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3월 10일, 2차 세계 대전 중 미 공군이 도쿄 대공습 (東京大空襲; Bombing of Tokyo, 1944 ~ 1945) 시작
도쿄 대공습 (東京大空襲, Bombing of Tokyo)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5년 3월 10일 일본을 무력화시키고 전쟁의 조기 종결을 위하여 미군이 추축국인 일본의 수도인 도쿄와 그 주변 일대에 대량의 네이팜탄을 투하한 사건을 말한다.

– 도쿄 대공습 (Bombing of Tokyo)
.태평양 전쟁 중 일본 본토 공습의 일부
.날짜: 1944년 ~ 1945년
.장소: 일본 도쿄, 요코하마
.결과: 연합군의 승리
.지휘관: 해리 S. 트루먼, 커티스 르메이
.이용 군장비: B-29 폭격기 344대
네이팜탄 (Napalm bomb 또는 Napalm)은 주연소재인 나프타에 네이팜제로 불리는 증점제를 첨가하여 젤리 모양으로 만든 것을 충전한 유지 소이탄이다.

○ 도쿄 공습
공습 직전 당시에 도쿄 인구는 600만 명이었는데, 공습 이후에는 피난민과 사상자 등으로 인구가 약 200만 명까지 급감했다.
폭격이 유발한 직접적인 피해는 히로시마 ·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보다 더 많았다.
도쿄 대공습은 미국이 태평양 전쟁 중 일본 본토 공습의 일환으로 1945년 3월 9일~10일 일본 제국의 수도인 도쿄 일대에 대량의 네이팜탄을 투하한 전략 폭격 작전을 말한다.
미군은 군사시설뿐만 아니라 의도적으로 민간인 거주지에도 무차별적인 폭격을 가했기 때문에 반전평화주의자들은 드레스덴 폭격과 함께 2차대전 중 일어난 최악의 민간인 학살사건으로 비판한다.
도쿄 대공습은 현대까지 일본에 트라우마를 안겨준 사건으로 알려져있다.
일본인들에게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불비가 대도시를 불태우고 파괴하는 모습을 전쟁의 이미지로 각인시킨 사건이 도쿄 대공습이다.

○ 결과
도처에 시체가 쌓여 있었다.
스미다 강을 따라 걸어간 한 군의관은 강 기슭에 쌓인 시체들을 보았다.
“표류하는 수많은 시체를 봤다. 옷을 걸친 시체도 벌거숭이 시체도 모두 목탄처럼 검게 타 있었다. 도무지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그들이 시체인 것은 틀림없는데 남녀를 분간할 수조차 없고 그 곁을 떠내려가는 물체가 팔인지 다리인지 아니면 불탄 나무조각인지도 식별할 수 없었다.”
반상회 조직은 살아남아서 식량조달과 임시거처 마련을 위해 힘썼다.
일본군이 파견되어서 시체들을 수습했다.
신원 확인이 불가능한 시체는 100구씩 모아서 커다란 공동무덤에 매장하였다.
3월 10일 아침부터 수십만 명 규모의 대탈출이 시작되었다. 철도는 빠른 속도로 복구되어 이들을 실어날랐다.
폭격 단 한 차례로 대략 가옥 25만 동이 파괴되었고 180만 명이 집을 잃었으며 도심 약 40 ㎢가 잿더미로 변했다.
사망자 숫자에 대해서는 아무도 확실하게 집계하지 못했다.
정부는 12만 명이 사망했다는 신문보도도 발표하지 못하게 막았는데, 프랑스인 기자 로베르 기얭 (Robert Guillain)은 사망자로 간주되는 피해자 수가 19만 7천 명이라고 보고된 문서를 접했다고 한다.

- 부정확한 사상자
일본의 공식 집계에 따르면 민간인 사망자 8만 3793명, 중상자 4만 918명, 이재민 100만 명 이상이 발생했다.
조선인은 약 1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망자와 행방불명자를 합치면, 피해자가 약 20만 명에 달하여 피해가 원폭 이상이다.
공습 피해 및 소개로 인하여, 종전 직후 도쿄 인구수는 진주만 공습이 발발하기 직전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
관동 대지진 때문에 막대한 피해를 입어 계획도시로 복구한 일본 제국의 수도 도쿄는 이 작전으로 다시 잿더미가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도쿄에서 과거 에도의 흔적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오늘날 사이타마현의 카와고에시는 옛 에도 분위기의 길거리가 보존된 것으로 유명한데, 원조 에도인 도쿄에는 전쟁 이후 폐허 위에 현대식 건물들이 세워지고 버블 시대에는 거의 무계획적으로 확장되었으며, 현재는 반쯤 미래화된 탓에 이런 곳이 거의 남지 않았다.
이때 피해로, 당시 김정희의 자료들이 이 폭격으로 대거 소실되었다.
당시 후지츠카 치카시 (藤塚隣)란 인물은 완당 (김정희의 아호)에 관심이 매우 깊어서 그의 글과 그림 등의 자료를 많이 소장하고 있었다. 서예가인 손재형은 후지츠카 치카시를 찾아가서 세한도를 돌려달라고 간청했고, 오랫동안 설득한 끝에 세한도를 돌려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후 이 폭격으로 치카시의 서재도 불타서 김정희의 자료들이 대거 소실된 것이다. 손재형의 설득이 아니었다면 세한도도 이 때 소실될 뻔했다고 한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