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4월 8일, 헝가리의 물리학자 외트뵈시 로란드 (Eötvös Loránd Ágoston, 1848 ~ 1919) 별세
외트뵈시 로란드 아고슈톤 (헝: Eötvös Loránd Ágoston, IPA, 1848년 7월 27일 ~ 1919년 4월 8일)는 헝가리의 물리학자이다.

– 외트뵈시 로란드 아고슈톤 (Eötvös Loránd Ágoston)
.출생: 1848년 7월 27일, 부더
.사망: 1919년 4월 8일, 헝가리 부다페스트 Józsefváros
.국적: 헝가리
.학력: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1870년)
.부모: 요제프 외트뵈시, Agnes Rosty de Barkócz
.배우자: 기젤라 호르바트 (1875년–1919년)
.자녀: 롤란다 마리아 외트뵈시, 졸란 외트뵈시, 일로너 외트뵈시
헝가리 이름은 성이 앞에 오고 이름이 뒤에 온다. 따라서 성은 ‘외트뵈시’이다.

○ 업적
외트뵈시는 오늘날 특히 중력 질량과 관성 질량 (소위 약한 등가 원리)의 등가에 대한 연구, 그리고 지구의 표면에서의 중력의 기울기 등의 중력에 관련된 외트뵈시 실험을 통해서 기억된다.
약한 등가 원리는 상대성 이론에 있어서 현저한 역할을 하며, 외트뵈시의 실험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1916년에 발표한 ‘일반 상대성 이론의 기초’라는 논문에서 언급되었다.
중력의 기울기의 측정은 석유 매장량의 위치와 같은 응용 지구물리학에서 매우 중요하다.
중력의 기울기에 대한 CGS 단위는 외트뵈시에 대한 존경에 외트뵈시 (eotvos)라 붙여졌다 (기호로는 E를 사용한다).
1886년에서부터 그가 사망하기까지 그는 부다페스트 대학에서 연구하며 가르쳤고, 1950년 부다페스트 대학교는 외트뵈시의 이름을 따서 외트뵈시 로란드 대학교로 개명하였다.

○ 유네스코 : 로란드 외트뵈시의 가장 탁월한 연구 성과 2가지와 관련된 문서 3건
.국가: 헝가리(Hungary)
.등재연도: 2015년
.외국어 표기: Three documents related to the two most outstanding results of the work of Roland Eötvös
.소장 및 관리기관: 헝가리 지질학 및 지구물리학 협회 (Geological and Geophysical Institute of Hungary), 헝가리과학학술원 도서관 및 정보센터 (Library and Information Centre of the Hungarian Acad. of Sci.)
- 본문
기초연구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과학자들은 ‘외트뵈시 (Eötvös,1848 ~ 1919)’라는 이름을 들으면 그 무엇보다 중력 질량과 관성 질량의 등가성에 관한 연구를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된다. 외트뵈시는 당시 널리 이용되었던 추 저울이 아닌 비틀림 저울 (torsion balance)을 이용해서 실험했고 그 결과 관측의 정확도가 1/200,000,000까지 높아졌다. 이 실험 결과로 외트뵈시는 국제적으로 널리 인정받게 되었고, 1909년에는 괴팅겐 (Göttingen) 대학교로부터 베네케 상 (Beneke Prize)을 수여하기에 이른다.
‘문서 1’은 외트뵈시가 베네케 상을 수상하게 해준 1908년에 작성한 자필 논문 원본이다. 이 문서는 1922년에 축약되어 출간되었다.
‘문서 2.a’ 및 ‘문서 2.b’는 1920년대에 인쇄된 비대칭 비틀림 저울의 광고홍보용 책자이다. 외트뵈시가 구상했던 본래의 아이디어가 어떻게 성공적으로 구현되었는지 보여주며, 이 정교한 장치가 지질 탐사에 적합한 도구라는 사실을 표현하고 있는 기록물이다. 이 같은 현장 장비의 개발은 응용지구물리학이라는 새로운 학문 분야를 탄생시켰고, 퇴적 분지의 심층 구조에 대한 탐사도 가능해졌다. 이로써 상용화 할 수 있는 최초 시리즈에 속하는 비틀림 저울이 발명되면서 새롭게 등장하여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던 전 세계 지질 탐사 분야의 측정 도구 제작의 발전과 데이터 수집 산업에 있어 중요한 진전을 맞이하게 되었다.

.세계적 중요성·고유성·대체 불가능성
외트뵈시의 실험은 물리학 분야에서 당대 최고 수준의 정밀 측정이었다. 중력 질량과 관성 질량의 등가성은 이후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원리의 중요한 한 요소가 되었다.
물리학 교수로 재직했던 외트뵈시는 처음에는 중력 현상을 증명하고 중력 질량과 관성 질량의 비율을 연구하기 위해 1886년 무렵 쿨롱 비틀림 저울 (Coulomb-mérleg, 미첼 또는 ‘캐번디시 저울’이라고도 알려짐)을 이용했다.
이론을 입증하기 위해 그는 장치의 수평을 계산함으로써 중력장 표면 높이의 형상, 즉 지구의 형상에 따라 놓였을 때의 저울 균형점이 명백해지게 되었다.
그 이론에 근거하여 외트뵈시는 비틀림 저울의 수평 막대 양 끝에 매달린 물체 중 하나가 가느다란 실에 의해서 낮은 수준에서 정지한다면, 비틀림 저울이 중력의 수평 기울기에 민감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장치의 비대칭 디자인에는 훗날 외트뵈시 비틀림 저울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 디자인은 독창적이며 근본적인 방식으로 초기 응용지구물리학의 발달에 기여했다.
외트뵈시의 발명이 획기적이라는 증거는 이 새로운 과학적 방법이 독창적인 신생 산업의 도래를 맞이하게 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1922년, 그가 세상을 떠난 지 몇 해 지나지 않아 그의 옛 동료와 페르디넌드 쉬시(Ferdinand Süss)는 비틀림 저울을 상업적으로 생산하기 위한 조립 라인을 가동했고, 세계 각처의 전문가와 기술자들이 부다페스트에 외트뵈시 연구소를 찾아와 새로운 장치를 다루는 방법과 이용법을 배워 갔다.
부다페스트에서 제작된 상용화가 가능한 초정밀 비틀림 저울 덕분에 헝가리는 빠르게 성장하는 신생 산업의 선두에 설 수 있었다.
특히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전 세계가 석유 탐사를 성공적으로 해낼 수 있었던 것은 외트뵈시의 비틀림 저울 덕분이었다.

참고 = 위키백과, 유네스코 문화유산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