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11월 6일, 독일의 반나치 비폭력 저항단체 백장미 (하얀 장미) 단원 크리스토프 프로브스트 (Christoph Probst, 1919 ~ 1943) 출생
크리스토프 프로브스트 (Christoph Probst, 1919년 11월 6일 ~ 1943년 2월 22일)는 백장미단 (하얀 장미, 화이트 로즈) 레지스탕스 그룹의 핵심 멤버 6명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나중에 합류한 멤버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처음 4개의 전단지에서 잠깐 등장했지만, 아내와 세 자녀를 보호하기 위해 그룹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1943년 1월 말, 레지스탕스에서 더 중요한 역할을 하기를 원했던 프로브스트는 한스 숄에게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는지 물었다.
처음에는 가족 때문에 프로브스트가 더 위험한 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꺼렸던 숄은 프로브스트에게 7번째 전단지 초안을 쓰라고 제안했다. 프로브스트는 기꺼이 그렇게 했고, 며칠 안에 한스에게 작성해 주었다.
이 팸플릿은 한스와 그의 여동생 소피가 1943년 2월 18일에 체포되었을 때 한스에게 있었다.
한스는 그것을 찢으려고 했지만, 그가 찢는 것을 끝내기도 전에 빼앗겼다. 게슈타포는 그 필적을 추적하여 크리스토프가 2월 20일에 체포되었다고 밝혔다.
1943년 2월 22일에 한스, 소피, 크리스토프가 재판을 받았다. 재판은 그가 주재한 재판의 약 90%에 사형을 선고한 냉정한 판사인 롤란트 프라이슬러가 주재했다.
말을 하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크리스토프는 아내가 소아 열병으로 아팠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정신병적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말하며 석방을 시도했다. 이 전략이 효과가 없자, 그는 판사에게 자녀들 때문에 자신을 살려달라고 간청했다.
프라이슬러는 한스 숄이 프라이슬러가 크리스토프를 풀어주기만 하면 모든 처벌을 대신 받겠다고 제안했을 때조차 그의 간청을 듣지 않았다.
오후 2시경, 프라이슬러는 판결을 발표했다. 한스, 소피, 크리스토프는 유죄 판결을 받았다. 형벌은 사형으로, 같은 날 즉시 집행되었다.
크리스토프는 감옥으로 끌려가서 마지막 편지를 썼다.
오래 전에 가톨릭을 받아들였지만, 어떤 종교와도 관련이 없었던 크리스토프는 죽기 전에 가톨릭 신앙으로 세례를 받기를 요청했다.
한스, 소피, 크리스토프는 죽기 전 몇 분 동안 잠시 함께 있을 수 있었다.
크리스토프는 그곳에서 “죽는 것이 그렇게 쉬울 수 있다는 걸 몰랐어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오후 5시 몇 분 후. 크리스토프는 단두대에 올랐다. 그는 죽기 전에 아내와 아이들을 볼 수 없었다.
사후 1999년, 프로브스트 (죽기 직전에 가톨릭으로 세례를 받음)는 독일 가톨릭 교회의 순교록에 등재되었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