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년 11월 10일, 튀르키예 공화국의 건국자•초대 대통령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Mustafa Kemal Atatürk, 1881 ~ 1938) 타계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튀: Mustafa Kemal Atatürk, 1881년 ~ 1938년 11월 10일)는 터키의 육군 장교, 혁명가, 작가이며 튀르키예 공화국의 건국자이자 초대 대통령이다.
그의 칭호인 아타튀르크는 “튀르크의 아버지”라는 뜻으로, 1934년에 튀르키예 의회가 헌정하였다.
–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Mustafa Kemal Atatürk)
.출생: 1881년, 오스만 제국 셀라닉주 (현재 그리스 테살로니키)
.사망: 1938년 11월 10일(57세), 튀르키예 이스탄불 돌마바흐체 궁전
.정당: 공화인민당
.배우자: 라티페 우사클리길
*튀르키예의 제1대 대통령
.임기: 1923년 10월 29일 ~ 1938년 11월 10일
.후임: 이스메트 이뇌뉘 (제2대)
튀르키예의 군인 출신 정치인이자 튀르키예의 초대 대통령이다.
갈리폴리 전투와 튀르키예 독립전쟁의 전쟁영웅으로 그의 성씨인 아타튀르크는 ‘튀르크인의 아버지’라는 의미를 가지는 이름으로, 그 이름에 걸맞게 ‘현대 튀르키예의 국부’로 칭송되고 있다.
특히 이슬람 문화의 영향을 짙게 받은 오스만 제국 출신임에도 정교분리, 세속주의를 추구했으며, 유럽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서구화를 단행하였다.
그 덕분에 오늘날의 튀르키예는 국민 대다수가 무슬림임에도 불구하고 세속주의 국가를 유지하고 있다.
법체계 면에서도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가 아닌 대륙법을 따르는 공화제를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과 이슬람 학자들이 철천지 원수로 인식하는 대상 중 하나이기도 하다.
외교에 있어서도 국제정세를 잘 이해하고 잘 행동한 유능한 지도자였다.
○ 생애 및 활동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터: Mustafa Kemal Atatürk)는 1881년, 오스만 제국 셀라닉주 (현재 그리스 테살로니키)에서 출생했다.
일찍이 청년 투르크 당에서 활동하였으며, 갈리폴리 전투에서 영국과 프랑스 군대의 공세를 저지한 탁월한 장군이기도 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육군 장교였고, 오스만 제국의 패배 이후 터키 국민 운동 소속으로 터키 독립 전쟁을 주도하였다.
터키는 1차 세계대전 후 공화국을 수립했으며, 그리스와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둔 1922년 8월 30일을 국경일로 기념하고 있다.
1923년에는 자신을 지지하는 청년 장교들과 함께 앙카라를 장악, 오스만 제국을 무혈혁명으로 멸망시켰다.
1922년 11월에는 술탄제를 폐지하고, 메흐메트 6세를 폐위했다.
1923년 7월 연합국과 새로운 조약 (로잔 조약)을 체결하였다. 동년 10월에는 이스탄불에서 앙카라로 천도하고 공화제를 선포하였으며, 대통령에 취임했다.
케말 아타튀르크는 1923년에 대통령에 취임한 뒤 본격적으로 개혁정책을 시행했다.
1924년에는 632년 이래 1300년 동안 이어져 오던 칼리프제를 폐지하였고, 터키 공화국의 기본 정신인 세속주의를 법으로 제정했다.
1925년에는 복장 개혁을 시행하여 여성들의 복장을 해방시키고, 과거에 금지되었던 여성의 교육권을 보장해 남녀평등교육을 시행하였으며, 이슬람력을 폐지하여 유럽식 그레고리력으로 대체했다.
1926년에는 민법을 개정해 일부다처제를 금지하고 일부일처제를 확립하였으며, 1928년에 튀르키예어의 아랍 문자 표기법을 폐기하고 로마자 표기법으로 변경하였다.
1930년에는 여성에게도 선거권을 부여하였다.
터키어는 고대에는 초기 돌궐 문자로, 중세에는 위구르 문자로 기록되었는데, 13세기부터는 몽골어 어휘와 페르시아어 어휘가 터키어에 유입되었다.
여기에 이슬람의 영향을 받은 오스만 제국 시대에는 공용어인 오스만어에 아랍어, 페르시아어 요소를 많이 받아들였고 표기 문자 역시 아랍 문자로 갈아탔다.
하지만 아랍 문자는 자음 문자에 비해 모음 표기 문자가 적었기 때문에 터키어 표기에는 적절치 않았고 그 결과 불필요한 자음 표기는 너무 많고, 터키어에 필수적인 모음 표기는 터무니 없이 부족한 상황이 벌어졌다.
이 때문에 1927년 조사에 의하면 당시 터키인 중에서 아랍 문자를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은 전체의 7%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에서 케말 파샤는 아랍 문자 29자, 페르시아 문자 4자를 폐기하고 라틴 문자를 도입하는 언어개혁을 전개했다.
국제 정세를 바탕으로 한 식견도 대단해서 추축국 편에 서지 말 것을 당부했다.
당시 국제적으로도 평이 나쁘지 않았던 아돌프 히틀러에 대해서도 “제정신이 아닌 인물”이라고 평해서 그 본성을 꿰뚫어 보았으며, 베니토 무솔리니에 대해서도 “자기 국민의 손에 목이 매달릴 놈이지.”라고 평했다.
아타튀르크는 전통술인 라크와 담배를 좋아해 대통령 시절 내내 둘을 입에 달고 살다시피 했고, 때문에 1937년 경부터 몸에 이상의 신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잠시 휴가를 다녀온 후에는 상태가 조금 나아졌으나 휴가를 마치자마자 지방 시찰을 다녀온 이후 다시 건강이 나빠졌다.
병세를 알아볼 겸 이스탄불로 가서 검진을 받아보니 간경변 판정을 받았다.
그 후 아타튀르크는 간경변 치료 및 요양을 위해 이스탄불에 머물면서 집무를 봤는데, 몸을 추스려야 할 시기에 정상적으로 집무를 보면서 격무에 시달리는 바람에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졌고, 결국 1938년 11월 10일 오전 9시 5분에 돌마바흐체 궁전에서 사망하였다.
– 약력
오스만 제국 5군 사령부 상위
동부 루멜리아 오스만 제국 철도 감독관 (1908)
오스만 제국군 지휘관 (1912)
오스만 제국 제2군 및 제7군 사령관 (1918.8. ~ 1918.11.)
일디림 군단 사령관 (1918.10. ~ 1918.11.)
튀르키예 대국민회의 국회의장 (1920.4. ~ 1923.10.)
튀르키예 대국민회의 초대 총리 (1920.5.~1921.1.)
공화인민당 대표 (1923.9. ~ 1938.11.)
튀르키예 초대 대통령 (1923.10. ~ 1938.11.)
○ 평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는 터키에서 독립 영웅이자 문자개혁, 정치개혁의 국부로서 추앙받고 있다.
터키 국회는 1934년 ‘터키의 아버지’라는 뜻의 ‘아타튀르크’ 경칭을 수여하였고 공공건물이나 거리의 이름을 이 명칭으로 바꿨다.
지폐 속의 인물도 오직 아타튀르크 단 한명이다.
한편 터키 형법에는 아타튀르크 모독에 대한 특별한 조항이 있다. 형법 301조가 그것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Madde 301 (제301조)
(1) Türk Milletini, Türkiye Cumhuriyeti Devletini, Türkiye Büyük Millet Meclisini, Türkiye Cumhuriyeti Hükümetini ve Devletin yargı organlarını alenen aşağılayan kişi, altı aydan iki yıla kadar hapis cezası ile cezalandırılır.
터키 민족을, 터키 공화국 국가를, 터키 대국민의회(=국회)를, 터키공화국 정부와 국가 사법조직을 공공장소에서 모욕하는 자는 징역 6개월에서 2년에 처한다.
(2) Devletin askeri veya emniyet teşkilatını alenen aşağılayan kişi 1. fıkra hükmüne göre cezalandırılır.
국가의 병사들 혹은 안보기관을 공공장소에서 모욕하는 이는 1항에 의거한 형벌에 처한다.
(3) Eleştiri amacıyla yapılan düşünce açıklamaları suç oluşturmaz.
비판의 목적으로 하는 사상적 행동은 처벌될 수 없다.
(4) Bu suçtan dolayı soruşturma yapılması, Adalet Bakanının iznine bağlıdır.
이 혐의에 의한 입증판단은, 법무부의 결정에 따른다.
“우리가 무너지면 오스만 제국 본국이 무너지고, 우리가 이젠 노예가 되는 생활이 기다리고 있다. 제군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살아남기 위하여 싸우는 것이 아니라 죽기 위하여 오늘 싸워야 한다. 그러나 이는 개죽음이 아니다. 오늘 우리들의 죽음이 조국을 지키는 밑거름이 될 것이며 그대들 이름은 남을 것이다. 나 역시 여기에서 무너지면 제군과 같이 시체로 뒹굴고 있으리라.” – 갈리폴리 전투에서
“주권은 조건없이, 제한없이 인민의 것이다”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