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 12월 3일, 프랑스의 영화 감독•각본가 장뤽 고다르 (Jean-Luc Godard, 1930 ~ 2022) 출생
장 뤽 고다르 (Jean-Luc Godard, 1930년 12월 3일 ~ 2022년 9월 13일)는 프랑스, 스위스의 영화 감독, 영화 각본가, 영화 평론가이다. 1960년대 프랑스의 영화 운동인 누벨 바그의 대표적 인물 중 한 명이다. 자기 영화를 전적으로 담당하는 작가로서, 고다르는 프로듀서, 시나리오 작가, 대본 작가를 겸임하며, 편집까지 스스로 담당하기도 했다. 가끔씩 단역으로 자기 작품에 출연하기도 했으며 내레이션을 맡기도 했다.
2022년 9월 13일, 스위스 자택에서 조력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향년 91세.
고다르 감독이 사망하자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프랑스의 ‘국보’가 사망했다며 애도했다. 영화감독 대런 아로노프스키는 트위터를 통해 “고마워요, 마에스트로”라고 언급했으며, 티에리 프레모 칸영화제 집행위원장은 “슬프고 슬프다. 고다르의 사망은 엄청난 슬픔”이라고 언급했다.
누벨바그의 마지막 생존자 고다르가 떠나면서 위대한 한 시대가 막을 내렸다.
– 장 뤽 고다르 (Jean-Luc Godard)
.출생: 1930년 12월 3일, 파리 7구
.사망: 2022년 9월 13일, 스위스 홀르
.국적: 프랑스, 스위스
.직업: 영화 감독, 영화 평론가, 각본가, 배우
.제작사: 지가 베르토프 집단
.배우자: 안 비아젬스키 (1967 ~ 1979년), 아나 카리나 (1961 ~ 1967년)
.활동: 1954년 ~ 2022년
.데뷔: 1954년 영화 ‘콘크리트 작전’
.학력: 소르본 대학교 (인류학 / 중퇴)
○ 생애 및 활동
부유한 파리지앵 가정에서 태어난 고다르는 부유층 자제였다. 하지만 타고난 반항아였다. 파리 소르본대학을 중퇴한 뒤 그는 파리 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서 영화 공부를 시작했다.
장 뤽 고다르 (Jean-Luc Godard)는 에릭 로메르, 프랑수아 트뤼포, 클로드 샤브롤, 자크 리베트처럼 영화 평론가로서 경력을 시작하였다.
주로 <가제트 뒤 시네마>, <카예 뒤 시네마>, <아르>에 글을 기고했다. 동시에 스위스의 그랑드디상스 댐 건설에 관한 다큐멘터리인 <콘크리트 작전 : Opération béton (1954)>, 모파상에 영감을 받아 예산 없이 찍어낸 <아양떠는 여자 : Une femme coquette (1955)>, 에릭 로메르와 함께 멋부린 문체로 쓴 <모든 청년들은 파트리크라고 불린다 : Tous les garçons s’appellent Patrick 또는 샤를로트와 베로니크 : Charlotte et Véronique>, 프랑수아 트뤼포가 촬영하고 고다르가 이미지를 편집한 <물의 이야기 : Une histoire d’eau (1958)>, 마지막으로 <샤를로트와 그녀의 정부 : Charlotte et son jules (1958)> 같은 16mm 단편을 찍기도 했다.
1959년, <네 멋대로 해라>의 촬영과 함께 장편 영화를 찍기 시작한다. 이 영화는 큰 성공을 거둠과 동시에, 누벨 바그의 시조격 영화 중 하나로 자리매김한다. 1960년대에 고다르는 일 년에 여러 편의 영화를 찍으며, 여러 기획을 진행한다. 1960년, 고다르는 알제리 전쟁에 관한 영화 <작은 병정 : Le Petit Soldat>과 뮤지컬에 대한 경의를 담은 영화 <여자는 여자다 : Une femme est une femme>를 찍는다. 이후 고다르는 매춘을 하는 젊은 여성에 관한 영화 <자기만의 인생 : Vivre sa vie (1962)>, 전쟁에 관한 신작 <기관총 부대 : Les Carabiniers (1963)>, 영화계를 다룬 영화 <경멸 : Le Mépris (1963)>을 찍는다. 고다르는 1964년 <국외자들 : Bande à part>과 <유부녀 : Une femme mariée>를 찍으며 영화 활동을 이어간다. 1965년, 고다르는 SF 영화 <알파빌, 레미 코숑의 기이한 모험 : Alphaville, une étrange aventure de Lemmy Caution>을 감독하며, 그 다음으로 많은 전문가들이 그의 걸작이라고 평가하는 로드 무비 <미치광이 피에로 : Pierrot le Fou>를 찍는다. 이후 고다르는 청춘들에 관한 영화 <남성 여성 : Masculin féminin>, <메이드 인 USA : Made in USA>, 다시 매춘이라는 주제를 다룬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두 세가지 것들 : Deux ou trois choses que je sais d’elle>, <중국 여인 : La Chinoise (1967)>, <주말 : Week-end (1967)> 을 찍는다.
이후 고다르는 일류 영화인으로서, 지식인 계층과 예술계를 이끄는 인물 중 한 명이 된다. 1968년, 그의 몇몇 이전 영화에서 이미 예견된 5월 사태는 기존 영화 체계와의 단절의 기회였다. 고다르는 정치적으로 급진적이 되며, 소외당한다. 고다르는 장피에르 고랭과 함께 정치 영화를 만들고자 시도하며, 지가 베르토프 집단이라는 집단 필명하에 영화를 제작한다. 이 시기 고다르의 영화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1974년부로, 고다르는 동거녀 안마리 미에빌과 함께 비디오 촬영을 실험하며, 텔레비전 매체를 통하여 작업하며, 영화와는 거리를 둔다.
고다르는 1980년대 <도망쳐라 (인생) : Sauve qui peut (la vie)>으로 영화계로 복귀한다. 이후 그는 마치 1960년대처럼 영화계의 중심으로 돌아온다.
1980년대 말, 고다르는 영화의 영화적인 역사를 구성하고자 시도한 <영화사 : Histoire(s) du cinéma>라는 제목의 영화-에세 연작 제작에 몰두하며, 1998년 완성하게 된다. 2000년대, 고다르는 <사랑의 찬가 : Éloge de l’amour (2001)>, <우리의 음악 : Notre musique (2004)>, <필름 소셜리즘 : Film Socialisme (2010)>과 같은 영화를 통하여 작품 활동을 계속한다. 또한 고다르는 파리 조르주 퐁피두 센터에서 전시를 열기도 했다. 고다르는 가장 야심적으로 계획한 전시를 결국 단념했지만, 원 전시 계획의 축소판은 라는 제목으로 전시되었다.
장 뤽 고다르는 1965년 <알파빌>로 베를린 영화제 황금곰상을 수상하였으며, 두 은곰상 (<네 멋대로 해라>로 감독상, <여자는 여자다>로 심사위원 그랑프리)을 수상했다.
고다르는 또한 1982년 베네치아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 영예상 (경력상)을 받았으며, 1983년 <카르멘이라는 이름 : Prénom Carmen>으로 황금사자상 작품상을 받았다. 이외에도, 고다르는 2014년 <언어와의 작별 : Adieu au langage>로 칸 영화제 심사위원상을 받았으며, 1987년과 1998년 세자르 영예상을 두 번 받았고, 2010년 자신의 전체 경력으로 오스카 영예상을 받았다. 2018년 고다르는 제71회 칸 영화제에서 자신의 모든 작품과 <그림책 : Le Livre d’image>으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세상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 보이는 것만 찍으면, 당신은 TV 영화를 만들 뿐이다.” (Il y a le visible et l’invisible. Si vous ne filmez que le visible, c’est un téléfilm que vous faites.)
○ 언론소개 : 장 뤽 고다르 (Jean-Luc Godard)
장 뤽 고다르는 현대 영화언어의 발전이라는 면에서 가장 큰 공로를 남긴 감독이다. ‘고다르 이전’과 ‘고다르 이후’라는 말이 생겨났을 만큼 고다르는 고전적 영화스타일과 현대적인 영화스타일을 가르는 경계에 서서 스스로 수많은 스타일 실험으로 영화의 미학적, 정치적 효과의 경계를 넓히는 데 가장 크게 공헌했다.
고다르는 소르본대학을 중퇴하고 파리 시네마테크 출신으로 독학으로 영화를 배웠고 시네마테크의 친구들인 프랑수아 트뤼포, 클로드 샤브롤 등과 함께 영화비평지 <카이에 뒤 시네마>의 필자로 활동했다.
50년대 말 ‘누벨바그’ (새로운 물결)라는 사조를 이끄는 감독들로 나선 고다르를 비롯한 이들 세대는 영화 역사상 최초로 영화에 대한 폭넓은 이론적 지식으로 무장하고 영화를 찍은 세대다. 누벨바그 세대 가운데 고다르는 제일 파격적인 영화언어로 첫 작품을 찍었고, 데뷔작인 <네 멋대로 해라 A Bout de Souffle>(1959)는 영화언어의 혁명을 몰고 온 영화사의 고전으로 남았다.
이야기를 펼치는 관습적인 방식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진행되는 줄거리에다 등장인물의 행위를 논리적으로 설명해주지 않으며 곧잘 거친 비약과 생략으로 편집을 때우는 <네 멋대로 해라>의 스타일은 ‘영화의 abc를 모르는 철부지 평론가가 저지른 장난’이란 비난도 받았으나 몇번이고 다시 봐도 질리지 않는 새로움으로 가득 차 있다. 고다르 영화의 힘은 첫 영화에 다 집약되어 있다.
험프리 보가트가 나오는 미국식 갱영화를 프랑스식으로 바꾼 <네 멋대로 해라>에서 고다르는 닳고 닳은 이야기를 전혀 다른 방향에서 찍어낸다. 고다르는 내용을 뒷받침하는 스타일이라는 전통적인 수법 대신 스타일 그 자체를 전경화시키고, 관객에게 ‘이것은 영화’라는 것을 끊임없이 강조하는 수법을 썼다. <네 멋대로 해라> 이래 고다르가 60년대에 줄곧 추구했던 영화 작업은 이야기의 전통적인 경계를 깨는 작업이었다. 영화는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허구이고 익숙한 이야기 규칙에 따라 지어낸 거짓말이지만, 관객은 진짜처럼 포장한 그런 허구의 이야기를 즐긴다.
그러나 고다르에게 중요한 것은 영화가 그럴듯하게 사실적으로 보이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아니라 감독이 영화로 무슨 말을 하는지 관객이 자각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라는 것이었다. 관객에게 그런 자각력을 심어주기 위해 고다르는 영화의 형식적 메커니즘을 드러내는 스타일을 창안했다. 대부분의 상업영화는 그 메커니즘을 감추지만 고다르의 영화는 의도적으로 그 메커니즘을 드러냈다.
화면은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고 배우는 화면을 쳐다보며 말하고 때로는 화면 밖에 감독의 논평이 깔리기도 한다. 스타일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이야기의 인공성을 폭로한다는 노선은 브레히트의 거리두기 효과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었고 60년대 중반으로 가면서 고다르는 미학적 효과보다는 이야기의 정치적 효과쪽으로 관심을 옮겨갔다.
<네 멋대로 해라>에서 <주말 Weekend> (1968)까지가 고다르 영화의 제1기라 한다면, 1968년 5월 혁명 이후는 고다르 영화의 제2기다. 좌파였던 고다르는 아예 마오쩌둥 주의로 노선을 정하고 지가 베르토프(기록영화의 이상에 가장 가깝게 다가섰던 30년대 소련 영화감독 이름) 집단을 만들어 혁명적인 영화의 생산과 제작과 배급에 주력할 것을 선언하고는 당시까지 그와 줄을 맺고 있던 전세계의 배급망과 관계를 끊었다. 노동자, 학생들과 같이 생활하면서 그들과의 토론을 바탕으로 ‘정치적 주제에 관한 영화’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만들어지는 영화’를 만들고자 했던 고다르의 신념은 그러나 좌절하고 만다.
관객의 사고를 유도하기 위해 고다르가 도입한 실험적인 양식은 주관객층인 노동자와 학생의 반발을 샀다. 고다르의 영화가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당시에 고다르가 겪었던 어려움을 반영하고 있는 영화가 <만사형통 Tout Va Bien> (1972)이다. 이브 몽탕과 제인 폰다라는 스타 배우가 나오는 이 ‘상업영화’는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어떻게 하면 영화를 급진적으로 만들 수 있는가라는 고민을 표현하고 있다. <만사형통> 이후 고다르는 스위스에서 칩거 생활에 들어갔고,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인생 Sauve Qui Peut: La Vie>(1980)으로 다시 상업영화에 복귀할 때까지 주로 비디오 실험에 몰두했다.
80년대의 고다르 영화에서 60년대 고다르 영화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미녀 갱 카르멘 Pr om Carmen>(1983) <마리아께 경배를 Je Vous Salut Marie>(1986) <누벨 바그 Nouvelle Vague>(1988) 등의 영화를 통해 고다르는 이제 영화, 나아가 예술의 가능성을 회의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예술이 발언할 수 있는 대상이 있는가, 예술이 없어도 자연은 아름다운 것 아닌가, 그럼 종교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따위의 형이상학적인 질문들과 씨름하고 있다. 동시에 후기 고다르의 영화는 사운드와 이미지의 관계를 성찰하는 고다르 특유의 실험이 거의 완성단계에 이른 도저한 형식주의를 보여준다.
평론가 로빈 우드는 고다르의 변덕스럽고 회의적인 요소를 끄집어내어 버리고 그가 실험한 영화언어의 성취를 끄집어내는 것이 이론가들의 몫이라고 평했다. 고다르는 최근 영화사에 관한 연작인 <영화사 Histoire Du Cinema>(1997)를 완성했다. [씨네21 영화감독사전]
○ 작품 목록
1960년 《네 멋대로 해라》
1961년 《여자는 여자다》
1962년 《자기만의 인생》
1963년 《작은 병정》 Le Petit soldat
1963년 《기관총부대》 Les Carabiniers
1963년 《경멸》
1964년 《국외자들》
1964년 《결혼한 여자》 Une femme mariée
1965년 《알파빌》
1965년 《미치광이 삐에로》
1966년 《남성, 여성》 Masculin féminin
1966년 《아메리카의 퇴조》 Made in U.S.A.
1967년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두 세가지 것들》
1967년 《중국 여인》
1967년 《주말》
1969년 《즐거운 지식》 Le Gai savoir
1972년 《만사형통》 “Tout va bien”
1979년 Sauve qui peut (la vie)
1988년 – 1998년 Histoire(s) du cinéma(영화사)
1993년 《오! 슬프도다》 Hélas pour moi
1995년 《JLG/JLG: 고다르의 자화상》 JLG/JLG – autoportrait de décembre
1996년 《포에버 모차르트》 For Ever Mozart
2001년 《사랑의 찬가》 Éloge de l’amour
2004년 《아워 뮤직》 Notre musique
2010년 《필름 소셜리즘》
2014년 《언어와의 작별》 Adieu au Langage
2018년 《이미지 북》 Le Livre d’image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