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 1일, 대한 독립을 선언하고 비폭력 만세 운동 시작 / 3·1운동과 3·1절 (삼일운동과 삼일절, 三一運動과 三一節)
3·1 운동 (三一運動) 또는 3·1 만세 운동 (三一萬歲運動)은 일제 강점기에 있던 조선인들이 일제의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 3월 1일 한일 병합 조약의 무효와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비폭력 만세 운동을 시작한 사건이다. 기미년에 일어났다 하여 기미독립운동 (己未獨立運動), 줄여서 기미운동 (己未運動)이라고도 부른다. 대한제국 고종이 독살되었다는 고종 독살설이 소문으로 퍼진 것을 계기로 고종의 인산일 (장례일)인 1919년 3월 1일에 맞추어 한반도 전역에서 봉기한 독립운동이다. 최근, 본 운동의 규모와 영향력을 고려해 3·1 혁명 (三一革命)이라고 부르자는 논의가 일고 있다.
만세 운동을 주도한 인물들을 민족 대표 33인으로 부르며, 이외에 만세 성명서에 직접 서명하지는 않았으나 직접적, 간접적으로 만세 운동의 개최를 위해 준비한 이들까지 합쳐서 보통 민족 대표 48인으로도 부른다. 이들은 모두 만세 운동이 실패한 후에 구속되거나 재판정에 서게 된다. 약 3개월 가량의 시위가 발생하였으며, 조선 총독부는 강경하게 진압했다.
3·1 운동을 계기로 다음 달인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대한민국 제헌 헌법에서는 3·1 운동을 대한민국 건국의 기원으로 삼아 임시 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것을 천명하였다.
한편 3·1 운동을 계기로 군사, 경찰에 의한 강경책을 펴던 조선 총독부는 민족 분열책인 일명 문화 통치로 정책을 바꾸게 되었다.
천주교는 흥선대원군의 탄압후유증 (7천여명 천주교인 살해)으로, 시위에 참여하지 않았다.

○ 배경
데라우치 마사타케에서 육군대장 하세가와 요시미치 (長谷川好道) 총독으로 계승된 무단 통치는 “3·1독립운동”이라는 뜻하지 않은 결과를 발생케 했다.
이런 가운데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파리강화회담에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제안한 14개조의 전후처리 원칙 중에 ‘각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이 스스로 결정하게 하자’라는 소위 민족자결주의가 알려지면서 조선의 독립 운동가들 사이에 희망의 분위기가 일어났다. 일부 독립 운동가들은 1918년 말부터 치밀하게 사전 계획을 세우고 있었고 파리 강화회의에 우리의 목소리를 알리기 위해서는 누군가 소요사태를 일으켜야 한다는 김규식의 발언과 1919년 초 갑작스럽게 사망한 고종 황제의 죽음 등 여러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나타나면서 절묘하게 기회를 포착하였다.
당시 중국에 유학중이던 여운형과 신규식 등은 이 선언과 뒤이은 파리 강화 회의가 조선 독립의 달성 여부를 떠나서 앞으로 조선의 미래를 결정짓는 중요한 사건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신한청년당이라는 단체를 문서상으로 조직해 파리 강화 회의에 불어를 잘하는 김규식을 파견하고, 조선쪽에는 일본어에 유능한 장덕수를 파견한다. 이러한 소식은 조선 안팎의 독립운동가들을 상당히 고무하는 소식이었다.
그리고 여운형 자신은 중국 길림 성으로 가서 활동하여 무오독립선언의 촉매역할을 했다. 만주 지린 (간도)에 있는 독립운동가 김약연등과 만나서 파리강화회의와 민족자결주의 원칙등 상황을 설명하였고, 이는 무오 독립선언에 영향을 주었다.
1919년 출국 전 김규식은 상하이의 신한청년당 당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독립 시위의 주문을 하였다. 김규식의 독립 시위 주문은 3·1운동이 벌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때마침 발생한 고종의 갑작스러운 죽음 역시 일본인들이 고종을 독살 하였다는 이야기가 나돌아 절묘하게 만세시위 확산에 기여하였다. 윤치호는 자신의 일기에 고종의 죽음 역시 국민적 감정을 자극해서 만세시위가 확산되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윤치호 일기, 1919년 1월 26일 일요일).
만주 지린에서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이 1919년 2월 1일 무오 독립선언을 통하여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였고, 조선 재일 유학생을 중심으로한 2·8 독립선언의 영향을 받은 삼일운동은 고종의 독살설로 인하여 일본의 부당한 조선 점령과 폭력에 의한 통치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반감을 갖게 되어 큰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시위는 순수한 평화적 시위였으나 일본군 은 이를 무력으로 진압함으로써 폭력화되었다.

○ 준비 과정
민족종교인 천도교의 대표인 손병희 등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천도교인, 기독교인, 불교도인이 모두 함께 대표로 참여하였다. 최남선이 〈독립선언서〉를 기초하였으나, 만해 한용운이 보고는 너무 어려운 한문투인 데다가 내용이 온건하다 하여 다시 쓰기를 자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천도교와 기독교 인사들의 연합으로 만세 시위 계획과 장소가 결정되었다. 불교계의 대표로는 한용운 등이 참여하였다. 최남선의 초안에 춘원 이광수가 교정을 보고 만해 한용운이 공약 3장을 덧붙였다.
한편 윤치호는 독립운동가들로부터 국민대표로 서명을 권유받았으나 거절했고, 이는 실망한 일부 학생들로부터 비판을 받게 된다. 그는 이 민족적인 거사를 순진한 애국심에 기초한 민족주의자들의 무모한 행동으로 파악했다.
준비 과정에 일어난 신철에 관한 일화가 있다. 1919년 2월 하순 천도교에서 운영하는 인쇄소 보성사(普成社)를 급습한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인 신철 (申哲: 일명 申勝熙)은 보성사 사장 이종일이 보는 앞에서 윤전기를 멈추고 〈독립선언서〉를 빼내어 보았으나 그냥 돌아갔다. 이종일이 최린에게 보고하자 최린이 신철을 저녁 식사에 초대하여 돈을 주며 만주로 떠나라고 권고했다고 한다. 일본 측 기록에는 신철이 그 돈을 받았다고 되어 있고, 한국 측 기록에는 그가 돈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3월 3일로 예정된 거사를 3월 1일로 앞당겼다.
2월 28일경 손병희의 집에 모여 ‘유혈 충돌을 피하기 위해’ 약속 장소인 탑골 공원에 나가지 않기로 결정하였고, 민족대표가 모일 장소는 태화관 (泰和館)으로 바뀐다.
○ 관련 인물 및 단체
– 민족대표 33인 또는 민족대표 48인
3.1 만세 운동의 첫 날 경성부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민족 대표자 33인을 말한다. 여기에 박인호, 김홍규, 노헌용, 이경섭 (이상 천도교), 김도태, 안세환, 함태영, 김원벽, 김세환 (이상 기독교), 임규, 송진우, 현상윤, 최남선, 강기덕, 정노식, 김지환, 한병익 등을 합쳐 민족대표 49인으로 보기도 한다.
그밖에 3.1 운동 당시 참상을 사진으로 촬영, 미국과 캐나다, 영국 등에 알린 스코필드 역시 별도의 조선인 민족대표자로 보기도 한다.
– 관련 인물 및 단체
신한청년당 –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
유관순 – 천안 아우내 장터 만세 사건
김규식 – 신한청년당 대표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 국내에서 사건이 발생해야 조선인의 운동을 홍보한다고 주장, 만세운동의 빌미를 제공
김순애 – 신한청년당 비밀연락원, 파리강화회의 파견 소식을 국내에 전달
여운형 – 신한청년당 당수, 신한청년단을 조직
우드로 윌슨 – 미국 대통령
김향화 – 수원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한 기생
정칠성 – 경성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한 기생
신익희 – 윤치영, 이광수 등과 2.8 독립선언을 주도
신태윤 – 유관순과 함께 아우내 장터 만세 운동을 조직하고 만세 운동, 천안경찰서 헌병대에 투옥, 고문, 태형 처분
윤치영
이광수
조병옥 – 천안 아우내 장터 만세 사건 관련
박헌영
임영신 – 당시 공주, 천안읍내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한 여교사
허정숙
상하이 임시정부 – 만세의 영향으로 파생된 망명 정부
한성 임시정부
– 기타
무오 독립선언 – 1919년 2월 1일, 중국 동북부 길림성에서 조소앙, 신채호 선생 등 만주와 러시아지역의 항일 독립운동지도자 39명이 제1차 세계대전 종전에 맞추어 조국독립을 요구한 독립선언서이다. 다음달 3월 1일 서울에서 이루어진 3·1 독립선언의 도화선이 되었다.
신한청년당 – 2·8 독립 선언에 직간접적 영향을 주었다. 또한, 파리강화회의 파견을 주도하였다.
기미독립선언서는 1919년 3월 1일 3·1 운동에 맞추어 민족대표 33인이 당시 일제 강점 하에 있던 조선의 독립을 국내외에 선언한 글이다.

○ 독립선언서 낭독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에 모이기로 했던 조선의 민족대표 33인은 늦게 온 사람이 있어 오후 3시가 되어서야 길선주, 유여대, 김병조, 정춘수를 제외한 29인이 모였다. 그들은 태화관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 소재)에서 조선이 독립국임을 선언하였고, 모든 행사가 끝난 때가 오후 4시 무렵이었다. 그들은 총독부 정무총감 야마가타 이자부로에게 전화를 걸어 독립선언 사실을 알렸는데, 이는 자신들이 태화관에 모여있으니 연행해 가라는 뜻이었다. 60여 명의 헌병과 순사들이 태화관에 들어닥쳐 민족대표를 남산 경무총감부와 지금의 중부경찰서로 연행하였다. 저녁무렵에 길선주 등 태화당에 도착하지 못한 나머지 4인도 경찰에 자진 출두했다.
“1. 우리는 이에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선언한다. 이 선언을 세계 온 나라에 알리어 인류 평등의 크고 바른 도리를 분명히 하며, 이것을 후손들에게 깨우쳐 우리 민족이 자기의 힘으로 살아가는 정당한 권리를 길이 지녀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
2. 반만 년이나 이어 온 우리 역사의 권위에 의지하여 독립을 선언하는 것이며, 이천만 민중의 정성된 마음을 모아서 이 선언을 널리 펴서 밝히는 바이며, 민족의 한결 같은 자유 발전을 위하여 이것을 주장하는 것이며, 누구나 자유와 평등을 누려야 한다는 인류적 양심이 드러남으로 말미암아 온 세계가 올바르게 바뀌는 커다란 기회와 운수에 발맞추어 나아가기 위하여 이를 내세워 보이는 것이니, 이 독립 선언은 하늘의 밝은 명령이며, 민족 자결주의에로 옮아 가는 시대의 큰 형세이며, 온 인류가 함께 살아갈 권리를 실현하려는 정당한 움직임이므로, 천하의 무엇이든지 우리의 이 독립 선언을 가로막고 억누르지 못할 것이다.” — 기미독립선언서 처음 부분
한편 오후 2시에 태화관과 300미터 떨어진 원래 약속 장소였던 탑골공원에서는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민족대표 33인이 보이지 않아 한동안 당황하였으나 경신학교 출신 정재용이 팔각정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오후 3시경에 보성법률상업보통학교 학생 강기덕, 연희전문학교의 김원벽 그리고 한위건이 민족대표의 소재를 찾아 나섰다.
거사시간에 기약하지 않고 모인 학생이 천여명이었고 정재용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자 만세소리가 울려퍼지고, 자그마한 태극기와 선언서가 하늘에서 내리는 꽃비처럼 쏟아졌다. 모인 사람들은 모자를 벗어 허공에 던지며 미친 듯이 기뻐하였다. 이 때, 성안과 지방의 백성들도 합세하여 수십만의 군중이 참여하였다. 시위 군중은 두 갈래로 나뉘어 행진을 하였는데, 한 갈래는 종로 보신각을 지나 남대문 쪽으로 향하고, 한 갈래는 매일신보사 옆을 지나 대한문을 향하였다. 대한문에 이르른 군중을 이끌던 사람이 덕수궁의 혼전에 나아가 세 번 절하고 계속 만세를 불렀다. 시위행진은 서울을 8개구로 나누어 길을 가면서 독립선언서를 나눠주고 “일본군과 일본인은 일본으로 돌아가라”, “조선독립만세”, “조선 독립정부를 수립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그리고 계속 진행하여 서대문을 돌아 태평로를 지나 미국 영사관에 이르렀다. 이때 어느 학생이 태극기를 높이 들고 손가락을 깨물어 피로써 ‘대한독립’ 4자를 써서 앞에 들고 군중을 인도하니 미국영사는 문을 열어 환영하고 깊은 동의를 표했다. 한 사람이 일어나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독립의 주지를 연설하고, 종로에 이르러 다시 연설을 벌이자 일본 헌병과 기마병들은 칼을 휘두르며 해산시키려 하였으나 군중들은 태연자약한 태도로 물러가지 않다가 6시가 되어서 자진해산하였다. 다음날 총독부는 독립단을 수색하고 체포하여 투옥하였는데 그 숫자가 1만여명에 이르렀다.
– 3.1 운동의 참여 인원
1919년 3월 3일 고종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전국의 사람들이 서울로 모여들었고, 이들 중의 많은 수가 시위운동에 참가하였다.
운동의 참여 인원에 대하여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의견은 차이가 있으나 역사학연구소의 ‘함께 보는 한국근현대사’ (서해문집, 2004)와 한영우의 ‘다시찾는 우리역사’(경세원, 2002년)에서는 참여 인원 2백만여 명, 전국의 만세 시위 건수 1,542회, 사망 7,509명, 부상 15,961명, 체포 46,948명의 규모로 서술한다.

○ 전국적인 시위와 폭력 진압
천안 아우내장터에서 시작되어 불과 수개월 만에 전국으로 퍼져나갔으며, 일본과 연해주 등 해외에서도 벌어져 1년여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임종국의 ‘실록 친일파’에 따르면, 3월 1일부터 4월 30일까지 60일 동안 1214회의 만세 운동이 벌어졌다고 한다.
독립선언서가 본래 낭독되기로 예정되어 있던 서울 탑골공원에서부터 만세 시위가 발생하였다. 몇십 만 명이 동시에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외치고, 빠른 속도로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이에 당황한 일본군들은 진압하다 못해 폭력을 휘두르게 되고, 그에 더 자극 받은 한국인들의 운동이 그 규모를 더하였다.
– 천안 아우내 만세운동
일시: 1919년 4월 1일 (음력 3월 1일)
장소: 천안 아우내 장터
경과: 천안 아우내 만세운동은 천안 병천 시장에 있던 3,000여 명의 군중이 독립만세를 부른 사건으로 일본 경찰과 헌병은 총검을 이용하여 강력한 진압을 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성공회 병천교회에서 운영하던 진명학교 교사 김구응이 지역 유지들과 젊은 청년, 학생들과 함께 참여하였다.비보를 듣고 온 그의 모친 최씨가 자식의 시신을 안고 통곡하자 노모마저 창과 칼로 찔러 살해하였다. 일본의 강제 진압으로 현장에서 죽은 사람은 19명이며, 유관순을 포함한 많은 참가자들이 부상, 투옥등의 어려움을 겪었다.
– 평남 강서군 사천장터 시위
일시: 1919년 3월 4일
장소: 평안남도 대동군, 강서군
경과: 3월 4일 대동군 금제면 원장리에서 약 3천여 명의 군중이 모여 강서군 반석면 상사리의 사천시장 방면으로 시위 행진을 벌였다. 이때 사천시장 부근에 있던 사천헌병대에 이 지역에서 만세 시위를 조직하던 기독교 계열의 인사들이 사전 적발되어 구금되어 있던 상태였기 때문이다. 사천헌병주재소의 일본인 소장 사토 지쓰고로 (일: 佐藤實五郞)와 조선인 헌병보조원 강병일, 김성규, 박요섭 등은 미리 매복해 있다가 행진하는 시위대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하여 시위 참가자 수십명을 살상했다. 이들은 돌을 던지며 맞선 시위대에게 그 자리에서 함께 살해당했다. 이 사건은 3·1 운동 최초의 사망자가 3월 1일 평안북도 선천과 안주에서 발생한 이래 가장 규모가 큰 유혈 사태였다.
관련자: 조진탁 (사형), 고지형, 지석용 등
– 삼진 의거
일시: 1919년 3월 28일, 4월 3일
장소: 경상남도 창원
경과: 제1차와 제2차 두 차례에 걸쳐 전개된 삼진의거는 창원 일대의 연합 대시위였다. 서울에서 시위에 참가한 뒤 연고지에 돌아온 변상태가 진전, 진북, 진동면의 3개면에서 동조하는 인사들을 모아 모의했다. 단일 시위로는 마산 지역에서 가장 격렬한 시위였으며, 전국적으로도 규모가 큰 연합시위로 기록되었다. 제1차 삼진 의거에서 검거를 피한 주모자들이 태극기를 제작해 제2차 삼진 의거 (4·3 삼진의거)를 재차 계획했으며, 진북면 지산교 부근에서 약 3천여 명의 비무장 시위대가 일본 헌병대와 유혈 충돌하여 5명이 즉사하고 11명이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관련자: 변상태, 변갑섭 (사살), 변상복 (사살) 등
– 제암리 학살 사건
일시: 1919년 4월 15일
장소: 경기도 수원군 (현 화성시) 향남면 제암리
경과: 3월 말 또는 4월 초에 수원 향남면 제암리 (지금의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에서 장날을 틈타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던 일본 육군이 4월 15일 제암리의 제암리교회에 성인 남자들을 모아놓고 불을 질러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 곽산 학살 사건
일시: 1919년 3월 6일
장소: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
경과: 곽산 그리스도교회를 중심으로 봉기하여 점차 수천명이 시위에 동참하자, 일제는 독립운동가 박지협 (朴志協)을 주동 혐의로 체포 직후 타살 (打殺)하고, 체포한 시위군중 100여명 중 50여명이 잔인한 고문으로 사망했다. 일제는 시위 진압 과정에서 군중에 대해 무차별 총격을 가했으며, 광견 (狂犬)을 죽이는 데 사용하던 쇠갈고리로 시위군중 수천명을 참살했다. 일명 곽산의 참살 (郭山一慘殺)이라고도 불린다.
관련자: 박지협 (타살)
– 사천 학살 사건
일시: 1919년 3월 3일
장소: 평안남도 사천
경과: 개신교 목사 한예헌 (韓禮憲)과 천도교 교구장 (敎區長) 이진식 (李鎭植), 최승택 (崔承澤), 김병주 (金炳疇) 등의 주도로 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일본 헌병대는 시위 군중에 대한 무차별 총격으로 73명을 학살했다. 그러나 시위군중은 학살에도 불구하고 시위를 계속하여 헌병 주재소에 불을 지르고 헌병 2명을 타살 (打殺)했다.
관련자: 한예헌 (韓禮憲), 이진식 (李鎭植), 최승택 (崔承澤), 김병주 (金炳疇) 등
– 화수리 학살 사건
일시: 1919년 4월 11일
장소: 경기도 수원군 우정면 화수리
경과: 4월 3일 시위군중이 화수리 주재소에 불을 지르고 시위대에 총격을 가한 일본 순사 1명을 타살하자 11일 새벽에 헌병과 경찰을 동원해 민가에 불을 지르고 뛰쳐나오는 사람을 총으로 쏘거나 칼로 찔러 마을 주민 수십여명을 학살했다. 40가구가 모여살던 화수리는 사건 이후 모두 불타 18가구만 남았으며, 사건 이전까지는 비교적 부촌 (富村)이었으나 이후 아사자 (餓死者)가 속출했다.
– 맹산 학살 사건
평안남도 맹산에서 천도교인과 기독교인이 만세시위를 벌였는데, 사건 며칠 후 일본군이 기독교인 지도자 한사람을 체포하여 헌병분견소에 가두고 고문을 하자 군중들이 몰려와 지도자의 석방을 요구하자 일본 헌병이 이들을 분견소 안마당에 끌어들인 뒤 문을 잠그고 60여명을 총살한 사건이다.
– 대구 학살 사건
대구에서 2만 3천 명이 시위를 벌여 일본군에게 113명이 총살되었고, 87명이 부상당하였다. 김용해의 아버지가 이 시위의 주모자로 독립선언을 낭독했는데, 김용해는 체포하러온 일본군과 맨손으로 대항하다가 칼에 맞아 중상을 입었으며, 부자가 투옥되어 며칠 후 사망하였다.
– 합천 학살 사건
3월 16일 경남 합천군 야로면에서 주민들과 해인사의 승려들이 모여 시위를 벌였는데, 그 참가자가 1만여명에 이르렀다. 3월 18일 합천군 강양면의 시장에서 시위가 있었다. 일본 군인과 경찰이 쇠몽둥이나 장검으로 해산시키려 했으나 어려워지자 발포하여 3명이 죽고 다수가 부상당했다. 3월 19일에는 합천군 대정면에서 지역 유지와 노동자들이 고현시장에 모여 독립을 선언하고 만세 시위를 벌여 주모자 5명이 체포되어 진주로 압송되었다. 3월 22일에는 상백,백산,가회,삼가 등 다섯 면의 주민 3만여 명이 모여 만세 시위를 벌였다. 질서있는 평화시위를 벌였음에도 일본군이 무차별 발포하여 42명이 사망하고 100여 명이 큰 부상을 입었다. 같은 날 초계면에서도 유림과 학생의 주도로 8천여명이 모여 만세 시위를 벌이자 역시 일본군이 발포하여 5명이 죽고 수십명의 부상자를 냈다.
– 전북 남원 학살 사건
남원군 덕과면장이었던 이석기가 관청 행사였던 식수 기념식이 예정되어 있던 4월 3일을 기해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하고 19개 면에 격문과 참가 취지서를 보냈다. 나무 심기를 핑계로 군중 800여명을 모아 식수기념식이 끝나자 19개 면장 등이 만세를 선창하고 군중들이 호응하여 남원-전주 간 도로를 행진하며 시위를 벌였다. 시위 소식은 곧 남원군 전체에 퍼졌으며, 다음날인 남원읍 장날에 장터에서 또다시 만세 시위가 벌어졌다. 장날 오후에는 광한루 앞 광장에서 군중 1000여명이 모여 시위를 벌이자 수천여명의 주민들이 다시 합세해 대규모 시위가 벌어져 읍내 전체가 시위 군중으로 가득했다. 일본군은 시위대에 총격을 가해 이 과정에서 방진형 (房鎭炯), 방명숙 (房明淑) 등 8명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10여 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황일환 (黃日換), 이성기 (李成器), 형갑수 (邢甲洙) 등 20여명이 체포되었다.
– 익산 이리장날 만세운동
기독교인이었던 군산 영명학교 교사 문용기가 1919년 4월 4일 이리 장날을 이용하여 일어난 독립운동을 주동하였다. 당시 일본군 보병중대가 주둔하여 검문검색이 심해서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그는 박도현과 장경춘등 기독교 계통의 인사들과 몰래 만나 4월 4일 장날에 거사하기로 하였다. 12시 쯤 이리 장터에는 기독교인 등 300여 군중이 모였다. 만세운동에 참여한 군중들은 문용기의 지휘에 의해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가지고 태극기를 휘날리며 대열을 지어 시가를 행진하였다. 군중의 수가 점차 늘어 1천여 명이 되고, 그에 따라 기세가 오르자 일본 헌병대가 출동하여 이를 제지하였다. 일제는 이에 소방대와 일본인 농장원 수백명을 동원하여 창검과 총·곤봉·쇠갈고리를 휘두르며 무력으로 진압했다. 시위 군중이 이에 대항하여 계속 만세운동을 진행하자 급기야는 무차별 사격을 감행하여 사상자가 속출했다.
이 때 문용기가 오른손에 태극기를 들고 군중의 앞으로 나아가 독립운동의 정당성과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연설을 하였다. 그러자 일본 헌병이 칼을 휘둘러 그의 오른팔을 베어 태극기와 함께 땅에 떨어뜨렸다. 그는 쓰러지지 않고 다시 왼손으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며 전진하자 이번에는 왼팔마저 베어버리니 그는 두 팔을 잃은 몸으로 뛰어가며 계속 만세를 외쳤다. 이에 격분한 일본 헌병은 끝내 추격하여 사정없이 난자하였고, 그는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끝내 순국하였다.
– 군산 3·5 만세운동
전북 군산에서 영명학교 졸업생 김병수가 1919년 2월 26일 민족대표 33인중 한명이던 이갑성과 접촉하여 독립선언서 200여장을 건네받고 만세운동을 주도하여 영명학교, 멜본딘여학교(현 군산영광여중·고교), 구암교회 교인, 시민 등 500여명이 3월 5일 시위에 참가하였다. 윌리엄 린튼은 군산의 만세운동을 지도하였는데, 시위는 이후에도 28차례에 걸쳐 계속되어 시민 3만여명이 시위에 참가하였다. 시위 당시 일제의 폭력진압으로 인해 53명이 사망하고, 72명이 실종되었으며, 195명이 부상을 당해 만세운동으로 인한 사상자로서는 전라북도 내에서 가장 많은 규모였다. 이는 3·1운동 이후 한강 이남 지역에서 최초로 벌어진 만세운동으로 그 의미가 크다.
– 만주 용정 만세운동
만주 지역에서의 대표적인 만세시위는 3월 13일 용정에서 3만여 명이 참가한 시위였다. 이들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쳤는데, 시가행진을 하자 중국군대가 시위대를 향하여 발포하여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일제는 3·1 운동의 영향을 차단하기 위하여 심양에서 조선인회를 열었다. 조선인회에 참석한 한국인들은 일본인과의 차별 철폐를 요구하였다.
○ 피해 규모
운동의 참여 인원에 대하여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의견은 차이가 있다.
역사학연구소의 ‘함께 보는 한국근현대사’ (서해문집, 2004)와 한영우의 ‘다시찾는 우리역사’(경세원, 2002년)에서는 참여 인원 2백만여 명, 전국의 만세 시위 건수 1,542회, 사망 7,509명, 부상 15,961명, 체포 46,948명의 규모로 서술한다.
그런데 3·1 운동을 진압하였던 조선총독부 쪽의 통계는 이와 크게 차이 난다. 조선총독부는 당시 조선헌병대사령부와 총독부 경무총감부의 보고서를 바탕으로 ‘조선소요사건일람표’ (朝鮮騷擾事件一覽表)를 작성하여 3월 1일에서 4월 말까지의 상황을 10일 단위로 정리하였다. 이를 합산하면 4월말까지 조선인 시위 참여자는 58만 7,641명(50명 이하 참여자의 경우는 제외), 검거자 26,713명 (당일 13,517명, 추가 검거 13,196명), 시위 참가자의 사망 553명, 부상 1,409명이라고 집계되어 있다. 또한 일본군과 헌병, 경찰의 경우 사망 9명, 부상 156명으로 집계하였다. 한편, 조선헌병사령부가 발간한 ‘소요사건 검거건수 조사표’ (騷擾事件 檢擧件數 調査表, 1919.4.21-1919.4.30)에서는 총 검거 건수를 26,713 명으로 집계하였다.

○ 삼일운동의 반응 및 파급 효과
만세 열기는 5월까지 계속되었다. 5월 31일 윤치호는 7,8명의 젊은이가 종각 역 근처에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는 것을 목격했다. 일본 헌병이 들이닥치자 그 중 한명이 주머니칼로 자신의 목을 그었다. 이를 지켜본 윤치호는 그 젊은이들을 안타까워하면서도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눈을 뜨고 지옥으로 뛰어들수 있는 그 용기에 감격’하였다. 그러나 이런 행동만으로는 독립을 달성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도 윤치호는 3.1 운동이 국내외에 한국인에 대한 시각을 개선시켰다고 평했다.
한국인들 스스로 민족의식을 깨우치는 계기를 마련했고, 조선의 멸망을 당연시하고 일본에게 긍정적이던 국내 체류 미국 선교사들의 시선을 개선시켰다고 평가했다. 또한 일본의 잔인한 진압이 미국인 선교사들과 미국 지식인들이 일본으로부터 등을 돌리거나 일본을 부정적으로 보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평했다.
– 한국내
3.1운동을 계기로 민주 공화제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됨으로써 19세기 후반부터 이어져 온 근대 국민 국가 수립운동이 첫 결실을 맺었다. 삼일운동으로 말미암아 한민족은 독립을 향한 마음이 서로 일치함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만주지방에 있던 독립운동가들과 삼일운동으로 인해 상해로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함으로써 구체적인 성과를 거두었으며, 세계적으로 독립의 결의를 나타내 각 국가의 국민에게 한국의 독립의지를 전파하였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한 이후 승전국은 이런 한국의 뜻을 받아들여 대한민국을 독립국가로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3.1 만세 운동의 실패를 예견한 윤치호는 만세 운동이 한참 진행 중이던 3월 2일자의 일기에서 학생들을 앞세운 뒤, 만세 대열에서 슬그머니 발을 뺀 기독교, 천도교계 인사들을 음모꾼들이라며 규탄했다. 3ㆍ1운동 후 구치소에 수감되는 여학생들의 모습에서는 일제 경찰에 대한증오와 분노로 밤새워 괴로워했다. 이후 3월 5일~3월 7일 그는 시내를 다니며 만세 시위 직후의 동태를 파악했다. 3월 7일 기자 회견을 통해 다음과 같은 담화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강자와 서로 화합하고 서로 아껴 가는 데에는 약자가 항상 순종해야만 강자에게 애호심을 불러일으키게 해서 평화의 기틀이 마련되는 것입니다마는, 만약 약자가 강자에 대해서 무턱대고 대든다면 강자의 노여움을 사서 결국 약자 자신을 괴롭히는 일이 됩니다. 그런 뜻에서도 조선은 내지에 대해서 그저 덮어 놓고 불온한 언동을 부리는 것은 이로운 일이 못됩니다.” — 윤치호, 경성일보 1919년 3월 7일
이 사건을 계기로 윤치호는 심한 비판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이완용, 예종석 등의 3.1 운동 반대 발언이 알려지면서 이완용, 예종석 등에 대한 성토 여론이 조성되었다.
– 조선총독부 통치정책 변화
3·1 운동을 계기로 강경책 내지는 군사, 경찰에 의한 무단 통치를 하던 조선총독부는 문화 통치로 정책을 바꾸게 된다.
– 해외
대한민국의 일부 사학계에서는 이 운동이 중국의 5·4 운동에 영향을 주었으며, 인도의 반영운동, 그 밖에 베트남, 필리핀, 이집트의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끼쳤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3·1운동이 중국의 5·4 운동에 참여한 일부 지식인에게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전자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을 받았고, 만세운동이라는 평화적 항쟁을 특징으로 하는 데 반해, 후자는 러시아 혁명이라는 볼셰비키주의의 영향을 받았고, 민중의 폭력적 시위와 연결되는 점, 아울러, 중화인민공화국의 학계에서 3·1운동의 한계가 무산계급 투쟁의 불완전성에 의한다는 담론을 파급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뉴욕타임즈는 1919년 3월 13일자에서 “조선인들이 독립을 선언했다. 알려진 것 이상으로 3·1운동이 널리 퍼져나갔으며 수천여명의 시위자가 체포됐다”고 기록했다. AP통신은 “독립선언문에 ‘정의와 인류애의 이름으로 2000만 동포의 목소리를 대표하고 있다’고 명시돼 있다”고 보도했다. 이운동의 시작부터 3.1운동에 관한 모든 한국의 상황을 해외에 전달하는데는 캐나다의 선교사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의 영향이 매우 많았다.

○ 부록 : 3·1절 / 삼일절 (三一節)
3·1절 (三一節, The March 1st Independence Movement Day)은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난 3·1 운동을 기념하여 제정된 대한민국의 국경일이자 공휴일이다.
1920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수립 이후 ‘독립선언일’ (Korean Independence Day)이란 국경일로 지정되어 재외교포와 임시정부 및 독립운동가에 의해 그 기념이 시작되었다. 광복 이후 ‘1946년 3월 1일 제27회 기념식을 기해 국가 경축일로 지정되었으며,[3] 대한민국 제1공화국 수립 이후 1949년 10월 1일 <국경일에관한법률>을 공포함으로써 국경일로 재지정되었다. 이는 2005년 12월 29일 <국경일에 관한 법률>로 개정되어 지금에 이른다. 3ㆍ1운동 때 유관순, 손병희를 포함해 3000명이 참여했다.
이 날에는 정부 주최로 3부 요인은 물론 각계각층의 유명인사들이 모여 기념식을 거행하여 대한민국의 헌법 기본정신인 3.1정신을 되새긴다. 이와 함께 나라의 광복을 위해 싸우다가 순국한 선열들의 유족 및 애국운동가들로 구성된 광복회 회원들은 따로 파고다 공원에 모여 그 날의 깊은 뜻을 되새기는 의식을 거행한다. 또한 민간 차원의 갖가지 문화 공연도 이날에 베풀어지며, 전국 관공서 및 각 가정에서 대한민국의 국기인 태극기를 게양한다.
– 3·1절 / 삼일절 (三一節)
.날짜: 3월 1일
.행사: 경축 행사
.행사내용: 일제로부터의 독립 선언과 한민족 최대 규모의 독립 봉기를 축하하며 기념
.관련: 광복절,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
– 3.1절의 역사
3.1절은 1919년 대한민국의 독립선언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발족과 함께 시작한다. 1920년 2월 임시정부 내무부 주최로 3.1독립선언 1주년 기념식 준비회를 설치하고 갖가지 행사를 준비하였다. 제1주년 3.1절은 임시정부 주최의 기념식과 교민단 주최의 3.1절대축하식, 시가행진, 기념공연 등으로 성대히 축하되었고, 당시 임시정부의 기관지였던 독립신문은 이날을 국경일로 적으며 기쁘게 맞이할 것을 동포들에게 주문했다.
3.1절 행사는 연해주와 만주, 미국, 심지어는 일본에서도 한인들에 의해 개최되었는데, 이들은 기념식을 가진 뒤 브라스밴드를 앞세워 퍼레이드를 벌였고, 기념 공연과 축포, 전단 살포 등의 다채로운 행사로써 3월 1일을 경축했다. 임시정부 시기 3.1절의 정식 명칭은 독립선언일이었으며, 이외에도 독립절, 혁명기념일 등의 명칭으로 불리었다. 3.1절이라는 명칭은 중국의 쌍십절이나 미국 독립기념일의 별칭인 4th of July에서 따 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외에도 여러 독립운동가들의 전단과 기록에서 3.1절은 대한민국 건국기념일이나 독립기념일 등으로 언급되었다.
한국내에서 열린 최초의 3.1절 행사는 해방 이후인 1946년 보신각 앞에서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주최로 성대히 거행되었다. 이승만의 개회사와 김구의 경축사, 김규식의 선창 순으로 식전이 열렸으며, 이날을 경축하기 위한 음악회와 전시회, 예술공연, 체육대회 등 다채로운 문화예술행사들이 베풀어졌다. 그러나 3.1절 행사는 당대 좌익과 우익 진영 간의 분열 속에 치러졌으며, 1947년에는 동대문운동장과 남산에서 각각 경축 행사를 거행하던 우익과 좌익이 충돌하여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1949년부터 3.1절은 4대 국경일로 지정되었으며, 이때까지만 해도 겨레 최대의 명절로 인식되고 있었다. 정부 주최의 경축식 이외에도 국방군의 축하 비행, 예술제, 퍼레이드, 학예회, 체육회, 연극 등 다채로운 행사가 거행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축 행사는 6.25 전쟁을 기점으로 사라졌으며, 5.16 군사정변과 5공화국 정권을 거치며 3.1절은 크게 천시되었다. 1998년 이후로는 만세운동 재현 행사가 실시되어 사실상 유일한 3.1절 행사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 3·1절 노래
‘3·1절 노래’는 1946년에 문교부 장관 안호상의 의뢰로, 위당 정인보의 3·1절 노래에 당시 숙명여대 음악과 강사였던 작곡가 박태현이 곡을 붙인 것이다.
‘기미년 3월 1일 정오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 독립 만세 태극기 곳곳마다 3000만이 하나로 이 날은 우리의 의요 생명이요 교훈이다 한강물 다시 흐르고 백두산 높았다 선열 하 이 나라를 보소서 동포야 이 날을 길이 빛내자.’
정인보가 작사하고 박태현이 곡을 붙인 작품으로 순국선열을 기리며 부르던 3.1절노래 가사다. 3.1운동이 일어날 당시 (1919년) 한반도의 인구는 2000만이 채 되지도 않았는데, “태극기 곳곳마다 3천만이 하나로”라는 가사로 불린 3·1절 노래의 오류를 지적하기도 한다.
– 현대의 3·1절
3.1절 100주년을 맞아 문재인 정부에서는 2018년 7월 3일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를 발족하였다.
2019년 3월 1일 3.1절 100주년을 맞이하여 전국 각지에서 행사가 개최됐다. 그 중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는 정부서울청사를 비롯한 인근 건물에는 대형 태극기가 내걸렸으며 문재인 대통령과 각부 장관, 각계 인사와 시민 약 1만 명이 참석하였다. 국민대표 33인의 행진과 독립선언문 낭독, 독립유공자 포상이 진행되었고, 독립유공자 334명에 대한 포상에서는 유관순 열사에게 최고 등급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다. 정오에는 전국에서 동시에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타종과 만세 행사가 열리기도 했다. 서울 보신각에서 열린 타종 행사에는 강제징용 피해자인 이춘식 씨와 유관순 열사의 조카 유장부씨 등 독립유공자 후손 12명이 참여하기도 했다. 서울광장 일대에서는 만세 행진과 공연이 이어졌고, 시민 3,000명이 참여한 대합창 행사도 열렸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