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 5월 9일, 빛의 속도와 에테르에 관해 연구한 폴란드계 미국의 물리학자 앨버트 마이켈슨 (Albert Abraham Michelson, 1852 ~ 1931) 별세
앨버트 에이브러햄 마이컬슨 (Albert Abraham Michelson, 1852년 12월 9일 ~ 1931년 5월 9일)은 폴란드계 미국인 물리학자이다. 빛의 속도와 에테르에 관한 업적을 남겼다.

– 앨버트 에이브러햄 마이컬슨 (Albert Abraham Michelson)
.출생: 1852년 12월 19일, 폴란드 슈트르첼노
.사망: 1931년 5월 9일, 캘리포니아주 패서디나
.국적: 미국
.분야: 물리학
.소속: Case Western Reserve University,Clark University, 시카고 대학교
.출신 대학: 미해군 사관학교,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
.지도 교수: 헤르만 폰 헬름홀츠
.지도 학생: 로버트 밀리컨
.주요 업적: 빛의 속도 측정, 마이컬슨-몰리 실험
.수상: 노벨 물리학상 (1907)
폴란드에서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나 2세 되던 해 부모와 함께 미국으로 이주해 온다. 1869년 애너폴리스의 해군 사관학교 (United States Naval Academy)에 입학하여, 1873년 졸업하여 해군으로 복무하며, 해병학교의 물리학 강사가 된다. 그 이후 유럽에서 2년간 공부하여 광속측정에 관심을 갖게 된다. 1881년 해군을 그만두고 유럽에서 유학하였다. 클리블랜드 대학 물리학 교수를 거쳐, 시카고 대학 교수를 지냈다.
마이컬슨은 광속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여 1881년 마이컬슨 간섭계를 발명해내어, 그것으로 지구상의 공전 궤도에 따르는 방향과 빛의 속도가 거의 같음을 실제로 측정하였다. 에드워드 몰리와 함께 당시 빛의 매질로 가정되었던 에테르를 검출하기 위해 공전운동하고 있는 지구와 에테르의 상대운동에 따른 광파의 간섭을 검출하는 실험을 반복한다 (마이컬슨-몰리 실험). 그러나 빛이 에테르같은 매질을 통해 전달되는 파동이었다면 검출되었어야 할 간섭현상은 검출되지 않는 결과로 끝맺게 된다.
그러나 이 결과는 어떠한 방향으로든 움직이는 물체에서 관측한 광속도는 언제나 일정하다는 광속 불변의 법칙의 발견으로 이어져, 후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의 기반이 된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편지에 따르면 이론을 전개하는데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한 이유로 교과서의 특수상대성이론 설명에 언제나 제일 먼저 등장하는 것이 마이컬슨과 몰리의 실험이다.
또한 마이컬슨은 정확한 광속도를 구하는 실험을 반복하여 그가 얻어낸 초속 18만 6,153마일이라는 숫자는 당시 최고의 정밀도를 자랑했다.
1907년 마이컬슨은 광학에 대한 연구업적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다. 이는 미국인이 과학부분에서 노벨상을 수상한 첫 번째 사례였다.

○ 생애 및 활동
마이컬슨은 2세 때 부모와 함께 미국으로 왔다. 그의 가족들은 뉴욕에서 네바다 주 버지니아 시로, 그 다음에는 샌프란시스코로 이사했고 그곳에서 그의 아버지는 상인으로 성공했다. 17세에 그는 메릴랜드 주 아나폴리스에 있는 미국 해군사관학교에 들어갔는데, 과학과목은 성적이 좋았으나 선박조종술은 평균 이하였다. 1873년에 졸업한 다음 1875~79년 사관학교의 과학교사로 있었다. 1878년 광속의 정밀한 측정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는데, 이는 평생 동안 열정적으로 계속되었다. 그는 직접 만든 기구를 이용해서 유용한 수치를 얻었다. 참된 진보를 위해서는 광학을 공부할 필요가 있음을 느낀 그는 1880년 유럽 여행을 떠나 베를린·하이델베르크·파리 등지에서 2년 동안 머물렀고 1881년에 해군에서 물러났다. 미국으로 돌아오자마자 광속을 측정해 29만 9,853㎞/s의 값을 얻었으며 그후 여러 번 더욱 정밀한 값을 얻는 데 성공했다.
유럽에 머무는 동안 그는 간섭계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 간섭계는 광선을 둘로 갈라서 이들을 서로 직각인 경로로 보낸 다음 다시 만나도록 고안된 것으로 만약 그 중간에 광파가 어긋나게 되면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이 교대로 나타나는 간섭무늬가 생기게 된다. 이 무늬의 너비와 개수로부터 전례없이 세밀한 측정을 하여 서로 직각으로 진행하는 광선의 속도를 비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는 간섭계를 이용하여, 당시에 우주의 기본적 매질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되던 에테르에 대한 지구의 속도를 측정하는 것이었다. 만약 지구가 빛을 전달하는 에테르를 통해 진행하고 있다면 같은 방향으로 진행하는 빛의 속도는 광속에 지구의 속도를 더한 값과 같지만 지구의 경로에 직각으로 진행하는 빛의 속도는 단지 광속으로만 진행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베를린에서 행한 그의 최초의 실험에서는 아무런 간섭무늬도 나타나지 않았는데 이는 광선의 속도에 차이가 없고 따라서 에테르에 대한 지구의 운동이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1883년 그는 클리블랜드의 케이스 응용과학학교의 물리학교수직을 수락했고 그곳에서 그의 간섭실험의 정밀도를 높이는 데 주력했다. 1887년 그의 동료인 미국의 화학자 에드워드 윌리엄스 몰리의 도움을 받아 이후 마이컬슨-몰리 실험으로 불리게 될 실험 결과를 발표할 준비를 했다. 실험의 결과는 부정적으로 간섭무늬는 나타나지 않았고 명백히 에테르에 대한 지구의 운동도 관측되지 않았다. 그것은 아마도 과학의 역사상 가장 중요한 부정적 실험일 것이다. 뉴턴의 고전역학에 비추어보면 그결과는 역설적인 것이었다. 분명히 광속에 다른 속도를 더한 값이 여전히 광속과 같았던 것이다. 마이컬슨-몰리의 실험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물리학은 새롭고 보다 정련된 기반 위에 새로 세워져야 했고 이는 마침내 1905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에 의한 상대성이론의 정식화로 이어졌다.
1889년부터 매사추세츠 주 우스터의 클라크대학교 물리학교수로 재직한 그는 새로 설립된 시카고대학교 물리학부의 교수 겸 초대 학과장으로 1892년 임명되어 1929년에 은퇴할 때까지 머물러 있었다. 1923~27년 국립 과학 아카데미의 의장을 지냈다. 그의 분광학과 기상학 연구로 인해 1907년 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과학분야에서 노벨상을 수상했다. 마이컬슨은 길이의 표준으로 어떤 특정 파장의 빛을 사용할 것을 주창했고 (이 제안은 1960년에 널리 받아들여짐), 1893년에는 가열된 카드뮴에서 방출되는 붉은빛으로 환산해 표준 미터를 측정했다. 그는 자신의 간섭계를 이용해 별의 양 끝에서 나오는 광선을 합성해 그결과 생겨나는 간섭무늬를 보고 그 천체의 지름을 측정할 수 있었다. 1920년 254㎝ 망원경에 부착시킨 6m 간섭계를 사용해서 베텔기우스 (오리온 자리 중의 알파별)의 지름을 3억 8,616만㎞(태양 지름의 300배)로 측정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별의 크기를 처음으로 정밀하게 측정한 것이었다 (광도측정법).

1923년 마이컬슨은 광속을 정밀하게 측정하는 문제에 다시 관심을 돌렸다. 캘리포니아 산맥에서 두 봉우리 사이의 35㎞ 거리의 경로를 측량해 2.5㎝ 이내의 정밀도로 그 거리를 결정했다. 그는 특별한 8면회전거울을 이용해 29만 9,798㎞/s의 광속값을 얻었다. 또한 더 정교한 측정을 하기 위해 그는 긴 진공관 속에서 광선이 계속 앞뒤로 반사되어 진공 속을 16㎞로 진행하도록 만들었다. 마이컬슨은 그의 마지막 실험이 평가되기 전에 죽었으나, 1933년 최종 수치가 29만 9,774㎞/s로 발표되었다. 이는 1970년대에 받아들여지게 된 수치보다 2㎞/s 이내로 큰 값이었다.
만년에는 광속의 정밀측정에 종사하는 한편, 천체관측에도 관심을 기울여 목성의 위성의 지름 측정도 하였다.
1907년 미국인으로서 최초로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 수상
노벨 물리학상 (1907)
Rumford Prize (1888)
Matteucci Medal (1903)
Copley Medal (1907)
Gold Medal of the Royal Astronomical Society (1923)
왕립 학회
United States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 저서
주요 저서로는 《광속 (光速) Velocity of Light》(1902), 《광파 (光波)와 이용 Light Waves and Their Uses》(1903) 등이 있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