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 12월 28일, 나석주 (羅錫疇, 1892 ~ 1926) 의사가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 투척 후 자결
1926년 12월 28일은 나석주 (羅錫疇, 1892년 2월 4일~ 1926년 12월 28일) 의사가 동양척식주식회사 (일명 ‘동척’)에 폭탄 투척 후 자결한 날이다
1908년 12월 28일 일제는 조선의 경제권 이득 착취와 토지, 자원 수탈을 위해 동양척식회사를 만들었다. 동양척식회사는 1905년 을사늑약으로 조선통감부가 설치된 지 3년 후, 인도제국을 식민지화 했던 영국의 동인도회사를 본떠서 만든 국책회사였다.
동양척식회사는 조선으로부터 출자 받은 토지를 매입하는 등 막대한 면적의 삼림지를 매입해 조선에 이주한 일본인이나 친일파 등 조선인 대지주에게 넘기는 등 조선식산은행과 더불어 일제 강점기 조선 경제 착취의 대표적인 기관이었다. 조선의 토지를 떡 주무르듯 해 앞잡이 노릇을 한 친일파와 일본인들에게 농토를 고스란히 넘겨주는 등 경제침탈이 본격적으로 행해진 원흉이었다. 1917년까지 토지수탈을 목적으로 한 일본인 이주, 농업경영, 토지개량이 주력사업이었다면 1930년대 이전까지는 금융사업을 확장했고 1930년대 이후에는 광업부문을 확장해 전쟁 수행을 위한 군수공업을 지원했다.
조선인 소작인들에게 5할이나 되는 고액의 소작료를 요구하여 막대한 이득을 취했으며, 또한 춘궁기에 양곡을 빌려주었다가 2할 이상의 이자를 받기도 했다. 등골이 휘는 고리대로 농민들은 고향을 등지고 만주나 연해주 등으로 떠나기도 했다.
동양척식회사의 수탈에 집안 땅을 모두 빼앗기고 소작농으로 전락했던 독립운동가 중 한 사람이 나석주 의사였다. 1892년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난 나석주는 백범 김구 선생이 설립한 양산학교에서 공부하며 독립운동가로 성장했다.
황해도 일대의 부호들의 집을 털어 독립운동 군자금을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송금하는 활동을 펼쳤으며 평산의 경찰 주재소를 습격해 경찰과 면장을 죽이고 중국으로 피신했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무국장인 김구의 경호관을 지내다가 약산 김원봉이 창설한 의열단에 가입했다.
그리고 동양척식주식회사가 만들어진지 18년 만인 1926년, 나석주는 조선 경제침략의 전초기지인 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를 폭파하기 위해 나섰다.
바로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생일날인 1926년 12월 28일 오후 2시께 나석주는 거사를 감행했다. 먼저 식산은행에 폭탄을 던지지만 불발되자, 동양척식주식회사로 향했다. 신문지로 숨긴 권총으로 1층에서 일본인을 사살한 후 2층 사무실을 돌며 총알을 쏟아내고 폭탄을 투척했다. 그러나 이 역시 터지지 않았고, 일본 경찰의 추격을 피해 도망하던 중 자신이 지녔던 총을 가슴에 쏴 서른넷의 생을 마감했다.
○ 나석주 (羅錫疇, 1892 ~ 1926) 의사의 생애 및 활동
나석주 (羅錫疇, 1892년 2월 4일~ 1926년 12월 28일)의 본관은 나주 (羅州), 일명 마중달 (馬仲達)로 황해도 재령 출신이다. 아버지는 나병헌 (羅秉憲)이며, 어머니는 김씨 (金氏)이다.
16세에 재령군 북율면 진초리의 보명학교 (普明學校)에 입학하여 2년간 수학하고, 그 뒤 농사를 지었다.
1910년 일제가 우리나라의 주권을 강탈하자 이에 비분강개하여 주권 회복에 신명을 바칠 것을 맹세하였다. 그리하여 23세에 만주로 건너가 북간도 나자구 (羅子溝)의 독립군 양성학교인 무관학교 (武官學校)에 입학하여 군사 훈련을 받았다.
1919년 국내에 들어와 3·1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그 뒤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사리원으로 옮겨 표면적으로는 정미업을 경영하면서 동지들을 규합하여 독립운동을 계획하였다.
1920년 김덕영 (金德永) · 최호준 (崔皓俊) 등 50명의 동지들과 항일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무기를 구입한 뒤 군자금 모금 활동, 친일파 숙청 등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사리원 최병항 (崔秉恒)과 안악 원형로 (元炯潞) 등의 부호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건네 받아 중국 상해에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송금하였다. 그리고 대한독립단의 단원들과 합세하여 악질 친일파인 은율 군수를 처단하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이들의 활동이 봉산 ·사리원 ·황주 ·재령 ·안악 등 황해도 일원에 확대되자, 일본 경찰은 감시를 강화하였다. 이에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 김구 (金九)가 지휘하는 경무국 경호원으로 임명되어 임시정부와 정부 요인의 경호를 담당하였다.
1923년 정식 군사 교육을 받기 위해 중국 허난성 (河南省) 한단 (邯鄲)의 중국 육군군관단강습소 (陸軍軍官團講習所)에 입교하여 사관 훈련을 수료하였다. 이듬해 중국군 장교로 임관되어 중국군으로 복무하다가 1925년 상해로 돌아와 임시정부에서 활동하였다.
1926년 톈진 [天津]에 본부를 두고 활동하던 항일 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 (義烈團)에 입단하였다. 그런데 그 해 6월 톈진에 체류하고 있던 민족 지도자 김창숙 (金昌淑)으로부터 경제 침탈의 총본산인 동양척식주식회사 (東洋拓殖株式會社) ·조선은행 ·조선식산은행 (朝鮮殖産銀行)을 폭파, 파괴하여 일제의 경제침탈을 응징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김창숙 ·유우근 (柳佑瑾) ·한봉근 (韓鳳根)·이승춘 (李承春) 등과 협의, 구체적인 거사계획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1926년 12월 중국인 노동자 마중덕 (馬中德)으로 변장한 뒤 인천으로 잠입하였다.
조선식산은행을 폭파하기 위해 폭탄을 투척하였으나 불발로 실패하였다. 곧이어 동양척식주식회사를 공격하였다. 그곳에서 권총을 사용하여 여러 명의 일본인을 사살하였으나 역시 투척한 폭탄이 불발하여,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일본 경찰의 추격을 받자 소지하였던 권총으로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중상을 입고 쓰러졌다. 일경이 즉시 병원으로 긴급 이송하여 이름을 묻자, 자기의 성명과 의열단원임을 밝히고 순국하였다. 후에 장남 나응섭 (羅應燮)이 백운학 (白雲鶴)으로 개명하여 중국으로 탈출, 임시정부에 보고하였다.
- 상훈과 추모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