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3년 3월 10일, 미국의 인권운동가 • 흑인 노예 폐지론자 해리엇 터브먼 (Harriet Tubman, 1822 ~ 1913) 본명, 아라민타 로스 (Araminta Ross) 별세
해리엇 터브먼 (Harriet Tubman, 본명 아라민타 로스, Araminta Ross, 1822년 3월 ~ 1913년 3월 10일)은 노예 해방 운동을 실천한 인권운동가이자 남북 전쟁 당시 활동했던 노예 폐지론자이다.

– 해리엇 터브먼 (Harriet Tubman)
.본명 아라민타 로스, Araminta Ross,
.출생: 미국 메릴랜드 도체스터 군
.사망: 1913년 3월 10일, 미국 뉴욕 오번
.묘지: 미국 뉴욕 오번 포르 힐 묘지
.부모: 해리엇 그린 로스, 벤 로스
.형제자매: 머라이어 리티 로스, 벤 로스, 리나 로스, 레이첼 로스, 모시스 로스, 헨리 로스, 소프 로스, 로버트 로스
.배우자: 넬슨 데이비스 (1869 ~ 1888년), 존 터브먼 (1844 ~ 1851년)
.자녀: 게르티 데이비스

○ 생애 및 활동
태어날 때부터 노예였던 그녀는 탈출 후, ‘지하철도’라는 반노예 운동가 네트워크와 아지트를 통해 해방 시설 열세 곳을 세워, 노예 칠십여 명을 구하였다.
해리엇은 1850년부터 1860년까지 ‘지하철도’의 차장으로서 남부에 들어가 300명이 넘는 흑인들을 북부로 탈출시켰다.
이후 그는 노예폐지론자 존 브라운을 도와 하퍼즈페리를 습격할 사람들을 모았으며, 전쟁 이후에는 여성 참정권을 위해 싸웠다. 메릴랜드주 도체스터군에서 태어난 터브먼은, 수많은 주인들에 의해 구타당하고 채찍질 당하였다. 어릴 적, 그는 화난 노예 주인이 다른 노예에게 던졌던 철 아령에 실수로 맞아 머리에 상처를 입었다. 상처로 인해 그는 평생 발작, 두통, 수면과다에 시달렸으나, 대신 꿈을 생생하게 꾸게 되었다. 독실한 기독교인인 그는 생생한 꿈을 하나님이 계시한 징조로 받아들였다.
1849년, 터브먼은 필라델피아로 도망쳤다가, 바로 메릴랜드로 그의 가족을 구해내기 위해 돌아왔다. 천천히, 한 번에 한 그룹씩, 그는 자신의 친척들을 주 밖으로 데리고 나갔으며, 결국 수십 명의 노예에게 자유를 찾아주었다. 아주 은밀하게 밤에만 움직였던 터브먼은 “한 번도 손님을 놓친 적이 없었다.” 그 덕분에 탈출한 사람들에겐 거액의 현상금이 걸리곤 하였지만, 그들을 돕는 게 해리엇 터브먼인 것은 아무도 몰랐다. 도망노예법이 제정된 때에는, 그는 도망친 노예들을 캐나다까지 갈 수 있게 도와주었으며, 동시에 그들에게 직업을 찾아주기도 하였다.
남북 전쟁 발발 후, 터브먼은 연합군을 위해, 처음에는 요리사이자 간호사로, 그 다음은 무장 정찰병이자 간첩으로 활약하였다. 전쟁에서 탐험대를 이끈 첫 여성이 된 그는, 콤바히강을 습격하여 700명이 넘는 노예들을 자유롭게 해주었다. 전쟁이 끝난 후 뉴욕주 오번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자신의 노부모를 돌봤다. 병 때문에 편히 움직일 수 없게 될 때까지 그는 여성 참정권을 위해서도 열심히 싸웠으며, 이후 자신의 도움으로 몇 년 일찍 세워진 흑인 양로원에 들어가 여생을 보냈다. 그리고 그 후에 폐렴으로 사망했다.

○ 유산
살아생전에도 유명하고 존중받는 인물이었던 해리엇 터브먼은, 숨을 거둔 이후 미국 전역에서 우상이 되었다. 20세기 말에 이루어진 조사에서 그는 남북 전쟁 전의 가장 유명한 인물 중 3위로, 베치 로스와 폴 리비어의 뒤를 이었다. 그는 평등과 권리를 위해 싸우는 여러 세대의 흑인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여러 정치적 리더의 칭송을 받았다.
사망 후, 터브먼은 오번의 포트 힐 공동묘비에 묻혔다. 오번 시는 시청사에 기념 액자를 설치해 그를 기렸다. 그 기념 액자는 그에 대한 자부심을 나타내고 있으면서도, 그의 말이 철자법에 맞지 않게 적혀있어 미국의 애국자이자 헌신적인 인도주의자였던 그를 깎아내리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도 받았다. 그를 기억하는 기념행사 역시 열렸으며, 부커 워싱턴이 중요 연설자로 참여하였다. 해리엇 터브먼의 집은 1920년 후 버려졌으나, 미국 감독 감리교회에 의해 복원되었다. 현재 터브먼의 생가는 박물관이자 교육 센터로써 수많은 방문객들을 받고 있다.
브래드포드의 전기 이후에는 얼 콘래드의 《해리엇 터브먼: 흑인 용사이자 노예 폐지론자》 가 출간되었다. 콘래드는 출판사를 찾는데 큰 어려움을 겪었으며, 터브먼의 삶에 대한 더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설명을 하려는 시도는 많은 멸시와 경멸을 받았다. 아이들을 위한 다양하게 각색된 터브먼의 삶 이야기들도 만들어졌었으나, 콘래드는 학술적인 스타일로, 학자들과 이 나라의 기억을 위해 그의 업적의 역사적 중요성을 자료화하였다. 전기는 결국 카터 우드슨의 출판사에 의해 1942년 출판되었다. 그의 명성과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성인을 위한 터브먼의 전기는 이후 60년간 나오지 않다가, 진 휴메즈가 터브먼의 삶에 대한 서적을 2003년 발표하였으며, 케이트 라슨과 캐서린 클린턴이 2004년 그의 전기를 작성하였다.

이외에도, 미국 전역에서 터브먼을 다양한 방식으로 기념하였다. 수많은 학교가 그의 이름을 따 붙여졌으며, 오번의 해리엇 터브먼의 생가와 캠브릿지의 해리엇 터브먼 박물관 둘 다 그의 삶에 대한 기념비로 남아있다. 1944년, 미연방 해사위원회는 SS 해리엇이라는 리버티 선을 만들었으며, 이것은 흑인 여성의 이름이 붙은 첫 함선이었다. 1978년, 미국 우체국에서는 터브먼을 기리는 우표를 발행하였는데, 이는 흑인을 기리는 첫 우표였다. 미국 성공회 (The Episcopal Church)에서 발간한 교회력에서, 7월 20일은 엘리자베스 케이디 스탠턴, 아멜리아 블루머, 소저너 트루스와 함께 해리엇 터브먼을 기리는 날로 되어있다.
2002년, 학자 몰레피 케트 아산테는 해리엇 터브먼을 “100명의 위대한 미국 흑인들”의 리스트에 포함시켰다. 2008년 토슨 대학은 캠퍼스의 새로운 기숙사의 이름을 “터브먼 하우스”라고 짓기도 하였다.
2016년 4월 20일, 잭 류 재무 장관은 20달러 지폐의 초상을 앤드루 잭슨 전 대통령에서 터브먼으로 바꿀 것이라고 발표했다. 다만 새 지폐가 시중에 언제 유통될지는 정확히 정해지지 않았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