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년 3월 11일, 아르헨티나의 작곡가 “탱고의 혁명가” 아스토르 피아졸라 (Ástor Pantaleón Piazzolla, 1921 ~ 1992) 출생
아스토르 판탈레온 피아졸라 (스: Ástor Pantaleón Piazzolla, 1921년 3월 11일 ~ 1992년 7월 4일)는 아르헨티나의 탱고 음악 작곡가이자 피아노 연주자, 반도네온 연주자이다.

– 아스토르 피아졸라 (Ástor Piazzolla)
.본명: Astor Pantaleon Piazzolla
.출생: 1921년 3월 11일, 아르헨티나 마르델플라타
.사망: 1992년 7월 4일(71세),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국적: 아르헨티나
.부모: 빈센트 피아졸라, 아순타 마네티
.배우자: 로라 에스칼라다 (1988 ~ 1992년), 데데 울프 (1943 ~ 1966년)
.자녀: 다이아나 피아졸라, 다니엘 피아졸라
.직업: 반도네온 연주가, 피아니스트, 작곡가
.장르: 탱고
.활동 시기: 1937 ~ 1990년
.악기: 반도네온, 피아노
자신만의 탱고 스타일로 독창적인 아르헨티나 탱고의 시대를 열었다.
그의 고향에서 그는 “위대한 아스토르” (스: El Gran Ástor)란 칭호를 듣고 있으며, “탱고의 혁명가”로도 불린다.

○ 생애 및 활동
1921년 3월 11일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주의 마르델플라타에서 이발사 아버지와 재봉사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당시엔 여느 가난한 남미 사람들과 마찬가지였다.
아스토르의 아버지도 아메리칸 드림의 부푼 꿈을 안고 가족들을 데리고 뉴욕으로 이주했다.
피아졸라 일가의 동네는 아메리칸 드림에 실패한 다국적 건달들이 모여 살던 우범지대 할렘가였다.
이곳에서 피아졸라의 아버지는 건달들이 드나들던 이발소를, 어머니는 그 건달들의 애인이 드나드는 미용실을 운영하면서 생계를 꾸렸다.
아메리칸 드림에 실패한 사람들, 거친 주먹들이 활보하는 뉴욕의 뒷골목. 피아졸라 음악 속의 슬픔과 쓸쓸함에는 어린 시절의 영향이 스며있다.
피아졸라 역시 주먹이었다. 헤비급 세계 챔피언으로 등극한 권투선수 로키 마르시아노가 이끄는 건달 패거리 중 한 명이었다.

뉴욕 뒷골목의 험악한 경험이 훗날 정신적인 강인함을 선사했노라고 피아졸라는 말했다.
피아졸라가 함께 어울려 다니던 건달들의 절반은 캘리포니아의 알카트라즈 감옥에서, 나머지 절반은 뉴욕의 싱싱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다.
피아졸라는 그렇게 거친 곳에서 어떻게 음악을 하게 됐을까.
탱고 마니아였던 피아졸라의 아버지는 아스토르 피아졸라에게 반도네온을 선물로 주어 연습시켰다.
열 살 때부터 반도네온을 연주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당대 탱고 스타들에게 아들을 소개하려고 했다.
탱고의 악기 반도네온은 아코디언을 베이스로 나왔기 때문에 아코디언과 비교된다.
아코디언은 반도네온에 비해 다소 크고 목에 걸고, 악기자체를 가슴과 복부에 붙여서 연주한다.
처음에는 아코디언도 단추식이었으나 19세기 중반이후 건반식으로 계량됐다.
오늘날은 연주가 용이한 건반식이 다수다.
음색은 악기가 다소 커서인지, 유순하고, 빠른 템포로 연주하면 잔음이 좀 남는 특징이 있다.
반도네온에 비해 스타카토가 덜 되는 편이다.
아코디언은 반도네온에 비해 역사가 훨씬 길고 세계각처에 널리 보급돼 있다.

한편 반도네온은 1830~40년경 독일의 하인리히 반트가 아코디언과 콘세르티나라는 악기로부터 개량하여 이름을 자신의 이름을 따 반도네온(bandoneon)이라 명명했다.
원래는 파이프오르간처럼 종교음악을 연주하기 위한 악기였다.
피아졸라의 반도네온 연주에 페르난도 수아레스 파스의 바이올린, 파블로 치글러의 피아노가 함께한 연주다.
반도네온을 연주하던 아스토르 피아졸라가 세상으로 나가게 된 계기가 있었다.
가장 큰 기회는 당시 뉴욕에 상륙한 최고의 탱고 보컬 카를로스 가르델을 통해 찾아왔다.
가르델은 피아졸라의 연주에 “꼭 스페인 갈라시아 지방 사람들이 연주하는 것 같다”면서 매력을 느꼈다.
가르델은 마침 제작중이던 자신의 세 번째 영화 ‘당신이 나를 사랑하게 되는 날’에 아스토르를 신문배달 소년으로 출연시켰다.
이 영화에 아스토르 피아졸라는 25달러를 받고 출연했다고 한다.
가르델 덕분에 피아졸라는 영화에서 반도네온 솜씨를 뽐낼 수 있었다.
피아졸라는 카를로스 가르델을 따랐다.
자신의 콘서트에 피아졸라를 자주 초대한 가르델은 1935년 전미 투어에도 피아졸라를 데려가고 싶어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 열네 살밖에 안된 어린 아들을 멀리 보낼 수 없었던 부모의 반대로 가르델은 아스토르 대신 젊은 유망주 호세 코르파스 모레노를 대리고 떠났다.
이들은 모두 불의의 비행기 사고를 당해 콜롬비아에서 한줌의 재가 됐다.

1969년 TV에 출연한 피아졸라는 이렇게 말했다.
“가르델의 죽음은 정말 치명적인 슬픔으로 다가왔습니다. 만일 그때 제가 함께 갔다면 지금쯤 저는 반도네온이 아니라 구름 위에서 하프를 연주하고 있었을 겁니다.”
카를로스 가르델이 어린 피아졸라에게 미친 영향이 없었다면 오늘날 피아졸라를 생각하기 힘들었을 것 같다.
가르델과 피아졸라, 두 사람의 인연은 매우 짧았고 세대도 달랐지만 이들의 만남은 탱고 역사에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가르델의 음악에 대한 직관과 재능, 무엇보다 탱고에 대한 원천적인 사랑은 어린 아스토르의 음악적 감수성을 성숙시키는 자양분이었다.
20세기 최고의 라틴 가수라 불리던 가르델은 정통 클래식이 아닌 대중음악을 주도하면서 음악을 통해 사회 계급을 대변한 진실한 포르테냐, 즉,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토박이였다.
지금도 아르헨티나에서는 카를로스 가르델의 탄생일인 12월 11일을 ‘탱고의 날’로 제정해 그의 예술과 업적을 기리고 있다.
이번에는 플루트와 기타의 연주로 피아졸라의 명곡을 들어본다.
피아졸라 ‘탱고의 역사’ 플루트에 패트릭 갈루아, 기타에 외란 쇨셔다.

1937년, 전운이 감도는 가운데 가족과 함께 다시 아르헨티나로 돌아온 피아졸라는 아니발 트로일로가 이끄는 탱고 앙상블에 들어가 반도네온 솔리스트로 활약했다.
피아졸라는 마침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방문한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루빈슈타인의 소개로 아르헨티나 작곡가 알베르토 히나스테라의 제자가 된다.
피아졸라는 이후 6년 동안 스트라빈스키, 라벨, 버르토크 등을 공부하며 정통 클래식을 섭렵했다.
1953년 히나스테라의 권유로 출전한 아르헨티나 작곡 콩쿠르에서 우승한 피아졸라는 프랑스 정부가 주는 장학금으로 파리에서 유명한 여성 작곡가이자 지휘자 나디아 불랑제를 사사할 기회를 얻는다.
피아졸라가 클래식과 탱고를 잇는 계기였다.
클래식이라는 코스모폴리탄의 대양에 떠 다니게 된 피아졸라.
그러나 그는 한편으로 심한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있었으니, ‘탱고 연주자’라는 과거 경력 때문이었다.
그러나 스승은 ‘모든 좋은 음악은 평등하다’라는 사실을 일깨워줬다.
선배 작곡가들의 어설픈 모방보다는 차라리 탱고를 자신의 스타일로 개척하는 게 가치있는 일이라 충고했다.
라벨을 찾아갔던 거슈윈도 마찬가지 아니었던가.
“누굴 모방하지 말고 너 자신의 음악을 해라…” 정말 중요한 교훈이었다.
18개월간의 공부를 마치고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돌아온 그는 다시 아니발 트로일로 밴드의 반도네온 주자로 활동하면서 탱고 안에서 다양한 가능성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진보적인 연주는 아르헨티나 내 정통파들에게 반감을 샀다.
그러다 일이 터졌다. 어느 날 피아졸라는 한 캬바레에서 클래식의 화성을 즉흥적으로 탱고에 가미해 봤다.

그러자 함께 연주하던 동료들이 연주를 멈추고 럭비선수처럼 몰려와서는 피아졸라를 미친 사람으로 몰아세웠다.
견디지 못한 피아졸라는 결국 자신만을 위한 밴드를 결성한다.
이것이 바로 ‘누에보 탱고’의 시작이었다.
1960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킨테토 누에보 탕고 (Quinteto Nuevo Tango, 탱고 5중주단)을 결성하고부터는 누에보 탕고 (영어판)라 불리는 독창적인 아르헨티나 탱고의 시대를 열었다.
심장마비로 쓰러지기도 했던 그는 완전히 건강을 회복한 후 유럽으로 이주를 결심했다.
1973년 경부터 유럽을 주무대로 삼았고, 방송용 소곡들을 작곡했는데 저 유명한 ‘리베르탱고’도 이때 작곡됐다.
이탈리아 외에도 피아졸라는 네덜란드, 스페인, 프랑스 등을 돌아다니며 큰 성공을 거뒀다.
1975년 중반에 들어서서 피아졸라는 다시 새로운 시도를 시작한다.
이번에는 전자 음악에 도전한 것이다.
재즈 피아니스트 칙 코리아의 전자음악과 재즈의 퓨전에 영향을 받은 그는 신시사이저와 전자 악기를 이용한 실험을 했고, 1975년 9월에는 아르헨티나로 귀국해 새로 전자 8중주단을 결성했다.
신시사이저, 전자 오르간, 일렉 기타 멤버들을 포함하고 즉흥 연주를 허용하는 등 다양한 시도를 한 이 8중주단은 논쟁을 불러일으키면서 보수적인 기존 팬들로부터 거하게 욕을 들어먹기도 했지만, 공연은 성공적이었다.
이후 북미, 유럽을 돌며 연주와 창작에 전념하던 피아졸라는 1977년까지 전자음악, 락 등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500 모티바시오네스’ 등의 명곡을 발표했지만, 1977년을 기점으로 다른 멤버와의 갈등 등으로 8중주단 역시 와해됐다.
새로운 5중주단은 전자음악을 버리고 다시 어쿠스틱한 실내악으로 돌아오는 등 다양한 편성으로 활동했다.

1980년, 피아졸라는 다시 해외 활동을 위해 파리로 다시 이주, 5중주단과 함께 유럽 순회 공연을 하는 등 공격적인 활동을 펼쳤다.
80년대 후반에는 영미권 활동에 주력하여 몽트뢰, 몬트리올 재즈 페스티벌에도 참여하는 등 피아졸라는 여러 장르에서 환영받는 명실상부한 국제 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1986년부터 1988년에 걸쳐 피아졸라와 프로듀서 킵 한라한의 ‘아메리칸 클라베 3 부작’을 발매했다.
[Tango: Zero Hour], [The Rough Dancer and The Cyclical Night], [La Camorra] 앨범이었다.
고된 일정을 소화하다 1988년 심장수술을 받는 등 건강이 다시 악화되기 시작했다.
이즈음 6중주단을 다시 결성했으나, 이 당시의 음악은 건강 악화의 영향으로 우울한 분위기가 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6중주단은 이전 못지 않은 활발한 활동을 펼쳤지만 1990년 8월 5일, 피아졸라는 뇌출혈로 몸 오른쪽이 마비되어 즉시 귀국, 병원으로 이송됐다.
뇌출혈로 쓰러진 후, 오랜 투병 끝에 폐렴과 장출혈 등 합병증으로 1992년 7월 4일 사망하였다. 향년 71세. 탱고를 클래식의 반열로 올려 놓은 주인공의 마지막이었다.

○ 작품 목록
Adiós Nonino (1960)
Tiempo Nuevo (1962)
La Guardia Vieja (1966)
ION Studios (1968)
María de Buenos Aires (1968)
Roma (1972)
Libertango (1974)
Reunión Cumbre (Summit) (1974) with Gerry Mulligan
With Amelita Baltar (1974)
Buenos Aires” (197)
Il Pleut Sur Santiago (1976)
Suite Punta del Este (1982)
Concierto de Nácar (1983)
SWF Rundfunkorchester (1983)
Live in Wien Vol.1 (1984)
Enrico IV (1984)
Green Studio (1984)
Teatro Nazionale di Milano (1984)
El exilio de Gardel (soundtrack, 1985)
Tango: Zero Hour (1986)
The New Tango (1987) with Gary Burton
Sur (1988)
La camorra (1989)
Hommage a Liege: Concierto para bandoneón y guitarra/Historia del Tango (1988) with Liège Philharmonic Orchestra
conducted by Leo Brouwer. The concerto was performed by Piazzolla with Cacho Tirao, the Historia by Guy Lukowski and Marc Grawels.
Bandoneón sinfónico (1990)
The Rough Dancer and the Cyclical Night (Tango apasionado) (1991)
Five Tango Sensations (1991) with Kronos Quartet
Original Tangos from Argentina (1992)
The Central Park Concert 1987 (1994)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