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12월 21일, 독일의 작가 하인리히 뵐 (Heinrich Böll, 1917 ~ 1985) 출생
하인리히 뵐 (Heinrich Böll, 1917년 12월 21일 ~ 1985년 7월 16일)은 독일의 소설가다.
1917년 독일 쾰른에서 태어났다. 1937년 고등학교 졸업 후 서점에서 견습생활을 하다가 이듬해 쾰른 대학에 등록해 독문학과 고전문헌학을 공부한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나치 군에 징집되어 6년간 프랑스, 소련, 헝가리 등 여러 전선에서 복무한다.
전쟁이 끝난 후 미군 포로수용소에서 풀려난 그는 쾰른에 정착, 본격적인 창작 활동을 시작한다. 그리하여 1949년 『기차는 정착했다』를 시작으로, 참혹한 참전 경험과 전후 독일의 참상을 그린 작품들을 발표했다.
– 하인리히 뵐 (Heinrich Böll)
.출생: 1917년 12월 21일, 독일 쾰른
.사망: 1985년 7월 16일, 독일 Kreuzau
.배우자: 안네마리 뵐 (1942 ~ 1985)
.자녀: 르네 뵐, 레이먼드 뵐
.형제자매: 메쉬틸드 뵐, 알로이스 뵐
.대표작: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9시 반의 당구』, 『어느 광대의 견해』, 『신변 보호』 등
1951년 ’47그룹 문학상’을 받으면서 문인으로서의 위치를 다졌고,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1953)로 비평가와 독자 모두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소비 사회의 세태에 대한 회의가 담긴 이 작품을 계기로 그 전까지 전쟁과 비 인간성에 주목하던 뵐 문학의 주제는 불균형한 사회 발전과 물질주의의 폐해로 옮겨간다.
1975년에 발표해 사회적으로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 문제작 『카트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를 비롯해 『9시 반의 당구』,『어느 광대의 견해』,『신변 보호』등의 대표작들이 있다.
1967년 독일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게오르크 뷔히너 상’을 수상한 그는, 1971년 독일인으로는 최초로 국제펜클럽 회장에 선출된다.
이미 독일 국내에서도 정치적, 사회적, 현안에 대해 거침 없이 의견을 표명하던 그는 국제 펜클럽 회장이 된 후 박해받고 있는 여러 나라의 작가들을 돕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현실적으로뿐 아니라 문학적으로도 항상 소외받고 억압당하는 약자의 편에 서고자 했던 그의 작품 세계는 1972년 노벨 문학상 수상으로 더더욱 많은 주목을 받았다.
현재 그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사랑받는 독일 작가의 하나로 꼽힌다. 1985년에 세상을 떠났다.
○ 생애 및 활동
1917년 쾰른에서 목공예 가문의 여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전후 가장 먼저 두각을 나타낸 독일작가들 중 한명이다.
청소년기 나치 하에서 히틀러 유겐트의 유혹을 뿌리치고, 참여하지 않는다. 서점의 견습공으로 있다가, 카이저 빌헬름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1939년 쾰른대학교 독문학과에 입학하나 곧 제2차 세계대전에 징집되었다. 프랑스, 루마니아, 헝가리, 러시아 등지에서 복무한다.
4차례 부상당한 후 1945년 4월 미군에게 포로로 잡혀 2년이 지나 그의 나이 30에 전업작가가 된다.
전후 귀향하여 ‘전쟁에서 본 것’과 전후의 ‘폐허’에 대해서 쓰기 시작했다.
1949년 병사들의 절망적인 삶을 묘사한 『열차는 정확했다』를 시작으로, 참혹한 참전 경험과 전후 독일의 참상을 그린 작품들을 주로 발표했다.
1951년 ’47그룹 문학상’을 받으면서 문인으로서의 위치를 다졌고, 1953년에 출간한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로 비평가와 독자들 모두로부터 찬사를 받으며 작가로서의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외에도 사회적으로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 문제작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를 비롯해 『9시 반의 당구』, 『어느 광대의 견해』, 『신변 보호』 등의 작품을 집필했다.
1967년에는 독일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게오르크 뷔흐너 상’을 수상했다.
1970년대에는 사회 참여가 더욱 적극적이 되었고 이에 따라 독일 사회와의 갈등도 심화되었다.
특히 1969년과 1972년 뵐은 귄터 그라스와 함께 사회민주당으로의 정권교체를 위해 선거 유세에 직접 참여하며 빌리 브란트를 적극 지지했다.
또한 1971년 독일인으로서는 최초로 국제 펜클럽 회장으로 선출되어 세계 곳곳에서 탄압받고 있는 작가와 지식인들의 석방을 위해 노력했다.
1971년에는 성취 지향 사회에 대한 저항을 담은 ≪여인과 군상≫을 발표하고 이듬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1929년의 토마스 만 이후 독일이 이 상을 받은 것은 43년 만이었다.
그의 작품은 3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고, 그는 아직까지 독일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문학 작품뿐만 아니라 행동으로도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한 활동에 진력했던 뵐은 1985년 동맥경화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 이후 독일 녹색당은 그의 저항적 삶을 기리기 위하여 당의 정책 연구소 이름을 ‘하인리히 뵐 연구소’라고 짓기로 결정하였다.
○ 주요 작품
열차는 정확했다 (Der Zug war pünktlich) (1947)
유언(Das Vermächtnis) (1948)
방랑자여, 그대 스파르타로 가거든…… (Wanderer, kommst du nach Spa…) (1950)
검은 양들 (Die schwarzen Schafe) (1951)
아담, 너는 어디 있었는가? (Wo warst du, Adam?) (1951)
천사는 말이 없었다 (Der Engel schwieg) (1952)
성탄절 시기에는 안 된다 (Nicht zur Weihnachtszeit) (1952)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Und sagte kein einziges Wort) (1953)
문지기 없는 건물 (Haus ohne Hüter) (1954)
어린시절의 빵 (Das Brot der frühen Jahre) (1955)
아일랜드의 일기 (Irisches Tagebuch) (1957)
흔적 없이 사라진 사람들 (Die Spurlosen) (1957)
무르케 박사의 누적된 침묵과 기타 풍자적 이야기들 (Dr. Murke’s gesammeltes Schweigen und andere Satire) (1958)
9시 반의 당구 (Billard um halb zehn) (1959)
한 움큼의 흙 (Ein Schluck Erde) (1962)
어느 어릿 광대의 견해 (Ansichten eines Clowns) (1963)
군대에서부터의 이탈 (Entfernung von der Truppe) (1964)
어떤 공무여행의 끝 (Ende einer Dienstfahrt) (1966)
여인과 군상 (Gruppenbild mit Dame) (1971)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Die verlorene Ehre der Katharina Blum) (1974)
사려깊은 포위 (Fürsorgliche Belagerung) (1979)
그 소년이 어떻게 될 것인가?:책들과 관계 있는 어떤 것 (Was soll aus dem Jungen bloss werden? Oder: Irgendwas mit Büchern) (1981)
지뢰밭 (Vermintes Gelände) (1982)
치명적 부상 (Die Verwundung) (1983)
강 풍경을 마주보고 있는 여인 (Frauen vor Flusslandschaft) 1985 (사후 출간) (1985)
○ 한국하인리히뵐학회 제공 : 하인리히 뵐의 인생과 작품연보
1) 1917년 ~ 1945년
하인리히 뵐은 1차대전 중 민생이 최악의 상태로 치달았던 1917년 12월 21일, 쾰른에서 목수이자 목공예가인 아버지 빅토르 뵐과 어머니 마리아 사이의 여섯 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부계의 조상은 수세기 전 종교적인 이유로 영국으로부터 이민해온 배 만드는 목수였다. 모계의 조상은 농부로서 술을 빚던 사람이었다.
“내 최초의 기억은 힌덴부르크의 귀향하는 군인들이다. 잿빛 제복을 입은 그들은 귀향의 기쁨도 잃은 채 질서정연하게 말과 대포를 끌고 집 앞 가로를 지나갔다. 나는 어머니 품에 안겨 창 너머로 내려다 보았다. 끝없는 잿빛 행렬이 라인 강의 다리를 넘어 갔다. 그 다음은 아버지의 작업장 내음이다. 나무 냄새, 아교와 안료 냄새가 기억 속에 있다. 갖 대패질을 한 나무판도 보았다.” <나의 대하여> 1958년.
1933년 1월 30일 히틀러가 제국수상이 되었다. 뵐 가에서는 정치적 사건에 대해서 말이 많았다. 그의 어머니는 수상 선출을 두고, ‘이건 전쟁을 뜻한다’고 했다. 뵐의 집에서는 가톨릭 소년단원들의 불법집회가 열렸다. 새로 발굴된 유고 단편소설과 시에서, 그가 1936년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뵐은 그 후 초기 집필에 대해 이렇게 회상한다.
“… 1937년과 47년에 나는 처음 글을 쓰기 시작했다. 최초의 소재는 나와 친근했던, 점차 쇠락해가는 소시민사회의 환경에서 얻어낸 것들이다. 이를 보호하기 위해 묘사한 것이 아이러니와 히스테리, 그리고 예술가적 자세였다. 당시 아버지는 조각과 목수작업을 위한 임대작업장을 가지고 있었다. 19세기 전형적인 작업장으로 길가 건물의 뒷부분에 있었다. 마메라두나 라스콜니코브가 거주했을 법한 어둡고 황량한 곳이었다.” -<우리와 도스토예프스키> 1972년
처음 글쓰기 시작할 때 도스토예프스키의 영향을 받았던 것이 분명하다.
하인리히 뵐은 1937년 고등학교 졸업 국가시험에 합격하고, 본에서 출판사 직원 직업교육을 받았다. 반년 동안 국가제정 노동임무를 마쳤다. 1937년 여름 쾰른 대학 등록을 마쳤다. 그 해 군에 징집되었다. 2차 대전에 참가하여 프랑스, 폴란드, 소련, 루마니아, 헝가리, 독일전선에 투입되었다.
그는 거의 매일 가족들과 1942년에 결혼한 안네마리 체흐 Zech에게 편지를 썼다. 전쟁 동안 뵐은 내내 장교가 되지 않으려고 근무를 피하려 했다. 처음에는 대학공부를 하기 위해 복무면제 신청을 냈으나, 그 후 꾀병이나 가짜 휴가증을 만들었다. 그는 세 번 부상을 입었다. 라인란트에서 종전을 맞게 된다.
“나는 당시 쾰른과 가까운 이웃에서 도망병으로 3,4개월 동안 가짜증명서를 가지고 아내의 집에 숨어 있었다. 허술한 데가 없는 증명서였다. 그 후 살아 남아야겠다는 철저한 의식에서 다시 군대로 복귀했다. 또다시 가짜증명서를 가지고서, 그것이 살아남기 위한 가장 안전한 길이었다. 당시 도망병은 군사재판으로 총살되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14일 후, 나는 프랑스에서 포로수용소에 들어가게 되었다. 반년 후 독일로 돌아올 수 있었다. 1945년 말이었다. 당시 아내는 시골에 살고 있었다. 베르기쉬 지역에 피난 가 있었다.” – <3월 3일 동안> 1975년
2) 1945년 ~ 1952년
쾰른으로 돌아온 가족들은 반파된 쾰른 집에서 살림을 꾸몄다. 그는 쾰른 대학에 다시 등록했다. 생활필수품 배급통장을 받기 위해서였다. 그의 아내는 중학교 선생으로 일했다. 뵐은 지금까지 출간되지 않은 장편소설 <사랑없는 십자가>, <천사는 말이 없었다> 등과 수많은 단편소설을 썼다. 이 작업들은 모두 나치 시대와 전쟁, 종전 직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전쟁, 귀향, 폐허문학으로 정의한다.
“그 정의가 옳다. 6년에 걸친 전쟁이 끝난 것이다. 우리는 전쟁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폐허를 보고 그것을 썼다. 이 정의에 걸맞는 우리가 비난하는 병든 목소리가 이상하다고 의심받게 되었다. 사람들은 전쟁이 있었고 모든 것이 폐허에 묻혔는데 그 책임을 지려고 하는 것 같지 않았다. 우리가 보았던 걸 나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안대를 매지 않고 보았다. 좋은 눈은 작가의 수공업 연장의 하나이다.” -<폐허문학 고백에서> 1952년
1948년 아들 르네(화가로서 라무브 출판사 설립) 출생. 1949년 미델하우베 출판사에서 하인리히 뵐의 첫 번째 책이 출간되었다. 소설 <죽음의 열차>였다. 가족 경제사정의 초긴장상태였다. 원고료로는 문학이 아내와 아이들에게 불행한 시간이라고 할 수 없었다. 1950년 아들 빈센트(건축 예술가) 출생, 미델하우베출판사에서 단편집 <검은 양>으로 47년 문학상 수상.
3) 1953년 ~ 1959년
뵐은 작품에서 독일연방공화국의 현실문제를 다루는 방향을 잡았다. 젊은 공화국의 정치적 위상과 관련된 수필들이 계속 생겼다. 새 공화국 초기에 있었던 도덕적 요구는 재건을 위한 경제와 정치의 결정을 유리하게 하기 위해 점차로 뒷전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나는 이미 오래 전부터 정치에 관심을 보였다. 화폐개혁을 대단히 비판적으로 지켜보았다. 화폐개혁이 일어난 조건들을 관망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해방시킨 사람들이 독일의 재무장과 관련하여 방임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지자, 비로소 나는 국내 정치에 활동을 전개했다. 50년, 51년 독일이 재무장된다는 느낌이 분명해졌다. 그리고 사람들이 옛 나치들과 전범자들과 본격적으로 자유롭게 왕래한다는 사실도 분명해졌다. 옛 장군들과 정치가들은 그 사이 모두 파면되어 어딘가에 숨어 있었다.” -1974년 어느 인터뷰에서
1953년 장편소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가 출간되어 처음으로 재정적인 성공도 거두게 되었다. 문학비평가상과 산업체연맹의 문화명예상을 수상했다. 남독일 방송국의 소설가상도 받았다. 다름슈타트 소재 독어.독문학 아카데미 회원으로 피선된다. 1959년 장편소설 <아홉시 반의 당구>가 출간되었다. 이 소설에서 뵐은 독일연방공화국의 현재를 과거 50년 독일역사가 계속된 것으로 나타내려고 하였다. 또한 순진한 사람들을 어린양으로, 정치를 결정하는 방약무인으로 물소로 상징하는 말을 만들어냈다. 작가 파울 샬퀵과 함께 시민들이 참여하는 유태인 역사도서관을 설립했다.
4) 1964년 ~ 1969년
아데나워 시대가 끝나고 사회당과 자민당의 연정 초기인 이 시기에 뵐의 정치적 앙가주망은 점점 강해졌다. 수필과 강연원고가 단편소설과 비교하여 그 숫자가 더 커져 갔다. 1964년 뵐의 문학 목표에 따른 소설 <부대와 거리>가 발간되었다. 뵐의 반전과 반 군대 이념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프랑크푸르트 대학에 시학강의를 네 번 했다. 1968년 3월 초 모스크바의 모소비에트 극장에서 B. 노르트와 G. 보르티니코브가 각색한 <어느 어릿광대의 고백> 초연이 있었다.
5) 1970년 ~ 1980년
1969년 사민당과 자민당 연정이 시작되면서 뵐은 동방정책에서 도덕을 기초로 세워지는 정치를 보게 된다. 그리하여 1972년 선거전에서 사회당을 지지한다. 국내정세에서 테러리즘이 태동하면서 독일연방공화국의 위상이 점치 더 굳어갔다. 뵐과 다른 지식인들은 야당(기독교민주당, 기독교사회당)이 많은 인사들과 친야성향을 띤 일간지들로부터 ‘테러리즘의 사부’라는 비난을 받았다. 독일의 안보규정이 강화된다.
“나와 내 이름에 대한 문제가 줄어들면(나는 이미 문제가 없다) 그것은 수천 명에서 수만 명의 교사, 편집자, 작가, 교수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을 뜻한다. 그러면 지식인의 흥분이란 표현은 정당성을 가지게 된다. 정신적 아버지라는 말을 계속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로 들 수 있다. 개인적인 투사에게 그런 짐을 지우는 민주주의는 위험하다. 민주주의 헌법과 민주주의 정부가 민주주의인 자기이해를 가지지 못하면 영원히 위험하다.” – <기름진 땅이 아니라 사막의 모래다> Nicht Humus, sondern Wüstensand: 1972년
1970년 희곡 <문둥병>이 아헨에서 초연되다. 뵐은 독일 펜클럽 회원으로 피선된다.
1971년 가을 되블린 국제펜클럽대회에서 국제펜클럽 회장에 피선되다. (1974년까지) 장편소설 <여인과 군상>이 발간되다. 6월, 테러단원 수배과정에서 뵐의 아이펠 집도 수색받았다.
1972년 뵐 시집 발간, 노벨문학상 수상하다.
1974년 소설 <카타리나 불룸의 명예 상실> 혹은 <폭력은 어떻게 생기며 또한 어디로 가는가> 발간. 이 소설에서 뵐은 신문과 가졌던 자신의 경험을 썼다. 어떤 여자가 테러리스트인 독일군 탈영병을 감춰준 사실이 그 신문에서 큰 지면으로 다루어 지고, 여자는 신문기자를 총으로 쏘아 죽인다. 미국 문학예술 아카데미 명예회원.
1975년 베를린 예술 아카데미 회원. 아들 르네가 친구와 함께 라무브 출판사 설립.
1977년 하인리히 뵐 문학전집 첫 5권이 출간되었다(1947~1977년 장편소설 수록)
1978년 뵐 전집 나머지 5권이 출간되었다(수필, 희곡, 인터뷰, 라디오, 드라마 시나리오, 시 등을 수록)
1979년 발터 셀 대통령의 공로 십자훈장을 거부하다. 쾰른 중앙도서관 개관을 계기로 뵐 자료실을 쾰른 시에 영구임대하다. 안보의 여러 가지 견해를 테마로 삼은 소설 <걱정스러운 집>이 가을에 출간되었다. 12월 에쿠아도르 여행. 오른쪽 다리 혈관에 이상. 독일로 돌아와 수술하여 오른쪽 발부분을 절단하다.
6) 1981년 ~
뵐은 병으로 거동의 자유에 심한 제약을 받았다. 정치적으로 평화운동을 적극 지지하였고 군비감축과 환경보호정책을 펼친 녹색당원들을 지원했다. 1982년 기독교민주당과 기독교사회당이 자민당과 새로이 연립정부를 세움으로써 정치적 전환점이 왔다.
1981년 <소년이 대체 무엇이 되겠는가> 라는 자전소설이 ‘책들에 얽힌 이야기’ 라는 부제로 라무브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뵐은 평화와 무기감축을 위한 크레펠트 호소와 중성자탄과 무기 증강에 반대하는 유럽작가들의 커뮤니케를 지원했다. 10월 10일 본에서 30만 군중의 평화시위에서 연설했다.
1982년 라무브 출판사가 뵐의 초기 미발표 전후소설 <유언>을 출간했다. 쾰른 시의회는 뵐에게 명예시민권을 수여했고 노르트라인 베스트팔렌 주는 뵐을 교수로 임명했다.
1985년 독일군 항복 40주년을 맞아 전쟁말기의 체험을 그린 <내 아들에게 주는 편지>가 출간되었다. 훗날 유고로 출간된 대화와 독백체의 장편소설 <강풍경을 마주한 여인들>을 완성한다. 7월 15일 재수술을 위한 준비로 퇴원했다가 7월 16일 아침 아이펠 지역 랑엔부르흐에서 타계했다. 하인리히 뵐은 7월 19일 독일국민들의 애도 속에 쾰른 근교 보른하임 메르텐에 안장되었다. 동료들과 정치가들 중 대통령 리하르트 폰 바이체커도 장례식에 참석하였다.
1986년 1983년~1985년의 글과 강연 모음집 <슬퍼하는 능력>을 라무브 출판사가 출간했다.
1987년 라무브 출판사와 키펜호이어 & 비츠 출판사가 공동으로 4권짜리 하인리히 뵐 소설전집(1947~1985)을 출간했다. 뵐의 70회 생일을 계기로 쾰른 시립도서관 내에 시대와 동시대 사람들과 연관된 전시회를 개최했다. 11월에 쾰른에서 작가 뵐의 친구들의 발의로 뵐 재단이 설립되었다. 이 재단은 89년 녹생당과 가까운 재단으로 인정받았다.
1988년 Kiwi 시리즈에 뵐의 <아일랜드 일기>가 자료와 함께 출간되었다. 부퍼탈의 베르기쉬 대학교에 노르트라인 베스트팔렌주의 주도하에 뵐연구소가 설립되어 독문학자 베르너 벨만 교수가 초대 연구소장으로 취임하였다. 이 연구소는 쾰른 시의 역사 자료실과 함께 뵐 유족협회와 함께 편지, 원고, 비망록, 일기 등을 정리하고 있다. 이 연구소의 연구결과를 Kiwi 출판사가 25권짜리 뵐 해설판전집으로 출간할 예정이다 (1992년 12월 심포지움 글에서)
1989년 Kiwi 시리즈에 <첫 눈에 본 로마여행, 도시들 그리고 경관>이란 수필집이 발간되었다. 소설 <아담, 너는 어디 갔었니?>가 자료와 함께 출간되었다. 랑엔부르흐 하인리히 뵐 하우스의 재단이 설립되었다. 하인리히 뵐 하우스는 뵐이 타개할 때까지 집필하며 살았던 집으로, 개조하여 예술가들에게 작업장으로 제공한다.
1990년 소설 <유언>이 자료와 함께 Kiwi 시리즈로 출간되었다.
1992년 유고소설 <천사는 말이 없었다>가 출간되었다. 유언에서 지정된 사람들이 발간했다. 부퍼탈의 뵐 연구소에서 정리한 장편소설이다.
1992년 12월 14~19일 하인리히 뵐 재단이 뵐의 탄생 75주년 축하기념주간을 만들어 학술제와 전시회, 영화, 라디오 드라마, 토론회, 뵐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산책 등의 행사를 개최했다. 주제는 ‘뵐의 도덕과 미학, 그리고 정치’였다.
1994년 Kiwi 출판사가 하인리히 뵐 단편소설집(1012쪽)을 발간했다. 47년부터 60년까지의 단편소설들로 책으로 출간되지는 않았으나, 매체를 통하여 발표된 단편소설 모음집이다. 그중 8권이 유고이다.
참고 = 위키백과, 한국하인리히뵐학회, 교보문고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