한 일화 – “자네들은 왜 전차에 백화점을 차리려고 하나?” – 를 묘사한 대목이다.
1938년, 코틴이 근무하던 설계국은은 새로운 진지 돌파용 중전차를 만들어내라는 과업을 부여받았다. 설계국장 예르모라예프는 사실 이 작업을 총괄하는 관리자여서 실질적인 개발은 코틴이 이끌고 있었다. 코틴은 설계국장에게 지시받은 다포탑 전차 초안 외에도 단일 포탑 중전차에 관한 도면을 병행하여 그리고 있었는데, 그 작업은 국장에게 인가받지 않고 그가 혼자 세부도면까지 그려나가고 있었다.
1939년 봄, 코틴을 포함한 기갑 엔지니어들은 정치국에 소환되어 높으신 분들 앞에서 보고서와 함께 신형 전차를 제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스탈린은 특히 키로프 공장의 설계 방안을 마음에 들어했는데, 그것은 60mm의 중장갑과 76.2mm 장포신 주포를 갖췄기 때문이었다. 실무자 코틴이 각 모델의 특징과 성능에 대하여 브리핑을 끝내자, 지도자 동지는 3개의 포탑이 달린 작은 나무 모형을 손에 들고 그것을 주의 깊게 살펴보기 시작했다.
지도자는 몇 가지 질문을 던지고 나서 코틴 앞으로 다가와 보조 포탑 하나를 뚝 떼어내더니 다시 질문을 던졌다.
“내가 얼마나 많은 걸 제거했는가?”
명민한 코틴은 자신 앞에 우뚝 선 스탈린이 어떤 답변을 기다리고 있는지 즉시 깨달았다.
“3톤입니다!”
“이 무게로 장갑을 얼마나 늘릴 수 있을까?”
“전차 정면 전체에 걸쳐 10밀리미터 두께를 더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서, 지도자는 대화를 계속하지 않고 훨씬 더 성공적인 프로젝트를 제안한다. 그는 포탑이 한개 달린, 즉, 코틴이 따로 작업하던 모형을 가리키더니 다시 입을 떼었다.
“이거 한번 만들어 보게.”
결과적으로 스탈린은 코틴의 성공에 가장 큰 돛을 달아준 셈이 되었다. 나중에 설계국으로 돌아간 코틴은 공장장과 당협위원장 앞에서 지도자 동지의 훈시를 낭독했고… 아무도 스탈린의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마침 타이밍도 기가 막히게 시제 차량이 준비되었을 때 겨울 전쟁이 시작되는 바람에, 그 전차들은 실전 테스트를 할 겸 전선으로 보내졌다. 핀란드에서 그 중전차는 기적과 같은 일을 행했다. 어떤 전투에서는 60여발의 포탄을 맞았지만 KV의 장갑은 깨지지 않았다.

- 탱크 도시를 건설하다
전쟁이 터지던 해, 조제프 코틴은 전차 산업을 총괄할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그의 지휘 아래 중전차 생산량은 즉시 기존의 2배로 늘어났고, 공장에서 생산된 전차는 곧바로 전투에 투입되었다.
키로프 공장은 곧 전쟁 수행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산업체가 되었고, 곧 이 사실을 간파한 독일군은 대규모 공세를 가해올 것이 틀림없었다.
이 공장이 있는 레닌그라드는 동부전선에 전진 배치된 루프트바페의 폭격기와 전투기들이 30분이면 날아올 수 있는 지척이었던데다, 하다못해 발트해를 통해 독일 해군의 함대가 접근해 함포 사격을 퍼부어도 파괴될만큼 전장에서 가까왔다.
자신들의 약점이 적의 눈 앞에 훤히 드러난 이런 상황에 두려움을 느낀 스타프카 (Ставка)는 공장의 모든 시설과 인력을 통째로 우랄 산맥 너머로 대피시키는 과감한 결정을 내리게 된다.
- 전차 도시의 장군
공장이 전선에서 2,500 km나 떨어진 첼랴빈스크 (Челябинск)로 옮겨진 지 겨우 일주일 만에 첫 탱크가 전선으로 보내졌다. 동쭉으로 대피한 7개 공장들의 비공식 명칭인 “탕코그라드 (Танкоград)”에는 첼랴빈스크 키로프스키 공장 (Челябинский Кировский Завод)이 형성되고 있다. 실무자 코틴의 지휘 아래 KV 전차를 개선하기 위한 작업이 진행되었고, 이 작업을 통해 KV-7 (КВ-7)과 화염방사 전차인 KV-8 (КВ-8), 122mm 야포를 단 KV-9 (КВ-9)이 만들어졌다. 소련 군부의 화력에 대한 갈증은 그것으로도 풀리지 않아, 순양함에 실린 152mm 함포로 무장한 대구경 중자주포 SU-152 (СУ-152)까지 개발되었다.
이런 소련의 중전차에 대한 독일의 답은 신형 전차인 티거 (PzKpfw VI Tiger I)와 판터 (PzKpfw V Panther)였다. 소련의 전차 제작자들은 파시스트의 강철 괴수에 맞설만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줄 전차는 이오시프 스탈린 (Иосиф Сталин)이라고 불렸다. 보로실로프의 요청에 의해 이 차세대 중전차는 장갑이 독일 전차보다 1.5배에서 2배 더 두꺼웠고, 화력도 몰라보게 보강된다. 그중 가장 성공적인 것은 코틴의 지도 아래 만들어진 IS-2 (ИС-2)였다.
IS-2는 2차 대전에서 실전에 참가한 것 중에서 가장 중무장되고 강력한 전차 중 하나였다. 1943년 11월부터 생산이 시작된 이 중전차의 주요 목적은 적의 잘 강화된 진지를 돌파하고 점령된 도시를 공격하여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1944년 4월, 코틴의 새로운 전차는 처음 실전을 치렀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꾸준히 개선되었다. IS-2는 임무를 잘 수행했고 전투에서 그 능력이 훌륭하게 증명되었다. 독일군 사령부는 전차병들에게 IS-2와 정면에서 교전을 벌이는 상황을 가급적 피하라는 훈령을 내렸다. 매우 성공적인 활약을 보인 이 중전차는 1990년대까지 러시아와 그 위성 국가들에 남아있었다.

- 전차에서 농업 기계로
독소전이 끝날 때까지 조제프 코틴이 이끄는 개발팀은 50종류 이상의 다양한 전투 차량을 만들어냈다. 코틴은 붉은 군대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된 기갑부대의 질적 개선에 견인차 역할을 조국이 가장 필요로 할 때 해낸 인물로 평가 받으며 출세가도를 달렸고, 이윽고 전군 최연소 장군이 되었다. 젊은 장군의 지도 아래, 탕코그라드는 전쟁 기간 동안 18,000대 이상의 전차와 자주포들을 쏟아내 러시아 영토에서 나치 독일군을 밀어내고 베를린까지 진격하는데 필요한 힘이 되어준다.
전쟁이 끝난 후인 1945년 말, 조제프 코틴은 레닌그라드로 돌아와 전차 개발을 다시 재개했고, 평화가 찾아온 조국을 위해 농업용 민간 장비의 생산에도 발동을 걸었다. 코틴의 지도 아래 설원부터 해빙기의 진흙길까지 누비면서 온갖 짐을 끌고 다닐 수 있는 KT-12 트랙터가 1948년에 등장했고, 마찬가지로 지금까지도 쓰이고 있는 K-700 키로베츠 (К-700 Кировец) 트랙터가 1962년에 생산이 시작되었다. 극지방 탐사를 위해 만들어진 독특한 전지형 차량 핀귄 (Пингвин)도 코틴의 작품이다.
냉전 시대가 도래하면서 군사적인 측면에서 전차의 중요성은 새롭게 부상하는 신병기 로켓에게 밀려나기 시작했다. 원래대로라면 지상 장비만 만들어오던 코틴은 그대로 잊혀질 순서였으나, 이 탁월한 공학자는 뜻밖에 우주시대에도 뛰어난 설계자임이 증명되었다. 창의성 넘치면서도 휘하의 개발자들의 의견을 조율하는데 있어 탁월한 능력을 보인 세르게이 코롤료프 (Сергей Павлович Королёв : 1907 ~ 1966)의 지도 아래 소련 최초의 이동식 로켓 발사대가 키롭스키 공장에서 건설될 때, 수석 설계주임인 코틴의 마지막 작품이 바로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탑재한 최초의 이동식 미사일 시스템인 RT-20P (РТ-20П)였다. 1968년에 조제프 코틴은 소비에트 방위산업부 차관이 되었다.
1972년부터 그가 숨을 거둘 때까지 코틴은 소련 국방부의 과학기술위원회원으로 위촉되어 있었다. 모스크바에 살던 그는 1979년 10월 21일에 세상을 떠났고 수많은 영웅들이 잠든 노보데비치녬 묘지에 매장되었다.
그와 함께 일했던 엔지니어들에 따르면, 조제프 코틴은 공학적 재능도 뛰어났지만 조직을 이끄는데에도 탁월한 정치력을 보였다고 한다. 코틴이 소련 공산당 수뇌부로부터 계속 높이 평가받았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가 전쟁 중에 남긴 공적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상부가 개스터빈 전차나 공기부양 전차 같은 허황되어 보이는 아이디어를 요구해도 즉시 실제로 만들어낼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지성적이면서도 끈질기고, 부지런하면서도 사려 깊은 그를 동료들은 높이 평가하고 있다. 물론 코틴이 남긴 공학적 산물은 국가적으로 높이 평가받았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는 스탈린상과 레닌 훈장을 각각 4회씩이나 수여받은 사회주의 노동영웅이었다. 오늘날 소련제 전차의 명성을 쌓아올리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그의 이름은 상트페레트부르크 (Санкт-Петербург)와 첼랴빈스크 곳곳에 붙여져 있다.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