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년 4월 19일, 바르샤바 게토 봉기 (Warsaw Ghetto Uprising) 발발
1943년 4월 19일, 바르샤바 게토에서 봉기가 발생했다. 바르샤바 봉기 (Warsaw Ghetto Uprising, 폴: powstanie warszawskie)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바르샤바를 독일 제3제국군에게서 해방시키기 위해 폴란드 국내군이 일으킨 일제 봉기이다.
이날은 폴란드의 호로코스트 추모일이다. 폴란드의 홀로코스트 추모일 (Yom Hashoa) “욤 하쇼아” (יומ השואה)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슬픔의 날이며 아픔의 날이다. 흔히 말하는 “홀로코스트” 기억의 날이다.
우리는 또한 유대인 600만 대학살 사건 혹은 홀로코스트 (욤 하쇼아)를 이야기할 때 “아우슈비츠 수용소” (Auschwitz concentration camp)에서 일어난 사건이라 말할 때가 많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유대인 뿐만 아니라 폴란드 양심수나 나치에 저항하는 사람들과 집시들도 많이 희생되었다.

○ 바르샤바 게토 봉기
동유럽 전체의 게토에 남아있던 많은 유태인들은 독일군에 저항하기위해 밀수한 무기나 사제 무기로 무장한 저항군을 조직했다. 1941년부터 1943년 사이에 약 100여개의 유태인 단체를 통해서 지하 저항 운동이 형성되었다. 그중 가장 잘 알려진 독일군에 대한 저항은 바르샤바 게토에서 있었던 전투라고 할 수 있다.
1942년 여름, 약 30만명의 유태인들이 바르샤바에서 트레블링카로 이송되었다. 학살 수용소에서 발생한 대량 학살 소식이 바르샤바 게토로 흘러 들어가자 대부분 청년들로 구성되었던 생존자 그룹이 Z.O.B. (폴란드 이름으로 Zydowska Organizacja Bojowa이며, 유태인 투쟁 조직이라는 의미임)라는 조직을 결성했다. 23세의 모데카이 아니레비츠 (Mordecai Anielewicz)가 이끄는 Z.O.B.는 유태인 사람들에게 수송 기차를 타지 말고 저항할 것을 종용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1943년 1월, 바르샤바 게토 투쟁자들은 게토 주민들을 이송하려고 준비하고 있던 독일군에게 총격을 가했다. 투쟁자들은 게토로 밀수된 얼마되지 않은 무기를 사용했다. 수 일 후에 독일군은 퇴각했다. 이 작은 승리는 게토 투쟁자들에게 앞으로의 저항 운동을 준비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
1943년 4월 19일, 바르사뱌 게토 봉기는 생존자들을 이송하려고 독일군과 경찰이 게토로 들어오자 시작되었다. 750명의 게토 투쟁자들은 중무장하고 훈련이 잘된 독일군들에 대항해서 싸웠다. 게토 투쟁자들은 1개월 가까이 전투를 끌 수 있었지만, 1943년 5월 16일, 무장 봉기는 종료되었다. 독일군은 저항군을 천천히 괴멸시켰다. 체포된 5만 6,000여명 이상의유태인 중에서 7,000여명이 총살 되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수용소로 보내졌다.

- 주요 날짜
1940년 10월 16일; 폴란드 바르샤바에 게토 설치
둘레에는 3m 높이의 콘크리트벽이 쳐져 외부와 차단됐고, 바르샤바 면적의 2.4%에 불과한 4㎢의 공간에는 바르샤바 인구의 30%나 되는 유대인을 감금한다.
1942년 7월 28일; 유태인 투쟁 조직 창설
바르사뱌 게토에서 트레블링카 집단 학살 수용소로 1단계 이송이 진행되는 중에 유태인 투쟁 조직 (ZOB, Zydowska Organizacja Bojowa)이 만들어졌다. 1942년 7월 22일, 독일군은 1942년 9월 12일까지 사실상 중단 없이 계속되는 대량 이송을 시작한다. 이번에는 25만명 이상의 유태인들이 게토에서 이송되거나 학살된다. 유태인 청년 조직 단체들의 회원들로 구성된 ZOB는 게토의 유태인들에게 이송에 저항할 것을 촉구한다. 이동 학살 부대와 학살 수용소 유태인들의 대량 학살 소식이 이미 게토로 흘러 들어 왔다. 그러나, ZOB는 아직 봉기할 단계가 아니다. 9월에 이송이 끝난 후, ZOB는 지하 정치 조직의 회원을 영입하고 훈련, 무기 및 폭약을 제공한 폴란드 저항군과 접촉한다. 모데카이 아니레비츠 (Mordecai Anielewicz)가 사령관으로 임명된다.
1943년 1월 18 ~ 21일; 저항에 직면한 독일군
독일군은 바르샤바 게토에서 이송을 재개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ZOB (유태인 투쟁 조직; Zydowska Organizacja Bojowa)의 저항에 직면한다. 이른 아침에 ZOB 조직에 대한 기습 검거가 시작되고, 사람들은 거리로 나와서 독일군에 저항한다. 게토의 다른 유태인들은 준비된 은신처로 피한다. 추방이 순조롭게 진행될 것으로 기대한 독일군은 격렬한 저항에 당황한다. 1월 21일 독일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큰 광장에서 1,000명의 유태인들을 집단 학살하지만, 추가 이송은 중지된다. 독일군은 5,000-6,500명의 유태인들을 이송하거나 죽였다. 저항 활동의 결과에 고무된 게토의 유태인들은 대대적인 봉기를 계획하고 준비한다. 저항 조직이 통합되고, 전략이 수립되고, 지하 벙커와 터널이 건설되고, 지붕 위 통로가 건설되었다. 바르샤바 게토의 유태인들은 끝까지 저항할 준비를 한다.
1943년 5월 16일; 게토 폐쇄, 봉기 종료
한 달간의 전투가 진행된 후, 독일군은 바르샤바의 대 예배당 (Great Synagogue)을 폭파시키는데, 이것은 무장 봉기의 종식과 게토 파괴의 신호탄이 된다. 1943년 4월 19일, SS 장군 유르겐 슈트루프 (Juergen Stroop)의 지휘 하에 게토의 최종 파괴와 남아있던 유태인들의 이송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게토 주민들은 이송에 순순히 응하지 않았다. 대신, 게토 투쟁 조직은 건물과 벙커 내부에 바리케이트를 치고 독일군에 저항할 준비를 한다. 3일 후, 독일군은 건물을 하나씩 불태우면서 유태인들을 은신처에서 몰아낼 목적으로 게토를 불사르기 시작한다. 독일군이 게토를 폐허로 만들어 가면서 수 주간 저항이 계속된다. 1943년 1월 이송 이후에 게토에는 약 5만명의 유태인만이 남아 있었지만, 슈트루프 장군은 게토를 파괴한 직후에 5만 6,065명의 유태인들이 체포되었다고 보고한다; 이 중 7,000명은 집단 학살 수용소로, 나머지는 강제 노동 수용소와 마이다네크 집단 학살 수용소로 보내졌다. 주민 저항군 중 일부는 게토를 성공적으로 빠져 나와서 바르샤바 주변의 삼림에 있던 유격대 조직에 합류한다.

○ ‘홀로코스트’와 ‘욤 하쇼아’
그런데 ‘홀로코스트’라는 말은 사실 유대인들이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홀로코스트’라는 단어는 그리스어의 ‘전체’ 혹은 ‘동물’를 뜻하는 ‘holos’와 ‘불에 타다’는 뜻의 ‘kaustos’의 합성어이기 때문이다. 600만 유대인들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소각장에서 강제적으로 동물처럼 불태워졌다는 아픈 과거를 나타내는 단어이기에, 유대인 입장에서는 불쾌한 단어일 수 있다. 히틀러를 비롯한 나치 정권과 그 부역자들이 유대인들을 제물 삼아 불태웠다는 속설도 전해질 정도로 유대인들에게는 뼈아픈 사건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 날을 “욤 하쇼아” (יומ השואה), “재앙의 날”이라고 부른다. 아픈 과거, 어쩌면 떠올리기조차 싫을 수 있는 이 날을 기억하며 자녀들에게 가르친다.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라’고 말이다. 그리고 다시는 이러한 재앙이 우리에게 찾아 오지 않도록 하자는 다짐을 한다.
이 날에는 대한민국이 과거 6.25전쟁을 통해 아픔을 당한 날을 기념하여 현충일에 1분간 순국선열을 기억하며 묵념을 하듯이, 유대인들도 긴 사이렌 소리와 함께 이 날을 기억하는 시간을 가진다.
그러므로 “유대인들 600만명이 불태워진 날”이라는 의미의 “홀로코스트”보다는, “그들의 재앙의 날”이라는 “욤 하쇼아”라는 표현이 유대인들에게는 그나마 덜 아프게 다가올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유대인들을 제외한 다른 나라 사람들과 우리에게는 “홀로코스트”가 더 익숙한 것은 사실이며 이스라엘에서도 “홀로코스트”라고 말할 때가 많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