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2월 20일, 미국의 탐험가 로버트 피어리 (Robert Edwin Peary, 1856 ~ 1920) 별세
로버트 에드윈 피어리 (Robert Edwin Peary, 1856년 5월 6일 ~ 1920년 2월 20일)는 미국의 해군·북극 탐험가이다. 북극 탐험에 뜻을 품고 여러 번 그린란드를 조사하였다. 1898년 이후에는 북극 탐험을 행하였다. 1909년 인류 최초로 북극의 극지에 성조기를 꽂았다고 알려져 왔으나, 1996년에 발견된 피어리의 새로운 일지를 검토해본 결과 북극점에서 40km 못미친 지점까지만 도달한 것으로 밝혀졌다. 북극점에 도달하지 못한 것과는 상관없이 탐험으로 북극이 깊은 바다라는 것과 북극에 대한 여러 가지 사실이 밝혀졌다. 저서로 《북극》, 《북쪽의 빙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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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버트 에드윈 피어리 (Robert Edwin Peary)
.출생: 1856년 5월 6일, 미국 펜실베이니아 크레손
.사: 1920년 2월 20일, 미국 워싱턴 D.C.
.국적: 미국
.직업: 탐험가, 군인
.부모: 찰스 N. 페어리, 메리 P. 페어리
.배우자: 조세핀 디비치 페어리 (1888년–1920년)
.자녀: Marie Ahnighito Peary, 칼리 페어리, 로버트 페어리 주니어, 로버트 에드윈 페어리 주니어
.수상: Hubbard Medal, Patron’s Gold Medal, Cullum Geographical Medal 등
미국의 탐험가이자 군인이다.
대중들에겐 탐험가로만 알려져 있지만, 토목 기사이자 미합중국 해군 장교며 공병소장까지 진급해 제독이 되는 등 군 이력으로도 꽤 성공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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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및 활동
펜실베이니아 주(州) 갤릿친 출생으로 1881년 해군 공병병과 장교로 임관, 니카라과 운하의 조사대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 후 그린란드를 거쳐 북극을 탐험했고, 1898∼1902년에는 북위 84 °17′, 1905∼1906년에는 북위 87 °6’에 도착했으며, 1909년 매튜 헨슨 및 4명의 에스키모인들과 함께 컬럼비아 곶을 떠나 동년 4월 6일 드디어 북극점에 도달하였다고 주장했으나, 훗날 거짓임이 드러났다.
피어리는 얼음 바다를 걸어서 북극점에 도달한 탐험가라고 전해졌었으나, 이제는 거짓말에 온갖 범죄를 저지른 게 드러나 명성을 잃었다.
그가 북극점 도달에 성공했는지 여부는 그가 탐험에 성공했다고 밝힌 순간부터 논란이 되었다.
뉴욕 헤럴드는 프레데릭 쿡이 북극점에 먼저 갔다고 주장했고, 뉴욕 타임스는 피어리를 편들었으나 결국 다수결 선거 끝에 135대 34로 피어리가 승리했다. 하지만 그 증거가 명확하지 않았다. 그는 북극점에 도달했다는 경도와 방위각을 측정하지 않았고, 또한 그의 항해일지는 너무 깨끗했다. 그가 당시 공개한 부분은 중요한 부분도 없고 깨끗했다.
또한 단 며칠 사이에 70km를 헤쳐갔다는 게 말이 되느냐는 의심도 받았다. 이는 피어리 탐험대가 이전에 하루 3km 이하에서 멈칫거리며 느리게 횡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쿡의 집념어린 반격으로 피어리는 제독이 됐다는 것 빼곤 온갖 소송과 비난에 시달렸으며, 늘그막에는 온갖 위장병으로 고생하다가 생을 마감했는데, 숨지기 며칠 전까지 혼수상태에서 “아냐. 난 북극점에 갔단 말이야.”라고 중얼거릴 정도로 비난에 크게 고생했다.
그러다가 1996년에 발견된 피어리의 새로운 일지를 검토한 결과, 북극점에서 40km 못 미친 지점까지만 도달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피어리의 탐사를 지원해줬던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피어리의 일지를 재검토한 결과 피어리가 북극점에 도착한 것이 맞는지 의심스러운 정황이 발견되었고, 일지에 나오는 기상정보를 통해 피어리의 위치를 다시 계산한 결과 피어리의 최종 도착점은 북극점인 북위 90도가 아닌 북위 89도 57분으로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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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피어리는 북극점을 항해와 도보로 향했고, 피어리 본인은 자신이 도착한 지점이 진짜로 북극점이라고 믿었으므로 고의로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었으며, 당시 기준으로는 가장 북극점에 가까이 도달한 것이 맞다. 하지만 북극점에 도달하지 못한 것은 확실하다. 이 때문에 피어리의 북극점 탐험 성공을 대대적으로 기사화했던 뉴욕 타임스는 진상이 밝혀지자 79년 만에 정정보도를 냈다.
게다가 엄밀히 말해서 피어리는 ‘해당 지점에 도달한 최초의 사람’도 아니었다. 그의 길을 안내해 준 이누이트 안내인들이 먼저 해당지점을 밟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대한민국이나 많은 나라에서는 강대국 미국 국적이라는 점으로 인해 대부분 기사나 뉴스, 사전에서도 로버트 피어리를 북극점에 최초로 도달한 인간이라고 설명하고 있었다. 최근에는 미국도 미국 망신이라고 피어리보다 헨슨이 더 위대하다 하자 한국에서도 피어리에 대한 위인전도 이젠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공교롭게도 피어리를 괴롭히던 인물이 바로 로알 아문센과 같이 벨지카 호에 탔던 프레드릭 쿡이었는데, 서로가 북극점에 먼저 갔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논란이 거셌다.
로버트 피어리의 명성이 크게 실추된 것은 그가 북극점에 실제로 도달하지 못했던 데다가 심각한 인종차별주의자였고, 무엇보다 인격때문이다.
그동안 피어리가 북극점에 갔다고 써 놓은 위인전이 많아서 개정이 안 되고 있는 경우도 있으며, 그가 북위 89도 57분까지만 도달했다고 명시한 기사에도 그가 북극점에 최초로 간 사람이라고 적어놓는 경우도 있다.
확실하게 말하자면 로버트 피어리는 북극점에 도착한 것이 아니라 북극점에 가까이 갔을 뿐이다.
게다가 미국 국적으로 아주 가까이 간 것도 피어리보다 더 먼저인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바로 매튜 헨슨(Matthew Henson, 1866~1955)이었다. 흑인인 그는 어릴 적부터 마차 및 개썰매 조종에 뛰어났고 이누이트어와 사냥도 잘했다. 피어리의 조수로서 활약하면서 당시 1시간이나 먼저 북극점에 도달했음에도, 이걸 질투한 피어리가 숨기고 자신이 먼저 갔다고 조작했다. 나중에 피어리는 “헨슨이 먼저 간 것”이라고 하던 쿡에게 “그가 흑인이라 잘 몰라 북극점에 가지 못했다.”고 했다.
흑인이라서 인종차별을 당하고, 모든 공로를 부정당했으며, 그냥 조수로서 도왔다고 알려진 그는, 빈민굴에서 어렵게 살아가다가 세상을 떠났다. 다만 흑인들에게는 피어리보다도 헨슨이 진정한 위인이라고 존경받았으며 빈민굴 속에서도 그는 우대받았다고 한다.
비록 생전의 헨슨은 업적을 전혀 인정받지 못하고 빈민굴에서 어렵게 살다가 생을 마감했지만, 나중에라도 그의 업적이 발굴되고 정식으로 인정받음은 불행 중 다행이다. 또한 그에 대한 만화나 위인전, 영화, 다큐멘터리도 90년대 와서 쏟아지면서 위인으로 재평가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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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onors
– Medals
American Geographical Society, Cullum Geographical Medal (1896)
American Geographical Society, Charles P. Daly Medal (1902)
National Geographic Society, Hubbard Medal (1906)
Royal Geographical Society of London, special great gold medal
National Geographic Society of Washington, the special great gold medal
Geographical Society of Philadelphia, great gold medal
Chicago Geographical Society, Helen Culver medal
Imperial German Geographical Society, Nachtigall gold medal
Royal Italian Geographical Society, King Humbert gold medal
Imperial Austrian Geographical Society
Hungarian Geographical Society gold medal
Royal Belgian Geographical Society gold medal
Royal Geographical Society of Antwerp gold medal
Spanish Campaign Medal
Honorary degrees
Bowdoin College – Doctor of laws
Edinburgh University – Doctor of laws
Honorary memberships
New York Chamber of Commerce honorary member.
Pennsylvania Society Honorary member
Manchester Geographical Society Honorary membership
Royal Netherlands Geographical Society of Amsterdam Honorary membership
– Other
Royal Scottish Geographical Society, special trophy, a replica in silver of the ships used by Hudson, Baffin, and Davis.
Grand Officer of the Legion of Honor, awarded 1913
In Arlington National Cemetery on April 6, 1922, the Admiral Robert Edwin Peary monument was unveiled by his daughter, Mrs. Marie Peary Stafford. Numerous government officials, including President Harding and Former United States Secretary of the Navy Edwin Denby were in attendance.
On May 28, 1986, the United States Postal Service issued a 22 cent postage stamp in his and Matthew Henson’s hon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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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어리의 반인륜적인 행위
로버트 피어리는 이누이트들과 교역을 트며 북극 탐험에 이들을 이용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피어리는 이누이트들을 가혹하게 부려먹었으며 심지어 여섯 명의 이누이트들을 속여 1887년 미국 뉴욕으로 데리고 왔다. 당시 언론에서는 이누이트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보였고, 구경 인파도 20,000명이나 되었을 정도. 피어리에 속아 뉴욕으로 온 여섯 명의 이누이트 중에는 카누크와 미닉 부자도 있었다. 그러나 갑작스런 기후변화로 이들 중 4명이 목숨을 잃는다. 미닉의 아버지도 그 중 하나다.
그러나 이들의 장례가 어떻게 치뤄졌는지는 알 수 없다. 자연사박물관 직원 보아스는 에스키모인들의 유해를 병원으로 후송해 해부하였고 급기야는 자연사박물관에 에스키모관을 설립하기에 이르렀다는 사실만 있을 뿐이다. 그 후 보아스는 ‘중앙 에스키모’란 논문을 출간 (1888년), 미국 인류학계로부터 크게 인정받는다.
어릴 적부터 미국에서 살다보니 전통적인 이누이트 생활방식을 잊어버려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미닉은 미국에서 인종차별로 고생을 하면서 나무꾼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날 우연히 자연사박물관을 관람하다가 자신의 아버지가 해부, 박제되어 전시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큰 충격을 받은 미닉은 피어리를 찾아가서 아버지의 시신을 돌려달라고 애원했지만 냉대를 당하고 만다.
오히려 피어리는 박제 관련 수익을 나에게도 내놓으라고 자연사 박물관에 소송을 제기했다가 패소하는 추태까지 벌였다.
낯선 미국에서 나무꾼으로 연명하며 힘겹게 살아가던 미닉은 1918년 28살 젊은 나이에 질병으로 사망하였다.
미닉은 자신의 아버지의 시체와 자신의 유골을 고향으로 돌려보내달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누구도 미닉의 유언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1970년대에 들어서 자연사박물관에 전시된 미닉의 아버지와 다른 이누이트의 시체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자는 움직임이 일었지만 미국 자연사박물관측은 이를 거부하였다.
그러다 1993년이 되어서야 마침내 자연사박물관에서 박제되어 있던 미닉의 아버지를 포함한 4구의 시신은 화장이 되었고 미닉의 유골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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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