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3월 12일, 니콜라옙스크 사건 / 니항 사변 (Nikolaevsk Incident, Nikolaevsk massacr)에 한인 독립군과 러시아 붉은 군대가 일본군 전멸
니콜라옙스크 사건 / 니항 사변 (Nikolaevsk Incident, Nikolaevsk massacr)은 1920년 3월 12일부터 1920년 6월 1일 사이에 러시아 빨치산과 한인 독립군이 러시아 하바롭스크주 니콜라예프스크에서 백군을 소탕한 후 일본인들을 학살한 사건이다.
트랴피친이 빨치산을 일으켜 한인 독립군과 연합하여 니콜라예프스크에서 러시아 백군과 일본군을 물리쳤다. 이 과정에서 많은 민간인 일본인들과 러시아인들이 죽임을 당했다.

– 니콜라옙스크 사건 / 니항 사변 (Nikolaevsk Incident)
.날짜: 1920년 6월
.위치: 러시아 니콜라옙스크나아무레
내용: 한인 독립군과 러시아 백군이 연합해 일본군 학살
야코프 트랴피친이 지휘하는 붉은 군대 소속 러시아인 아나키스트 · 볼셰비키 · 최대강령주의자, 중국인 아나키스트, 민족주의 · 볼셰비키 · 아나키스트 성향의 한국인 게릴라에 의한 대규모 학살, 테러 및 약탈로 인해 니콜라옙스크에서 수천 명이 살해되었고 지역은 폐허가 되었다.
또한 도시의 여성 (소녀, 부인)에 대한 잔인한 대규모 강간살인도 벌어졌다.
도발 주체가 트랴피친 측인지 일본군인지에 대해서는 소련-러시아 학자들 사이에서 엇갈리나, 트랴피친이 대규모 학살을 벌여 수천명의 사망자를 낸 것은 학계 내 ‘많은 역사학자들이 동의’하고 있으며 트랴피친 측의 대규모 파괴와 학살에 대해서는 역사학계에서 논란의 여지가 없다. 대한민국의 독립기념관에서도 ‘일리야 박 (Илья́ Пак)의 독립군’이 반혁명파 러시아인을 살해한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살해된 민간인들은 대부분 사회민주주의자들이었다.
“아무르 지역에 주둔하는 백군 군대는 이반 칼미코프의 지휘를 받는 우수리 카자크 부대로 수감자들을 잔인하게 처리하는 것으로 악명 높았고, 이는 적군들 (Rads’)의 복수심을 부추겼다. 양측은 잔학행위를 저질렀지만, 그러나 1920년 니콜라옙스크 마을의 파르티잔의 파괴는 무고한 민간인들에게 얼마나 가학적이고 잔인하게 행해졌는가? 남성, 여성, 어린아이들 – 이해를 할 수가 없다. 그들은 모든 사람들을 “백군 수비대” 범주에 포함시켰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사회민주주의자였고 그들의 의지에 반하여 징용되었다. 반면에 모든 파르티잔들이 짐승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것은 공정하다. 사촌 중 한명은 딸아이와 함께 집에서 쫓겨났을 때 파르티잔이 어떻게 살 수 있게 도와줬는지를 이야기했다. 나중에 그는 체카에 의해 체포될 뻔 한 것을 구했고, 또 다른 파르티잔은 그녀가 중국 포함 (砲艦)을 타고 탈출하도록 주선했다.” _ 엘라 루리 와이즈웰 (Ella Lury Wiswell)의 해제 (Gutman, Anatoli i I Akovlevich, Wiswall, Ella Lury 번역과 해제, Pierce, Richard A 편집, The destruction of Nikolaevsk-on-Amur : an episode in the Russian Civil War in the Far East, 1920 ,Kingston, Ont, Fairbanks, Alaska, Limestone Press, 1993, xi)
일본은 러시아 혁명에 반대하여 1918년 1월에는 해군을, 6월에는 육군을 출병시켜 블라디보스토크항을 점령했는데, 이때 제1차 세계대전의 연합국 13개국 군대가 러시아의 동서남북으로 진주하고 있었다.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이 연합하여 작전을 하기도 했다. 일본은 1918년에는 12,000명을, 한국에서 3·1 운동을 봉쇄한 뒤 1919년에는 3개 사단을 넘는 군대를 블라디보스톡 지역에 파병하였다. 일본군은 1922년 패퇴할 때까지 많을 때는 75,000명의 병력을 진주시켜 러시아 혁명군과 싸우며 시베리아에 일본 괴뢰 정부를 수립할 망상을 불태웠다.

- 경과
트랴피친 부대와 한인 독립군은 백군을 물리치고 일본군에게 항복을 요구하지만 일본군은 1920년 3월 12일 기습 공격을 감행하였다. 하지만 트랴피친 부대는 일본군을 패퇴시켰다. 5월 25일 일본군은 약속을 어기고 다시 공격을 시작하였고, 러시아 빨치산과 한인 독립군은 철군하면서 시가지에 불을 지른 뒤 일본인 포로와 러시아 백군 전원을 살해하였다.1920년 5월 30일부터 6월 1일까지 트랴피친은 니콜라예프스크시의 대부분을 불태웠고 러시아 백군, 포로로 잡혀 있던 일본 군인들과 일본 군인들의 가족들, 그리고 일본 주민들까지 살해했다. 이 과정에서 니콜라예프스크 주재 일본 영사 부부를 비롯한 일본인 민간인들이 희생되었다. 이것을 니항 사변(尼港事變)이라고 부른다.
- 결과
니항 사변에서 트랴피친의 학살 행위는 빨치산 부대 내에서도 반발을 가져와서 부대 내에서 트랴피친에 반대하는 봉기가 일어났다. 봉기의 결과 트랴피친을 비롯한 부대 지도자 7명이 체포되어 러시아 사할린주 인민 재판소의 결정에 따라 사형을 선고받았고 즉시 집행되었다. 봉기는 한인들의 니항 부대에게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니항 부대는 트랴피친의 처형을 두고 찬성과 반대, 두 진영으로 분열되었다.

- 의의와 평가
니항 사변에 대한 평가는 상반된다. 먼저 3월 12일에 벌어진 일본군의 선제 공격이 일본의 배신적 행동이었다는데는 모두가 동의한다. 그러나 니항 사변에서 일어난 학살극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의견이 있다.
먼저 트랴피친을 무정부주의자로 비판하며 사건의 모든 책임을 트랴피친에게 묻는 입장이 있다. 이 입장의 논리는 트랴피친이 부르주아 및 소부르주아 가족과 우익 활동가들뿐만이 아니라 소비에트 권력의 지지자들까지 희생시켰다고 비판했다. 이는 후에 소비에트의 공식 입장이 되었으며 러시아인, 한인, 사회주의자들 대부분이 어느 정도 이런 입장을 지지하였다.
다음으로 트랴피친을 옹호하는 입장이 있다. 니항 부대에 참가했던 최진일은 일본 영사관으로 후퇴한 일본군과 일본 주민들을 살해한 것은 트랴피친 부대가 아니라고 했다. 최진일에 따르면 일본군 장교들이 중국 군함으로 가서 대포를 빌려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중국 함대는 이를 거절했고 결국 일본군과 중국 군함 사이에 무력 충돌이 발생했으며 이에 격분한 중국군이 일본 영사관에 포격을 했다는 것이다.
또한 최진일은 니콜라예프스크가 전소된 것에 대해서도 일본군의 대포 사격으로 화재가 일어나 모두 불타 버렸다고 했다.
니항 사변은 빨치산 부대 내의 분열뿐만 아니라 국제적 문제로 확장되었다. 일본군은 니항 사변에 대해 강력히 규탄하며 시베리아 재출병에 대한 명분을 얻게 되었다. 일본은 1920년 4월 4일 밤 기습적으로 러시아 연해주 공격을 감행했다. 러시아 연해주에 있는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것이 공격 이유였다.


참고 = 위키백과, 세계한민족문화대전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