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3월 1일, 미국 네바다주와 애리조나주 경계에 있는 중력식 아치 댐인 후버 댐 / 볼더 댐 (Hoover Dam / Boulder Dam) 완공
후버 댐 / 볼더 댐 (Hoover Dam / Boulder Dam)은 미국 네바다주와 애리조나주 경계에 있는 콜로라도 강 중류의 그랜드 캐니언 하류, 블랙 캐니언에 있는 높이 221m, 길이 411m의 중력식 아치 댐이다. 이 댐이 완성되자 길이 185km, 최고 깊이 162m에 달하는 거대 인공호수 미드 호 (Lake Mead)가 생기게 됐다. 이 곳의 물은 미국 서부 지역의 주요 상수원이다.
미국의 대공황 시기인 1931 ~ 36년의 짧은 기간에 걸쳐 건축되었고 원래 명칭은 볼더 댐 (Boulder Dam)으로 불렸으나, 1947년 허버트 후버 대통령을 기념하여 ‘후버 댐’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 후버 댐 / 볼더 댐 (Hoover Dam / Boulder Dam)
.위치: Nevada 89005, United States
.건설 시작: 1931년
.건설 완료: 1936년
.길이: 411m
.높이: 221m
.미드호 : 길이 185km, 깊이 162m
– 설치 배경
후버 댐 (볼더 댐)의 수원인 콜로라도 강은 로키 산맥으로부터 캘리포니아 만에 걸쳐 2,253km를 흐르면서 미국 서부의 건조한 지역에 물을 대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서부 개척이 시작되고 인구가 대폭 유입되면서 생활을 위한 물의 확보가 매우 중요하게 되었다. 특히 19세기와 20세기 초에 봄과 여름에 녹은 눈으로 인해 낮은 지역의 농토와 지역이 자주 잠기게 되었고, 반대로 늦여름이나 초가을에는 하천의 수량이 매우 적어져 인근 지역에 물을 공급할 수가 없게 되었다. 결국, 홍수를 조절하고 갈수기에 적정한 물을 확보하기 위해서 콜로라도 강을 다스릴 프로젝트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 추진 경위
1931년 건설이 시작되어 1935년 마지막 콘크리트가 타설되었는데 당초 계획보다 2년 앞서 완공되었다. 댐 건설에 들어간 시멘트 양은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2차선 도로를 건설하는데 충분한 양의 콘크리트였다고 하며, 정확하지는 않지만 착공에서 완공까지 112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1935년 9월 30일 볼더 댐 (후버 댐)의 준공을 선언하였고, 1년 후인 1936년 발전소 시설이 완공되어 그해 10월 첫발전을 시작한 이후 1961년 17번째 및 18번째 발전기가 상업발전을 하게 되었다.후버 댐은 당시에는 세계 최대 규모의 전기설비 이자 세계 최대 규모의 콘크리트 건축물임을 자랑했을 뿐만 아니라 블록모양으로 댐을 분할 시공하는 등 획기적 기술을 연구 개발하여 건설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을 촉진했다.
댐의 이름은 처음에는 볼더 댐 (Boulder Dam)이라고 지어졌고 부근에 댐 종사자 등이 거주하는 볼더시티가 건설되기도 했는데, 1947년 미국의 제31대 대통령을 역임한 허버트 후버를 기념해서 지금의 이름으로 개칭되었다. 후버 댐은 지금도 위대한 건축물로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는데 미국 내 현대 건축물 중 7대 건축물로 손꼽히며 1981년에 미국 국립역사관광지에 등록되었으며, 1985년에 국립사적지로 지정되었다. 연방개발국이 관리하는 후버 댐 건설로 인해 미드호가 생겼는데, 부근 일대는 미드호 국립레크리에이션지역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관광도시인 라스베이거스와는 48km 정도 거리이다.

– 건설 비화
인류 역사에 남을 가장 큰 토목공사 중 하나였으며 5년동안 2만 1천 명 정도의 인력이 소요되어 건설되었다. 그 과정에서 112명이 사망하였다. 사용된 콘크리트의 양은 3,394,000㎥이다. 콘크리트는 양생 과정에서 상당한 열이 발생하는데, 후버 댐의 경우 열팽창으로 인한 붕괴를 막기 위해 기존의 거푸집식 타설이 아니라 소규모 블럭으로 모듈을 만든 후 이 블럭들을 쌓는 형식으로 건설하였다. 또한 시멘트의 빠른 냉각을 위해 댐 건설 시 냉각탑을 건설하여 수온 4℃의 냉각수를 블럭 밑에 설치된 강철 파이프 라인을 통해 공급하였다, 이런 공법을 통해 전체 공사기간이 ’15년’이 걸릴 것을 ’22개월’로 단축시켰다. 무려 12년 가량의 공기를 단축시킨 것이다.
참고로 초기 구상은 협곡을 폭파해 흘러내리는 흙과 바위로 만드는 것이였지만 당시 폭파를 제어할 기술도 없었고 ‘물이 언젠간 바위를 뚫어 붕괴할 것’이라고 생각해 그만두었다고 한다.
상기하였듯 근대 건축물치곤 사상자 수가 상당히 많이 나왔는데, 최단 시간 내에 건설을 완료하기 위해 인부들의 안전이 희생되었기 때문이다. 헬멧을 비롯한 각종 안전 장비와 안전 장치가 제대로 보급되지 않은 건 물론이요, 연방 건설법 상 밀폐 공간 내 공사에는 반드시 전기 장비를 써야 했으나 이를 무시하고 기존의 기름을 쓰는 착암기와 트럭 등을 사용했으며, 이는 인부들의 일산화탄소 중독을 일으켰다. 이 와중에 건설사가 임금을 삭감한다고 발표하자 분노가 쌓이고 쌓였던 인부들은 파업을 결정하고, 연방 건설법을 적용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 조건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노동부장관에게 요청했으나 후버 정권 소속이던 노동부장관 역시 댐의 빠른 완성을 우선시했기에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인부들은 대공황이었던 당시 상황에 파업을 오래 지속하지 못하고 중단한다. 후일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후버댐 메모리얼 브릿지가 지어졌다.
미드호 수위가 오르면서 근처에 있던 세인트토마스라는 마을이 수몰되었다. 이 작은 마을은 1800년 대에 만들어졌는데, 최대 인구 500명까지 도달한 적이 있었다. 이곳 주민들은 미드호 수위가 천천히 오르면서 마을 한 쪽에서 물이 올라오는 걸 보고 경악했으며 서둘러 짐을 싸서 떠났다. 마지막으로 마을을 떠난 남성은 자기 집 문턱까지 물이 차오르지 않으면 떠나지 않겠다고 호언했으나, 문턱까지 물이 차오르자 카누를 타고 탈출했다고 한다. 2015년 가뭄으로 미드호 수위가 하락하자 수몰되었던 세인트토마스가 다시 나타나기도 했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