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6년 4월 10일, 대한민국의 서양화가 이중섭 (李仲燮, 1916 ~ 1956) 출생
이중섭 (李仲燮, 1916년 4월 10일 ~ 1956년 9월 6일)은 일제 강점기, 대한민국의 서양화가로 호는 대향(大鄕), 본관은 장수이다.
이중섭의 작품에는 소, 닭, 어린이, 가족 등이 가장 많이 등장하는데, 향토적 요소와 동화적이고 자전적인 요소가 주로 담겼다는 것이 소재상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싸우는 소》, 《흰소》, 《움직이는 흰소》, 《소와 어린이》, 《황소》, 《투계》등은 향토성이 진하게 밴 대표적 작품이다. 《닭과 가족》, 《사내와 아이들》, 《길 떠나는 가족》과 그 밖에 수많은 은지화들은 동화적이고 자전적 요소가 강한 작품들이다.

– 이중섭 (李仲燮)
.호: 대향 (大鄕)
.출생: 1916년 9월 16일, 평안남도 평원군 조운면 송천리 742
.사망: 1956년 9월 6일 (41세), 서대문적십자병원
.직업: 화가
.학력: 도쿄 문화학원
.분야: 화가
.주요 작품: 흰 소
.부모: 이희주
.배우자: 마사코 야마모토 (1945 ~ 1956)
.자녀: 이태성, 이태현
.형제자매: 이중석, 이중숙
호는 대향 (大鄕).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이희주 (李熙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오산고등보통학교 (五山高等普通學校)에 들어가 당시 미술 교사였던 임용련 (任用璉)의 지도를 받으면서 화가로서의 꿈을 키웠다.
1937년 일본으로 건너가 분카학원 [文化學院] 미술과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 독립전 (獨立展)과 자유전 (自由展)에 출품하여 신인으로서의 각광을 받았다.
분카학원을 졸업하던 1940년에는 미술창작가협회전 (자유전의 개칭)에 출품하여 협회상을 수상하였다. 1943년에도 역시 같은 협회전에서는 태양상 (太陽賞)을 수상하였다.
이 무렵 일본인 여성 야마모토 [山本方子]와 1945년 원산에서 결혼하여 이 사이에 2남을 두었다. 1946년 원산사범학교에 미술 교사로 봉직하기도 하였다.
북한 땅이 공산 치하가 되자 자유로운 창작 활동에 많은 제한을 받았다. 친구인 시인 구상 (具常)의 시집 『응향 (凝香)』의 표지화를 그려 두 사람이 같이 공산주의 당국으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6·25전쟁이 일어나고, 유엔군이 북진하면서 그는 자유를 찾아 원산을 탈출, 부산을 거쳐 제주도에 도착하였다. 생활고로 인해 다시, 제주도에서 부산으로 돌아왔다.
이 무렵 부인과 두 아들은 일본 동경으로 건너갔으며, 이중섭은 홀로 남아 부산 · 통영 등지로 전전하였다. 1953년 일본에 가서 가족들을 만났으나 며칠 만에 다시 귀국하였다. 이후 줄곧 가족과의 재회를 염원하다 1956년 정신이상과 영양실조로 그의 나이 40세에 적십자병원에서 죽었다.
화단 활동은 부산 피난 시절 박고석 (朴古石) · 한묵 (韓默) · 이봉상 (李鳳商) 등과 같이 만든 기조전 (其潮展)과 신사실파에 일시 참여한 것 외에 통영 · 서울 · 대구에서의 개인전이 기록되고 있다. 살아있는 동안에 많은 인간적인 에피소드와 강한 개성적 작품으로 1970년대에 이르러 갖가지 회고전과 재평가 작업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1972년 현대화랑에서의 유작전과 화집 발간을 위시하여, 평전 (評傳)의 간행, 일대기를 다룬 영화 · 연극 등이 상연되었으며, 많은 작가론이 발표되었다.

○ 생애 및 활동
– 생애 초기
평안남도 평원군 조운면 송천리에서 출생하였고, 어린 시절 아버지가 작고하셔서 출생지인 평원을 떠나 외가였던 평양으로 가족 모두 거처를 옮겨 평안남도 평양에서 성장하였다. 외조부는 평양 내에서 손꼽히는 부자로 사업이 아주 번창했다고 한다. 사업 종류가 일제 시대에 거리낄 일이 없는 종류라 어릴 때부터 어려움은 전혀 모르고 편안한 유년 시절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진학 시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 (五山學校)에 입학했다. 오산학교에서 서양화가인 임용련으로부터 미술 교육을 받은 이중섭은 본격적으로 미술의 세계에 입문하게 된다. 민족 정기에 대한 교육을 받은 이중섭은 일본에서 개최되는 미술전에 작품을 제출하게 되는데 오산학교 시절 민족교육의 영향을 크게 받아, 작품의 주제를 황소로 잡고 황소를 소묘하는 작품으로 참가하게 된다. 당시 황소는 일본인들 사이에서 한국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황소라고 할 정도로 민족정서를 대표하는 동물이라 일본인들이 일부러 소에 관련된 표현 자체를 못하게 하는 분위기였는데, 이런 분위기를 보란듯이 비웃으며 작품을 그려낸다.
첫 작품이라 전시 때 비교적 그림 크기를 크게 그려 내는 기조를 알면서도 손바닥만한 작은 크기에 강렬한 눈빛을 가진 소를 그린 그림을 본 일본의 한 기자는 이중섭의 천재성을 바로 알아보고 감탄했다는 말이 이어진다. 특히 소 그림의 낙관에 ‘중섭’이 아닌 ‘둥섭’이라고 씌어 있는 걸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당시 친일파로 변절한 조선인 문학가가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게재한 〈머리를 중처럼 밀고 전쟁에 참가하는 아름다운 청년이 되자〉라는 논조의 사설을 보고 중섭의 본인 이름에 발음이 같은 중자도 부르기 싫고 부끄러운 일이라며 분노하여 낙관의 이름까지 바꿔서 써낸 일화가 있다.
– 일본 유학
1936년 일본 도쿄 데이코쿠 미술 학교 (현재의 무사시노 미술대학)에 입학했지만 1937년 자유롭고 혁신적인 분위기의 학풍을 중시하는 도쿄 분카 학원 (문화학원)으로 옮겨 졸업하였다. 1941년에는 일본 도쿄에서 유학 생활을 하던 조선인 화가인 이쾌대, 진환, 최재덕 등과 함께 조선신미술가협회 (朝鮮新美術家協會)를 결성했고, 1943년에는 자유미술가협회 특별상 태양상을 수상했다.
– 귀국
1945년 고향인 평안남도 평원에 돌아왔다. 1945년 5월에는 원산에서 일본인 이남덕 (李南德, 본명 야마모토 마사코, 山本方子)과 결혼했다. 이남덕은 이중섭을 분카 학원 유학 시절에 만났다.
1946년에는 원산사범학교의 미술교사로 근무했지만 1주일 만에 사직했다. 같은 해에는 그의 친구인 구상 등이 펴낸 시집 《응향》(凝香)의 표지 제작을 맡았지만 《응향》이 퇴폐적, 반인민적, 반동주의적인 작품으로 규정된 필화 사건인 응향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다.
– 한국 전쟁 이후
1950년 한국 전쟁 때 월남해서 경상남도 부산, 통영, 제주도 등을 다니면서 살았다. 통영에서 지낼 때 이중섭은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며 힘든 일생 중 그나마 가장 편안하고 가족들을 한국으로 데려올 수 있다는 희망적인 생각을 하며 지내는 시기를 보내게 된다.
이중섭은 그림 재료를 살 돈이 없어서, 담뱃갑의 은박지에 그림을 그릴 정도로 극심한 어려움에 시달렸는데, 이 때문에 1952년 부인이 두 아들과 함께 일본으로 넘어갔다. 그들의 만남은 1953년 이중섭이 부두 노동으로 번 돈으로 마련한 선원증을 통해 일본의 처갓집을 방문하여 한 차례 더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선원증을 갖고 있던 이중섭은 일본에 오래 체류할 수 없었기 때문에 1주일 만에 대한민국으로 귀환했다. 부산, 대구, 통영, 진주, 서울 등을 떠돌며 가난 속에서도 창작에 매달렸다.
– 전시회
1955년 친구들의 도움으로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인 전시회를 미도파백화점에서 열었다. 서울에서 열린 전시회에 작품을 마흔가지도 넘게 전시를 하고 20점이나 판매하는 높은 성과를 거두지만, 사기로 한 사람들이 전쟁 후 어려운 형편에 돈으로 주기로 한 작품료를 먹을 것으로 대신하거나 차일피일 미루고 제대로 돈을 지급하지 않자 결국 손에 쥔 돈은 얼마 안되는 수고비정도 였다고 한다.
이중섭은 자신의 전시회를 도와준 동료와 선후배들에게 술이나 대접할 수 있는 정도의 수입만 갖게 되고 이로 인해 가족을 책임지지 못한 가장이라는 자괴감에 빠지게 된다. 그로 인해 중섭은 거식증에 시달리면서 동시에 조현병 증세를 보이게 된다. 1956년 간염으로 인해 서울 서대문적십자병원에서 4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친구들이 수소문해서 찾아오니 이미 시체와 밀린 병원비 청구서만이 있었다고 한다.
– 기념
현재 제주도 서귀포시에서는 1951년 이중섭 가족이 살던 집을 개조해 이중섭 박물관을 운영하고 있으며, 그 주변으로 이중섭 거리를 조성하였다. 매년 9월에는 이 거리에서 이중섭 예술제를 한다.
2016년 9월 1일에는 이중섭 탄생 100주년 기념 우표가 발행되었다. 2007년 3월 6일에는 이중섭을 추모하는 음반인 《그 사내 이중섭》이 발매되었다.
– 서훈
1978년 은관문화훈장 (2등급, 추서)

○ 이중섭의 묘비
” 묘비에는 아이가 서로 팔을 뻗어 안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두 아들 태현과 태성에 대한 그리움을 사후에서라도 풀라는 염원을 담은 것 같다. “
무덤의 주인을 알려주는 것은 무덤 옆으로 비켜 세워진 조각상이다. 비운의 조각가 차근호의 작품이다. 까만 돌을 깎아 만든 조각상에는 ‘대향이중섭화백묘비’라고 적혀 있다. ‘대향(大鄕)’은 이중섭의 호다. 큰 고을이라는 뜻이다. 이중섭은 ‘덕지덕지 아들딸 많이 낳아서 그놈들과 대향촌(큰 고을)을 만들고 싶다’고 늘 말했다. 자신의 호, 대향에 가족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그러나 그는 죽어서도 가족을 그리워하게 됐다. 아니 혼백의 절반만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다. 친지들의 도움으로 화장된 이중섭의 육신은 절반만 망우리에 묻혔다. 나머지는 부인 야마모토 마사코가 있는 일본으로 보내졌다. 조각상에는 2명의 아이가 팔을 뻗어 서로 안고 있는 그림이 새겨져 있다. 두 아들 태현과 태성에 대한 그리움을 사후에서라도 풀라는 염원을 담은 것 같다. 차근호는 이중섭의 고향(평안남도 평원)의 후배이자 유일한 제자다. 무연고 시신으로 발견된 이중섭의 유골을 수습해 망우리에 묻을 때도 차근호가 함께했다. 그는 장례식 때 이중섭을 따라가겠다며 소동을 피운 일화를 남겼다. 차근호의 작품에서 이중섭에 대한 그리움의 절규가 들려오는 듯하다. 그리움을 아는 이만이 그 슬픔을 아는 법이다.
○ 이중섭 (李仲燮) 작가의 연보 (1916~1956년 사이와 그 이후)
– 1910년대
1916
9월 16일 평안남도 (平安南道) 평원군 (平原郡) 조운면 (朝雲面) 송천리 (松千里)에서 아버지 이희주 (李熙周, 1888~1918), 어머니 안악 (安岳) 이씨 (李氏)의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형 중석은 12년 연상이고, 누이 중숙은 6년 연상이다.
– 1920년대
1923
평양공립종로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외할아버지 이진태 (李鎭泰)의 이문리 집에 거주하였다. 학교 동기로는 화가 김병기와 시인 양명문, 작가 황순원이 있었고, 작가 김이석은 한 학년 위, 시나리오 작가 오영진은 두 학년 위에 재학 중이었다.
1926
4학년 때부터는 그림에 몰두했다. 모지랑이 붓으로 수채화 풍경을 그려 교내에서는 그림 잘 그리는 아이로 유명했다. 기타나 바이올린 악기 연주에도 능했다. 보통강 교외의 진흙을 파서 흙장난을 하는 등 짓궂은 장난도 쳤다. 5~6학년의 졸업을 전후해서도 진학 시험공부가 아니라 그림 공부에만 열중하였다.
1929
평양 제2고등보통학교에 응시했으나 낙방하였다.
– 1930년대
1930
정주로 내려가 오산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고, 미술부에 가입하였다. 미술부에는 1년 상급생으로 문학수, 동급생으로 안기풍을 만났다. 안기풍은 이중섭과 함께 제국미술학교를 거처 문화학원으로 함께 옮긴 동반자였으며, 문학수는 먼저 문화학원에 들어가 선배로서 이중섭을 이끌어 주었다.
1936
오산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제국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하였다. 이쾌대 (李快大, 1913~1965), 김만형 (金晩炯, 1916~1984) 등이 다니고 있었고 같은 평양 출신으로는 김원, 황헌영, 윤중식 등이 있었다.
1937
도쿄 제국미술학교에 싫증을 느끼고 자유로운 분위기의 문화학원 미술과에 입학하였다.
1938
문화학원에 야마모토 마시코(山本方子, 1921~ )가 입학하여 처음 만났다. 제2회 ‘자유미술가협회’ 공모전에 <소묘A>, <소묘B>, <소묘C>, <작품 1>, <작품 2>을 출품하여 입선하였다.
1939
봄 개학과 함께 야마모토 마사코와 사귀기 시작하였다. 가을 제국미술학교 학생 나찬근 소개로 시인 구상과 처음 만나게 되었다.

– 1940년대
1940
제4회 ‘자유미술가협회전’에 <서 있는 소>, <누워 있는 여자>, <소의 머리>, <작품 1>, <작품 2> 등 5점을 출품하여 입선하였다. 12월 연인 마사코에게 그림을 그려 넣은 엽서를 보내기 시작했다.
1941
3월 문화학원을 졸업했다. 제1회 ‘조선신미술가협회전’에 <연못이 있는 풍경>을 출품했다. 이 전시에는 이쾌대를 비롯하여 이중섭, 진환, 최재덕 등이 참여하였고, 이중섭은 활동적으로 협회의 일을 맡아 추진하였다. 제5회 ‘미술창작가협회(구 자유미술가협회전)’에는 <망월>과 <소의 여인> 2점을 출품하였다.
1942
제6회 ‘미술창작가협회(구 자유미술가협회)’에 회우 자격으로 <소와 아이>, <봄>, <소묘>, <목동 (牧童)>, <지일 (遲日)>을 출품하였다.
1943
제7회 ‘미술창작가협회 (구자유미술가협회)’에서 <망월>, <소와 소녀>, <여인>, <소묘> 등 9점을 출품하였다. 특히 출품작에 대해 높은 평가를 받고 한신태양사에서 제정한 제4회 태양상을 수상하여 부상으로 팔레트를 받았다. 8월 귀국하여 6~15일에 열린 제6회 재동경미술협회전 (총독부미술관)에 참석하여 기념 촬영을 하였다. 원산으로 돌아간 이중섭은 10월에도 경성을 방문해 조선신미술가협회 주최로 열린 이쾌대 개인전 (경성 화신화랑)에 참석했다.
1944
5월 29일에 마사코에게 보낸 전보에는 전람회를 위해 제작 중이라는 짧은 언급이 보인다. 6월 10일에는 전람회가 연기되어 편지가 10일 정도 늦어졌다는 것을 밝히기도 했다. 여기에 참가한다는 전시는 아마도 평양에서 개최된 <6인전>일 것으로 보인다. 평양 체신회관에서는 열린 <6인전>에는 문학수 김병기, 황염수, 윤중식, 이호연이 함께 참가했다. <6인전>에 이중섭은 ‘소 그림’을 출품했다.
1945
야마모토 마사코가 최후의 연락선을 타고 현해탄을 건너와 5월 원산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1946
2월 28일에 결성대회를 개최한 조선조형예술동맹에 참가했다.
1947
6월 오장환 시집 『나 사는 곳』 속표지화를 제작하였다. 8월에는 평양에서 열린 제1차 전국미술전람회에 출품했다. 한묵의 기억에 따르면 이때 이중섭이 출품한 작품은 <투우>, <투계>, <군조> 등으로, 성난 소, 성난 닭, 성난 까마귀 떼들을 그렸다는 것이다.
1948
2월 9일 둘째 아들 태현이 태어났다.
1949
8월 16일 셋째 아들 태성이 태어났다.
– 1950년대
1950
한국전쟁 발발하자 소개령에 따라 일가족이 안변군 내륙쪽 과수원으로 이주하였다.
1951
부산에 도착한 이중섭 가족은 정부에서 실시하는 피난민 소개 정책에 따라 종교 단체에 신청을 하였고 1월 15일 제주도로 가는 1차 출항 기선에 승선하였다.
1952
2월 마사코의 부친이 병환으로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남긴 유산의 상속 문제 등 때문에 마사코 자신이 일본으로 가야만 하였다.
1953
5월 26일~6월 4일에 부산 임시 국립박물관에서 열린 제3회 신사실파전에 <굴뚝 1>, <굴뚝 2>를 출품했다.
1954
봄에는 장욱진, 유강렬과 함께 3인전을 개최하였다.
1955
《이중섭 작품전》(1월 18일~27일, 미도파화랑, 의회주보사 주최, 문학예술사 후원)을 개최했다.
1956
1월 맥타가트는 지난 해인 1955년 미도파 개인전에서 구입한 은지화 3점을 뉴욕 근대미술관 (MoMA)에 기증의사를 표명했다. MoMA에서는 이를 검토하고, 심의 절차를 거쳐 소장하기로 결정하였다.
– 1960년대
1960
부산 로터리 다방에서 부산의 지우들이 소장하고 있었던 작품으로 최초의 유작전이 개최되었다.
– 1970년대
1972
서울 현대화랑 (현재 현대갤러리)에서 15주기 추모전이 열려 대성황을 이루었다. 이를 전후로 이중섭을 테마로 한 영화, 연극 등이 제작되어 일반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78
부산국제화랑에서 ‘미발표 이중섭 작품전’ (7월 12일~30일)이 개최되었고 10월 은관문화훈장에 추서되었다.
– 1980년대
1986
호암갤러리에서 ‘30주기 특별기획 이중섭전’ (6월 16일~7월 24일)이 개최되었다. 8월에는 이중섭기념사업회, 이중섭미술상 제정이 추진되었다.
– 1990년대
1996
3월 2일 서귀포시에서 이중섭기념관을 개관하고 이중섭거리를 지정하였다.
1997
서귀포시에서 이중섭이 거주했던 집을 매입하여 복원하였고 가나아트 주최로 서귀포 신라호텔에서 ‘이중섭특별전’ (7월 1일~8일)이 개최되었다.
– 2000년대
2002
이중섭전시관이 개관하였다.
2003
2종 미술관으로 등록되었고 가나아트센터 이호재 대표의 기증 작품전 ‘이중섭과 그 친구들’전시가 개최되었다.
2004
1종 미술관으로 등록되었고 현대 갤러리 박명자 회장의 기증 작품전 ‘이중섭에서 백남준까지’전시가 개최되었다.

○ 작품들
그가 추구하였던 작품의 소재는 소 · 닭 · 어린이 [童子] · 가족 등이 가장 많다. 불상 · 풍경 등도 몇 점 전하고 있다. 소재상의 특징은 향토성을 강하게 띠는 요소와 동화적이며 동시에 자전적 (自傳的)인 요소이다.
「싸우는 소」· 「흰소」 (이상 홍익대학교박물관 소장)· 「움직이는 흰소」· 「소와 어린이」· 「황소」 (이상 개인 소장)· 「투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등은 전자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닭과 가족」· 「사내와 아이들」· 「길 떠나는 가족」 (이상 개인 소장)과 그밖에 수많은 은지화 (담뱃갑 속의 은지에다 송곳으로 눌러 그린 일종의 선각화)들은 후자를 대표하는 작품들이다.
– 섶섬이 보이는 풍경 / 나무판에 유채, 41×71cm, 1951년
폭격의 위험을 피해 월남한 이중섭은 부산에서 다시 제주도 서귀포로 갔다. 주민의 호의로 살 곳을 얻어서 비로소 안정을 얻게 되었다. 사는 집 지붕과 그 아래로 펼쳐지는 섬이 있는 바닷가 고요하고 깨끗한 느낌을 그린 것이 풍경화다. 뒷날 부산과 통영에서 그린 풍경화들에서 보이는 활달한 필치와는 사뭇 다르다.
– 서귀포의 환상 / 나무판에 유채, 56×92cm, 1951년 / 용인 호암 미술관 소장
귤이 자라는 따뜻한 날씨와 작으나마 깃들 수 있는 집에서 비로소 안도한 이중섭의 마음을 느낄수 있다. 아울러 아이가 새를 타는 것으로 설정해서 환상적이기도 하지만 사실적인 필치가 있으므로 북한에서 생활할 때 강요되다시피 했던 사실주의적인 태도가 남은 것이라고도 여겨진다. <도원>과 함께 이중섭이 남긴 그림 중에서 가장 커다란 것에 속한다.
– 물고기와 노는 두 어린이 / 종이에 유채, 41.8×30.5cm
– 도원 / 종이에 유채, 65×76cm, 1953년 무렵
물이 있고 크고 작은 봉오리들이 있는 곳에 서있는 천도복숭아를 중심으로 네 명의 남자아이가 노는 광경을 통하여 낙원의 느낌을 나타냈다. 젊은 시절 애인에게 보낸 그림엽서들에도 이런 경향이 강했다. 통영에 머물던 시기에 그려진 것이라고 한다. 최재덕과 8.15 직후 서울에서 그렸던 벽화도 이런 소재였다고 하는데, 통영에서 멀지않은 산청이 고향이며, 이 그림을 그릴 당시에는 월북하고 없었던 조선신미술가협회의 동인이었던 최재덕이 떠올랐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호 대향을 써서 대이상향이라는 본래의 의미대로 낙원의 느낌을 물씬하게 풍기도록 하였다.
– 길 떠나는 가족 / 종이에 유채, 29.5×64.5cm, 1954년
헤어져 있던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가족을 소달구지에 태우고 자신은 황소를 끌고 따뜻한 남쪽 나라로 함께 가는 광경을 그렸다고 했는데, 이 그림은 이를 옮긴 것이다. 서울에서 개인전을 성공리에 마치면 곧 만나게 될 가족에 대하여 희망에 차서 그린 것이다. 유화가 1점 더 있다. 그림의 테두리는 젊은 시절 큰 영향을 받은 루오가 쓰던 수법을 응용한 것으로 이중섭도 이를 자주 애용했다.
– 가족 / 종이에 유채, 41.6×28.9cm
– 소
소는 중등 과정부터 즐겨 그리던 그림의 소재였다고 동창들은 전한다. 소를 통하여 자신의 감정과 소로 상징되는 민족과 현실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그렸던 것으로 보인다. 자신을 돌봐준 의사에게 선물한 이 그림은 그의 배려로 건강하게 되었다는 감사의 마음을 그림에 보이는 평정한 모습의 소로 전달한 것으로 보인다. 뒷면에 <비둘기가 있는 가족>이 그려져 있다.
– 가족과 비둘기 / 종이에 유채, 29×40.3cm, 1956년 무렵
가족을 그린 그림들에서 느껴지는 공통점은 경쾌함이다. 가족이란 화기애애함이 넘치는 인간관계임을 강조한 것이라 여겨진다. 특히 이 그림은 재빨리 완성해 이런 느낌이 더더욱 강조되었고, 그럼에도 등장인물의 개별 특징이 또렷한 것이 큰 특징이다.
– 소와 새와 게 / 종이에 유채와 연필, 32.5×49.8cm
– 황소 / 종이에 유채, 32.3×49.5cm, 1953년 무렵
소는 고개를 들면서 외치는 듯하다. 왼쪽으로 향한 얼굴과 오른쪽으로 향한 눈이 화면의 양쪽 모두를 지배하는 듯하다. 외침이 들리 듯한 느낌을 강조하기 위하여 소의 얼굴과 목 주위를 유달리 주름지게 한 것으로 보인다. 코와 입에 가해진 선연한 붉은 색과 넓은 배경의 붉은 노을을 층지게 하여 이런 느낌을 강화하고 있다. 그가 태어난 평원군은 노을이 아름답기로 유명했다고 하는데, 이런 감회를 표현한 것이라 여겨진다.
– 투계 / 종이에 유채, 29×42cm / 과천 국립 현대 미술관 소장
두 마리의 닭이 서로 싸우고자 덤벼드는 설정이다. 푸르고 붉은 빛깔로 그린 닭 부분이 충분히 마른 뒤, 그 위에 덮은 검은 빛깔이 마르기 전에 물감칼로 덮은 물감을 긁어냄으로서 완성하는 과정을 거쳤다. 조응하는 색깔과 태세로 보아 고구려 무덤벽화에 나타나는 색채적, 조형적 특징을 계승한 것이라 보인다.
– 부부 / 종이에 유채, 51.5×35.5cm, 1953년 무렵
– 소와 어린이 / 나무판에 유채, 29.8×64.4cm
기진맥진한 소는 후기작으로 추정되는 이중섭의 그림에 자주 등장한다. 지고 가던 지게를 세우고 남자아이가 딱한 처지의 소 가랑이 사이에 들어가 앉아 두 손으로 꼬리와 뒷다리를 쥐었다. 무슨 행동인지 납득하기 어렵다. 이 상태에서 재빨리 소 불알을 훌트면 기운이 버쩍 난다고 한다. 그림으로 그려내기는 곤란한 장면이다. 그러므로 그림이 될 순간만 포착하였다. 어떻게 할 것인지 정확히 계산되었으므로 단붓질로 끝을 내 화면은 깔끔하고 경쾌한 리듬감마저 느껴진다.
– 닭과 가족 / 종이에 유채, 29×40.3cm, 1956년 무렵
가족이라는 주제는 헤어져 있는 가족이 다시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이중섭의 염원이 서린 것이다. 그렇다고 개인적인 소망만으로 보기는 어렵다. 월남한 이산가족이기도 했던 그는 이 비극을 대변하고자 하는 심정을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자신은 극단적인 예였다. <가족>의 위쪽의 아이에게 긴 색띠를 들도록 하여 화면을 아우르는 역할을 하도록 했고, 자신은 꽃을 쥐도록 했는데 꽃잎이 뚝뚝 듣도록 했고, 아내쪽에는 새를 배치했다. 셋 모두 앞을 보도록 한것과 달리 아래의 아이는 화면 안쪽을 향하도록 하고, 고개를 쳐들어 셋을 보도록 연출했다. <닭과 가족>의 닭은 결혼직후 이중섭이 일삼아 키우기도 했고, 즐겨 먹던 것이다. 두 아이는 병아리가 든 광우리를 들고, 아래 두 사람은 성징이 불분명하여 아이들로 착각하게 하지만 암탉을 안은 듯한 왼쪽은 아내고, 오른쪽은 지아비로 닭에게 어떤 작용을 가하고 있다. 교미시키기 위하여 발정하도록 항문에 숨을 세차게 불어넣고 있는 것이다.
– 부부 / 종이에 유채, 51.5×35.5cm, 1953년 무렵 / 박명자-한용구 기증, 과천 국립 현대 미술관 소장
두 마리의 봉황이 안으려고 애쓰는 모습을 그렸다. 그러나 위의 새는 화면 너머의 무엇인가에 긴박된 듯 매달려 있는 것 같고, 아래의 새는 다리를 지면에서 떼기 힘든 듯 하다. 일어서서 날아오를 힘이 없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두 마리의 새는 서로 만나려 애쓰나 만나기 힘든 것이다. 후자는 가로줄을 겹쳐 이러한 분위기를 보강하고 있다. 그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그림은 이중섭이 제목과 달리 부부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남북한에 관한 것이라고 말했다는 증언이 있다. 어떻게 보든 함의가 풍부한 그림이다. 비슷한 유형의 그림이 서울에서의 개인전에 출품되었다고 하는데, 새들이나 애정이라고 한 것이 이에 해당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 달과 까마귀 / 종이에 유채, 29×41.5cm, 1954년
까마귀는 6.25 전쟁 전만 해도 흔하던 새였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전쟁의 포성과 화약 냄새 때문인지 보기 어렵게 되었다고 한다. 이 그림은 통영에서 그려졌다고 하는데 평화로웠던 그 곳에서 반갑게 여겨졌는지도 모른다. 보름달이 뜬 맑고 푸르른 하늘, 검게 세 가닥으로 그어진 전깃줄에 앉은 친구를 찾아 모여드는 까마귀를 검은 물감을 묻힌 붓으로 간단히 그렸다. 몸 전체가 까맣다는 점 때문에 먹만으로 그리는 문인화의 소재로 어울릴 소재다. 까마귀를 이루고 있는 붓질을 자세히 보면 날려져 있어서 마치 글씨예술(서예)의 비백과 같다. 그래서 전통 예술의 냄새가 진한 것이다. 대한 미협전에 출품되어 절찬을 받은 작품이다.
– 물고기와 게와 노는 네 어린이 / 종이에 유채, 36×27cm, 1951년 무렵 / 용인 호암 미술관 소장
물고기와 노는 아이들을 그린 일련의 유화들이다. 앞은 거대한 물고기와 노는 두 남자아이를
그렸다. 줄을 이용해 대상들을 서로 긴밀하게 연관지운 연출이 돋보인다. 끈을 이용한 구성은 자주 애용되는 방법이다. 더욱이 화면 아래쪽의 아이가 입은 옷을 물고기가 물도록하여 생기를 돋구었다. 아이와 물고기가 만드는 그림자도 연결시켰다. 그러다 보니 밝고 어두운 부분을 구별하여 묘사하게 되었는지, 이중섭의 그림에서 드물게 명암법이 등장한다. 그래서 제주도 또는 부산 시절의 초기에 그린 것으로 본다. 뒤의 것은 물고기와 게를 앞세운 네 명의 남자아이들이 앞사람의 엉덩이를 두 손으로 잡는 방법으로 줄지어 있는 모습을 새을자 모양으로 배치했다. 그밖에도 이들을 한데 묶어주는 것은 맨 앞과 뒤에 있는 아이들이 잡은 끈인데, 이를 두 번째 아이가 잡아 당기므로 해서 더욱 재미있게 연관지웠다. 배경을 한가지 색으로 평면으로 칠하고 테를 둘러 정연해 보이나 억센 붓질로 그렸다.
– 파란 게와 어린이 / 종이에 유채, 30.2×23.6cm
발 앞에 있는 게를 잡으려는지 두 손에 쥔 끈을 늘어뜨리고 서 있는 남자아이를 그렸다. 턱을 쳐들고 위를 보도록 해 얼굴이 마치 고개를 뒤로 젖히듯 배치되어 있는데, 몸체는 앞을 향하고 있다. 또한 게가 정확히는 풀빛에 가까운 특이한 색으로 눈길을 모은다. 이런 눈속임 장치가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이중섭의 연출이 그만큼 높은 수준임을 말해준다고 하겠다. 전체는 매우 거칠게 그려졌는대 칼칼한, 조야한 맛을 우리 미감이라 여겼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 횐 소 / 나무판에 유채, 30×41.7cm, 1954년 무렵 / 서울 홍익대학교 박물관 소장
회색조의 배경에 검고 흰 붓질로 된 득의의 작품이다. 소의 상태도 평정을 이루어서 심정이 안정된 가운데 최고조의 상태를 보인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도판 16과 같은 붓질이 특징이다. 여기에서는 검은빛과 흰빛을 아울러 추사체와 같은 붓질을 보이고 있다. 특히 머리와 꼬리 부분에 그런 표현이 강하다. 사의성 마저 느끼게 하는 것으로 보아 서예를 비롯한 전통 예술에 대한 소양을 느낄 수 있다. 장자의 우화에 등장하는 솜씨 좋은 소잡이가 생각나는 그림이다.
– 소 / 종이에 유채, 27.5×41.5cm
다친 소의 머리에서 피가 나 뚝뚝 떨어지기까지 한다. 소 그림에서도 매우 드문 소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쳐든 앞다리 한쪽과 넓게 벌린 뒷다리의 분위기로 보아 투혼이 사그라지지 않았으므로 뿔을 앞세워 상대를 향해 돌진하려는 태세다. 거의 같은 것이 하나 더 있다.
– 흰 소 / 종이에 유채, 34.5×53.5cm, 1953년 무렵 / 용인 호암 미술관 소장
검은 배경 앞에 소가 화면 너머에 있으리라 여겨지는 상대를 향해 뿔을 세우고 막 나아가려 하고 있다. 붓과 물감칼로 비교적 넓게 발려진 흰 빛깔에 비해 어두운 빛깔의 물감은 붓을 꼿꼿이 세워 그은 것으로 보인다. 이런 서릿발 같은 매우 숙련된 상태가 아니면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마치 추사체의 필획을 보는 것 같다.
– 복사꽃이 핀 마을 / 종이에 유채, 29×41.2cm, 1953년
통영에서 친구인 미술가 유강열의 호의로 안정을 취하게 된 이중섭은 오늘날 대표작으로 꼽는 여러 점의 그림을 그려 남긴다. 이 그림은 이곳에서 그려진 일련의 풍경화의 하나이다. 서귀포에서 그린 풍경화와 달리 통영에서 그려진 그림들은 굵고 빠른 필치가 특징인데, 통영에서 그려졌다는 소그림들에도 엿보이는 특징이다. 숙련된 붓질에서 오는 시원스런 맛이다. 이런 것이 기운생동의 미감이 아닐까?
– 길 / 종이에 유채, 41.5×28.8cm, 1953년
지붕과 나무가지가 화면의 아래와 위, 전면에 걸쳐 있는 사이로 꼬불꼬불한 길을 배치했다. 통영에 있는 남망산으로 오르는 길이다. 화면은 엷고 빠른 붓질로 되어 있어 독특한 운치를 자아낸다. 분청사기 표면에 베풀어진 귀얄무늬가 연상되는 느낌이다.

– 봄의 어린이 / 종이에 연필과 유채, 32.6×49cm
– 환희 / 종이에 에나멜과 유채, 29.5×41cm, 1955년
복숭아꽃이 수 놓여진 네모 틀 안에 구름에 쌓인 해를 사이에 두고 봉황을 닮은 파란 숫새와 붉은 암새가 춤을 추는 전례가 없었던 독특한 구성의 그림이다. 그러나 물감을 두껍게 쌓이도록 그리고 이를 충분히 말린 위에 전면적으로 물감을 칠한 다음, 긁어서 원하는 형태를 얻는 과정을 거치는 방법으로 간혹 사용했던 기법이다. 자부와 깊은 관심의 대상이었던 고구려 무덤벽화의 분위기가 물씬하다. 대구에서의 개인전에 출품한 것으로 전람회가 열린 미국 공보원의 직원이 간직하던 것이다.
– 손 / 종이에 유채, 18.4×32.5cm, 1954년
왼손과 오른손의 앞뒤를 출렁이듯 휘감은 연기 같은 흰선들이 등장하는 독특한 그림이다. 갈색조의 엄지와 집게손가락선은 흰 선의 한 자락을 집어들었고, 나머지 세 손가락의 주변에 그려진 것은 무엇인지 불분명하다. 손을 그린 2점 중 하나로, 진주에서 박생광과 어울리던 시절 그 친구 청담스님을 만나 느낀 바를 그린 것으로 보이며 불교적인 분위기가 강하다.
– 물고기와 노는 아이들 / 종이에 유채와 연필, 10.5×12.5cm
– 물고기와 노는 세 아이 / 종이에 유채와 연필, 25×37cm, 1953년
– 두 아이와 물고기와 게 / 종이에 먹과 수채, 10.5×12.5cm
물고기를 가지고 노는 어린이는 즐겨 그려졌던 그림으로 앞에서도 살펴보았다. 세 명의 남자아이가 물고기와 노는 장면을 그린 그림은 원산의 집에서 일하던 사람이 부산으로 피난 와 부모의 약?대신으로 얻어간 그림이라고 한다. 벌거숭이라는 말이 맞을 정도로 붉은 색조와 초록빛을 띤 물고기의 색이 독특하다. 물고기, 게와 노는 두 남자아이는 거의 같은 상태로 무려 다섯 번이나 그려진 것으로 확인된다. 약간의 차이가 있을뿐 거의 같은 소재를 거듭 탐구하듯 한 태도를 엿볼 수 있다.
– 부부 / 종이에 크레파스와 수채, 19.3×26.4cm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 동봉한 그림 중의 하나. 싸우는 듯한 설정인 도판 11과 흡사하나 아래 암탉의 자태를 보면 교미를 위한 자세다. 두 마리의 닭이 모여 이루는 형태가 꼬리로 인하여 덜 완결되기는 했지만 하나의 동그라미를 이루는데서 서로 조응하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그림으로 된 언어다.
– 여섯 마리의 닭 / 종이에 연필과 수채, 26×36.5cm
두 마리의 닭을 통해 다툼과 어울림의 여러 정황을 노래한 이중섭은 여러 마리의 닭이 펼치는 드라마를 그림으로써 자신이 즐기던 소재를 더욱 심화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어떤 정황을 나타낸 것인지 불분명한데, 푸르고 붉은 색깔의 닭을 서로 어긋나게 배치하였다. 중앙 뒤의 닭을 빼고 오른쪽 닭의 꽁지를 잡고 있는 남자아이를 선으로만 그린 연필화 한 점이 전한다.
– 닭과 게 / 종이에 연필과 과슈, 29×41cm
앞에서 살펴 본 그림의 왼쪽 위에 등장하는 닭을 그대로 옮겨진 듯 그려져 있고 닭이 굽어보는 쪽에는 게 한 마리를 배치했다. 게 주위에는 복숭아꽃잎을 배치하여 닭이 물고 있는 복숭아와 연관을 지니도록 했고 색채로도 청색과 분홍빛을 적절히 섞어 조화를 꾀해 하나의 산뜻한 소품을 완성했다.
– 여인 / 종이에 연필, 41.3×25.8cm, 1942년
우리가 볼 수 있는 이중섭의 초기그림 가운데 하나이다. 소를 그린 연필화로 전 해에 그려 지유텐에 출품한 것이 엽서그림을 제외하면 유일하다. 굵직한 연필선이 특징인데 훗날 특장이 되는 굵고 거친선을 감안한다면 이중섭의 개성이 벌써 뚜렷하게 나타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아랫도리에 걸친 옷은 고갱이 자주 그린 태평양 연안지역에서 입는 사롱이라는 치마와 흡사한데, 이것으로 그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는 없다. 대향이라는 서명은 이 그림에서 처음 쓰였다. 훗날 아내가 된 여성을 그린 것으로 보여진다.
– 소년 / 26.4×18.5cm, 종이에 연필, 1942∼5년
– 세 사람 / 18.2×28cm, 종이에 연필, 1942∼5년
8.15 직후에 열린 해방기념 미술전에 내기 위해서 원산에서 들고 왔으나 늦어서 미수에 그쳤다는 바로 그 그림들이다. 1943년 이래 그 때까지는 거의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1942년에 그렸던 것을 다시 손 봐 출품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소년>은 화면의 거의 다를 차지하는 헐벗은 둔덕 가운데 난 길에 아이가 쪼그리고 앉아 있다. 상단에는 가지만 벌린 나무가 있고 아래 구석에는 베어져 그루터기만 남은 나무가 있다. 무대는 어느 산등성인 듯 그림에는 보이지 않는 어떤 존재와 아이, 그루터기만 남은 나무의 그림자가 스산함을 더해주고 있다. 그가 나타내고자 한 것은 스산한 정감이다. 이러한 느낌을 하늘에는 가로줄을, 헐벗은 땅 부분에는 무수한 세로줄을 그었다가는 지우거나, 바탕재인 종이가 패일 듯 힘주어 그음으로써 더욱 강화했다. <세사람>에서도 두드러진 것은 스산한 감정이다. 현실을 외면하고 숨으려 드는 심리를 묘사한 것으로 보여 단말마와 같은 일제의 등살에 못살게 된 식민지 민증의 내면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 못가에서 노는 세 어린이 / 종이에 청먹지로 그리고 수채
– 1940년 말에서 1941년 후반기 사이에 그린 그림 엽서 / 14×9cm
후배 일본인 여성을 사랑하게 된 이중섭은 고민에 빠진 것으로 보인다. 일본인이라는 점에서 어려움이 생긴 것이다. 졸업한 뒤에도 계속 학교에 남아 그리던 이중섭은 겨울을 맞아 가족이 사는 원산으로 돌아와 있으면서 변함없는 마음을 확인하고 그림이 그려진 엽서를 보내기 시작한다.
– 활을 쏘는 사람들 / 종이에 펜과 수채로 그림, 9 × 14cm 1941년 말
– 소와 말을 타는 사람들 / 종이에 청먹지로 그리고 수채, 9 ×14cm 1941년말
소를 타는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역시 환상적인 분위기다. 1941년 한 해 동안 작은 크기이지만 80매에 이르는 그림을 고심해서 그렸다.
– 환상적인 바다풍경 / 종이에 청먹지로 그리고 수채, 9 ×14cm 1940년말
원산만으로 보이는 해변에 꼬리는 물고기, 몸통 위는 소인 괴물이 바다에서 튀어나오는 환상적인 광경을 그렸다. 마치 원산에 사는 자신을 소개하는 듯한 설정이다.
– 부인과 아들에게 보낸 편지와 그림 / 종이에 잉크와 색연필
일본인 부인이 아이들과 거듭된 곤란 탓으로 일본의 친정으로 돌아가자, 다시 익숙한 일본어를 쓰게 되었다. 그러므로 아내와 자식들에게 보낸 편지는 일본어로 작성되었다. 이에 대하여 우리는 식민지를 거친 민족 내지는 국가의 처지 때문이라고 이해하게 된다. 이 점은 제외하고 생각하더라도 그의 편지는 그림과 어울려 대단히 흥미로운 것이다. 이토록 명랑하고 낙관적인 인물이 비극적인 말로를 맞게 된 것이 서글프기 그지없는 일이라는 감상이 문득 일어난다. 가족에게 편지를 보내고 받는 것을 그나마 위안으로 삼던 이중섭이 눈에 선하게 다가오는 것 같다.
– 자화상 / 종이에 연필, 48.5×31cm, 1955년
1955년 초 서울에 이어 5월 대구에서도 개인전을 열어 어려운 상황을 타개해 보려던 의도는 산산이 부서진다. 밀항을 해서라도 가족이 있는 일본으로 가겠다는 계획도 실패로 돌아가자 자포자기에 빠져 그토록 열심하던 그림도 그리지 않고 밥도 먹지 않겠다고 하자, 정신 이상이라는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이에 전람회를 열기 위해 대구에 머물 당시 친구에게 자신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다며 그린 그림이다. 사실 자신의 모습을 그린 자화상이 이중섭만큼 많은 화가도 드물 정도다. 가족을 그린 그림에는 꼭 자신이 등장한다. 하지만 자기만을 그린 것은 한 점도 없다고 여겨졌는데, 이 작품이 발굴됨으로써 또 다른 면모를 알 수 있다.
– 나무와 달과 하얀 새 / 종이에 크레파스와 유채, 14.7×20.4cm, 1956년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서울에서의 개인전 직전 처음 크게 건강을 상해 병원에 입원했던 이중섭은 서울과 대구에서 개인전을 마치자 다시 병원 신세를 질 수 밖에 없었다. 이 그림들은 서울로 가서 병원을 오가던 그가 다소 안정을 되찾아 정릉에 머물던 시기에 그려졌다. 잎이 져버린 나무와 눈이 겨울임을 가리키는데 크레파스를 그어 마련한 거칠거칠한 질감이 계절 분위기를 잘 살렸다. 그러나 나무를 중심으로 여러 가지 상태로 등장하는 새들을 서로 긴밀하게 연관시켜 춥고 배고플 겨울을 나겠다는 의지가 보이는 것 같다. 희거나 노란 색을 칠한 새가 그런 느낌을 북돋우고 있다.
– 구상네 가족 / 종이에 연필과 유채, 32×49.5cm, 1955년
자전거를 타는 아이를 어른 남자가 잘 탄다고 칭찬하는 듯한 광경을 중심으로 어른 여자와 한 아이가 이를 쳐다보고 있고 화면 앞에 있는 다른 한 남자는 이를 부러워하는 듯 하다. 이 설정은 대구서 개인전을 열고자 작품을 준비하던 이중섭이 친구인 구상의 호의로 그 집에 머물면서 구상이 그의 아이들에게 자전거를 사주어서 모두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는 부러워했다는 증언대로다. 자신은 가족과 헤어져 있었으며, 자신의 아들에게 자전거를 구해서 가겠다는 약속을 편지에서 여러 번 한 바가 있었기 때문에 부럽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구상과 이중섭이 서로 손을 조응하고 있는 것이 특이한데, 서로의 우정에 대한 표시라 여겨진다. 이중섭이 입고 있는 옷은 이즈음 그려진 연필로 그린 자화상에 나오는 바로 그 옷으로 보인다.
– 과수원의 가족과 아이들 / 종이에 잉크와 유채, 20.3×32.8cm
– 싸우는 소 / 종이에 에나멜과 유채, 27.5×39.5cm, 1955년
서로 싸우는 두 마리의 소 중에서 오른쪽의 소가 완전히 넘어지려고 하고, 왼쪽의 소는 앞다리와 뒷다리 한쪽마저 상대방에게 올려놓았다. 싸움이 바야흐로 끝나려는 광경이다. 이런 설정은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진 소도 이긴 소도 모두 몰골이 형편없어서 싸움이란 이렇게 허무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위의 작품과 함께 1955년 5월 대구에서의 개인전에 출품된 것이므로 말년의 작품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 돌아오지 않는 강 / 종이에 연필과 유채, 20.2×16.4cm, 1956년
왼쪽 위에는 머리에 물건을 인 여자가 눈이 내리는 속에서 화면 앞으로 오는 듯 하다. 오른쪽 거의 절반을 차지한 집의 창가에는 한 남자가 팔을 괴고 얼굴을 옆으로 두고 있다. 검게 표현되었지만 눈이 내리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 그림들은 이중섭의 절필작이라고 하는 비슷한 일련의 그림 중 하나이다. 화면의 전체에 물감이 칠해지고 남자가 고개를 들고 있는 것도 있고, 하단에 담을 설정해 흰 새를 올려놓은 것도 있다. 제목은 당시 막 개봉된 마릴린 먼로 주연의 영화에서 유래한 것이다. 보고 싶은 아내를 기다리는 자신의 심정을 그린 것 같다.
– 옛이야기 / 장판지에 유채, 31×41cm, 1956년
정릉에서 살던 만년에 그려진 것으로 전한다. 사슴과 학으로 여겨지는 동물과 불로초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도교적인 이상을 배경으로 한 십장생 주제를 변형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추운 날씨인 듯 한데 본인으로 보이는 인물이 벌거벗은 채 앉아 있고 상투까지 틀고 있어서 의외의 느낌이다. 복고적인 태도를 느끼게 하는 이런 작품들이 꽤 그려졌으나 환영받지 못하여 사장되어 왔던 것으로 여겨진다.
– 달밤 / 종이에 잉크와 수채, 17.5×13.5cm
구름에 쌓인 달을 바라보고 누운 어린이가 나오는 특이한 설정의 그림이다. 달과 구름은 자주 애용되는 전통적인 문화의 한 품목이지만 그것을 소재로 다룬다고 해서 충분한 것은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 그런 소재를 소화해낸 방식에서 우리는 전통을 어떻게 잘 살려냈는지 아닌지를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그림에서는 구름을 처리한 방식에서 그가 소재로만 다룬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덩어리 구름과 꼬리 구름을 소화한 방식에서 전통적인 미감을 잘 파악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그 아래에 자족적인 남자어른이 아니라 누운 어린이를 배치하여 자연과 어린이로 새롭게 끌고 간 점이 이중섭다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그리운 제주도 풍경 / 종이에 잉크, 35×24.5cm
일본에 건너가 헤어져 있는 가족들에 보낸 편지에 동봉한 그림의 하나다. 서귀포에서 살 때
자주 가서 놀던 섶섬과 범섬이 보이는 바닷가에서 즐거이 놀던 시절을 회상하면서 자신과의 유대를 흐트리지 말자고 말하는 것 같다.

– 물고기와 노는 세 어린이 / 종이에 유채와 연필, 27×39.5cm
두터운 바탕칠 위에 정성들인 선묘로 아이들과 나뭇잎, 물고기를 그리고 이들을 연결하는 끈을 설정했다. 그런데 아이들의 몸에는 채색을 하지 않았으며, 게다가 왼쪽의 아이는 뒤만 보이고 머리와 팔은 보이지 않는 설정이다. 그러므로 아이의 움직임을 한 화면에 동시에 담으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한다. 그럴 경우라면 그림에는 두 아이가 등장하는 셈이다.
– 꽃과 어린이 / 종이에 펜과 수채, 17 ×15.3cm 1940년말
– 네 어린이와 비둘기 / 종이에 연필, 31.5×48.5cm
이 그림이 상당히 큰 규모라서가 아니라 종이에 연필로 그려진 이중섭의 작품들을 흔히 스케치나 소묘, 또는 밑그림이라고 부르기는 미흡한 점이 많다. 근래 들어 이런 그림의 독자성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가는 현상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 그래서이기도 하지만 이를 연필화로 부르고자 하며, 더욱 큰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여긴다. 특히 요즘은 덜 하지만 중국, 일본과 같이 한자문화권에 속하면서 글씨예술(서예, 서도를 가리킴)이 발달한 우리의 경우 붓이나 연필을 구사하는데서 다른 문화권과 구별되는 독자성이 존재한다. 이중섭은 1940년대부터 이를 감지하고 독특한 붓질과 연필구사법을 개발해 온 것으로 여겨진다. 종이 위에 확신을 가지고 긁다시피 그어댄 선의 맛은 그 자체 독자적인 감각을 발휘한다.
– 꽃과 어린이와 게 / 종이에 잉크, 9 ×14cm
– 물고기를 안고 게를 탄 어린이 / 종이에 펜과 유채, 19.2 ×12.2cm
– 개구리와 어린이 / 종이에 잉크와 수채, 10.5 ×25.7cm
– 판자집 화실 / 종이에 펜과 수채, 26.8×20.2cm
방 하나인 판자집의 네 벽에서 한 벽을 완전히 제거하고 내부를 보이도록 했다. 그런데 지붕과 실내는 약간 비스듬하게 설정해 단조로움을 피하고자 했다. 그림 그리기를 마치고 헤어져 있는 가족들에게 보낼 편지도 봉투까지 쓰기를 마치고 누워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는 자족한 모습이다. 겨울 언저리임을 알 수 있는 풍경과 주변 색깔에 비해 자족한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노란색은 매우 효과적이다. 창조의 기쁨에 다른 곤란은 문제도 아니라는 이중섭의 기분이 전달되는 것 같다.
– 작품 / 1904년, 제4회 지유텐 출품작
– 소와 소녀 / 1941년, 제5회 지유텐 출품작
– 소묘 / 종이에 연필, 23.3 ×26.6cm 1941년, 제6회 지유텐 출품작
– 망월 / 제4회 지유텐 출품작
– 그림엽서 / 1941년 중반기
– 망월 / 1943년 제7회 지유텐 출품작
– 오지환 시집의 속표지 그림
– 소 / 종이에 연필, 26.5 ×33cm
– 신문을 보는 사람들 / 은박지에 유채, 미국 뉴욕 모던 아트 뮤지엄 소장
– 동원유원지 / 종이에 연필과 수채, 유태 19.2 ×26.5cm
– 게와 담배대 / 종이에 연필과 수채 19.2 ×26.5cm
○ 위작 논란
이중섭의 둘째 아들 이태성 (야마모토 야스나리)이 2005년 3월 16일에 첫 공개해서 경매에 내놓은 그림 8점이 2005년 10월에 가짜로 밝혀져서 대한민국의 미술 시장이 냉각되기도 했다.


참고 = 위키백과, 이중섭기념관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