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6년 1월 6일, 대한민국의 시인•교육자 박목월 (朴木月, 1916 ~ 1978) 출생
박목월 (朴木月, 1916년 1월 6일 / 음력 1915년 10월 13일 ~ 1978년 3월 24일)은 대한민국의 시인 겸 대학 교수 및 교육자이다.
– 박목월 (朴木月)
.본명: 박영종 (朴泳鍾)
.아호: 소국(素國) / 본관: 경주 박씨
.출생: 1915년 1월 6일, 경상남도 고성군 고성면 수남리
.사망: 1978년 3월 24일 (63세), 서울특별시 용산구 원효로4가 자택
.학력: 건천공립보통학교 (졸업), 계성고등보통학교 (졸업)
종교: 개신교 (한국기독교장로회)
그는 한양대학교 문리과대학 학장 재직중이던 1978년 3월 24일을 기하여 서울에서 고혈압으로 병사하였고 후임 한대 문리대 학장 직위는 조연현이 승계하였다.
본명은 박영종 (朴泳鍾). 경상북도 월성 (지금의 경주) 출신이다. 1935년 대구의 계성중학교 (啓聖中學校)를 졸업하고, 도일 (渡日)해서 영화인들과 어울리다가 귀국하였다. 1946년 무렵부터 교직에 종사하여 대구 계성중학교, 이화여자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연세대학교·홍익대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1962년부터 한양대학교 교수로 재임하였다.
1947년 한국문필가협회 발족과 더불어 상임위원으로 문학운동에 가담, 문총 (文總) 상임위원 · 청년문학가협회 중앙위원 · 한국문인협회 사무국장 · 문총구국대 (文總救國隊) 총무 · 공군종군문인단 창공구락부 (蒼空俱樂部) 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58년 한국시인협회 간사를 역임하였고 1960년부터 한국시인협회 회장직을 맡아 1973년 이후까지 계속하였다. 한때 출판사 산아방 (山雅房) · 창조사 (創造社) 등을 경영하기도 하였다.
또한, 잡지 『아동』 (1946) · 『동화』 (1947) · 『여학생』 (1949) · 『시문학 (詩文學)』 (1950∼1951) 등을 편집, 간행하였으며, 1973년부터는 월간 시 전문지 『심상 (心象)』을 발행하였다.
처음은 동시를 썼는데 1933년 『어린이』지에 동시 「통딱딱 통딱딱」이 특선되었고, 같은 해 『신가정 (新家庭)』지에 동요 「제비맞이」가 당선된 이후 많은 동시를 썼다.
본격 시인으로는 1939년 9월 『문장 (文章)』지에서 정지용 (鄭芝溶)에 의하여 「길처럼」·「그것은 연륜 (年輪)이다」 등으로 추천을 받았고, 이어서 「산그늘」 (1939.12.) · 「가을 으스름」 (1940.9.) · 「연륜 (年輪)」 (1940. 9.) 등을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데뷔하였다.
1946년 조지훈 (趙芝薰) · 박두진 (朴斗鎭) 등과 3인시집 『청록집 (靑鹿集)』을 발행하여 해방 시단에 큰 수확을 안겨주었다.
1930년대 말에 출발하는 그의 초기 시들은 향토적 서정에 민요적 율조가 가미된 짤막한 서정시들로 독특한 전통적 시풍을 이루고 있다. 그의 향토적 서정은 시인과 자연과의 교감에서 얻어진 특유의 것이면서도 보편적인 향수의 미감을 아울러 담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청록집』 · 『산도화』 등에서 잘 나타난다.
6·25사변을 겪으면서 이러한 시적 경향도 변하기 시작하여 1959년에 간행된 『난 (蘭) · 기타』와 1964년의 『청담』에 이르면 현실에 대한 관심들이 시 속에서 표출되고 있다.
인간의 운명이나 사물의 본성에 관한 깊은 통찰을 보이고 있으며, 주로 시의 소재를 가족이나 생활 주변에서 택하여, 담담하고 소박하게 생활사상 (生活事象)을 읊고 있다.
1967년에 간행된 장시집 『어머니』는 어머니에 대한 찬미를 노래한 것으로 시인의 기독교적인 배경을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다.
1968년의 『경상도의 가랑잎』부터는 현실인식이 더욱 심화되어 소재가 생활 주변에서 역사적·사회적 현실로 확대되었으며, 사물의 본질을 추구하려는 사념적 관념성을 보이기 시작한다.
1973년의 『사력질 (砂礫質)』에서는 사물의 본질이 해명되면서도 냉철한 통찰에 의하여 사물의 본질의 해명에 내재하여 있는 근원적인 한계성과 비극성이 천명되고 있다. 그것은 지상적인 삶이나 존재의 일반적인 한계성과 통하는 의미다.
수필 분야에서도 일가의 경지를 이루어, 『구름의 서정』 (1956), 『토요일의 밤하늘』 (1958), 『행복의 얼굴』 (1964) 등이 있으며, 『보랏빛 소묘 (素描)』 (1959)는 자작시 해설로서 그의 시작 방법과 시세계를 알 수 있는 좋은 책으로 평가되고 있다.
시사적 (詩史的)인 면에서 김소월 (金素月)과 김영랑 (金永郎)을 잇는 향토적 서정성을 심화시켰으면서도, 애국적인 사상을 기저에 깔고 있으며, 민요조를 개성 있게 수용하여 재창조한 대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1955년 첫 시집 『산도화 (山桃花)』 (1954)로 제3회 아세아자유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1968년 시집 『청담 (晴曇)』으로 대한민국문예상 본상을, 1969년 『경상도 (慶尙道)의 가랑잎』 (1968)으로 서울시 문화상을, 1972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상하였다.
○ 생애 및 활동
– 유년시절과 활동초기
본명은 “영종 (泳鍾)”이나, 시를 쓸 무렵 본인의 필명을 “목월 (木月)”로 지었다. 이 때 목월의 아버지 박준필은 반대하였다. 18세인 1933년, 개벽사에서 발행하는 잡지 《어린이》에 동시 「통딱딱 통짝짝」이 뽑혔고, 같은 해, 《신가정》 6월호에 그의 시 「제비맞이」가 당선되어 동시를 주로 쓰는 시인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 본격적인 작품활동
1940년, 《문장》 9월호에 「가을 어스름」, 「연륜」으로 추천 완료하여 본격적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이 당시는 일제 강점기 말엽인데, 특별한 활동은 보이지 않는다. 1945년, 대구 계성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1946년 6월, 목월은 조지훈, 박두진 3인과 유명한《청록집》을 발간했으며, 동시집인 『박영종동시집』도 발간한 것으로 보아 이전에도 작품활동은 꾸준히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1945년부터 1950년대 말까지는 그의 활동이 활발하던 시기였다. 1948년, 목월은 한국문학가협회 중앙위원과 사무국장으로 취임하여 활동하였고, 1950년 이화여자고등학교로 학교를 옮겼으나, 6월에 한국전쟁이 터지자 한국문학가협회 별동대를 조직, 1953까지 공군종군문인단의 일원이 되어 문관으로 군복무를 하게 된다. 전쟁이 끝나고 목월은 홍익대학교와 서라벌예술대학, 중앙대학교 등지에서 강의하였고, 1959년 4월, 한양대학교 조교수가 되어 은퇴할 때까지 한양대학교에서 후학을 키우는 일을 계속적으로 담당하였다.
– 말년
목월은 1977년, 자신이 봉직한 한양대학교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다음 해인 1978년, 그는 자신이 출석하던 원효로 효동교회에서 장로 안수를 받았고 동년 3월 24일, 새벽에 산책하고 돌아온 후, 지병인 고혈압에 걸려 6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 학력 및 경력
– 학력
경상북도 대구 계성고등학교 졸업
명예 박사 학위 (한양대학교 명예 문학박사)
– 경력
계성중학교 교사(1945)
이화여자고등학교 교사(1949)
한국문학과협회 사무국장(1950)
홍익대학교 조교수(1953)
한양대학교 문리대 국문학과 부교수(1961)
한양대학교 문리대 국문학과 교수(1963)
대한민국예술원 회원(1965)
한국시인협회 회장(1968)
시전문지 심상 발행인(1973)
한양대학교 문리대학 학장(1976)
– 상훈
1954년 제3회 아세아자유문학상
1968년 대한민국 문예상
1969년 서울시 문화상
1972년 국민훈장 모란장(2등급)
○ 작품세계
– 정지용의 평가
정지용은 목월의 시를 높이 평가하며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북에는 소월이 있었거니 남에는 박목월이가 날 만하다. 소월이 툭툭 불거지는 삭주귀성조 (朔州龜城調)는 지금 읽어도 좋더니 목월이 못지않아 아기자기 섬세한 맛이 좋아. 민요풍에서 시에 발전하기까지 목월의 고심이 더 크다. 소월이 천재적이요, 독창적이었던 것이 신경 감각 묘사까지 미치기에는 너무나 “민요”에 시종하고 말았더니 목월이 요적 (謠的) 뎃상 연습에서 시까지의 콤포지션에는 요 (謠)가 머뭇거리고 있다. 요적 수사 (修辭)를 충분히 정리하고 나면 목월의 시가 바로 한국시이다.” _ 정지용, <문장>(1940. 9)
– 부정적 평가
목월의 시는 80년대를 기점으로 비판을 받는 경향이 강해지는데, 이는 그의 시가 가진 특유의 여린 서정성과 내면성 때문이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는 그의 시는 부정적으로 읽힐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또한 당시에 본격적으로 유입된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탈권위주의를 표방하는 시대적 경향은 당시 상당한 문학적 권위를 인정받던 목월의 시에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긍정적 측면
한편 목월의 시는 그 특유의 서정성을 바탕으로 한 순수 시로 주목받고 있다. 특히 그의 시에 보이는 미학적인 측면은 한국의 현대 시문학을 풍성하게 해주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시 후기작에는 그가 주목하지 않았던 일상의 삶에 대한 성찰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그의 유명한 작품인 〈가정〉은 시인이며 동시에 한 가정의 가장이 하는 고민의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다.
– 기독교적 색채
목월의 시문학의 한 축이 토속적이고 서정적인 면이라면, 다른 한 축은 기독교 신앙에 기반을 둔 절대자에 대한 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유고시집인 《크고 부드러운 손》에는 절대자에 의존하는 모습이 두드러지게 등장하고 있다. 또한 그의 시에는 어머니의 신앙과 관계된 추억들이 간혹 등장하고 있다.
“유품 (遺品)으로는 그것뿐이다. 붉은 언더라인이 그어진 우리 어머니의 성경책.” _ 박목월, ‘어머니의 언더라인’
○ 작품활동
– 시집, 작품집
시집 《청록집(공저)》(1946)
시집 《산도화》
자작시 해설서《보랏빛 소묘》(1958)
시집 《난, 기타》(1959)
동시집 《산새알 물새알》(1959)
시집 《청담》(1964)
시집 《경상도의 가랑잎》(1968)
연작시집 《어머니》(1968)
연작시집 《청록집·기타》(1968)
시집 《사력질》
시집 《무순》(1976)
– 유고집, 전집
《박목월자선집(전 10권)》(1973)
신앙시 모음집(유고작) 《크고 부드러운 손》(1979)
《박목월 시전집》(서문당, 1984)
《박목월 시전집》(민음사, 2003)
참고 = 위키백과, 한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