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 3월 31일, 중국의 정치가•사상가 캉유웨이 / 강유위 (康有爲, 1858 ~ 1927) 별세
캉유웨이 / 강유위 (康有爲, 1858년 3월 19일 ~ 1927년 3월 31일)는 중국 청나라 때부터 중화민국 때까지의 사상가이자 정치가이다.

– 캉유웨이 / 강유위 (康有爲)
.출생: 1858년 3월 19일, 청나라 광둥성 남해현 (南海縣) 단조(丹灶) 소촌 (蘇村)
.사망: 1927년 3월 31일(69세), 중화민국 교오상부 (膠澳商埠, 現 산둥성 칭다오시)에서 병사
.성별: 남성
.국적: 청나라 → 중화민국
.학력: 진사시
.직업: 정치가
.경력: 중국국민당 고문
.부모: 강달초 (康達初), 노씨 (勞氏)
.형제: 강유부 (康有溥, 동생)
.배우자: 장운주 (張雲珠), 양수각 (梁隨覺), 하전리 (何旃理), 市岡鶴子, 요정징 (廖定徵), 장광 (張光)
.종교: 유교 (성리학)
.의원 선수: 無
.정당: 보구대청황제회 (保救大淸皇帝會, 1899년 ~ 1907년) → 중화제국헌정회 (中華帝國憲政會, 1907년 ~ ?)
본명은 강조이 (康祖詒), 자 (字)는 광하 (廣廈), 호는 장소 (長素), 명이 (明夷), 경생 (更生), 서초산인 (西樵山人), 유존수 (游存叟), 천유화인 (天游化人)이다.
량치차오 (양계초)와 함께 중국 근대 정치사상가로 분류된다.

○ 생애 및 활동
청말민초의 정치가이자, 사상가로 변법자강운동을 통해 중국을 개혁하려고 했던 인물이다.
청나라가 망하고 중화민국이 건국된 후에는 입헌군주론자로서 복벽운동을 펼쳤다.
한국식 독음은 강유위다.
본명은 강조이 (康祖詒), 자 (字)는 광하 (廣廈), 호는 장소 (長素), 명이 (明夷), 경생 (更生), 서초산인 (西樵山人), 유존수 (游存叟), 천유화인 (天游化人)이다.
- 출생
캉유웨이 (康有爲)는 1858년 3월 19일, 청나라 광둥성 남해현 (南海縣) 단조 (丹灶) 소촌 (蘇村)에서 출생했다.
어려서부터 조부모 슬하에서 자랐으며, 지역의 명망있는 학자인 주차기로부터 21세까지 성리학, 양명학을 공부하였다.
주차기의 문하에서 나온 뒤에 요평을 만난 것을 계기로 공양학을 공부했다.

- 진사 이전
광둥성 난하이 현 출신으로 지방에서 살며 공양학과 당시 유럽의 근대화에 대해 공부하였다.
또한 일본의 메이지 유신과 입헌군주제의 과정도 관심있게 지켜보게 된다.
성리학의 문제점에 비판적이었던 그는 1883년부터 한 마을에서 전족을 폐지하는 시도를 한다.
고향에 사숙 만목초당을 열고 여기서 량치차오 등 제자를 배출하였다.
고향에 사숙 (私塾) 만목초당 (萬木草堂)을 열고 량치차오 등의 제자를 배출하는 한편 과거에 응시하여 1895년 진사가 된다.
청일전쟁 패배로 인해 양무운동이 실패로 돌아가고 정국이 혼란에 빠지자, 청나라 개혁을 위한 상소를 꾸준히 올렸고 이로인해 광서제의 눈에 띄게 된다.
양무운동 (洋務運動)은 19세기 중후반에 청나라에서 일어난 근대화(자강) 운동으로, 한때 동아시아 최강대국으로 군림하던 청나라가 쇠망할 대로 쇠망하여 모두의 예상을 깨고 아편전쟁에서 영국에게 패배하고, 태평천국의 난의 여파로 외적/내적으로 군벌과 내전 상태에 치닫게 된 자국을 근대화시켜, 열강이 될 수 있도록 하는 데 주목적이 있었다.
1860년 제2차 아편전쟁의 패배 이후 열강의 요구로 외교 아문이 성립되는 시점을 시작으로 보고, 1895년 청일전쟁에서의 패배를 기점으로 끝난 것으로 본다. 이 시기에 일시적으로 청 제국의 통치력이 회복되었기에 이 시기의 회복을 당시 황제의 연호를 따 동치중흥(同治中興)이라고도 한다. 이 시기에 정국이 혼란에 빠지자, 캉유웨이는 청나라 개혁을 위한 상소를 꾸준히 올렸고 이로인해 광서제의 눈에 띄게 된 것이다.
결국 1897년 독일 제국의 키아우초우 점령 사건 등으로 청나라의 주권에 상당한 위협이 가해지게 되자, 1898년 6월 11일 광서제는 직접 캉유웨이를 정권에 적극 등용하면서 개혁정책을 펼치게 된다.

- 무술변법
진사가 된 캉유웨이는 이후 여러차례 청나라를 개혁할 내용을 담은 상소를 올렸으며, 대신들의 집요한 방해공작끝에 겨우 당시 황제였던 광서제의 눈에 띄게 된다.
그 중 중요한 것이 1898년의 ‘변법자강책 (變法自彊策)’이다.
광서제는 당시 서태후의 손아귀에 휘둘리고 있었고상황을 타개하고 개혁 정치를 추구하기 위해 캉유웨이의 갖가지 정책을 지지하게 된다.
캉유웨이는 언론이 인간의 의식을 지배하는 세력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상소를 신문에 싣는 방법으로 지지자들을 확보하였다.
또한 <일본변정고>, <이대피득변정기> 등의 책을 출판하여 메이지 유신, 표트르 대제의 개혁을 청나라의 개혁방향으로 제시하였으며, 보국회를 조직하여 지지자들을 정치세력으로 만들었다.
그는 자신이 만든 보국회를 서구식 의회 민주주의의 씨앗이 될 것으로 기대하였다.
하지만 보국회가 정치개혁을 원하는 민중들의 지지를 받자, 서태후는 이를 해산시켜버렸다.
1898년에는 광서제의 지지를 받기도 하였으나, 쿠데타 음모가 원새개의 밀고로 발각되어 캉유웨이의 정치개혁은 실패하였다.
캉유웨이의 동생은 처형되었으며, 그를 동정하던 관리들도 파면이나 처형을 당하였다.
캉유웨이 자신도 양계초와 함께 중국을 탈출하여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캉유웨이의 변법자강책에는 과거 제도 개혁, 탐관오리 혁파, 각종 경제 개혁 등이 담겨 있었고, 무술변법을 통해 이중 일부를 실행에 옮기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변법은 광서제의 권위에만 의존했으며, 결국 서태후 등 반개혁파에게 패배해 외국으로 망명을 가는 결과로 끝이 난다.
이로 인해 무술변법은 ‘100일 변법’이라고도 불린다.

- 망명 이후
망명 이후 그는 제자 량치차오와 다른 길을 걷는다. 당시 쑨원 등 공화제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지만, 캉유웨이는 끝까지 입헌군주제를 고수한다.
신해혁명이 성공한 이후 캉유웨이의 정치적, 사상적 입지는 좁아진다.
1914년에 중국으로 돌아온 캉유웨이는 위안스카이의 제정에 반대하며 장쉰 등과 함께 선통제를 복위시키기 위해 복벽운동을 일으킨다.
복벽운동으로 선통제를 복위시키고 입헌군주제 국가를 만들려 했으나, 내부에 호응 세력이 적었고, 쑨원과 군벌인 돤치루이 등은 이를 반역이라고 여기며 지지도 얻지도 못하고 오히려 군벌들에게 대패하며 장쉰의 피난으로 실패로 돌아간다.
- 별세
말년의 캉유웨이는 중국의 전통문화를 보존하기 위한 활동과 철학 작업에 몰두하다가 1927년 칭다오에서 별세한다.
- 사후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이 묘를 파헤쳐 시신을 꺼내 거리에 끌고 다녔고, 강유위의 시신의 머리를 잘라 따로 청도시 (靑島市)의 조반유리 (造反有理) 전람회에 보내 전시했다.
이후 행적이 불명해 지금까지도 찾지 못했다.
○ 평가
유학자이자 반동적 복벽파이긴 했지만 의외로 반자본주의자였으며 사회주의와 기술주의를 지지한 인물이였다고 한다.
중국의 전통문화와 철학, 정치 시스템을 지지한 보수주의자이자, 동시에 자본주의를 비도덕적이라고 생각해 유교적 이상에 기반한 사회주의를 지지한 독특한 인물이였다.
유교와 개화를 타협시키려 한다는 점에서 박은식과 비교되기도 한다.

○ 저서
《신학위경고 (新學僞經考)》, 《공자개제고 (孔子改制考)》, 《대동서 (大同書)》, 《일본변정고》, 《아대피득변정기 (俄大彼得變政記)》 등의 저서를 남겼다.
특히 《일본변정고》는 광서제가 항상 옆구리에 끼고 다닐 정도로 애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학위경고 (新學僞經考)》(1891)
《춘추동씨학 (春秋董氏學)》(1987)
《공자개제고 (孔子改制考)》(1898)
《논어주 (論語注)》(1902)
《맹자미 (孟子微)》(1901)
《대동서 (大同書)》(1902)
《일본변정고》
《아대피득변정기 (俄大彼得變政記)》
《실리공법전서 (實理公法全書)》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