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년 3월 28일, 로마 제국의 제18대 황제 푸블리우스 헬비우스 페르티낙스 (Publius Helvius Pertinax, 126 ~ 193) 암살
푸블리우스 헬비우스 페르티낙스 (Publius Helvius Pertinax, 126년 8월 1일 ~ 193년 3월 28일)는 로마의 군사 지휘관 및 193년의 3개월 간 로마제국의 18대 황제 (재위 193년 1월 1일 ~ 193년 3월 28일)이며, 콤모두스를 이어 혼란스러운 다섯 황제의 해 기간 첫 황제가 되었다.
콤모두스 사후 등극한 로마 제국의 황제, 해방노예의 아들로 태어나 개인이 가진 뛰어난 능력만으로 출세해 원로원 의원과 집정관까지 지냈던 사람으로, 자신의 조력자 프라이토리아니를 개혁 대상으로 삼고, 국고 적자 매꾸기 수단으로 전임자가 한 악폐도 한 탓에 암살됐다

– 푸블리우스 헬비우스 페르티낙스 (Publius Helvius Pertinax)
.휘: 푸블리우스 헬비우스 페르티낙스
.존호: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헬비우스 페르티낙스 아우구스투스
.출생: 126년 8월 1일, 이탈리아 알바폼페이아
.사망: 193년 3월 28일 (66세), 로마 / 매장지: 로마
.부친: 헬비우스 수케수스
.배우자: 플라비아 티티아나
.황제재위: 193년 1월 1일 ~ 193년 3월 28일 (3개월)
.전임: 콤모두스 / 후임: 디디우스 율리아누스
해방 노예의 아들인 페르티낙스는 교사로 일하다 뒤에 군대에 들어가 시리아, 브리튼, 도나우 강, 라인 강 등지에서 부대를 지휘했다.
그는 169년 게르만족이 대대적인 침입을 해왔을 때 명성을 날렸다. 원로원 의원이 되고 레기온 (보병 군단)의 지휘를 맡게 된 그는 곧이어 모이시아 · 다키아 · 시리아를 관할하는 사령관으로 승진했다. 그러나 프라이펙투스 프라이토리오 (근위대장)인 페렌니스가 상승가도를 달리는 동안 뒤에 황제가 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함께 콤모두스 황제의 총애를 잃었다.
콤모두스 황제의 치세가 끝날 무렵 그는 로마의 집정관이 되었고 세베루스는 도나우 강 상류에서 군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콤모두스가 192년 12월 31일 암살당하자 원로원은 새벽이 오기도 전에 회의를 열고 당시 제국의 장군인 페르티낙스를 황제로 선포했다. 그는 일반 경비뿐만 아니라 군사비의 지출도 억제하려 했으나 호응을 얻지 못했고 제위에 오른 지 채 3개월도 못 되어 근위대장 레토가 이끄는 군인들에게 암살당했다.
뒤이어 같은 해에 황제의 자리에 오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칙령을 내려 피살당한 통치자를 기리는 성스러운 장소를 마련하고 거기에 페르티낙스의 이름을 붙였다.

○ 생애 및 활동
– 출생과 성장
이탈리아 알바폼페이아에서 해방노예의 아들로 태어나 교사 생활을 하다가 30대에 군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일개 병사에서부터 사령관에 이르기 까지 로마군 계급을 차근차근 올라갔고 시리아, 브리타니아, 게르마니아의 라인강, 도나우강 전선 등에서 복무했다. 이후 169년 게르만 족의 침입을 막아내면서 실력을 인정받아 결국에는 원로원 의원직을 거머쥐고 시리아, 다키아, 모이시아 일대를 지휘하는 사령관에 올랐다. 하지만 이때 근위대장인 페렌니스에 밀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함께 뛰어난 장군임에도 콤모두스에게 총애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원로원 내부에서도 명망이 높았기에 콤모두스 말 집정관까지 지냈다.
– 황제 등극
192년 12월 31일 분노를 샀던 콤모두스는 죽었지만 공모 주도자들인 라이투스와 에클렉투스에게는 계획을 성공적으로 끝내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고, 그들은 황제의 시신을 싸구려 침대보로 싸서 빨랫감으로 위장해 믿을 만한 노예 두 명을 시켜 콤모두스가 그날 밤을 보냈던 장소에서 가지고 나가게 했다. 한편 라이투스와 에클렉투스는 로마 거리를 지나 명망이 높았던 페르티낙스의 집으로 향했다. 그들은 콤모두스가 죽었다는 사실을 페르티낙스에게 알리고 그에게 황제 자리를 맡아달라고 했다. 그러나 황제로 인정받으려면 근위대의 지원이 필요했는데 페르티낙스는 각각의 근위병에게 12,000 세스테르티우스를 주기로 하고 그들의 지원을 얻었다. 페르티낙스는 군대와 민중들의 호위를 받으며 어둑어둑한 거리를 지나 원로원 의원들이 모인 곳으로 갔다. 그곳에서는 원로원 의원들이 콤모두스를 맹렬히 비난하면서 소리치는 상황이었고 페르티낙스는 상징적인 의미로 한 번은 사양한 후 관례에 의해 모든 권한과 함께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받음으로써 황제로 선포되었다.
처음에는 전망이 밝은 것처럼 보였다, 새 황제는 별다른 반대 없이 국정 주도권을 장악했고 현명하게 통치를 해 나갈 듯했다. 그러나 고작 3개월 후에 그가 빠른 죽음을 맞이하면서 심각한 내란이 유발되었고, 이후 몇 년간 무려 4명의 후보가 제위를 놓고 각축전은 벌이기 시작했다. 혼란했던 69년과 마찬가지로 내전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국경 지역 주둔군의 힘이었다. 그러나 로마 제국 전역을 총괄하는 확고한 통치력을 거머쥘 만한 인물이 출연하기까지는 아직 4년이라는 시간이 더 흘러야 했다.

– 개혁의 실패와 죽음
페르티낙스는 능력이 뛰어났지만 확고한 정통성도, 확실한 지지세력도 없었으며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것을 바꾸려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능력과 지위만을 생각해 중요한 세력 기반들을 모두 놓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페르티낙스의 즉위는 사실 단독 근위대장 아이밀리우스 라이투스 (레토)의 도움이 있어서 가능했다. 하지만 그는 무일푼에서 제 힘으로 지금 자리까지 올랐다는 성공신화를 자랑스럽게 여겼고, 자신을 도와준 라이투스(레토)와 프라이토리아니를 질서 회복을 위해 개혁대상으로 선언하고 대립했다. 따라서 그는 무리하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즉위 직후부터 갈수록 비대해지는 프라이토리아니와 이들을 이끈 근위대장의 지나친 권력을 통제하려고 시도했다. 이 조치는 콤모두스 아래에서 피로감을 느낀 원로원과 일반 시민들의 호응을 얻었지만 프라이토리아니 내 군인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따라서 근위대는 이에 맞서 원로원 의원 중 한 사람을 황제로 선포했다. 그러나 군인들에게 황제로 선택된 당사자는 이 사실을 페르티낙스에게 알리고 로마를 떠나버렸다.
비슷한 시기에 황실의 자유민들, 즉 궁정 관리로써 행정의 많은 부분을 맡아서 보던 해방노예들이 횡령으로 고소되는 사태가 벌어지자 페르티낙스는 그들이 황실 재정의 부실을 초래했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이러한 조치 또한 원로원과 로마 시민들은 이를 반겼지만 페르티낙스는 근위대와 궁정 관리 양측의 반대에 부딪히는 아주 위험한 상황이 되었다. 여기에 더해 그는 콤모두스 시대의 악폐를 정리하고, 국고를 안정화시킨다는 이유를 들어 자신이 비난한 콤모두스가 한 것처럼 고위직을 비싼 돈을 매겨 팔고 그 수익으로 국고를 채우는 방식을 사용했다. 따라서 개혁대상으로 욕을 먹던 황궁 관료들과 큰 기대를 했던 원로원에서는 이런 페르티낙스의 인기가 추락할 수밖에 없었다. 또 그는 당시 존재하던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내 남성황족들을 적극 활용하지 않았고, 그들의 협력보다는 자신의 경험과 능력을 앞세웠다. 따라서 처남 콤모두스의 막장극에 질린 나머지 잠시 원로원을 떠났던 폼페이아누스, 어떻게든 정신상태 불안으로 광증이 심해진 처남을 돕기 위해 아내와 함께 황궁에 남아 도왔던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는 새황제 페르티낙스 정권에 도움을 주지 못했다. 즉, 페르티낙스는 콤모두스가 저지른 것을 수습하면서도 자신을 도울 수 있던 이들을 적으로 계속 돌리면서 실패할 수밖에 없는 길만 가고 있었던 것이다.
3월 초 페르티낙스가 오스티아에서 중요한 곡물 선적 상황을 시찰하고 있는 동안 심각한 쿠데타 기도가 있었는데 이 배후에는 근위대가 있었고 그들이 추대한 인물은 집정관 퀸투스 소시우스 팔코 (Quintus Sosius Falco)였다. 그러나 음모는 발각되었고 팔코는 사면받았지만 병사 몇몇은 처형되었다. 그러나 몇 주 후 근위대장 레토 주도로 일어난 쿠데타는 성공했다.
3월 28일 페르티낙스가 그날의 공식 일정을 취소하고 궁에 있었는데, 갑자기 300명의 군사들이 궁정 문으로 밀고 들어왔으며 보초를 서던 호위병들도 황실 관료들도 그들을 막지 않고 황제를 죽이라고 뒷통수를 쳤다. 이때 페르티낙스 황제 주위에 사람들은 그에게 달아나서 목숨을 보존하라고 권유했지만 페르티낙스는 그 자리에 남아 칩입자들에게 맞서는 용기를 보여주었고, 자신의 지위와 위엄으로 그들을 설득하고 진압하려고 했지만 모두 허사가 되었다.
페르티낙스가 말을 하던 도중 병사 한 명이 불쑥 튀어나오더니 “병사들이 보낸 칼을 받아라”라고 외치며 그를 칼로 내리쳤고 이에 다른 병사들이 가세하여 66세의 페르티낙스를 구타하여 죽였다. 그렇게 피폐한 제국 재정을 개선하고자 각종 경비와 군사 예산을 삭감하려던 것이 군의 반발을 사서, 결국 황제가 된지 불과 3개월도 되지 않아 다른 이들도 아닌 근위대에게 암살당했다. 그렇게 페르티낙스의 통치 기간은 고작 87일에 그치고 말았다. 그리고 제위는 돈으로 근위대의 지지를 얻은 원로원 의원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에게 넘어가고 만다.
이후 같은 해 황제 자리에 오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와 반대파들을 제거하고 난 뒤, 페르티낙스의 신원을 복구하여 정통성을 인정하고 살해자들을 처벌했다는 점이 그에게는 저 세상에서나마 그나마 위안.

○ 평가
페르티낙스를 옆에서 직접 지켜본 디오 카시우스의 말처럼 막장군주 콤모두스가 저지른 악폐를 정리하는데 최선을 다한 황제인 것은 맞지만, 지나치게 본인의 능력과 경험만을 앞세워 끝내 실패한 황제가 됐다.
이 사람은 오늘날 기준으로 보더라도 사회 밑바닥에서 최상류층까지 올라간 성공신화를 쓴 훌륭한 인물이다. 하지만 동시대 사람이자 원로원 동료였던 디오 카시우스를 비롯해 근현대 학자들의 주장처럼 그는 지나치게 자신의 능력과 경험을 앞세웠고, 정치력과 상황 파악능력이 분명 떨어졌다. 또 그 과정에서 너무 빠르고 급진적으로 문제 해결에 나선 탓에 몰락하게 됐다. 따라서 마키아벨리는 통치자가 설령 좋은 행동으로도 미움을 받지 않아야 하는 이유의 예시로 이 황제를 거론하기도 했으며, 디오 역시 페르티낙스의 인품과 성실함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콤모두스의 폭정을 막겠다면서 지나치게 개혁 속도를 올리고 다른 상황을 무시한 행태를 간접적으로 비판했다. 즉, 설령 좋은 의도로 개혁을 시도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어도 자신의 오판으로 미움을 받아 몰락했다고 평가받는다.
페르티낙스의 최대 실수로 지적받는 부분은 여러 가지가 거론된다. 그중 가장 먼저 이 사람이 간과한 부분은 콤모두스 시대와의 절연을 지나치게 원칙적이고 비타협적으로 전개한 나머지 100년을 지배한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즉 안토니네 가문 사람들을 활용하지도 않고 최대 개혁대상인 프라이토리아니와 황실관료들을 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거론된다. 이는 정통성이 없고 무력으로 상대를 찍어누르지도 않은 황제가 저지른 최대실수였다고 지적받으며, 그의 선량한 의도조차 안토니네 가문의 황금기를 그리워한 이들에게도 결국 미움을 받게 만들었다. 페르티낙스는 자신을 도와준 아이밀리우스 라이투스(레토)를 배제하거나 그들을 개혁대상으로 삼아 불도저처럼 밀어붙였다. 이는 과거 베스파시아누스가 오래된 친황실세력인 네르바 등을 활용한 전례나 네르바가 군부의 지지를 받는 트라야누스를 양자로 삼은 선례와 매우 대비된 행보였다.
당시 로마에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외손자로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폼페이아누스가 있었다. 페르티낙스에게 남성황족들은 공동황제 제도 등을 이용해 더 확고한 정통성을 만들 수 있는 최고의 카드였다. 특히, 루키우스 폼페이아누스는 폼페이아누스와 루킬라의 아들이었고, 이 청년의 부친 폼페이아누스는 은퇴 후 복귀하긴 했지만 여전히 원로원과 프라이토리아니, 속주총독들에게 차기 황제로 지지를 받고 있던 안토니네 집안 맏사위였다. 그런데 페르티낙스는 이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폼페이아누스나 온화한 성품의 올곧은 황족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의 협력을 요구했냐고 물으면 그것도 아니었다. 즉, 그는 정통성도 없고 제 힘으로 황제 자리를 차지한 황제가 아님에도 100년 넘게 로마를 지배한 안토니네 가문 사람들을 사실상 배제한 채 자신의 인기와 민중들의 기대, 지지 아래 무리하게 개혁을 추진했다.
다음으로 그가 저지른 실수는 자신의 즉위에 도움을 준 인사들을 개혁 대상으로 돌려버린 부분이다. 당시 프라이토리아니는 문제가 많았지만 콤모두스 암살을 주도한 라이투스는 당시 콤모두스 암살 직후 페르티낙스와 접근하고 그의 즉위에 힘을 실어줬다. 즉, 페르티낙스는 프라이토리아니 세력이 도움을 준 집단이었다. 하지만 페르티낙스는 정통성도 없이 이들의 지지로 즉위했음에도 자신의 우군을 오히려 개혁대상이자 적폐로 지목하고 대립했다. 또 페르티낙스는 국고를 벌충하는 과정에서 콤모두스가 모았던 막대한 재물을 경매로 풀었다고 해도, 자신이 그토록 비난한 관직 매매까지 한 탓에 그에게 기대를 했던 동료 원로원에게도 적극적 지지를 받지 못했다.
따라서 페르티낙스는 실패했고, 끝내 암살당하고 말았다.
“그는 폭 넓은 경험을 한 사람이었지만 모든 것을 한 번에 개혁할 수 없다는 것, 특히 국가가 회복되는 데는 시간과 지혜가 두루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ㅡ 디오 카시우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