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1월 27일, 레닌그라드 공방전 종결 : 제2차 세계대전중 독일의 소련 레닌그라드 포위전 패배
레닌그라드 포위전 (Siege of Leningrad) 또는 ‘레닌그라드 봉쇄’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동부 전선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옛 이름인 레닌그라드에서 발발한 독일 북부 집단군의 장기간 군사 작전이다.
포위전은 1941년 9월 8일 마지막 육상 연결 통로가 끊어지면서 시작되었다.
비록 소비에트 연방이 1943년 1월 18일 도시로 연결되는 작은 회랑 부분을 해방하지만, 완전한 포위전 종료는 전투 시작 872일 만인 1944년 1월 27일 끝났다.
이 전투는 역사상 가장 길었고 파괴적인 포위전이었을 뿐 아니라 가장 많은 사상자인 약 4백만 명의 사상자를 입은 도시 전투로 꼽힌다.
– 독일의 레닌그라드 포위전
.내용: 제2차 세계 대전 중 동부 전선의 일부
.날짜: 1941년 9월 8일 ~ 1944년 1월 27일
.기간: 2년 4개월 19일
.장소: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 SFSR 레닌그라드
.결과: 소비에트 연방의 승리
2년 반 동안의 계속된 포위공격은 대규모의 도시 파괴 및 현대 도시에서 벌어진 전투 중 가장 많은 사망자가 발생한 전투로 알려져 있다.
히틀러가 명시한 명령에서는 도시 방어 구역 외곽에 위치한 예카테리나 궁전, 페테르호프 궁전, 로프샤, 스트렐나, 가치나와 같은 차르 궁전 및 기타 역사적 건물들에 존재하는 많은 예술품들을 나치 독일로 가져가 약탈하고 파괴했다.
많은 수의 공장, 병원, 학교 및 사회 기반 시설은 공습 및 장거리 포격으로 파괴되었다.
레닌그라드 포위전은 1944년 1월 27일 소련군이 레닌그라드-노브고로드 공세를 펼치며 독일군이 도시 남부로 퇴각하면서 끝났다.
이 공세는 레닌그라드 전선군, 볼호프 전선군 및 1 발트 전선군, 2 발트 전선군이 합동으로 치룬 공세이다.
발트 함대는 30%의 항공력으로 마지막 독일 국방군에 대한 공격을 펼쳤다.
1944년 여름, 핀란드 방어군에게 비보르크-페트로자보츠크 공세를 펼치면서 핀란드군은 비보르크 만과 부오크시 강 건너편으로 후퇴했다.
○ 타냐 사비체바의 일기
타냐 사비체바 (본명 ‘타티야나 니콜라예브나 사비체바’, Татьяна Николаевна Савичева, 1930.1.23 ~ 1944.7.1)는 레닌그라드에서 제빵사 니콜라이 (1936년 사망)와 재봉사 마리야의 다섯 아이들 중 막내딸이자 가수가 꿈이었던 열한 살 소녀였다.
하지만 독일군의 포위가 시작되자 이 소녀는 평생 꿈을 이룰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독일군의 공습 이후 작은 언니 니나가 돌아오지 않자 그녀의 어머니는 타냐에게 니나의 수첩을 주었고 타냐는 거기에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타냐는 그 전에도 두꺼운 공책에 일기를 쓰고 있었지만, 나무도 석탄도 극히 부족한 상황에서 땔감 대용으로 써버렸기 때문에 저 수첩이 유일하게 남은 일기장이 되었다.
다음은 일기의 일부이다.
.1941년 12월 28일 아침 12시 30분에 언니 제냐가 죽었다
.1942년 1월 25일 낮 3시에 할머니가 죽었다
.1942년 3월 17일 아침 5시 오빠 레카가 죽었다
.1942년 4월 13일 밤 2시 삼촌 바샤가 죽었다
.1942년 5월 10일 낮 4시 삼촌 레샤가 죽었다
.1942년 5월 13일 7시 30분에 엄마가…
.사비체바 사람들이 죽었다.
.모두 죽었다.
.타냐 혼자 남았다…
타냐는 1942년 8월에 139명의 아이들과 함께 소련군의 레닌그라드 시민 소개 작전을 통해 니즈니노브고로드의 크라스니 보르라는 마을로 옮겨졌지만, 포위 기간 동안의 영양실조로 면역력이 악화된 상태에서 장결핵으로 투병하다가 전쟁 후반기인 1944년에 세상을 떠났다.
공습으로 사망한 줄 알았던 작은 언니 니나는 무사히 살아남았고, 역시 레닌그라드 밖으로 탈출해 목숨을 건진 작은 오빠 미하일과 함께 레닌그라드가 해방된 뒤 집으로 돌아와 가족들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타냐의 일기를 발견했다.
그녀는 이 일기를 세상에 알리며 활동했고 2013년 94세로 세상을 떠날때까지 타냐의 일기를 알리고 더불어 레닌그라드 공방전 희생자 추모단체를 이끌며 활동했다.
타냐의 일기는 곧 레닌그라드 공방전으로 희생된 시민들의 상징이 되었고, 타냐가 묻힌 니즈니노브고로드의 샤트키 공동묘지, 생명의 길, 피스카료프 공동묘지와 사비체바 가족의 자택에는 타냐를 추모하는 기념비가 만들어졌다.
여러 모로 러시아판 안네의 일기이다.
타냐의 일기는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당시 증거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 연대기
– 1941년
4월: 바르바로사 작전과 제네라플랜 오스트의 계획에 따르면, 히틀러는 레닌그라드를 점령하고 파괴하고자 했다.
6월 22일: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추축국이 소련을 침공하기 시작한다.
6월 23일: 레닌그라드 지휘관인 M. 포포프가 레닌그라드 남부 방어지를 답사한다는 두 번째 명령을 한다.
6월 29일: 루가에 방어 진지 건설이 시작됨. 이와 함께 어린이 및 여성의 대피령이 시작.
6~7월: 독일군이 전진하면서 프스코프와 노브로고드에서 피난을 온 시민 30만명이 레닌그라드로 몰려온다. 북서전선군은 레닌그라드 전방 방어선에 배치되기 시작했다. 자원군 및 징집병을 포함한 전선에 있는 군 병력이 200만명에 도달한다.
7월 19~23일: 북부 집단군의 첫 번째 레닌그라드 공격이 레닌그라드 남부 100km에서 멈추다.
7월 27일: 히틀러가 북부 집단군을 방문하여 진격이 지연되는 것에 대해 화를 냈다. 그는 빌헬름 리터 폰 레프에게 12월까지 레닌그라드를 점령하라고 명령했다.
7월 31일: 핀란드군이 카렐리야 지협의 소련 23군을 공격하면서 겨울 전쟁 이전의 핀란드 국경에 도달했다.
8월 20일~9월 8일: 레닌그라드의 산업, 학교, 병원, 주거 지역에 대해 포격이 있었다.
8월 21일: 히틀러 제34 지침에서 “핀란드군과 함께 레닌그라드를 포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8월 20일~27일: 민간인 대피가 레닌그라드로 이어지는 철도 및 도로에 대한 공격으로 인해 중단되었다.
8월 31일: 핀란드군이 방어 태세에 들어서고 전선을 더 이상 진군하지 않는다. 이 전선은 1939년 겨울 전쟁 이전 핀란드의 국경선이다.
9월 6일: 독일 국방군 최고 사령부의 알프레트 요들이 핀란드군에게 레닌그라드 공격을 계속하라고 설득하는 데 실패한다.
9월 2~9일: 핀란드군이 벨루스트로프와 잉구시 북부 해안지대를 점령하고 완전 방어 태세에 들어선다.
9월 8일: 독일군이 라도가 호에 도달하면서 레닌그라드 육지를 완전히 포위한다.
9월 10일: 이오시프 스탈린이 레닌그라드 전선군 지휘관에 클리멘트 보로실로프를 해임하고 게오르기 주코프를 임관하다.
9월 12일: 레닌그라드에서 가장 큰 식품 저장소인 바다예브스키 상점이 독일의 포격으로 파괴되다.
9월 15일: 빌헬름 리터 폰 레프의 4 기갑군이 모스크바 공방전을 위해 전선에서 중앙 집단군으로 재배치된다.
9월 19일: 독일군이 레닌그라드 10km까지 진군하고 정지한다. 시민들이 수비선에서 전투에 참가하기 시작한다.
9월 22일: 히틀러가 “샹트페테르부르크”는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한다고 발언.
9월 22일: 히틀러가 “…우리는 민간인 생명을 구하는 데에 전혀 관심이 없다”라고 발언.
11월 8일: 히틀러가 뮌헨에서의 연설에서 “레닌그라드는 굶어죽여야 한다”라고 발언.
11월 10일: 소련군의 반격이 시작되어 11월 30일까지 독일군은 티흐빈에서 볼호프 강으로 퇴각하여 레닌그라드 동부의 스비리 강에서 핀란드군과 조우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다.
12월: 윈스턴 처칠이 그의 일기에서 “레닌그라드는 포위되었지만, 절대로 점령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썼다.
12월 6일: 영국이 핀란드에 선전포고하다. 이후 캐나다, 호주, 인도, 뉴질랜드가 차례로 선전포고한다.
– 1942년
1월 7일: 소련의 “리유반 공세”가 시작되다. 16주간의 공세가 실패하여 2 충격군이 손실을 입었다.
1월: 소련군이 포위를 풀기 위해 네브스키 퍄타초크 교두보 전투를 시작한다. 이 전투는 1943년 5월까지 지속되었지만 부분적인 성공만 거두었다. 양 측 모두 많은 사상자를 입었다.
4월 4~30일: 루프트바페의 레닌그라드 해상에 위치한 발트 함대 공격 작전인 에이스 스토스 작전이 실패한다.
6월 ~ 9월: 38cm 지크프리트 K (E)라는 열차포를 투입하여 포 무게 약 800kg의 포격을 시작한다.
8월: 스페인 청색 사단(División Azul)이 레닌그라드로 배치된다.
8월 14일 ~ 10월 27일: 내빌 데타츠먼트 K가 라도가 호수의 소련 보급로와 충돌하다.
8월 19일: 소련군이 8주 길이의 신야비노 공세를 시작시켜 포위 해제에는 실패했지만, 독일군의 노르드니흐트 작전을 무력화시킨다.
– 1943년
1월 ~ 12월: 레닌그라드 포격이 대폭 증가하다.
1월 12일 ~ 30일: 소련의 이스크라 작전을 통해 라도가 호수를 따라 육지 길이 열린다. 육지 포위망이 해제되었다.
2월 10일 ~ 4월 1일: 포위망을 해제할려는 폴랴르냐 즈베즈다 작전이 실패하다.
– 1944년
1월 14일 ~ 3월 1일: 포위전을 끝내기 위한 소련군의 몇몇 공세들이 시작한다.
1월 27일: 레닌그라드 포위전이 끝나다. 독일군은 도시에서 60~100 km 외로 후퇴하다.
1월: 독일군이 후퇴하기 전에 차르의 역사적인 궁전인 예카테리나 궁전, 페테르호프 궁전, 가치나, 스트렐나를 약탈하고 파괴한다. 샹트페테르부르크에 위치한 다른 역사적 랜드마크 및 교외 주택이 약탈되고, 많은 수의 귀중한 예술품들은 나치 독일 본토로 이동된다.
포위전 기간 동안 레닌그라드 도시 및 교외의 주택 3,200채, 목조 주택 9,000채(모두 태워짐), 공장 시설 840채가 파괴되었다.
○ 습지에 세워진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 (St. Petersburg)
상트페테르부르크 (St. Petersburg)는 러시아의 북서쪽에 있는 연방시이다. 네바 강 하구에 있으며, 그 델타지대에 형성된 자연섬과 운하로 인해 생긴 수많은 섬 위에 세워진 도시이다. 발트해의 핀란드 만에 접해 있다. “북유럽의 베네치아”라고도 불린다.
예전에는 페트로그라드 (1914 ~ 1924년)와 레닌그라드 (1924 ~ 1991년)로 불리기도 했다. 1924년 1월 21일 블라디미르 레닌이 죽자 1924년 1월 26일 그를 기념하여 레닌그라드로 불리게 되었고, 1991년 9월 6일 다시 옛 이름을 되찾았다.
러시아 제국의 차르 표트르 대제가 1703년 설립한 이 도시는 1713년 모스크바에서 천도하여 1918년까지 러시아 제국의 수도였다. 1918년 수도는 다시 모스크바로 옮겨졌다. 2010년 기준으로 5,000,000명이 살고 있으며, 러시아에서는 수도 모스크바 다음으로, 유럽에서는 네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이다. 모스크바에 이은 러시아의 대공업도시로 복잡한 정밀기계의 제조가 특색이다. 선박, 터빈, 발전기, 디젤 엔진, 트랙터, 공작기계, 계기류 (計器類), 각종 장치의 제조공장이 있고, 화학공업 (고무제품·과린산비료·화학합성 자재·염료·도료·향료), 섬유공업, 인쇄업 등도 성하다.
다수의 학술 연구기관, 미술관, 박물관 등이 있어 학술·문화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도심은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레닌그라드주와는 분리된 연방시를 이루고 있으나, 레닌그라드주의 행정 중심 도시로 되어 있다.
모스크바에 이어 러시아에서 버금가는 큰 도시이다. 인구는 510만 명으로 모스크바 다음으로 정치, 경제, 문화적 영향력이 큰 도시다. 면적은 1,439 km²이다. 북위 59도 56분, 동경 30도 20분에 위치한다.
2003년 5월 29일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300주년을 기념해 다양한 축제가 열렸다.
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있는 핀란드 만 주위로 8~9세기부터 러시아인들이 정착했다. 이 지역은 노브고로드 대공국에 귀속되었으나 습지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거의 살지 않았으므로 버려진 땅이었으며 이후 15세기에 모스크바 공국의 영토가 되었다. 1611년에 한번 스웨덴이 이 지역을 차지한 적이 있었으나, 표트르 1세가 북방전쟁에서 이 지역을 탈환하였다. 이곳의 수비를 목적으로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를 짓기 시작함으로써 도시건설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표트르 1세는 서구 문화를 받아들이기 위하여 장대한 도시계획을 세우고, 이 요새 근처에 사도 베드로의 이름을 따서 새로운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짓게 되었다.
새 도시를 짓기에는 이 지역의 자연환경이 좋지만은 않았다. 연 평균 기온은 4.2도에 일조량은 31일 정도이다. 또 매년 한 번씩 홍수가 터져서 곤혹을 치른다. 또 원래 습지였던 이 지역에 도시를 바로 짓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도시를 짓기 위해서는 석조 토대가 필요했는데, 이 때문에 도시를 지을 때 돌을 쏟아부어 습지를 메울 필요가 있었다. 물론 습지를 메우는 데에는 어마어마한 양의 돌이 필요했다. 따라서 표트르 대제는 돌을 충당하기 위해 도시를 들어오는 모든 선박과 사람들에게 돌을 가져오라고 칙령을 내렸다. 선박은 크기에 따라 30kg이상의 돌을 10~30개 가져와야 했으며, 육로로 들어올 경우에는 15kg이상의 돌을 세 개씩 가져와야 했다. 수많은 노예들이 습지를 돌로 메우는 데에 이용되었으며 가혹한 자연과 고된 노동을 이기지 못하고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였다. 이때 죽은 노예를 습지로 던져버렸기 때문에 이 도시에는 ‘뼈 위에 세운 도시’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있다. 이 때는 석조 건축물을 짓는 것도 금지되었다. 각종 물건들에도 세금이 붙었고 교회의 재산도 국가에 귀속시켜 버렸다. 표트르 대제에 반하여 구 귀족 및 종교 세력의 편이었던 그의 아들 알렉세이 페트로비치 황태자는 1718년에 무자비하게 처형되고 만다.
18세기 초반부터는 러시아 최대의 무역항으로 공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1851년엔 러시아 최초의 철도가 부설되기도 했다. (모스크바와 연결) 자본주의가 발전하고 교통이 편리해짐으로써 이 도시의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이후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각종 러시아의 혁명에서도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중심이 되었다. (피의 일요일, 3월 혁명, 11월 혁명) 또 세계 2차대전 당시 1941년 8월부터 29개월 동안 독일군에 포위당한 상태로 40만 명이 아사 (餓死) 당하면서까지 지켜낸 도시라고 하여 영웅 도시라고 불리기도 한다. 소련이 해체될 때까지 “레닌그라드”라고 불렸다가,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름을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역사 지구와 관련 기념물군은 1990년 세계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