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3년 4월 3일, 대한민국의 서양화가 김환기 (金煥基, 1913 ~ 1974) 출생
김환기 (金煥基, 1913년 4월 3일 / 음력 2월 27일 ~ 1974년 7월 25일)는 대한민국의 서양화가이다. 그의 작품은 한국의 미술품 경매의 신기록을 쓰고있다.
– 김환기 (金煥基)
.별칭: 호 (號) – 수화 (樹話)
.출생: 1913년 4월 3일, 일제 강점기 전라남도 신안군 안좌면 읍동리
.사망: 1974년 7월 25일 (61세), 미국 뉴욕주 뉴욕
.직업: 화가, 교수
.국적: 대한민국
.학력: 일본 니혼 대학교 대학원 미술학 석사
.사조: 추상화
.경력: 홍익대학교 교수 및 학장, 서울대학교 교수, 대한미술협회 회장
.부모: 김상현
.배우자: 변동림
.자녀: 김금자
.주요 작품: 론도
김환기는 한국적 서정성을 바탕으로 세련되고 정제된 조형언어로 승화시켜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정립한 한국을 대표하는 화가다. 그는 1931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1933년 일본대학 예술과 미술부에 입학하였고,《이과회》에서 <종달새 노래할 때>와 <25호실의 기념>이라는 작품으로 입선하면서 신인 화가로서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또한《아방가르드 양화연구소》,《백만회》,《자유미술가협회》등 여러 미술단체에 참여하여 활발한 작품 활동을 전개했고, 1937년에는 도쿄 아마기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개최했다.
1938년 《자유미술가협회전》에 <론도>를 출품하여 입선했으며, 이 작품은 현재 등록문화재 535호로 지정되어 있다. 1947년에는 유영국, 이규상과 함께《신사실파》를 결정하고 추상회화의 정착에 기여했다. 1956년부터 3년간 파리에서 작업에 전념했으며, 1963년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한국 대표로 참여하여 명예상을 수상하였다. 그 후 뉴욕에 정착하면서 서울과 뉴욕에서 수차례의 개인전을 개최하는 등 국제적인 활동을 지속하였다. 1970년 한국일보 주최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에서〈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로 대상을 수상했고, 전면 점화라는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전개하면서 한국내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입지를 굳혔다.
○ 생애 및 활동
본관은 김해 (金海)이며 호는 수화 (樹話)이고, 전라남도 신안군 안좌면 읍동리 출생이다.
1936년 일본 니혼 대학 미술학부를 마치고 도쿄에서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1946년-1949년 사이에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를 역임하고 신사실파전 (新寫實派展)에 출품했다. 여러 차례 국전 심사위원으로 활약하고 1952년 홍익대 미술학부 교수, 1954년에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1956년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 엠베지트 화랑을 위시하여 1957년 파리 · 니스 · 브뤼셀 등에서 계속 개인전을 가졌다. 1959년 귀국하여 홍익대 교수 · 초대 예술원 회원 · 한국미술협회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1963년 제7회 상파울로 비엔날레 한국 대표로 참가하게 되어 브라질로 갔고, 동 국제전의 명예상을 받았으며, 그곳 현대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되었다. 1964년 이후 부인인 수필가 김향안 (金鄕岸, 본명 변동림)과 함께 미국에 체류하며 작품 활동 중 그곳에서 사망했다.
2015년 김환기의 1971년작 작품 <19-Ⅶ-71#209>은 서울옥션 홍콩 경매서 한화 47억 2100만원 (3100만 홍콩달러)에 낙찰되었고, 이로써 이전의 최고가로 남아있던 박수근의 <빨래터>를 제치고 국내 작가 미술품 경매 중 최고가를 기록했다.
2019년 11월 23일 김환기의 1971년작 작품은 크리스티 홍콩 경매서 한화 132억 3600만원 (8800만 홍콩달러)에 낙찰되었고, 한국 미술품 중 최초로 한화 100억을 넘긴 작품이 되었다.
한국의 서양화가로 한국 근현대미술사를 대표하는 거장으로 서구 모더니즘을 한국화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초창기 추상미술의 선구자였고, 프랑스와 미국에서 활동하며 한국미술의 국제화를 이끌었다. 김환기는 추상 계열에서 벗어나 구상을 추구하면서도 오히려 조형수단의 자율적인 표현을 추구했다. 또한 사실적인 표현보다는 면, 선, 형태, 색체, 리듬 등으로 대상을 조형적으로 새롭게 표현했다.
- 학력
안좌공립보통학교 졸업
중동중학교 중퇴
도쿄 부천정보산업고등학교 졸업
니혼 대학 미술학과 졸업
니혼 대학 대학원 (미술학 석사)
- 주요 활동사항
대학 재학 시절인 1934년아방가르드미술연구소를 만들고 추상 미술 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1937년 귀국할 때까지 일본에서 길진섭 (吉鎭燮) 등과 백만회 (白蠻會)를 조직하는 한편, 자유전 (自由展)의 출품과 아마기화랑 (天城畫廊)에서의 개인전을 통하여 신미술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광복 후 1946년에서 1949년까지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신사실파 (新寫實派)를 조직, 새로운 모더니즘 운동을 전개하였다.
1956년에는 파리로 건너가 서구 미술을 3년간 체험하고 귀국하였다.
한편, 1952년홍익대학교 교수로 취임하여 미술학부장과 학장을 지내면서,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의 심사 위원과 대한미술협회 회장,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등을 맡기도 하였다.
1965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São Paulo Biennale)의 커미셔너로 출국한 뒤 미국에 정착하여 뉴욕에서 작품 활동을 하였다.
죽은 뒤에 뉴욕과 서울에서 각각 그를 위한 회고전이 열렸다.
○ 작품 활동
전후 14회의 개인전을 국내외에서 가졌고, 1970년 한국일보사 주최 한국미술대상전 (韓國美術大賞展)에서 대상을 받았다.
작품경향은 초기의 기하학적인 추상에서 출발하여 동양적인 관조 (觀照)와 아취 (雅趣)를 근간으로 한 반추상 (半抽象)의 세계를 보이다가 도미 (渡美) 후에는 완전히 추상화풍으로 전환하여 옵티컬한 양식의 새로운 사조(思潮)를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인다.
그의 대표 작품으로 〈론도〉,〈산〉, 〈산월 (山月)〉, 〈야상곡 (夜想曲)〉,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등이 있다.
그의 작품 중 〈론도〉는 대한민국의 등록문화재 제535호로 등록되기도 하였다.
○ 작품세계
작품 경향은 크게 4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초기에 해당하는 수업 시대는 당시 일본에 소개되기 시작한 새로운 추상 미술에 깊은 관심을 보였던 때이다.
현재 남아 있는 작품을 통하여 볼 때, 1937년 작품인 「향 (響)」과 1938년 작품인 「론도」등에서 시도된 기계의 찬미 등에서 미래파적인 요소와 구성주의적 색채를 찾아볼 수 있다.
광복 이후부터 부산 피난 시절을 거쳐 파리로 건너가기까지의 시기는 한국적 소재의 발견으로 일관되었다.
달과 산과 구름과 학 그리고 나목 (裸木)을 통하여 한국적 풍류와 시적 정서를 표출하려는 것이 이 시기의 주된 경향이었다.
약 3년간의 파리 시대는 이러한 주제가 더욱 요약되고 함축된 이른바 양식의 심화기로 볼 수 있다.
항아리와 달로 대변되는 둥글둥글한 형태가 화면을 채워 버린다든지, 극히 단순한 선으로 요약된 산과 몇 그루의 나목과 산에 걸린 달로 압축된 「월광 (月光)」·「산월 (山月)」 등은 이 시기를 대표할 만한 작품들이다.
파리에서 돌아와 미국으로 건너갈 때까지의 서울 시대는 파리 시대의 지속으로 보인다. 하지만 구성이 보다 단순해지면서 상징적 요소가 더욱 짙게 내포되기 시작하였다.
하나의 긴 수평선으로 상징되는 강이라든지, 곡선의 중첩으로 상징되는 산 그리고 몇 개의 사각 점획들로 대변되는 풍경 가운데의 점경 등이 상징적이면서 풍부한 공간 해석으로 이끌어 갔다.
미국으로 건너가 사망 때까지의 약 10년간의 뉴욕 시대는 지금까지의 경향에 비하여 커다란 변모를 보였다.
점과 선이 무수히 반복되어 찍혀진 점묘는 추상 공간의 무한대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두껍게 발라 올리던 마티에르의 구축성도 없어졌다. 그 대신 수묵 (水墨)과 같이 투명한 질감을 사용하였다.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는 1970년 제1회 한국일보대상전에서 대상을 받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가 있다.
그는 동양의 직관과 서양의 논리를 결합한 한국적 특성과 현대성을 겸비한 그림을 구상과 추상을 통해서 구현한, 대한민국의 대표적 현대 화가라 할 수 있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