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 3월 19일, 영국의 정치인•제50대 총리 아서 밸푸어 (Arthur James Balfour, 1st Earl of Balfour, 1848 ~ 1930) 별세
밸푸어 경 (Lord Balfour)으로도 알려진 제1대 밸푸어 백작 아서 제임스 밸푸어 (Arthur James Balfour, 1st Earl of Balfour, KG, OM, PC, FRS, FBA, DL, 1848년 7월 25일 ~ 1930년 3월 19일)는 1902년부터 1905년까지 영국의 총리를 역임한 보수당 정치가이다.
밸푸어는 로이드 조지 내각에서 외무장관으로서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고국” 건설을 지지하는 1917년 밸푸어 선언에 내각을 대표하여 서명했다.

– 아서 제임스 밸푸어 (Arthur James Balfour)
.출생: 1848년 7월 25일, 스코틀랜드 이스트로디언 위팅엄 하우스
.사망: 1930년 3월 19일 (81세), 잉글랜드 서리 워킹
.학력: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
.정당: 보수당
.종교: 장로교와 성공회
*영국 총리
.임기: 1902년 7월 12일 – 1905년 12월 4일
(3년 4개월 23일)
.전임: 솔즈베리 후작 / 후임: 헨리 캠벨배너먼
군주, 에드워드 7세
*보수당 당수
.임기: 1902년 7월 11일 – 1911년 11월 13일
.전임: 솔즈베리 후작 / 후임: 버너 로
*외무장관
.임기: 1916년 12월 10일 – 1919년 10월 23일
.전임: 팰러든의 그레이 자작 / 후임: 케들스턴의 커즌 백작

○ 생애 및 활동
– 배경과 어린 시절
아서 밸푸어는 스코틀랜드 이스트로디언 위팅엄 하우스에서 제임스 메이틀런드 밸푸어 (1820 ~ 1856)와 블랑슈 개스코인세실 부인 (1825 ~ 1872)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할아버지 제임스를 이어 스코틀랜드 의원을 맡았다.
어머니는 초대 솔즈베리 백작 로버트 세실을 시조로 하는 세실 가문 출신으로, 2대 솔스베리 후작의 딸이자 훗날 총리가 되는 3대 솔스베리 후작의 누이였다.
아서 밸푸어의 대부는 웰링턴 공작으로, 그의 이름을 물려받았다.
아서 밸푸어는 8명의 자식들 가운데 셋째로, 장남이었으며, 형제 넷과 누이 셋이 있었다.
아서 벨푸어는 헤트포드셔 허즈던에 있는 그레인지 예비교 (1859 ~ 1861)와 이튼 칼리지 (1861 ~ 1866)에서 교육받았다.
이튼에서 밸푸어는 대가이던 윌리엄 존슨 코리에게서 배웠다.
이후 밸푸어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진학하여,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윤리학을 듣고 (1866 ~ 1869), 2등급 학위로 졸업했다.
남동생은 케임브리지의 배아학자 프랜시스 메이틀런드 발푸어 (1851 ~ 1882)이다.

– 정치 활동
1874년 국회에 입성한 밸푸어는 아일랜드 비서실장으로 명성을 얻었다.
이 직책으로 밸푸어는 부재 지주들에 대한 조치를 취하는 한편, 농촌의 불안을 잠재웠다.
밸푸어는 아일랜드가 영국에 남거나 독립하는 것 사이에 어떠한 타협책도 있을 수 없다고 말하며, 아일랜드 자치법을 반대했다.
1891년부터 밸푸어는 하원에서 보수당을 이끌며 외삼촌 솔즈베리 경 밑에서 일했다.
솔즈베리 정부는 1895년과 1900년 총선에서 의회 과반수를 차지하며 승리했다.
명성있는 논객이던 밸푸어는 정당 경영이라는 틀에 박힌 업무에 질려했다.
1902년 7월, 밸푸어는 외삼촌의 총리직을 이어받았다. 그가 총리로 활동할 시기의 보수당과 영국 정부는 관세 개혁 때문에 대립하고 있었다.
1902년부터 1905년까지 영국의 총리를 역임했다.
한편 밸푸어는 로이드 조지 내각에서 외무장관으로서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고국” 건설을 지지하는 1917년 밸푸어 선언에 내각을 대표하여 서명하기도 했다.

– 밸푸어 선언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거국내각이 수립되자 밸푸어는 1916년 로이드 조지에 의하여 외무부 장관으로 재발탁된다.
유대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이스라엘의 건국을 약속했던 밸푸어 선언이 이 시기의 일이다.
종전 이후에도 로이드 조지 내각에 남아 파리 강화 회의와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협상장에도 참가하면서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1922년 5월 밸푸어 백작이 되었고, 동년 10월 로이드 조지 내각의 붕괴 이후에도 정계의 원로로 왕성히 활동했으며, 이 때 추밀원장으로서 영국 본국과 자치령의 관계를 재규정한 1926년 밸푸어 선언을 발표하기도 했다.
밸푸어 선언 (Balfour Declaration)은 영국 정부가 1917년 제1차 세계대전 중에 공적으로 진술한 문서로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민족적 고향” (national home for the Jewish people)이 설립되는 것을 지지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 선언은 영국의 외무장관 아서 밸푸어가 영국 유대인 공동체의 대표인 월터 로스차일드에게 보내는 서한에 포함되어 있다.
밸푸어 선언은 전세계의 유대인 공동체에서 시온주의에 대한 지지를 증가시키고,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의 근거가 된 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의 핵심 요소가 되는 등 국제 질서에 오랜 영향을 주었다.
또한 선언의 내용이 그 이전 영국이 메카의 샤리프인 후세인 빈 알리와 후세인-맥마흔 서한에서 한 약속과 상충되는지 등의 논쟁이 여전히 남아 있다.

이는 사실상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서 민족적 고향을 건설하겠다는 것을 지지한다는 내용의 서신이다.
하지만 이미 밸푸어 선언 이전인 1915년 10월에 헨리 맥마흔이 후세인-맥마흔 서한을 통해 전후 아랍인의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지지하기로 약속하였다.
이런 영국의 모순된 행동으로 결국 전 후 유대인세력과 아랍세력의 분쟁을 초래하게 되었다는 비판도 있다.
아서 제임스 밸푸어 (Arthur James Balfour)는 1930년 3월 19일, 잉글랜드 서리 워킹에서 별세했다. 향년 81세.
○ 서훈
1916년 메리트 훈장(OM)
1922년 가터 훈장(KG)
1922년 밸푸어 백작위 서임(1st Earl Balfour of Whittingehame)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