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1월 26일, 스페인 내전: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이끄는 군대가 바르셀로나 점령
1939년 1월 26일, 스페인 내전기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이끄는 군대가 바르셀로나를 점령했다.
프란시스코 파울리노 에르메네힐도 테오둘로 프랑코 이 바아몬데 (스: Francisco Paulino Hermenegildo Teódulo Franco y Bahamonde, 1892년 12월 4일 ~ 1975년 11월 20일)는 갈리시아 지방에서 출생하여, 육군 사관 학교에서 군사 교육을 받았다. 32세의 젊은 나이에 장군이 되어 차차 세력을 강화하였다.
1931년의 공화 혁명 때 공화 정부 쪽에 가담하였으나, 얼마 후 거기서 터전을 닦아, 1936년 총선거에 인민 전선파가 승리하자 중앙의 정치에서 떨어져 나가게 되었다.
1936년 7월 17일, 모로코인 용병을 포함한 자신의 직속 군대를 이끌고 공산주의 정부인 인민전선 정부에 반대해 군사반란을 일으키니 이것이 바로 스페인 내전이다.
내전에서 그는 국민 정부의 주석 및 군 총사령관이 되었으며, 독일의 히틀러와·이탈리아 무솔리니의 도움으로 1939년 수도 마드리드를 함락시켰다.
1937년 스스로 팔랑헤당의 당수가 되었다. 이후 1975년까지 38년간 독재자로 군림했다.
에스파냐 내전 / 스페인 내전 (the Spanish civil war)
스페인 내전 (the Spanish civil war, 스: Guerra Civil Española)은 마누엘 아사냐가 이끄는 좌파 인민전선 정부와 프란시스코 프랑코를 중심으로 한 우파 반란군 사이에 있었던 스페인의 내전이다.
– 스페인 내전 (the Spanish civil war)
.전간기의 일부
.날짜: 1936년 7월 17일 – 1939년 4월 1일
.장소: 스페인 및 그 식민지 – 스페인, 스페인령 모로코, 스페인령 사하라, 스페인령 기니
.교전: 공화파 / 국민파
.결과: 국민파의 승리, 스페인 제2공화국 멸망, 스페인국 수립, 백색 테러 발생
.영향: 프랑코 독재 시작, 공화파에 대한 대숙청 자행
.피해: 총 사상자 175,000명, 민간인 학살 5만명.
1936년 7월 17일 모로코에서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내전이 시작되었고, 1939년 4월 1일에 공화파 정부가 마드리드에서 항복하여 프랑코 측의 승리로 끝났다. 내전으로 인해 스페인 전 지역이 황폐화되었다.
소비에트 연방과 각국에서 모여든 의용군인 국제 여단이 반파시즘 진영인 인민 전선을 지원하고, 파시스트 진영인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 정권, 그리고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가 집권하고 있던 포르투갈이 프랑코파를 지원하여 제2차 세계 대전의 전초전 양상을 띠었다. 아울러 스페인의 로마 가톨릭교회와 왕당파는 프랑코파를 지원하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공화국 정부에 군수 물자를 지원하였으나 국제 연맹의 불간섭 조약을 이유로 스페인 정부에 대한 지원에 미온적이었다. 미국은 공식적으로 중립을 표방했지만, 스페인 제2공화국과 지원국 소련 측에는 비행기를, 스페인 반군 측에는 가솔린을 팔았다.
– 배경
스페인 내전이 일어난 원인은 물론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1936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오랫동안 대립해온 ‘두 개의 스페인’, 즉 ‘두 개의 광신적이라 할 만한 정열과 이상’이 파괴적인 형태로 충돌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스페인 내전은 ‘두 스페인’이 공존의 길을 찾지 못해 마지막으로 도달한 유일한 출구였다.
역사가들은 18세기부터 ‘두 스페인’에 관한 개념을 말해왔는데, 하나는 개방적이고 관대하며 급진적이고 범세계적인 지식인과 진보주의자들의 스페인이고, 다른 하나는 가톨릭적이고 맹목적이며 엄격하고 스스로 폐쇄적이며 민족주의적인 보수주의자들의 스페인이었다.
1936년 당시 군대와 공공질서를 유지하는 경찰과 같은 국가 기관 내에서까지도 이러한 ‘두 스페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처럼 당시의 스페인 사회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가진 사회가 아니었다. 양 진영에는 각각 군인도 있고 사제도 있었다. 또 중산층과 지식인층, 가톨릭교도와 반교회주의자, 전통을 옹호하는 계층과 진보적인 그룹 사이에 갖가지 알력과 상극도 존재했다. 말하자면 당시의 스페인 사회는 가로와 세로로 분단되어 서로의 틈을 메우기에는 그 상처가 너무 넓고 깊었다.
– 스페인 내전 전개
1936년 7월 17일, 스페인령 모로코에서 군사 봉기가 일어났다. 다음날인 18일, 프랑코는 좌천당해서 근무하고 있던 카나리아 제도에 계엄령을 발동하고 아프리카 반란군의 지휘를 맡았다. 세계를 뒤흔든 스페인 내전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19일, 이미 스페인령 모로코에 가 있던 프랑코는 북아프리카 주둔 스페인군에게 본토로 이동하라고 명령했다. 이 본토 상륙 작전은 전투의 국면을 좌우하는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그러나 공화국 정부군의 작전상 실수로 프랑코의 본토 상륙을 허용하고 말았다. 그 결과 ‘실패로 끝났을 쿠데타’가 스페인 전체의 ‘내전’이라는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되었다. 즉, 반란군을 지지하는 한쪽의 스페인 국민과 공화국 정부를 지지하는 또 다른 한쪽의 스페인 국민, 다시 말해 ‘두 스페인’이 서로를 증오하고 죽이기 시작한 것이다.
내전은 공화국 정부군 쪽이 우세한 가운데 시작되었다. 주요 도시와 우수한 무기, 많은 자원, 공업 지대, 풍요한 농촌 지대, 외화 등이 모두 공화국 정부군의 손 안에 들어 있었다. 한편 반란군은 각 지방에 뿔뿔이 흩어져 있었고, 군수 물자마저 부족했다. 하지만 양쪽 진영의 사기를 비교해보면 반란군 쪽이 더 높았다. 공화국 정부가 교회와 군대를 억눌러온 데 대한 반란군 진영의 복수심, 그것이 바로 반란군 쪽의 사기를 높이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던 것이다.
반란군 진영은 봉기한 곳이 서로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횡적인 연락망이 충분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배하고 있는 지역에서만큼은 한 명의 군사령관이 모든 권한을 장악하고 통솔했다. 공화국 진영은 공화국 정부와 혁명을 지향하는 여러 정파가 서로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내전이 ‘전쟁이냐 혁명이냐’라는 소모적인 논쟁만 일삼고 있었다.
스페인 내전은 초기 단계부터 유럽과 온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소련과 멕시코가 공화국 정부군을, 독일과 이탈리아가 반란군을 지원했다. 이는 스페인 내전이 국제전으로 확대되었음을 의미했다. 공화국 정부군 측에서는 작가인 헤밍웨이와 조지 오웰 등이 참여한 의용군으로 이루어진 4만여 명의 국제여단이 활약해 세계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외국의 원조가 시작된 이후로 공화국 정부군 진영에 주어진 인적·물적 원조가 반란군 진영에 주어진 것보다 훨씬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전투에서는 그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정규군으로 이루어진 반란군 쪽이 절대적인 우세를 보인 가운데, 1939년 3월 28일 마침내 마드리드가 함락되고 반란군이 승리했다. 2년 9개월 동안 스페인을 보수와 혁신으로 양분한 스페인 내전에서 약 30~60만 명으로 추산되는 사람들이 사망했으며 25~50만 명의 공화국 정부군과 민간인들이 프랑스로 망명했다.
공화국 정부군의 패배 원인에 대해서 당시 공화국 정부군 편이었던 역사가 산체스 아르보르노스는 “공화국 정부를 넓게 뒤덮고 있던 ‘태만의 정신’, ‘미래를 향한 비전의 결여’, ‘충분하지 못한 조직화’가 그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스페인 내전에 참가했던 영국 작가 조지 오웰이 “스페인의 역사는 1936년에 멈추고 말았다.”라고 말할 정도로 스페인 내전은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 스페인 민주주의의 싹을 짓밟아버렸다.
– 202회째의 성공자
스페인에는 옛날부터 스페인의 정치 상황을 숙명론적으로 표현한 우화가 있다.
“성모 마리아는 스페인 사람들에게 그들이 갖고 싶은 것을 하나님에게 주선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래서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좋은 풍토 (風土)를 부탁했다. 하나님은 이것을 들어주었다. 다음에는 가장 좋은 과일과 밀을 부탁했고, 가장 뛰어난 말과 칼도 부탁했다. 하나님은 이것들도 모두 들어주었다. 그들은 다시 가장 아름다운 노래와 춤을 부탁했고, 또 가장 아름다운 여성과 가장 용감한 남성을 부탁했다. 하나님은 이것도 들어주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좋은 정부 (政府)를 부탁했다. 그러자 당황한 성모님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것은 안 됩니다. 그렇게 된다면, 천사들이 하루도 천당에 머물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스페인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그들이 원했던 것은 무엇이든 손에 넣을 수 있었지만 좋은 정부만은 얻지 못함으로써 역사적으로 악정에 시달리는 백성이 되고 말았다는 이야기이다. 더구나 19세기 중엽부터는 군부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군사 독재 정권을 수립하는 나쁜 전통이 생기게 되었다. 한 스페인 전문학자는 1841년 이래 스페인에서는 202회의 군부 쿠데타가 일어났으며 1975년에 사망한 프랑코는 그 202회째의 성공자였다고 전하고 있다.
–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한 세 편의 소설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한 작품으로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조지 오웰의 『카탈루냐 찬가』, 앙드레 말로의 『희망』이 있다.
미국과 영국과 프랑스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세 작가가 모두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였고, 장편소설을 한 권씩 썼다.
세 작품은 모두 각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가 된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