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5년 11월 26일, 대한민국의 목회자 • 독립운동가 길선주 (吉善宙, 1869 ~ 1935) 별세
길선주 (吉善宙, 1869년 3월 25일 ~ 1935년 11월 26일)는 한국의 장로교 목사이며 독립운동가이다. 아호는 영계 (靈溪)이다.
– 길선주 (吉善宙)
.출생: 1868년 3월 15일, 평안남도 안주군 성내 후장동
.사망: 1935년 11월 26일(향년 67세), 평안남도 강서군
.묘소: 서장대(西章臺)
.국적: 조선 → 대한제국 → 일제강점기
.종교: 개신교(장로회)
.본관: 해평 길씨
.별칭: 자(字)는 윤열(潤悅), 호(號)는 영계(靈溪)
.직업: 독립운동가, 목사
힘이 장사였던 그는 19세부터 차력술을 연마하던 중, 25세 때 친구로부터 선도 (仙道)로 장사가 된다는 말을 듣고 입산하여 3년을 힘썼으나, 신통한 것을 얻지 못하고 집에 돌아왔다.
이때 자기에게 선도를 권했던 김종섭 (金鍾燮)을 만나, 그로부터 기독교에 입교하였다는 이야기와 그가 권하는 한문 기독교 서적들을 읽었다. 특히 『천로역정 (天路歷程)』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래서 1897년 29세 때 세례를 받고, 1898년에는 교회의 영수 (領袖)가 되었다. 1901년 장대현교회의 장로가 되고, 1902년 조사가 되어 평안도와 황해도지방을 맡아 전도하였다.
한편, 정국의 혼란과 국운의 비극을 염려하여 안창호 (安昌浩) 등과 함께 독립협회 평양지부를 조직, 사업부장을 맡아 구국운동에도 앞장섰다.
그러나 국운이 이미 기울어졌음을 깨닫고, 기독교신앙운동을 통해 구국의 길을 찾을 결심으로, 2,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장대현교회 건물을 세웠다.
1903년 평양신학교에 입학, 1907년 제1회 졸업생으로 7명의 동료와 함께 독노회 (獨老會)에서 안수를 받고 장대현교회 목사가 되었다.
그는 열정적인 목회자로, 부흥사로 활약하여 많은 사람을 개종시켰고 부흥운동을 통하여 심령의 역사를 크게 나타내었으며, 많은 교회를 설립하였다. 특히 그는 1907년에 시작된 평양대부흥운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고 그 영향으로 부흥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한국교회의 현대화와 토착화를 위해서도 크게 노력하였는데, 그 당시의 남녀 구별의 불평등을 교회 안에서 타파하기 위해, 교회당 안에 설치된 남녀 좌석 사이의 휘장을 철거케 하였다.
또한 아악 (雅樂)을 교회음악으로 도입하여 행사 때나 교회 명절에 연주하게 하였고, 찬양대와 교회음악단을 조직하여 교회선교활동을 활성화시켰다.
연극과 성화 (聖畵)에도 관심을 두어, ‘성극의 밤’을 열기도 하였다. 1910년 제4회 노회에서 1백만 구령운동을 제창하여, 국권상실의 수치와 비운에 빠진 민족을 구령으로 위로하고 민족의 최후 보루를 교회에 구축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애국정신으로 1912년 105인사건 때에는 많은 애국지사와 함께 수난당하였고, 장남을 잃는 고통을 겪은 뒤 성서연구에 몰두, 신·구약성서의 주석서를 많이 남겼다.
교육사업에도 힘써 숭실학교 숭덕학교 경영에 참여하였고, 3·1운동 때에는 기독교를 대표하여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여 2년의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석방된 뒤로는 북간도를 비롯하여 전국을 순회하면서 부흥집회를 인도하였다. 저서로 『해타론』과 『만사성취』가 있고, 유고로 『말세학』·『길선주목사설교집』 등을 남겼다.
○ 생애 및 활동
자는 윤열 (潤悅), 호는 영계 (靈溪). 1869년 3월 25일 평안남도 안주 출신. 아버지는 봉순 (鳳順)이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워 시화에 능했고, 음악을 좋아했다.
- 입교
젊은 시절부터 종교에 관심이 많아 무 (巫)와 선도에 심취하며 입산 수도하다가, 선교사의 전도를 통해 1897년 개신교에 입문했다. 같은 해 안창호가 독립협회 평양 지부를 설립할 때 발기인이 되는 등 기독교 계열 인사들과 함께 사회 활동을 시작했다.
입교 전 관우를 섬기는 무속인으로서 한 무리의 제자들을 거느릴 정도로 신통력을 인정 받았었던 그는 타고난 영적 감응 능력을 갖추고 있어서 부흥회를 이끄는 데 자질을 보였다.
그러다 1907년 1월 6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사경회를 위한 새벽기도회를 인도하던중에 길선주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회개를 대중 앞에 하게 된다. 당시 길선주는 목사 안수를 받기 바로 직전이었다.
“나는 아간과 같은 자입니다.”
“나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실 수가 없습니다.”
“약 1년 전에 친구가 임종시에 나를 자기 집으로 불러서 말하기를 ‘길 장로, 나는 이제 세상을 떠나니 내 집 살림을 돌보아 주시오.’라고 부탁했습니다.”
“나는 잘 돌보아 드릴 터이니 염려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재산을 관리하며 미화 100달러 상당을 훔쳤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한 것입니다.”
“내일 아침에는 그 돈을 죽은 친구의 부인에게 돌려 드리겠습니다.” — 길선주, 1907년 1월 6일 장대현 교회에서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이 회개를 시작으로 다른 사람들의 회개도 빗발쳐 나오면서 이것이 평양대부흥의 시점이 되었다고 한다.
- 목회 활동
길선주는 1907년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 제1회 졸업생으로 한국 최초의 장로교 목사 일곱 명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 기독교 교육 사업에도 관심을 보여 평양의 숭실학교와 숭덕학교 경영에 참여했다.
1911년 105인 사건 때 체포된 바 있고, 이때 신민회 회원인 장남 길진형은 고문으로 얻은 병으로 1917년 사망했다. 1919년 3·1 운동 때는 민족대표 33인으로 참가하여 3.1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도장을 이승훈에게 맡기고 3월 1일 당일에는 지방에 있었는데, 김병조, 유여대, 정춘수와 함께 태화관 독립선언서 낭독 모임에는 참가하지 않은 네 명 중 한 명이다. 1919년 당시 평균연령이 40대였던 시기에 이미 51세였고, 안질로 인해 시력을 많이 잃은 상태였다. 1919년 3월 1일 당일 태화관 모임 불참 사실이 확인되었으나 길선주는 체포되었고 미결수로 2년 가까이 구류된 이후 체포된 민족대표 32인 중 유일하게 무죄 판결을 받았다.
1935년 평안남도 강서의 교회에서 사경회를 인도하던 중 뇌일혈로 순직했다.
- 신학
배덕만 교수는 그가 미국의 세대주의 전천년설을 수용하여 대한민국의 대중화를 시킨 인물로 꼽고 있다.
제임스 게일은 길선주 목사의 스승으로 그의 책 <주님이 오신다 (Jesus is Coming)>로 길선주 목사에게 영향을 끼쳤다. 그런 의미에서 길선주 목사는 한국 근본주의 신학의 시조라고 불리고 있다.
- 사후
민족대표 33인 중 31인은 일제에 의해 유죄 판결을 받았고 복역 후 독립운동과 항일 운동에 참여하여 독립 운동 공로를 인정받았다. 하지만 최린과 박희도, 정춘수가 추후에 변절하여 친일 행위에 가담하여 친일인사가 되었다. 길선주는 무죄를 선고받았기에 독립운동 관련 공로를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나 1년 7개월 동안 옥고를 치른 사실이 이후 확인됨에 따라 대한민국 정부는 2009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에서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상훈과 추모
2009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가족 관계
장남 : 길진형, 신민회 회원, 고문 후유증으로 1917년 사망
2남 : 길진경, 목사, 1980년 평전 《영계 길선주》 출간
3남 : 길진섭, 화가
○ 저서
주요저서로 『해타론』과 『만사성취』가 있고, 유고로 『말세학』, 『길선주 목사 설교집』 등을 남겼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