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1월 24일, 이탈리아의 화가 • 조각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Amedeo Clemente Modigliani, 1884 ~ 1920) 별세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이: Amedeo Clemente Modigliani, 1884년 7월 12일 ~ 1920년 1월 24일)는 이탈리아의 화가이다.

–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Amedeo Clemente Modigliani)
.출생: 1884년 7월 12일, 리보르노
.사망: 1920년 1월 24일 (34세), 파리
.매장지: 페르 라셰즈 묘지 (1920 – )
.직업: 화가, 조각가, 데생화가
.국적: 이탈리아 왕국
.학력: Accademia delle Arti del Disegno
피렌체 미술 아카데미
.스승: Giovanni Fattori, 콘스탄틴 브랑쿠시
.분야: 회화
.사조: 현대 미술
.동거인: Beatrice Hastings (1914 – 1916), 잔 에뷔테른 (1917 – 1920)
.자녀: 잔 모딜리아니
.주요 작품: Nudo seduto, Ritratto di Lunia Czechowska con ventaglio, Jean Cocteau, Portrait of Lunia Czechowska (1919), Frontal portrait of Jeanne Hébuterne
.영향: 앙리 드 툴루즈로트레크, 폴 세잔, 콘스탄틴 브랑쿠시, 파블로 피카소

○ 생애 및 활동
1884년 이태리 토스카나주 리보르노에 있는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에우제니아는 철학자 스피노자의 혈통을 이어받은 마르세유의 명문가 출신으로 높은 지성과 교양을 갖추고 있었다. 부친의 사업이 어려워지자 직접 단눈치오의 시를 번역하거나 서평을 써 생활을 유지할 정도였다. 모딜리아니가 태어났을 당시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집안은 어려웠지만 에우제니아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대한 재능을 보인 아들을 굴리엘모 미켈리의 아틀리에에 데리고 가기도 했다.
그러나 모딜리아니는 늑막염, 폐결핵, 폐렴 등 병치레가 잦아 평생을 고통받았다.
14세에는 병으로 학교를 그만두었고, 17세에는 결핵에 걸려 이탈리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요양을 해야 했다.
베네치아·피렌체 미술 학교에서 공부한 모딜리아니는 1906년 파리로 나가 몽마르트르에 아틀리에를 빌렸고 세잔의 영향을 받았다.
독립 미술파에 속하며, 파리 화단의 특이한 화가로서 인정되었다. 조각도 하여, 브랑쿠시, 콕토 등과도 사귀었다.
그러나 돌조각에서 나오는 먼지로 폐가 나빠지자 조각을 그만두고 그림만 그렸다.
1912년 파리 가을 미술전에 작품을 출품했지만 주목받지 못했고 초상화 한 점 당 10프랑밖에 받지 못했다. 그러나 미남으로 유명했던 모딜리아니에겐 모델을 자청하는 여성들이 많이 있었다.
1917년 몽파르나스의 카페에서 모딜리아니는 러시아 조각가 차나 오를로프 (Chana Orloff)의 소개로 14세 연하의 화가 지망생 잔 에뷔테른 (Jeanne Ebuterne)을 만났다.
잔은 모딜리아니와 같은 아틀리에를 쓰는 일본인 화가 후지타 쓰구하루의 모델이었다. 보수적인 부르주아 가정이었던 잔의 가족은 가난하고 병약하며 마약을 하는 유대인 모딜리아니와의 교제를 싫어했지만 두 사람은 동거에 들어갔다.
같은 해 모딜리아니는 폴란드 화상 레오폴트 즈보로프스키의 주선으로 개인전을 열었지만 외설적이라는 비판만 받은 채 전시회는 실패로 돌아갔다.
이듬해인 1918년 모딜리아니는 잔과 니스에서 요양을 했고 딸 지오바나를 얻었다.
1920년 파리로 돌아온 모딜리아니는 자선 병원에서 결핵성 뇌막염으로 34세에 요절하였다.
당시 임신 8개월째였던 잔은 모딜리아니가 죽고 이틀 뒤에 투신 자살했다.
모딜리아니는 파리의 페르 라 셰즈 묘지에 묻혔고, 10년 뒤 잔의 가족들은 잔을 모딜리아니 곁에 묻어주었다.

- 모딜리아니와 잔느의 지독한 사랑
“우수에 젖은 표정과 긴 목의 초상으로 잘 알려진 세계적인 작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Amedeo Modigliani, 1884 ~ 1920)와 그의 영원한 사랑이자 예술의 영감이 되었던 뮤즈, 잔느 에뷔테른 (Jeanne Hebuterne, 1898 ~ 1920)”
잔느는 모디의 아내로 그동안 미술사에서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모디에게 모델로서 영감을 불러일으켰고 그와 함께 작업하며 예술에 대한 열정을 표출했던 화가 지망생이었다. 모디는 친구들이 붙여준 별명으로 ‘저주받은 화가’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탈리아 리브른느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모딜리아니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지만 선천적인 늑막염, 장티푸스, 폐렴 등으로 어려서부터 허약했다. 1913년경부터는 건강의 이유로 그가 좋아했던 조각을 하지 못하고 주위 아는 사람이나 창녀들을 모델로 주로 초상화와 누드를 그렸는데, 특히 아프리카의 원시조각상에 영향을 받은 그는 긴 목의 애수와 관능적인 여인상의 그림을 많이 그렸다.15살의 나이에 이미 화가의 꿈을 지녔던 어린 잔느는 미술학교에 다니며 몽파르나스의 가난한 예술가들과 교우하고 때론 그들의 모델이 되어주기도 했다.
잔느는 수업이 끝나면 카페 로통드에 자주 들르곤 했는데, 어느 날 깔끔한 코듀로이와 붉은 스카프를 두른 이탈리아 화가 모딜리아니를 우연히 마주하게 된다.
모딜리아니는 잘 생긴 외모에 교양과 매너가 있어서 당시 파리의 예술가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높았으나, 너무 가난해서 빵을 사기 위해 헐값에 그림을 그리기도 했고, 술과 마약, 방탕한 생활에 의지해 현실에서 도피하는 예술가였다.
1917년 봄, 조각가 Chana Orloff는 화가들의 모임에서 모딜리아니에게 잔느를 소개해준다.
1916년 몽파르나스에서의 가난했던 시절, 그의 열렬한 후원자였던 즈보로프스키는 그랑쇼미엘 8가에 있는 빌딩 꼭대기에 모디와 잔느의 작업실을 내어준다.
1917년부터 2년 동안 잔느는 수업이 끝나면 작업실에서 그와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며 사랑을 키워간다. 어릴 때 부터 폐결핵을 앓던 모디의 병세가 점점 악화되자 즈보로프스키의 권유로 둘은 니스의 해변으로 요양을 가게 되고, 그곳에서 본격적으로 둘만의 시간을 갖게 된다. 둘은 부부로서 살았지만, 잔느 집안의 극심한 반대로 합법적인 예식을 치르지 못한다. 14살 연상에 알콜중독에 마약복용, 결핵으로 몸까지 성하지 않은 가난한 무명화가에게 딸을 보내는 것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었겠다.
하지만 잔느와 함께하는 동안 모딜리아니는 술도 줄였고, 마약도 끊게 되었다.
둘은 가난하지만 기쁨이 충만한 날들을 보내며 모딜리아니는 그 어느 때보다 뛰어난 작품들을 열정적으로 그려낸다. 이 시기에 모딜리아니의 대표적인 초상화들이 가장 많이 탄생했고, 모딜리아니와 잔느의 딸 잔느 모딜리아니가 태어난 것도 니스에서였으며, 목이 긴 여인으로 유명한 잔느의 초상화들을 제작한 곳도 니스였다고 한다.
“천국에서도 당신의 아내가 되어 줄게요…”
그러나 그들은 2년이 채 못되어 다시 파리로 돌아와야 했고, 병원에 실려간 모딜리아니는 입원 3일 후 사망한다. 사인은 결핵성 뇌막염이었다.
그의 사망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온 잔은 모딜리아니의 주검에 달라붙어 오래도록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다. 그리고 근 이틀이 지난 1920년 1월 26일 새벽, 잔느는 가족과 함께 머물던 아파트 5층에서 창문에 몸을 던진다.
22살의 그녀는 8개월 된 둘째 아이를 가진 상태였다.
모딜리아니의 연인이기 전에 화가로서 잔느의 재능을 보여주는 자화상이다.
그녀가 살아남아 계속 작품을 그렸다면 아마 뛰어난 화가로 기억되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잔느는 자신의 재능도 삶도 모두 포기한 채 사랑하는 연인인 모딜리아니와 영원히 함께하기 위한 길을 택했다. 모딜리아니의 절친한 친구였던 시인 앙드레 살몽은 잔느의 죽음에 이런 시를 남겼다.
“편히 잠들라, 애처로운 잔느 에뷔테른이여.
편히 잠들라, 당신의 죽은 아이를 요람에 넣어 흔들었을 애처로운 여인이여.
편이 잠들라, 더 이상 헌신적일 수 없었던 여인이여.
생 메다르 교구의 마리아 상과 닮았던 아메데오 모딜리아니의 죽은 아내여.
편히 잠들라, 흙에 덮여가는 그 새하얀 은둔처에서.”
가난 속에서 죽었고, 죽은 후에 유명해진 모딜리아니와 영원한 사랑의 신화로 남은 잔느의 이야기는 어떤 비극보다도 슬프고 아름다운 사랑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 사후
모딜리아니의 외동딸인 잔 (어머니 잔 에뷔테른의 이름을 따서 붙였음) 모딜리아니 (1918 ~ 1984)는 아메데오의 누나인 마르가리타가 양육했다. 화가가 되어 고생만 하다 죽은 남동생의 인생이 싫었던 마르가리타는 조카딸에게 부모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유태인이라서 이탈리아 파시스트들에게 시달림을 받던 잔은 프랑스로 피신하기도 했다. 나중에 부모에 대해 알게 된 잔은 미술사를 연구하는 학자가 되어서 아버지 모딜리아니에 대한 자료를 모아 평전 ‘모딜리아니 : 인간과 신화’ (1959)을 펴냈다.

○ 화풍
모딜리아니는 폴 세잔와 툴루즈 로트렉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항상 인물만을 그렸는데 파리의 뒷거리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 및 여성의 나체 등을 즐겨 그렸다. 그의 인물화는 가늘고 긴 목이나 달걀 모양의 얼굴을 가는 선으로 둘러 독특한 기품과 아름다움을 나타냈다.
모딜리아니는 총 314점의 작품을 남겼다.
그는 대부분 인물화를 그렸다. 그의 화풍은 1914년을 기준으로 전기와 후기로 나뉘는데, 초기의 작품은 다소 조화롭고 고전적인 느낌을 가진다면 후기의 작품들은 인물의 표현이 다소 비정상적이며 형태도 단순화되었다. 그 이유로는 그가 회화를 잠깐 접고 조각을 했을 때 고대 에투르스크 조각과 아프리카 원시조각의 형태를 접했고 거기에 흥미를 느껴 인물을 세밀하게 그리기보단 내면적인 특징을 그리는데 힘썼기 때문이다.
주요작품으로 ‘첼로 연주자 : The Cellist’ (1909), ‘여인의 두상 : Head of a Woman’ (1911), ‘섕 수틴의 초상 : Portrait of Chaim Soutine’ (1916), ‘붉은 누드 : Red Nude’ (1917), ‘잔 에뷔테른의 초상 : Portrait of Jeanne Hébuterne’ (1918),
‘꽃 파는 소녀’, ‘문지기의 아들’, ‘벌거벗은 에리부리’, ‘폴 기용의 초상’ 등이 있다.
- 모딜리아니의 초상화
모딜리아니가 그린 초상화의 특징은 인체를 보이는 그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화가의 감정을 담기 위해서 독특한 표현을 구사했다는 것이다. 간의 작품 활동을 통해 수많은 인물들을 그려냈던 모딜리아니. 그는 모델들을 화폭 속에서 독특한 표현으로 재탄생 시키면서, 자신?4년간의 작품 활동을 통해 수많은 인물들을 그려냈던 모딜리아니. 그는 모델들을 화폭 속에서 독특한 표현으로 재탄생 시키면서, 자신만의 독자적인 ‘모딜리아니상’을 완성시켰다. 그리고 이 같은 독자적인 양식을 구축한 데는 인물을 그리면서 그가 지닌 몇 가지 독특한 표현을 구사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 인체 표현
모딜리아니는 단순화된 형태와 부드러운 선으로 인체를 표현했다. 큰 타원형으로 몸을 그리고 , 작은 타원형의 얼굴을 그린 것이다. 그리고 길고 가느다란 목을 그리면 기본 형태가 갖춰진다. 즉 모딜리아니는 작품의 기본 윤곽을 단순한 형태로 그렸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형태를 감싸고 있는 부드러운 선의 연결을 통해 우아한 고전미를 발하게 된다. 이처럼 부드러운 선의 연결을 통해 우아한 고전미를 발하게 된다. 이처럼 부드러운 선의 표현을 이탈리아 르네상스기 미술의 특징이기도 한데, 그가 화가로 입문할 당시 익혔던 고전 미술에 대한 감동이 잠재적으로 반영되고 있는 것이다.
- 목의 표현
모딜리아니가 탄생시킨 인물상의 특징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목의 표현이다. 모딜리아니는 길고 가느다란 목을 그렸다. 이는 그가 그린인물들이 갖는 독창적인 이미지였다. 길고 가는 목의 표현은 원시미술을 비롯한 다양한 양식의 영향에서 비롯되는데, 그 중에서 인체를 길게 왜곡시켜서 그린 매너리즘 화가들의 영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이기도 하다. 다양한 양식의 영향으로 완성된 모딜리아니상은 가면처럼 평면적이고 도식화된 양식으로 자칫 차갑고 무표정해 보이기 쉽지만, 작품 속의 인물들은 마치 살아 있는 듯 저마다의 개성을 과시하고 있다. 이처럼 모딜리아니의 작품 속에서 살아 있는 감정이 느껴지는 것은 그가 모델을 그리면서 그만의 독특한 분위기와 심리적인 상태를 잘 그려냈기 때문이며, 그 심리 상태는 눈을 통해서 잘 나타난다.
- 눈의 표현
모딜리아니가 그린 눈은 정상적인 모습이 아니라 조금씩 비뚤어져 있다. 하지만 모딜리아니는 모델의 심리상태와 모델과 자신의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서 눈이나 표정 등에 섬세한 정성을 기울였다.

○ 작품
모드 Abrantes의 초상화, 1907, 헥트 박물관
폴 기욤, Novo Pilota, 1915, Musée de l ‘Orangerie
신부와 신랑, 1915
자크와 베르테 리 키츠, 1916
장 콕토, 1916, 헨리와 로즈 펄맨 컬렉션, 장기 대출에 프린스턴 대학교 미술관
레온 인덴 바움, 1916, 헨리와 로즈 펄맨 컬렉션, 장기 대출에 프린스턴 대학교 미술관
초상화 베아트리체 헤이스팅스, 1916
초상화 Moise Kisling, 1915
마담 키슬링, 1917
예술가의 아내의 초상 (Jeanne Hébuterne), 1918
Jeanne Hébuterne with Yellow 스웨터, 1918
디디 헤이든, 1918, 센터 조르주 퐁피두
자화상, 1919 년, 캔버스에 유채, 현대 미술관, 상파울루, 브라질
아기와 집시 여자, 1919, 국립 미술관
작은 농부, 1918, 테이트 리버풀
젊은 여자의 초상화, 1918, 뉴 올리언스 미술관
Buste de femme, 알 수 없음, 1919 년 이전, Museo Nacional de Bellas Artes (부에노스 아이레스)
베아트리체 헤이스팅스, 1916–1919,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
팬을 가진 여자, 1919, 도난 Musée d’ Art Moderne de la Ville de Paris
앉아있는 Jeanne Hebuterne의 초상화, 1918, 이스라엘 박물관, 예루살렘
Blaise Cendrars의 초상화, 1917, 갤러리아 사바 우다, 토리노
- 누드
아이리스 트리, 씨. 1916 년 코 톨드 미술관
리클라이닝 누드, 1917,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앉아있는 누드, 1917, 앤트워프 왕립 미술관
디반에 앉아 누드 ( “La Belle Romaine”), 1917
나체상, 1917,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
블루 쿠션에 누드, 1917, 국립 미술관
누 쿠셰, 1917–18
앉아있는 누드, 1918, 호놀룰루 미술관
- 회화
모자를 쓴 여자의 머리 (1907)
Juan Gris의 초상화 (1915)
미술상 폴 기욤의 초상화 (1916)
Jean Cocteau의 초상화 (1916)
누 쿠셰 (1917-1918)
앉아있는 누드 (1918 년경) 호놀룰루 미술관
Jeanne Hébuterne의 초상화 (1918)
팬을 가진 여자 (1919), 파리 현대 미술관
초상화 마리오 스 바르 보글리스 (1920; 모딜리 아니의 마지막 그림)
- 조각품
모딜리아니의 조각품 27개가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Tête (1910/1912)
여자의 머리 (1910/1911)
머리 (1911–1913)
머리 (1911–1912)
머리 (1912)
로즈 Caryatid (1914)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