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 3월 28일, 일본의 기독교 사상가 우치무라 간조 (内村鑑三, 1861 ~ 1930) 별세
우치무라 간조 / 우찌무라 간조 (内村鑑三, 1861년 3월 26일 – 1930년 3월 28일)는 일본의 개신교 사상가이다. 서구적인 기독교가 아닌, 일본인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가르침 즉, 일본적인 기독교를 찾고자 한 사상가로 평가받는다.
서구적인 기독교가 아닌, 무교회주의를 제창했다.
‘나는 왜 기독교인이 되었는가?’ (How I Became a Christian), ‘구안록’, ‘대표적 일본인’ 등의 저자이기도 하다.
– 우치무라 간조 / 우찌무라 간조 (内村鑑三)
.출생: 1861년 3월 26일, 일본 도쿄도
.사망: 1930년 3월 28일, 일본 도쿄도
.알려진 분야: 무교회주의
.묘지: 일본 도쿄도 다마 공동묘지
.학력: 삿포로 농학교, 홋카이도대학교, 앰허스트 대학
일본의 대표적인 기독교 사상가이자 사회 사상가. 메이지유신 100주년을 맞아 ‘일본 근대화의 발전에 기여한 20명’ 중 한 명으로 선정된 바 있다. 1877년 삿포로 농학교에 들어가 1881년 수석으로 졸업했고, 1884년 미국으로 건너가 펜실베이니아주립 지적장애인 시설의 간호부로 근무하다 이듬해 애머스트 대학교와 하트퍼드 신학교에서 공부했다. 1888년에 귀국하여 도쿄 제일고등학교의 교사로 재직하던 중 1891년 ‘교육칙어’에 대한 불경죄로 해직되었고, 이후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1897년에는 일본 최대 일간지 ‘만조보 : 万朝報’의 영문판 주필을 맡았으나,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고 언론사가 정부의 기관지로 전락하자 사직하고 만다. 이후 ‘동경독립잡지’와 ‘성서 연구’ 등을 통해 반전운동과 성서 연구에 매진하다 1930년에 세상을 떠났다.
“기독교 신앙의 유일한 근거는 성서일 뿐이며, 교회와 그 관습은 기독교를 담아내는 껍데기”라고 보았던 그는 무교회주의 기독교 사상가를 많이 길러내어 현대 일본 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김교신, 함석헌, 송두용, 최태용 등에게도 사상적 영향을 미쳤다. 저서로 ‘구안록 : 求安錄’ (1893), 영 문으로 쓴 ‘회심기 : How I Became Christian’ (1895) 외 다수가 있다.
○ 생애 및 활동
다카사키 번사 우치무라 요시유키의 장남으로 에도 고이시가와 (小石川)에서 태어났다. 미국 농학자인 윌리엄 스미스 클라크가 세운 삿포로농학교를 다니던 중 친구의 전도로 기독교인이 되었다. 대학생 시절 그는 친구들과 기도 모임을 구성하여 신앙생활했는데, 모임은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이 없는 민주적인 공동체였다. 이러한 새로운 신앙경험은 우치무라의 기독교 사상에 영향을 주었다.
대학교를 졸업한 1882년 우치무라와 친구들은 삿포로 독립교회를 통해 서구의 교회가 아닌 일본적 교회를 설립하고자 했다. 교회는 5명의 위원들에 의해 공동으로 운영되었는데, 일상적인 교회의 일은 그들이 함께 처리했고 그 외의 것은 언제나 투표로 처리했다. 또 교회의 회원은 의무적으로 교회를 위해서 일해야만 했다.
1884년 미국 애머스트 칼리지 3학년으로 편입하여 명예상을 받고 졸업한 뒤 하트포드 신학교에 진학하였으나 4개월만에 학업을 포기했다. 자신이 신학을 포기한 이유에 대해 “나는 더 이상 신학공부를 할 수 없게 되었다. 지난 3년 간의 극심한 정신적 긴장으로 신경이 불안정해지고 매우 심각한 만성 불면증에 시달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휴식이나 진정제, 기도도 효과가 없었고,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고향 땅으로 돌아가는 것밖에 없었다”라고 말했다. 결국 1888년 일본으로 귀국하였고, 도쿄에 있는 제일고등중학교 교원으로 취직하였다.
하지만, 1891년 일본 천황의 절대권력의 상징인 ‘교육칙어’ (敎育勅語)봉독식 때 예를 갖춰 인사를 하지 않았다는 ‘불경사건’으로 일본 천황을 숭배하는 존황파 (尊皇派)들에게 미움을 받아, 보복 테러의 표적이 되어 아내와 자식 그리고 직장을 잃었다. 우치무라는 교원으로 활동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나는 왜 기독교인이 되었는가?’ (How I Became a Christian), ‘구안록’ 등을 저술했다.
또한 ‘만조보’ 지의 기자와 월간지 ‘성서지’ 연구의 간행인으로도 일하는 등 바쁘게 활동했다. 1921년에는 도쿄의 한복판에서 일요일마다 로마서를 강의하여 수많은 청중들이 크게 감동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 연표
1861년 다카사키 하급 무사 우치무라 요시유키의 아들로 에도에서 출생
1877년 도쿄외국어학교에서 삿포로 농업대학에 관비생으로 입학, 기독교로 개종 (17세)
1881년 삿포로 농업대학 졸업 (21세). 훗카이도 개척사 어용 관직을 임명받음. 도내의 어업을 조사•연구하는 일에 종사. 친구들과 삿포로 그리스도교회를 건립하여 전도 활동에 힘씀.
1883년 훗카이도 개척사 어용 관직 사직. 아사다 다케라와 결혼하였으나 6개월 만에 이혼.
1884년 미국 유학길에 오름 (24세). 펜실베니아 주립 아동백치원의 간호인으로 근무. 뉴잉글랜드의 애머스트 대학에서 수학. 하트포드 신학교 입학. 4개월 간 신학 공부
1888년 일본으로 귀국 (28세). 니가타 현의 호쿠에쓰 가칸 학교에서 교장직을 맡음. 선교에 대한 그의 원칙과 서양 선교사들 사이의 불화로 교장직 사직. 제일고등중학교의 강사로 부임.
1889년 요코하마 가즈코와 결혼.
1891년 제일고등중학교 불경사건 (천황의 초상 옆에 걸어 놓은, 천황이 서명한 새로운 ‘교육칙어’ 사본 앞에 머리를 숙여 경의를 표하기를 거부한 사건)으로 교사직을 박탈당함. 아내와 사별.
1893년 <구안록> 출간
1894년 <전도의 정신> 출간. <지리 연구> 출간. <Japan and Japanese> 출간
1895년 <How I Became a Christian>출간
1897년 <번영을 위한 최상의 유물> 출간. ‘요로즈 쵸오호우’ 영문란 주필 역임 (37세)
1898년 ‘요로즈 쵸오호우’ (만조보) 주필 사임. 평론지 ‘도쿄 도쿠리츠잣시’ (동경독립잡지) 발행
1900년 ‘도쿄 도쿠리츠잣시’ 폐간. 월간지 ‘세이죠노겡쿠’ (성서지연구)를 창간, 30년간 문필 전도에 전력 (40세)
1903년 고우도쿠 슈우스이 등과 반전론 제창. ‘요로즈 쵸소호우’지의 객원직을 사임. 오직 성서 연구와 복음 전도에 힘씀.
1930년 도쿄에서 별세 (70세)
○ 신학
한국교회에서 우치무라 간조의 신학은 무교회주의라고 해서 불온시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는 무교회주의를 잘못 이해한 것으로, 무교회주의는 기존교회에 대한 반발이 아니라 성서의 권위를 존중한 복음주의이다. 교회가 아닌 성서가 기독교 신앙의 원천이라는 오직성서 (Sola Scriptura)이다. 그는 성서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는다고 고백하였으며, “나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말미암아 얻은 구원에 대한 감사일뿐이다. 그러니 나의 신앙은 낡았고 구식이다”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강조하였다. 그가 무교회주의를 주장한 이유도 기독교 신앙의 근거는 가시적인 교회 즉, 예배당이 아닌 성서뿐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우치무라 간조는 “기독교 신앙의 유일한 근거는 성서뿐, 교회와 그 관습은 기독교를 담아내는 껍데기”라고 하였다. 구안록에서는 죄인인 사람은 스스로 평안을 구할 수 없으나, 예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셨기 때문에 평안을 얻는다고 했다.
○ 한국 교회에의 영향
그에게 영향을 받은 제자로는 한국의 무교회주의 개신교 운동가인 김교신, 함석헌, 송두용, 최태용 등이 있다.
김교신은 1901년 4월 18일, 함경남도 함흥에서 아버지 김염희와 어머니 양신의 사이에서 태어난다. 어렸을 때 한학을 공부하고 함흥보통학교를 거쳐 함흥농업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뒤 1919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세이소쿠 영어 학교 (正則英語學校)에 입학했다. 1922년 도쿄고등사범학교 영문학과에 입학했으나, 지리 · 박물과로 전과하였고, 1927년에 졸업하였다. 도쿄 유학 당시 일본의 군국주의에 반대하고 성서 중심의 무교회주의를 주창하던 기독교 사상가 우치무라 간조 (內村鑑三)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귀국 후 당시 한국인 유학생으로서 이 강의에 참석 했던 김교신을 비롯하여 송두용, 유석동, 양인성, 정상훈, 함석헌 등은 조선성서연구회를 조직하여 조선을 성서 위에 세우기 위한 무교회주의 운동을 시작하였다. 김교신이 생각하는 기독교는 교회라는 조직과 그 속에서 유지되어 온 형식이 아닌, 예수와 성서 위에 세워진 조선을 위한 기독교 곧 선교사들의 사상적 지배에서 벗어나 한국인의 얼에 따른 기독교 사상을 생각하고 실천하는 기독교였다.
○ 저서
How I Became a Christian 『余は如何にして基督信徒となりし乎』나는 어떻게 크리스챤이 되었는가 (1986년)
Representative Men of Japan『代表的日本人』(1908年) 우치무라 간조의 인물 일본사 (조양욱 역, 아침바다, 2003년)
대표적 일본인 (기파랑, 2011년)
『基督信徒のなぐさめ』 – 1893年の内村鑑三の処女作。「無教会」という言葉が初めて使われた作品である. 岩波文庫(1976年)
『求安録』(1893年) 구안록 (포이에마, 2016년)
김유곤 옮김, 크리스챤서적, 2006년
ロマ書の研究 (1957) 우찌무라 간조의 로마서 연구 (김유곤 역, 크리스챤서적, 2002년)
一日一生 일일일생 (안진희 역, 홍성사, 2004년)
『内村鑑三所感集』소감 – 복음 그 진리와의 대화 (김유곤 역, 크리스챤서적, 2011년)
우찌무라 간조 회심기 : 내 영혼의 항해 일지 (양혜원 역, 홍성사, 2001년)
사랑의 샘가에서 (범우사 | 2013년)
내촌감삼 : 우찌무라 간조 성서주해 (바이블넷, 2013년)
– 참고서적
우치무라 간조, 신 뒤에 숨지 않은 기독교인, 양현혜 저,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2017년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간조, 스즈키노리히사, 소화, 1995년
우치무라 간조의 삶과 사상, 미우라 히로시 저, 오수미 역, 예영커뮤니케이션, 2000년
우찌무라 간조에게 배운다, 이사카와후지오 저, 김충손 역, 은혜미디어, 1996년
○ 평가
유영모 함석헌 김교신 안창호.. 그들에게 처음 예수의 ‘아름다운 민족주의’를 가르친 스승 우찌무라 선조가 있다.
많은 사람들은 우찌무라 간조의 사상의 실체에 대하여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단순히 ‘무교회주의자’ 또는 “일본 기독교 지도자” 정도로 치부하고 있다. 그러나 그를 이렇게 평하기에는 그의 사상의 폭이 너무나 방대하고 심오하여 그를 총체적으로 평가할 수가 없다. 오늘날 우찌무라 간조의 신앙과 사상은 일본에서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그 방대한 저서는 인간의 생명의 양식으로서, 인류의 신앙의 유산으로서 영원한 가치를 지닌다.
“안타깝게도 지금의 한국 교회는 세인들의 비난과 조소 속에서 휘청대고 있습니다. 병든 세상을 치유하여 새롭게 하며 바른 미래로 이끌어 가야 할 교회가 오히려 세상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이런 때에 우리의 이웃 나라 일본에서 바른 교회를 일구고,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을 세워 나가기 위해 고민하며 살았던 우찌무라 간조의 삶과 사상을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은 큰 의미를 갖습니다.” (김진홍 목사, ‘다시, 우찌무라 간조를 생각한다’ 중에서)
참고 = 위키백과, 교보문고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